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세계의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페르시아라는 큰 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니, 이제 그리스 세계에는 돈독한 우정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시대가 열렸을 거 같은데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봅니다.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기위한 그리스 폴리스들 간의 연합은 일시적이었을 뿐 원래부터가 이들은 각각 독립된 국가였죠.
마치 아직 2차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시점에서부터 연합국들이 냉전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페르시아의 마지막 원정 당시 그리스 세계 역시 이미 분열과 갈등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후 냉전이라는 새로운 체제에서 미국과 소련이 대결했던 것처럼 그리스 세계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물론, 이 대결은 냉전이 아닌 열전이었습니다. 아니, 냉병기의 시대이니 딱히 열전이라고 하기도 좀 뭐하네요. 근데 이런 비유는 단순히 비유에서만 끝난 게 아니더라구요. 실제로도 냉전 시기에 국제정치를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갈등에 대한 연구를 많이 진행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경쟁에 대한 연구에도 소환되구요. 2500년 전의 그리스 세계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그 만큼 모든 문물이 극도로 고도화된 현대에도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는 거겠죠?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
기원전 478년,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두 폴리스인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이제 그리스 세계의 패권국가로 우뚝서게 되었습니다. 이미 펠로폰네소스 지역에서는 군사력으로 가장 강성했던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로서 군림하고 있었구요.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무찌른 아테네는 신흥 해상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 (Themistocles) 때 크게 확대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기세를 몰아 페르시아의 영향권 안에 속해 있었던 이오니아 지방의 폴리스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반면에 스파르타는 이런 아테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네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아테네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폴리스들 간의 상호방위체제인 델로스 (Delos) 동맹을 결성해 맹주가 되면서부터 다른 폴리스들을 압도하는 제국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민주정 국가에서 제국이라니 말이 좀 이상하죠? 이 동맹의 당사국들은 원래 모든 사안에 있어 동등한 자격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아테네의 의도가 많이 반영되었죠. 그러면서 동맹국들 사이에서 아테네의 입김이 점차 세졌습니다.
이때 아테네에서는 제 1 시민, 민주정의 완성자라고 칭송받는 페리클레스 (Pericles)가 집권 중이었습니다. 그는 귀족 중심의 보수파에 맞서 민중파를 이끌며 민주주의의 안정에 기여했고 학문과 예술을 부흥시켰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한 것도 페리클레스였습니다. 지금도 아테네에는 그때의 유적들이 남아있죠. 그의 집권기 동안 아테네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그런 번영은 어찌보면 델로스 동맹의 다른 동맹국들에 대한 착취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저 동맹국들 사이에서 아테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정도였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만을 위한 동맹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원래 델로스에 두었던 동맹국들의 분담금 금고가 아테네로 옮겨졌고, 아테네는 자신들의 해외원정에 동맹 연합군을 마음대로 차출하기도 했습니다.
델로스 동맹에 빨대를 꽂은 아테네의 대외적 팽창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우려를 낳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아테네 내에서 그나마 친스파르타 인사로 분류되던 보수파의 키몬 (Cimon)이 페리클레스의 주도로 도편추방되었죠. 아테네의 패권이 확대되면서 그리스 세계에 민주정이 도입되는 것도 왕정국가인 스파르타에게는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버전의 세계대전이나 다름없는 이 전쟁은 그리스 전체를 몰락으로 몰고 갔습니다.
전초전
전운이 감도는 기원전 460년,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한 두 나라, 메가라 (Megara)와 코린토스 (Corinth) 사이에서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아테네에서는 이를 지중해 서부로의 진출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메가라와 동맹을 맺으면서 코린토스 지협에 군대를 배치하고 긴장을 고조시켰죠. 이 코린토스 지협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이 문제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결국 아테네의 조치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근데 스파르타가 먼저 싸움을 걸었다고 하기엔 좀 애매해요. 이 당시 스파르타는 동맹인 도리스 (Doris)에 지원군을 보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함대에 의해 스파르타로 돌아오는 해로를 차단당하자 그럼 이 참에 아테네를 공격하자 싶어 아테네로 진군한 거였거든요. 길이 막힌 스파르타 군이 아테네를 공격할 거란 걸 예측하지 못했던 아테네는 스파르타 군을 상대로 타나그라 (Tanagra)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스파르타에 패했습니다. 물론 스파르타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요.
