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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고대 오리엔트 세계

이제 신화와 모험이 가득한? 그리스 시대로 들어가면 될 것 같지만 아직 서양사에 영향을 준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역사가 조금 더 남았습니다. 당장의 고대 그리스 역사와는 별로 관련이 없어보일 수도 있지만 서양사 전체의 관점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나라들이라서요. 고대 서남아시아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아시리아와 그리스에 알파벳을 전해준 페니키아, 그리고 훗날 서구세계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기독교의 탄생에 밑거름이 된 헤브라이가 바로 그들입니다.

 

 

강력한 정복국가 아시리아

 

기원전 1200년경, 수수께끼의 바다민족이 지중해를 휩쓸고 지나가자, 그 일대에서 강력했던 고대국가들은 줄초상을 치렀습니다. 한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 때를 틈타 세 민족이 급격히 성장했죠. 페니키아인과 유대인, 그리고 아람인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페니키아인은 지중해를 주름잡던 크레타를 대신해 새로운 해양세력으로 성장하구요. 모세를 리더로 삼아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지역은 아람인들이 차지하죠. 

좀 더 동쪽으로 이동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가보면, 그곳은 기원전 900년경이 되도록 암흑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카시트 왕조의 바빌로니아는 서쪽의 아람인과 동쪽의 엘람 사이에 껴서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구요. 북부는 미탄니의 지배에서 벗어난 아시리아가 나라를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기원전 911년 아다드 니라리 2세가 즉위하자 그 때부터 아시리아는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합니다.  

군대를 강화하고 행정조직을 개편한 아다드 니라리 2세는 그 전까지 이민족의 침략을 막는 데에 급급했던 데에서 벗어나 주변국들을 위협하며 본격적으로 정복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손자인 아슈르 나시르 팔 2세 때에는 주변국가들을 두려움에 빠뜨린 잔혹한 살육과 무자비한 파괴행위로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며 크게 성장하죠. 

물론 아시리아가 줄곧 성공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슈르 나시르 팔 2세가 승하하자, 아시리아는 잠시 침체기를 겪었고 그 사이 북쪽 캅카스 고원지대에서 성장한 우라르투에게 도전장을 받게 됩니다. 두 나라는 한동안 비등비등한 세력을 보이다가 기원전 745년 아시리아에서 또 다른 중흥군주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즉위하면서 마침내 우라르투에 승리했죠.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군대를 재정비해 페니키아의 도시들과 이스라엘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사이좋게 양분하던 남부의 카시트 왕조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자기가 왕으로 즉위합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아들인 사르곤 2세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틀 위해서 아시리아의 전성기를 이어갔습니다. 세력이 약화된 우라르투를 완전히 제압하고, 아직 남아있는 바빌로니아의 반란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수도인 바빌론을 공략했죠. 비록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하긴 했어도 바빌론은 여전히 오리엔트 세계 제일의 도시였습니다. 모든 국가적 역량이 군사력에만 치우져 있었던 아시리아로서는 세련된 문화도시인 바빌론이 꼭 갖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빌론을 근거지로 반란세력이 계속해서 등장하자 뒤이어 즉위한 센나케리브는 결국 바빌론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파괴된 바빌론은 다음 왕인 에사르 하돈에 의해 대대적으로 재건되긴 합니다.  센나케리브는 수도를 님루드에서 니네베로 천도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아시리아의 무자비한 정복전쟁과 강압적인 통치방식은 피정복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리아에 대한 적개심을 키운 것이죠. 

아시리아의 최대강역을 이룬 왕은 기원전 668년에 즉위한 아슈르바니팔입니다. 아시리아의 왕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멋진 거 같아요.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그는 선왕이 시작한 이집트 원정을 마무리하고 엘람을 공격해 멸망시킵니다. 그의 치세에 아시리아는 이집트와 시리아,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에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죠.

1988년에 만들어진 아슈르바니팔 왕의 청동상입니다.샌프란시스코에 있어요. 물론 현대에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품에 사자를 안고 있는 저 모습은 전통적으로 왕의 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

 

한편 그는 예술과 학문을 장려한 문화군주이기도 했습니다. 이전의 아시리아 왕들과는 확실히 다른 부분입니다. 여러 개의 언어를 구사하고 스스로 작품을 쓸 정도로 문학에 정통했구요.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예술가들을 궁정으로 초청했습니다. 또한 도서관을 건립해 그렇게 연구한 성과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도록 했죠.

