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소처럼 한가하게 폰을 들여다보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이 인도한 영상 중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이 눈에 띄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긴 개막식을 짧게 축약해 보여주는 영상이었겠지만 크레타 문명에서 시작된 그리스의 장구한 역사를 표현한 퍼레이드는 정말이지 과거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한눈에 보여주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전세계가 알고 있는 역사를 가진 나라라니 그리스 사람도 아닌데, 그리스 국뽕이 차는 느낌이랄까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생겨난 문명의 빛이 크레타 섬을 거쳐 드디어 오늘날 유럽 땅의 남쪽 끝 발칸 반도에 닿았습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 학문의 왕인 철학의 탄생지, 모든 서구인의 정신적 고향인 그리스가 드디어 역사 시대로 접어든 것이죠. 혹자는 그런 것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서구사회, 더욱 나아가 현대의 전지구로 이어지는 길고 긴 역사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크게 반대하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지중해로 퍼진 폴리스들
기원전 1200년 경 그리스로 남하한 도리스인들은 최신의 철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주로 해상무역을 하던 그리스인들과 달리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정착해 농경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기존의 그리스인들과는 조금 달랐죠. 코린토스 (Korinthos) 와 스파르타 (Sparta) 등이 이들이 세운 폴리스였습니다.
도리스인들이 그리스로 밀려들어오자, 아카이아 그리스인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아티카 (Attika) 로 이동해 아테네 (Athenae), 테베 (Thebae), 아르고스 (Argos) 등의 폴리스를 형성했고, 다른 일부는 이오니아의 페니키아인들이 형성한 식민지들에 정착했습니다. 밀레투스 (Miletus), 에페수스 (Ephesus) 등이 그런 폴리스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해안에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근거지를 요새화했습니다.
폴리스 (Polis)는 뭘까요? 폴리스는 지중해에 넓게 분포된 작은 도시국가들입니다. 주로 해안에 형성되었지만 내륙의 평야지대에 자리잡은 폴리스들도 있긴 했죠. 스파르타처럼요. 기본적으로는 왕이 통치하는 왕국이지만 비슷한 시기의 오리엔트 국가들의 군주들 같은 전제군주는 아니었고 대부분의 국가중대사는 시민들이 함께 논의해서 결정했습니다.
이제 지중해 연안은 각지에 들어선 폴리스들로 와글와글합니다. 그리스 신화나 비극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들은 대부분 이 폴리스들이죠. 일부는 지금도 이 때의 지명을 사용하고 있더라구요. 그런 동네에서 살면 기분이 어떨까요. 신화 속에서 사는 느낌은 아닐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폴리스들을 포함해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대부분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폴리스 내부에는 광장인 아크로폴리스 (Acropolis)와 시장인 아고라 (Agora) 등이 있어 정치, 행정, 여론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했구요. 중요한 안건은 대토지를 보유한 귀족들의 협의체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들은 미케네의 영향을 받아 고대적 봉건제를 바탕으로 성장한 시민 계층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이란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이랑은 다른, 귀족인 셈이죠.
한꺼번에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폴리스들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과는 다르게, 다툼을 벌이기 보다는 서로 연합하여 공동방위체제를 구성했습니다. 동,서는 뭐가 달랐던 걸까죠?
중국의 경우에는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진 주나라 때에 이미 천자 사상이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멸망 후의 극심한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에도 형식적으로나마 주나라의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통일을 지향했었죠. 그 뒤의 삼국시대 때도, 5호 16국 시대 때도, 5대 10국 시대 때도, 난세의 영웅들은 늘 '천하통일'을 꿈꿨습니다. 그에 반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처음부터 그런 구심점이 될만한 요인이 없었고, 각각의 독립적인 도시국가의 형태로 존재할 뿐 통일을 지향하지는 않았습니다.
평민층의 성장
폴리스들은 때로는 경제적 이득을 두고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 폴리스들 사이에서의 해상무역이 발전하면서 대토지 소유와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귀족계급의 세력 대신,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폴리스의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습니다. 폴리스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무역이 번성하면서 그리스인들은 이오니아에 건설한 식민지들에서부터 서쪽으로 한참 멀리까지 진출했습니다. 이오니아에 건설한 폴리스들이 초기의 그리스 식민지들이라면, 지중해 중서부에 건설된 신도시들 중에는 현재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해당하는 마실리아 (Massilia), 이탈리아의 나폴리인 네아폴리스 (Neapolis) 등이 있습니다.
피니키아로부터 문자, 화폐를 전례받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이제 무역을 통해 판매할 상품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 자급자족하던 방식에서, 제품을 팔기 위한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한 것이죠. 수공업과 조선업, 직물업, 금속세공업 등이 발전하자, 과거 대규모 농지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 세력은 갈수록 축소되고 해상활동으로 부를 쌓은 평민 세력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전개이지 않나요?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중세 말기가 생각납니다.