상황은 뭔가 아테네에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듯 싶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에 지원군을 보낸 상태였는데요. 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테네도 상당한 병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스파르타를 상대로 한 도발도 좀 자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싸움을 걸 만한 여유가 없어서 사태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일 뿐, 둘 사이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는 그 동안 주변 나라들에게 돌아가면서 공격을 받았고 그래서 이를 진압하러 다니기에 급급했죠. 테베 (Thebae)가 먼저 싸움을 걸어 아테네 군에 승리했고 그다음에는 에우보이아 (Euboea) 지역이, 그리고 마침내 코린토스 지협을 막고 있던 메가라가 아테네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메가라가 아테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니 코린토스 지협도 이제 아테네의 영향권 밖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메가라가 열어준 코린토스 지협을 통해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로 진군했습니다. 스파르타 군은 에우보이아 반란을 진압하다 말고 허겁지겁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스파르타 군은 이미 아테네 전 지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다급하게 스파르타의 귀족들을 매수해 아테네의 스파르타 군을 철수하도록 하는 데에 가까스로 성공했습니다. 스파르타로서는 아쉬운 결정이었죠. 아테네를 아주 없애버릴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양측은 이후 30년 동안 두 동맹을 인정하고 서로의 영향권을 침범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30년이 지나서 합의시한이 끝나면 양측은 다시 전쟁을 재개하게 되겠죠? 근데 실제로는 30년이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이 합의는 15년 만에 깨지고 양측은 이제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합니다.
에피담노스가 불러온 나비효과
서로의 영향권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 30년 간의 합의가 15년 만에 깨졌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 상대방의 영향권을 침범했다는 의미겠죠? 사태는 기원전 436년, 에피담노스라 (Epidamnos)는 작은 나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퀴라 (Corcyra) 라는 나라 사람들이 세운 식민지였습니다. 한편 케르퀴라는 코린토스 사람들이 세운 식민지였죠.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귀족파와 민중파가 대립하던 에피담노스에서 민중파가 권력을 잡자 귀족파는 거칠게 반대했습니다. 귀족파가 외세까지 끌어들여 민중파를 몰아내려고 하자 민중파는 곧 모시 (母市) 인 케르퀴라에 도움을 요청하죠. 케르퀴라는 중립 약속을 명분으로 에피담노스 민중파의 요청을 거절했고 민중파는 이번에는 케르퀴라의 모시인 코린토스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케르퀴라와는 달리 코린토스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죠.
에피담노스와 코린토스의 밀착에 위기감을 느낀 케르퀴라가 도움을 청할만한 곳은 아테네 밖에 없었습니다. 코린토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케르퀴라로서는 아테네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는 아테네로서도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만약 아테네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케르퀴라를 돕는다면 30년 동안 서로의 영향권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 합의를 어기는 일이 될 테고, 그럼 겨우 마련한 이 평화도 깨질 테니까요.
양측은 사태를 외교적으로 합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상황은 점차 전쟁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그 두 패권국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신중하고 치열한 외교전은 현대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지더라구요.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양측의 군대가 꽝 부딪히면서 터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서서 이루어졌던 외교적 노력이 무색하게 분명 한발한발 파국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결국 아테네 민회에서는 케르퀴라에 함대를 파견하기로 했고, 스파르타는 이런 조치에 반발했지만 아테네는 이미 내려진 이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양국은 이제 공식적으로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충돌이 일어난 곳은 테베와 플라타이아 (Plataea)였죠. 펠로폰네소스 동맹 가입국인 테베가 식민시였던 플라타이아를 공격하자 플라타이아가 아테네에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테네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스파르타와 테베가 이미 플라타이아를 함락해버렸습니다.
플라타이아는 함락되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승부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타는 이후로도 수차례 아테네로 원정군을 보냈지만 아테네는 시민들을 성벽 안으로 대피시켜 그 안에서 버텼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밀집한 아테네의 성벽 안에서는 페스트가 발병하고 그로 인해 페리클레스도 목숨을 잃으면서 양측의 전력이 비슷해져 버립니다.
전염병으로 전력의 4분의 1을 상실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통솔할 수 있는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보다 더 급진적인 주전론자 클레온 (Cleon)이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역병 때문이든,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것 때문이든 아테네에서는 이제 성벽 안에서 버티는 것보다 좀 더 적극적인 공격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벽 밖으로 나가 보다 적극적으로 스파르타 군과 싸우는 것이었죠.