아슈르바니팔이 좀 더 적극적인 문화통치를 시행했다면 좋았을걸... 영토는 크게 넓어졌지만 아시리아 특유의 가혹한 통치방식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반란도 줄기차게 이어졌구요. 예전에는 반란이 일어나면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는게 가능했지만 영토가 넓어지니 군대를 파견하는 데에 시간도 더 걸리고, 또 동시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것도 문제였죠. 결국 아시리아는 아슈르바니팔의 승하 후 급격히 쇠퇴하게 됩니다. 

 

 

나라를 되찾은 바빌로니아

 

강력했던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것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의 무자비한 통치에 저항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며 투쟁해온 바빌론의 칼데아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오리엔트 세계에서 문명적으로 가장 발전한 도시에 살았던 이들은 무력을 앞세운 아시리아의 통치에 결코 순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빌론이 아시리아의 손에 넘어가자 처음 반란을 일으켰고 바빌론이 파괴된 이후에는 주변 여러 나라들을 돌며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기원전 612년, 바빌론 지역을 관할하던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가 메디아인의 지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키고 마침내 아시리아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는 새롭게 바빌로니아의 부활을 선언하며  칼데아 바빌로니아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죠. 흔히 신(新) 바빌로니아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나보폴라사르의 왕위를 이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로니아의 옛 영광을 제현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한때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된 적이 있었던 도시 바빌론에 공중정원과 이슈타르 문, 에테메난키 등 바빌론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건축물들이 모두 그의 치세에 지어졌습니다. 그렇게 바빌론은 예전의 화려함을 넘어 더욱 번성한 당대 최대의 메트로폴리스로 거듭나게 되었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내치 뿐만 아니라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신 바빌로니아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특히 이집트를 점령하고 남유다 왕국을 공격해 그곳에서 오늘날 유대인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헤브라이인들을 대거 바빌론으로 끌고 오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바빌론 유수'라고 일컫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빌론으로 끌려온 헤브라이인들은 바빌론 곳곳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동원되곤 했습니다.  

이후 신 바빌로니아는 왕위계승을 두고 한동안 혼란이 지속되다가 나보니두스 왕 때 다시 왕권이 강화됩니다. 하지만 이미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메디아를 제압하고 크게 성장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서아시아 세계를 평정할 위대한 지도자 키루스 2세의 등장으로 신 바빌로니아는 다소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나보니두스는 아들인 벨사자르에게 수도를 맡기고 동지중해 연안으로 원정을 떠난 상태였죠. 그리고 이 틈을 타서 밀고들어온 키루스 2세에 의해 결국 바빌론이 함락되었습니다.

 

 

새로운 강자 페르시아


페르시아는 파죽지세로 주변지역을 평정하면서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사실 키루스 2세가 멸망시킨 메디아는 그의 모계 가문이 다스리던 나라였습니다. 즉, 페르시아와 메디아 사이의 혼인동맹이 키루스 2세 때 깨지면서 페르시아가 메디아를 병합한 것이었죠. 이렇게 메디아를 차지한 키루스 2세는 이어서 신 바빌로니아를 멸망키고 그보다 더 서쪽의 리디아를 공격해 서아시아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인연을 맺게 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평생동안 키루스 2세의 훌륭한 조언자가 됩니다.

이제 그가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문명 세계는 이집트 정도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아직 오리엔트 세계가 노려볼만한 가치있는 영토는 아니었구요. 키루스 2세는 북쪽 스키타이인들의 영역까지 진출을 시도했지만 스키타이의 강력한 지도자인 토미리스 여왕이 이끄는 마사게타이 부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며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지도자의 최후로는 다소 허무한 결말인 것 같네요. 이 결말말고, 그냥 나이가 들어 궁 안에서 평안히 숨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키루스 2세 사후 즉위한 캄비세스 2세는 키루스 2세가 정복하지 못했던 이집트를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이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공격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캄비세스 2세의 원정으로 전통적인 이집트 왕조의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 것이죠. 이후 이집트에는 외국인 왕조가 들어서서 이집트인들을 통치하기 시작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영토를 넓힌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1세 때에 또 한번의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서쪽으로는 사모스 (Samos) 섬을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바빌로니아인들의 반란을 제압했습니다. 또한 동쪽의 인더스 지역을 점령하고 북쪽의 스키타이인들을 물리친 후 서쪽으로도 원정에 나서 기원전 513년, 현재의 불가리아 지역인 트라키아 (Thrace)와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Macedonia), 아프리카의 리비아를 정복하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 유적지에 남아있는 다리우스 1세의 부조입니다. 사실 제 눈에는 이 동네의 부조들이 길가매쉬부터 이때까지도 비슷비슷해보여서 누가 누군지 구별하는 건 어려워요. (출처: commons.wikimedia.org)