최강대국 아테네
그리스 폴리스들 중 가장 발전된 도시국가인 아테네 (Atenae)도 귀족정이 와해되고 평민의 권리가 신장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귀족회의인 아레오파고스 (Areopagus)에서 주요 안건들을 선별하고, 분야별로 선출된 9명의 귀족 출신 집정관들이 행정, 군사, 종교, 재판 등을 관장하던 시스템에 서서히 평민들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원전 621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드라콘 (Draco)이 입법하여 제정된 드라콘 법전은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으로, 귀족들이 일방적으로 판결을 내리던 주먹구구식 재판에서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제정되었습니다. 드라콘은 귀족 출신이었지만 이제 귀족들도 평민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평민들의 권리가 향상된 것이죠.
하지만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 형벌이 가혹해서 채무를 갚지 못한 평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지금도 영어 단어 'draconic'은 '법이나 규율 등이 너무 가혹한' 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남아있다고 하네요. 사전에도 정말 있더라구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 솔론 (Solon)은 기원전 593년부터 일련의 개혁을 통해 드라콘 법에 의해 노예가 되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우선 채무를 진 평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평민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평민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시민들을 재산에 따라 구별하여 참정권을 부여했습니다. 시민들을 소유한 재산에 따라 지주, 기사, 농민, 노동자의 네 계층으로 나누고 이 구분에 따라 정치 참여의 자격을 부여한 것입니다. 일종의 금권정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솔론은 개혁을 통해 귀족과 평민 양 계층을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를 하고자 했지만, 그의 뜻과는 반대로 양쪽 모두의 불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평민 세력과 결탁한 귀족들은 참주정 (Tyranny)을 출범시켰습니다. 참주정은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독재로 인식되지만 원래는 귀족과 평민들이 당대의 명망 있는 인사를 지도자로 추대하여 권력을 부여하고자 한 제도였습니다.
기원전 561년 아테네의 초대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 (Peisistratos)는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배분하며 평민의 권리신장에 힘썼습니다. 또한, 평민들의 세금을 줄이고 상공업을 장려해서 흑해의 무역로를 정복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독재자아닐까요?
그러나 그의 아들인 히피아스 (Hippias)가 참주 자리를 세습받자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이미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집권기 동안 많은 권리를 평민들에게 양보하며 참아왔던 귀족들이 히피아스와 반목하면서 급기야 참주정이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히피아스를 피해 스파르타로 달아났던 귀족들은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 (Cleomenes I)를 끌어들여 조국인 아테네를 공격했고 히피아스는 실각했습니다. 아테네의 정국은 한동안 혼란스러웠다가 클레이스테네스가 아르콘에 당선되어 집권하면서 다시 안정을 되찾아갔습니다.
병영국가 스파르타
스파르타 (Sparta)의 정식 국명은 라케다이몬 (Lacedaemon) 입니다. 생소한 이름이에요. 스파르타는 제우스의 아들인 라케다이몬이 에우로타스의 딸 스파르테와 혼인해 처가의 왕위를 계승한 것에서 기원한 이름입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에 속해있었지만, 그리스로 남하한 도리스인들이 세운 도시국가였습니다. 도리스인들이 남하하기 전에도 그 지역에는 아카이아인들이 세운 폴리스가 존재했었지만,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고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지배세력이 도리스인으로 바뀐거죠. 그래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는 여러가지가 측면에서 성격이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펠로폰네소스 (Peloponnese) 반도에 위치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비해 군국주의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다른 폴리스들이 미케네 문명이 초토화된 후 새롭게 자리를 잡은 것과는 다르게, 스파르타에는 미케네 문명의 군사적 성격이 상당 부분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군국주의적 성격은 기원전 7세기, 스파르타의 왕족인 리쿠르고스 (Lykurgos)가 집권하며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사회적 다양성을 획일화하는 정책들을 시행했습니다. 주택의 규모와 형태를 동일하게 짓도록 하고, 의복을 비롯한 생필품도 정해진 규격을 따르도록 강제했습니다. 공동식당을 설치해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같은 음식을 먹도록 했습니다. 마치 나라 전체가 군대 같죠?
이러한 제도는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시민들이 동등한 수준의 의무교육을 받도록 했고, 재산권에 있어서 아들과 딸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등 시민들 간의 평등을 중시했죠. 또한 민선관을 두어 왕족과 귀족들을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리쿠르고스의 정책들은 스파르타를 병영국가화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장보병을 바탕으로 한 밀집대형 (Phalanx) 전술은 훗날 동방의 강대국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 세계를 지켜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부작용 부분도 볼까요? 스파르타는 이미 도리스인이 남하하던 때부터 인구과잉과 식량부족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폴리스들이 이주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과 다르게 스파르타는 이 문제를 해외정복으로 해결했습니다. 기원전 8-4세기, 세 차례의 메세니아 (Messenia) 전쟁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스파르타는 획득한 영토의 피정복민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우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피정복민들을 순종적인 페리오이코이 (Perioikoi) 와 반항적인 헤일로타이 (Heilotai)로 니누어 차별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정복 활동을 계속하면 할수록 원래의 스파르타인인 소수의 정복민은 인구가 크게 늘어나지 않은 반면에 피정복민 인구는 크게 늘어났고, 다수인 이들을 다루기 위한 군국주의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의 가혹한 대우에 불만을 품은 헤일로타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화불안이 늘 잠재해 있었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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