본격적인 공세와 니키아스의 평화
페리클레스 사후 공격 모드로 전환한 아테네는 이제 적극적으로 군대를 보내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속의 폴리스들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후방인 필로스 (Pylos) 곶에 방어시설을 갖춰 이 곳을 요새화했습니다. 필로스 곶을 차지한 아테네의 공격은 스파르타를 괴롭히는 데에 충분했습니다. 스파르타는 군대를 보내 필로스를 다시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결국 먼저 협상을 요청했지만, 주전파인 클레온이 이 요청을 들어줄 리가 없었죠.
하지만 아테네로서도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습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필로스 곶의 아테네 측 요새가 거슬리는 한편, 본토에서는 전쟁을 틈타 헤일로타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이다보니 아테네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고, 아테네 입장에서도 본토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필로스 곶에서 스파르타 군을 붙잡아봤자 이들을 무한정 지키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식량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으니까요.
한편, 앞서서 아테네가 플라타이아를 지원해 테베를 공략하려던 계획은 승부가 나지않는 지루한 상황에서 갑자기 아테네에게 불리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필로스 곶의 상황과는 반대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아테네의 주요 은광 중 하나인 암피폴리스 (Amphopolis) 지역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과정에서 양측의 사령관이자 주전론자인 아테네의 클레온과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 (Brasidas) 가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양측의 주전론자들이 사라지자 이제 주화론자들이 나섰습니다. 클레온 사후 정권을 잡은 니키아스 (Nikias) 의 주도로 양측은 평화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아테네는 필로스 곶에서 붙잡은 스파르타의 정예군 포로들을 스파르타에 돌려주고 스파르타는 암피폴리스를 아테네에게 반환하기로 하죠. 기원전 421년 맺어진 이 협상은 아테네의 니키아스가 이끌었다고 해서 니키아스 화약, 니키아스 화의 또는 니키아스의 평화라고도 불립니다. 이렇게 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반부가 마무리됩니다.
평화협정의 파기와 아르고스 동맹
이번에 체결된 협정은 50년 동안 유지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서 한번 협정을 깬 적이 있으니 이번 협정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죠? 아니나다를까, 아테네에서는 또 다른 주전파 인사인 알키비아데스 (Alcibiades) 가 등장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의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가 찾은 방법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에 있으면서도 스파르타와 적대적이었던 아르고스 (Argos)를 이용하는 것이었죠.
알키비아데스. 상당히 묘한 인물입니다. 정치 명가 출신이었던 그는 모든 아테네인들의 존경을 받는 외삼촌 페리클레스를 후견인으로 두었구요.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추앙받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준수한 외모에 웅변 솜씨도 훌륭했고, 올림픽 제전의 전차경기에서 우승한 경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인물인 것 같은데 그의 행보는 오히려 그와 반대였습니다. 너무나 완벽해서 쉽게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산 것인지, 아니면 인성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는 아테네 정계에서는 상당한 견제를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훗날 시칠리아 원정 이후 통수의 통수를 치는 그의 행적을 보고있으면 분노를 넘어서 감탄을 하게 됩니다.
아르고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스파르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르고스 역시 상당한 국력을 갖춘, 적어도 2인자 정도는 될만한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스파르타가 아테네에게 밀리는 듯한 형세를 보니, 자신들 역시 그 기회를 틈타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죠. 그리고 이런 구상은 아테네와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습니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는 스파르타의 영향권에서 이탈한 나라들이 아르고스 측에 합류하면서 아르고스 동맹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맹의 배후에는 아테네가 있었죠.
이제 막 세력이 확대되고 있는 아르고스와, 수세에 몰려 평화협정을 요청할 만큼 절박했던 스파르타는 결국 만티네아 (Mantinea)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기세로 보면 아르고스가 이길 것 같은데, 그래도 스파르타는 여전히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가진 나라였죠.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지원군이 포함된 아르고스 동맹군에 승리하며 잃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의 패권을 회복했습니다.
이제 니키아스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아테네의 다음 타겟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스파르타 군의 보급을 용이하게 도와주고 있던 멜로스였습니다. 그런데 아쉬울 때에는 그럭저럭 멜로스를 잘 이용했던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공격에 시달리는 멜로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죠. 국제관계란 참 냉혹하네요. 결국 멜로스는 멸망하고 그곳의 주민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노예로 전락하는 등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시칠리아 원정
전쟁은 이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벗어나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시칠리아 (Sicily) 로 번집니다. 시칠리아는 장화 모양으로 된 이탈리아 반도의 발가락 앞부분에 놓인 큰 섬이구요. 나중엔 로마의 기원에 큰 영향을 주는 마그나 그라이키아 (Magna Graecia) 라는 문화권의 일부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정도까진 아니어도 시라쿠사 (Siracusa), 네아폴리스 (Neapolis), 세게스타 (Segesta) 등이 이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폴리스들이었죠.