 

그는 내치에도 힘썼습니다.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총독을 파견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으며, 행정망, 통신망, 교통망을 건설하고 화폐개혁, 세제개혁으로 국고를 탄탄히하기도 했죠. 이렇게 내정이 안정되자 그는 그 사이 새로운 문명으로 성장한 그리스로 원정에 나섰습니다. 

 

사실 그리스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더 익숙한 우리는 이미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를 잘 알고 있지만,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리스는 마지막으로 끼워맞출 남은 한조각 퍼즐이었을 거에요. 여기만 정복하면 전부 다 내 땅! 하지만 유사 이래 지금까지 한 나라가 전세계를 통일한 역사는 단 한번도 없었죠.  그의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의 후계자들 역시 끝끝내 그리스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지중해의 주인, 
페니키아


다시 기원전 12세기경, 수수께끼의 바다민족들이 많은 문명들을 소멸시킨 직후로 돌아가볼까요? 이 때 성장한 세 민족, 아람인, 페니키아인, 헤브라이인은 큰 제국을 건설하지는 않았지만 이후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우선 아람인은 시리아 지역에 정착에 한때 다마스쿠스 왕국을 건설해 그 지역을 다스렸지만 곧 페니키아와 헤브라이에 합쳐져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언어인 아람어는 오리엔트 지역의 중요한 공용어가 되어 다양한 문헌에 등장했죠. 아람어는 지금도 동방의 시리아 정교나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 같은 교회에서 전례를 위한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동부연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들의 역사는 특이하게도 도시의 규모를 키워 주변도시들을 통합하고 그렇게 나라를 만들어 영토를 확대해나가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상인들이 모여 항구가 들어서기 좋은 곳에 도시를 만들고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죠. 우가리트 (Ugarit), 티레 (Tyre), 시돈 (Sidon), 비블로스 (Byblos), 베리투스 (Berytus) 등이 기원전 1200년경 형성된 페니키아 (Phoenicia) 도시들입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느슨한 도시연맹체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이들 도시가 위치한 곳은 대부분 항구가 건설되기 좋은 곳이었고, 배를 만들기 좋은 고품질의 삼나무가 많이 나는 곳이었습니다. 아직도 레바논은 국기에 삼나무가 들어가 있어요. 또한 소금도 품질이 좋아서 역시 이들의 특산품이었습니다. 그 밖에는 올리브유, 포도, 마른 생선 등이 있었죠. 

 

페니키아인들은 이 특산물을 팔아 염료와 곡물, 구리, 유리제품 등을 사들였고 이 제품들을 또 다른 나라에 팔아 이득을 남겼습니다. 물론 그렇게 배를 타고 왔다갔다 하던 와중에 지중해 각지에 문명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겠죠? 상업으로 크게 번성했던 이들은 그리스에 화폐와 문자를 전해주었습니다.  

 

페니키아 알파벳입니다. 몇몇 글자는 오늘날의 알파벳과 크게 다른 거 같지 않은데요. (출처: www.wikipedia.org/)

 

이렇게 도시를 세우고 무역활동을 하던 페니키아인들은 이제 동지중해 해안가를 벗어나서 지중해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 때도 거대한 페니키아 제국을 세우지는 않았어요. 작은 식민지들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생겨났죠. 훗날 로마와 자웅을 겨루는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와 이베리아 반도에 세워진 서유럽 최초의 도시 가디르가 이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입니다. 처음 도시들이 세워진 곳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인지를 보면 이들의 세력권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식민지 (Colony)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우리도 겪었던 식민지 시대.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에 건설했다는 그 식민지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만든 그 식민지와 같은 걸까요? 근대의 식민지는 본국의 이익을 위한 경제적 침탈을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이 당시의 식민지는 새로운 곳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인구가 너무 늘어나서라던가, 아니면 외적의 공격으로 본국에 살기가 어려워졌을 경우 주로 식민지로의 이주가 이루어졌죠.