이 지역의 판도는 크게, 도리스인이 세운 친 스파르타 성향의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결집한 폴리스들이 존재했고, 나머지 작은 폴리스들이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모습이었죠. 이 나머지 도시들은 당연히 스파르타의 적국인 아테네의 힘을 빌리고 싶어했고, 아테네의 주전론자인 알키비아데스는 이를 기회로 삼아 시칠리아로 진출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평화협상을 이끌었던 니키아스는 좀 더 신중하자는 입장이구요.
그러다 기원전 416년, 시칠리아의 세게스타가 시라쿠사와 대립하며 아테네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알키비아데스는 민회를 설득해 세게스타로 파병할 대규모의 지원군을 꾸려 원정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정적인 순간, 그는 정적들에 의해 위기에 처하는데요. 정적들이 그를 신성모독죄로 기소한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평소에도 적을 많이 만들었던 그의 태도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것일 수도 있겠네요.
이런 위기의 순간 알키비아데스가 택한 해법은 놀랍게도 망명이었습니다. 그것도 적국으로의 망명이요. 그는 스파르타로 넘어가 아테네 군을 쳐부술 수 있는 방법들을 스파르타에게 조언하고 스파르타와 시라쿠사의 연합군은 그의 조언에 따라 아네네 군의 공격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가 끌고 온 그 원정군이죠. 알키비아데스가 없는 아테네 군은 이제 니키아스가 이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정군은 애초에 주전파인 알키비아데스의 뜻에 따라 조직된 것이었고 니키아스는 원정에 큰 의지가 없는 주화론자이니... 아테네는 전투 전부터 이미 원정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면 차라리 포기하고 철수하는 게 나았을텐데, 니키아스는 예정된 대로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아테네 원정군은 결국 스파르타와 시라쿠사 연합군에 대패했습니다. 확실히 알키비아데스의 망명과 니키아스의 우유부단함, 원정지의 지리에 대한 무지 이 세가지를 모두 겪고도 이기기란 불가능해 보이네요. 아테네는 엄청난 인명,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했고 사령관이었던 니키아스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일단 많은 수의 군사를 잃은 만큼 육군과 해군의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재정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스파르타와는 다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국방력이 약화된 것을 눈치챈 스파르타는 수시로 공격을 해왔습니다.
한편, 델로스 동맹에 소속되어 착취당하던 폴리스들 역시 이 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죠. 그 중에는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은닉해두었거나 아테네에 중요한 자원들을 수출하던 폴리스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반란은 아테네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타격이었죠.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페리클레스 사후 중우정으로 변질된 민주정과 무거운 세금 부담이 지긋지긋해진 아테네의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아테네가 자랑하던 민주주의도 사실상 제 기능을 잃었습니다. 아테네는 이제 정말 살아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확실한 계기가 필요했죠.
국력을 소진시키는 해전의 연속
아테네는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대대적으로 해군을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듯 키노세마 (Cynossema), 아비도스 (Abydos) 등 몇 차례의 해전에서 승리하며 스파르타 군을 쳐부수죠. 하지만 이미 재정은 바닥이 난 상황이고 그 와중에 또 영끌을 하느라 더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반대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서로 죽일 듯이 싸웠던 페르시아에게 지원을 받아, 같은 편에서 함께 싸웠던 아테네와 싸우는 상황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네요.
한편 스파르타로 망명했던 알키비아데스는 그곳에서 스파르타 왕비와 한바탕 떠들썩한 스캔들을 일으킨 뒤 또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로 돌아올 방법을 모색하며 아테네 귀족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부추겼죠. 아테네에 귀족들의 과두정이 수립되면, 민주정 시절 나라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 것에 대한 처벌을 면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귀환을 받아주는 대가로 페르시아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내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귀환을 요청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이미 스파르타를 지원하는 중이었는데 말이에요.