식민지는 본국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받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모국과 여러 모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는 모국과의 접점이 희미해지면서 다른 나라처럼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페니키아의 식민지들도 이런 모습을 보였구요, 이후에 등장하는 그리스의 폴리스들도 이렇게 발전했습니다. 

이후의 역사를 볼까요? 동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초기의 페니키아 도시들은 아시리아와 신 바빌로니아 시대를 거치며 이들의 영향권에 들어가 도시가 멸망하거나 자치권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지중해에 흩뿌려진 섬들에 세워진 식민지들은 그때까지 남아있었죠. 그러다가 페르시아가 부상하자 다시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 휘말리며 전쟁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활동 초반에 그리스 세계로 편입되었고, 비교적 이들과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계속 성장하다가 훗날 로마와의 일대 대결을 거쳐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습니다.  

 

 

변방의 작은 역사 헤브라이


한편, 오늘날의 유대인들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헤브라이 (Hebrai)인의 역사도 페니키아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헤브라이인은 원래 아라비아를 고향으로 하는 셈족의 한 갈래였습니다. 상당수의 헤브라이인들은 이집트에서 하층민, 노예 계급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전쟁을 벌이던 람세스 2세 때, 이들의 유일신 야훼의 음성을 들은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대거 탈출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일족을 정착시킨 곳에는 사실 이미 팔레스타인인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헤브라이인들을 새롭게 이주시킨 이후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죠. 무려 3000년이 넘는 갈등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민족의 공격에 직면한 헤브라이인들은 본격적으로 나라를 세우고 군대를 운영해야 자신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초대 국왕으로 추대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사울 왕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체계를 갖추며 이스라엘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 때에는 남부, 동부로 더욱 영토를 확장하고 예루살렘을 차지해 그곳에 수도를 건설했죠. 뒤이어 즉위한 솔로몬 왕 때에는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페니키아는 이스라엘의 신전 건축을 위해 자신들의 고품질 삼나무를 비롯한 건축자재들을 공급하며 돈독한 관계를 쌓아갔습니다. 양측은 항구를 공유해 사용하고 구리광산도 공동으로 개척하는 등 협력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페니키아의 풍부한 물자가 이스라엘로 흘러들고 그들의 다신교 신앙도 함께 넘어오면서 왕실은 점차 사치스러워지고, 야훼를 모시는 이들의 유일신 신앙도 종종 위태로워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외국과의 혼인동맹으로 여러 명의 외국인 왕비와 혼인했는데 이들은 모두 각자의 모국의 다신교 신앙을 갖고 있었죠. 구약성서에서 종종 묘사되는 이교도들의 우상숭배가 바로 페니키아인들의 바알 신앙일 것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이미 나라는 솔로몬 치세 말기부터 흔들흔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솔로몬 사후, 북부의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부의 남유다 왕국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기원전 900년경이 되면 이 때 크게 위세를 떨진 아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게 됩니다. 이 때 페니키아의 많은 도시들도 모두 아시리아의 손에 들어가 버리죠. 그리고 아시리아가 멸망한 뒤에도 헤브라이인들의 시련은 계속됩니다. 뒤이어 등장한 신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곳까지 세력을 확장해오며 남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헤브라이인들을 대거 바빌론으로 끌고간 것입니다. 

 



문명은 오리엔트 지역에서 처음 발생했지만 이제 발전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추측해본다면, 오리엔트는 지리적 중심지가 없는 지역으로 두 문명이 발생하기에 적합한 강 하구 지역을 갖고 있었지만 더 진보한 문명으로 성장하기에는 넓은 평야지역과 같은 지리적 요인이나, 두 문명을 흡수해 통합할 만한 토착문명과 같은 문화적 요인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오리엔트 문명은 형성 초기에는 고도로 발달한 정치, 행정체제를 이룩했지만, 강력한 전제군주제 때문에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 발전의 원동력을 삼기보다는 억압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계속해서 문명이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발전의 원동력을 서쪽의 그리스 세계에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리엔트 지역의 역사가 왜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또 다른 근거가 필요하겠지만요.

오리엔트 얘기는 여기가 끝입니다. 이 뒤로도 이 지역에는 서양사에 영향을 미치는 굵직굵직한 나라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비록 이 카테고리가 서양사를 다루는 중이니 오리엔트의 이후 역사를 계속 따라가진 않겠지만 인류의 역사를 그렇게 칼로 싹뚝 자르듯 딱 나누어서 얘기할 수는 없으니 단편적으로나마 서양사 얘기에 계속 등장하게 될 거 같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스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