재정난에 시달리던 아테네 귀족들은 결국 알키비아데스의 말에 넘어가 그를 받아들였고,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다시 아테네 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파르타 군과 싸웠습니다. 비록 자신이 조건으로 내걸었던,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에는 당연히도 실패했지만 그는 기원전 410년, 키지코스 (Cyzicus)에서 스파르타 해군을 크게 이기며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 해군에도 영웅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 (Lysandros) 는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내 스파르타 해군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대량의 함선을 새로 건조하고 아테네에서 훌륭한 선원들을 빼오기도 했죠. 그리고 노티움 (Notium)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마침내 아테네 해군에 승리했습니다. 패배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정적들에 의해 책임을 추궁당하자, 또 다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애초에 본인이 자초한 일이지만 그의 운명도 평탄하지가 않네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키지코스와 노티움에서 각각 1승씩 올린 가운데, 이제 그리스 세계 전체를 참화 속으로 몰아넣었던 전쟁도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불리한 점도 양측이 공평하게 한 가지씩 나눠가졌죠. 스파르타에서는 리산드로스의 임기가 끝나 사령관이 교체되었고, 아테네에서는 알키비아데스를 대신해 총사령관을 임명하는 대신 8명의 장군들이 지휘권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사실, 아테네는 이미 시칠리아 원정에서의 끔찍한 패전으로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거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끝일 수도 있었죠. 그런 아테네가 그 이후로도 다시 해군을 어느 정도 재건하고 몇 번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가 그런 큰 국난을 극복할만한 국가적 역량을 갖춘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나라였다면 진작 끝났을 전쟁인데 말이에요.
기원전 406년, 아테네는 다시 한 번 모든 국가적 역량을 끌어모아 해군을 정비했습니다. 한번 영끌을 했는데 어디에서 또 돈이 나오나 싶은데, 이번에는 신전 안의 금이나 은으로 된 신상이나 신전을 장식한 금박까지 모두 끌어모았다고 하네요. 마치 우리나라의 IMF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캠페인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마련한 자금으로 해군을 보강한 아테네는 아르기누사이 (Arginusae) 제도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기적처럼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곧바로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부상병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않고 전사자들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것을 두고 8명의 지휘관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전원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안 그래도 계속된 전쟁으로 지휘관들이 전사해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 아테네인들이 이들을 사형에 처한 것은 스스로 아테네를 사형에 처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많은 연구에서는 이때의 결정이 아테네를 재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정이라는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중우정으로 몰락하면 벌어질 수 있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하구요. 어쨌든 스파르타 해군을 물리친 덕분에 아테네 인들은 자신감도 되찾고 몇 년 정도 시간도 더 벌 수는 있었지만, 전쟁의 결말을 알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 승리가 오히려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이야기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패한 스파르타도 아테네처럼 재정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미 그 전부터 페르시아로부터 해군 운영 자금을 지원받았지만 외세의 힘을 빌어 군대를 유지하는 게 스파르타인들에게 썩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었죠. 근데 이제 정말 돈이 없었습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계속 받아낼 수 있는 인물, 리산드로스를 다시 복귀시켰습니다.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리산드로스는 로도스 (Rhodos) 섬 일대의 델로스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고 헬레스폰토스 (Hellesponto) 해협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아테네에 식량을 수출하는 무역선들의 발을 묶어 놓고 아테네 시 근처까지 접근하기도 했죠. 아테네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를 크게 이겼는데도 스파르타는 여전히 건재해 보였고 그 뒤에는 황금이 마르지 않는다는 페르시아의 지원이 있었으니까요.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를 막기 위해 아이고스포타모이 (Aegospotami) 지역에 정박했습니다.
리산드로스를 막는다고 오긴 했는데 사실, 아테네 군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를 호령하던 예전의 아테네 해군은 온데간데 없이, 병력은 터무니없이 줄어 있었고 여러 번의 해전 동안 유능한 지휘관들은 전사하거나 처형당했습니다. 남은 병사들도 숙련도가 낮아 잘 싸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 진영에 익숙한 얼굴이 불쑥 나타납니다. 노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사라졌던 알키비아데스였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인근지역에서 지원군을 끌어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며 지휘권한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관들은 과연 그를 믿어도 될지 고민에 빠졌죠.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엎치락 뒤치락하며 국운을 건 싸움을 하는 이 전쟁터 한가운데가 그에게는 그저 출세를 위한 기회의 장이라는 것을, 이제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지휘관들은 결국 알키비아데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알키비아데스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요?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아테네의 대패였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교전 끝에 아테네 해군이 리산드로스에 의해 완파되고 만 것입니다. 27년을 끌었던 지독한 전쟁으로 서로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탓인지, 리산드로스는 전투에서 생포한 아테네인 포로들 대부분을 처형했습니다. 해군이 없어진 아테네라니. 제국 아테네의 종말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폴리스 체제의 종말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 군이 자신들을 점령할 경우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사 항전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도시에서 아테네로 들어오는 곡물 수입루트가 차단당하게 되자 그것마저도 불가능해졌죠. 결국 아테네는 얼마 안 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패전국 아테네의 운명은 이제 스파르타의 손에 놓였습니다. 스파르타는 우선 아테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동맹국들을 해방시켰습니다. 해군은 이미 전멸해버렸고, 스파르타가 공격핼 때마다 아테네인들이 쏘옥 숨어들어갔던 아테네 도시 내의 성벽들은 모두 철거되었죠. 스파르타가 싫어하는 민주정 역시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라는 나라 자체는 존속시키기로 합니다. 그게 항복의 조건이었으니까요. 결국 이렇게 살아남기는 했지만 아테네는 다시는 예전과 같은 패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겨우 명맥을 이어가다가 훗날 로마 제국이 팽창하자 로마의 자치도시가 됩니다.
한편, 승리한 스파르타라고 해서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승리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권위를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죠. 반면 이는 분명 페르시아에게는 잘 된 일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해외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국방력을 제한하여 사실상의 속국으로 삼았지만 그리스의 세계를 지탱하던 폴리스 체제 자체가 이미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착취에서 벗어난 폴리스들의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을까요? 아니요. 현실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그리스 세계를 제패한 스파르타는 곧 아테네가 다른 폴리스에게 실시했던 것보다 더욱 가혹한 군국주의 체제를 수립했습니다. 각 폴리스들에 군대와 감독관을 파견하고, 공납금을 인상하고, 그리스의 체제에 맞지 않는 지나친 독재와 간섭으로 갈등의 조짐을 보였습니다.
기원전 394년, 페르시아가 왕위계승 문제로 내분에 빠지자 스파르타는 이때를 틈타 이오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코린토스, 아테네, 테베, 아르고스 등은 재빨리 페르시아와 결탁해 스파르타에 맞서죠. 이 사건은 곧 코린토스 전쟁이라는 또다른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 자체가 제국으로서의 스파르타의 한계 아닐까죠? 결국 스파르타는 이오니아 지방을 페르시아에 완전히 넘겨주고 평화조약을 맺으며 사태를 마무리했지만 그리스 세계에서 스파르타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페르시아만 좋은 전쟁이 되어버렸네요.
그렇게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강대국이 몰락의 길을 걷는 동안 보이오티아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반짝 등장했습니다. 두 폴리스의 약화를 틈타 테베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것이었습니다. 펠로피다스가 주도하는 민주정이 수립된 이래, 테베는 명장 에파메이논다스의 눈부신 활약으로 스파르타와 일전을 벌일 정도로 세력을 성장시켰습니다.
결국 기원전 371년, 양측은 레욱트라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테베의 에파메이논다스는 먼저 공격을 감행해온 스파르타의 밀집대형에 맞서 사선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기병대는 스파르타군의 힘이 집중된 우측을 선회해서 좌측을 파고드는 방법으로 스파르타군을 격파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테베는 스파르타의 본진인 라코니아까지 진출해, 스파르타의 경제력의 토대인 메세니아를 점령했습니다.
테베는 그리스 세계의 새로운 강자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리스 문명 자체가 이미 쇠락 중이었습니다. 기원전 362년 에파메이논다스의 사후, 잠깐 동안의 전성기를 누렸던 테베는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려 욕심을 부렸다가 이번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연합군에 패했습니다. 그리고 이 패배는 테베의 짧은 전성기를 끝내는 계기가 되었죠. 테베 역시 다른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쇠퇴했습니다.
결국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약 50년간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급속히 쇠퇴해, 테베의 몰락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경제적 원천이던 해상무역은 그리스가 더 이상 식민지를 확대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포화상태에 도달해 다른 해외식민지들에 의해 잠식당했고, 경기 침체로 실업자가 된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직업용병이 되었습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중장보병들은 이제 경무장의 용병부대에 의해 대체되었고, 폴리스들끼리 서로 자웅을 겨루던 그리스 세계는 강성했던 군사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펠로폰네소스 전쟁 얘기도 끝이 났네요. 다른 글보다 조금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분량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략하게 중요한 사건들만을 열거했을 뿐인데도, 이 전쟁은 고대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이 메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그리스 세계의 작은 폴리스들은 물론이고, 그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도 연관되었구요.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보더라도 소아시아에서부터 시칠리아에 이르기까지 동지중해 일대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정말 고대 그리스 버전의 세계대전이라고 할만한 것 같아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그리스 세계는 이렇게 끝이 나나 싶은데, 아직 한 챕터가 더 남아있습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변방으로 불리웠던 마케도니아가 새로운 패권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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