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 (Macedonia)'라는 나라 이름 들어보셨나요? 발칸 반도 중간 쯤에 있는 내륙국가입니다. 옛날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있다가 유고 연방이 붕괴되면서 독립국이 되었죠. 축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가끔 경기를 보셨을 수도 있겠구요. 한국 사람들은 많이 찾지 않지만 풍광이 뛰어나고 물가가 싼 '오흐리드 (Ohrid)'라는 휴양지를 들어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몇 년 전에는 그리스와 나라이름을 두고 벌인 다툼이 뉴스를 탄 적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의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와는 큰 관련이 없는 슬라브계 국가입니다. 두 나라의 위치가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지금의 마케도니아 일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의 마케도니아의 북부지방에 해당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마케도니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와 더 관련이 깊을 거에요.
그래서 두 나라는 나라 이름을 두고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게 '마케도니아'라는 국명을 쓰지 말라고 하고, 마케도니아는 계속 쓰겠다고 하고. 마케도니아가 유고 연방을 탈퇴하고 새로 국명을 결정했던 1991년부터 2019년까지 거의 30년을 끌어어온 이 분쟁은 결국 마케도니아가 이름 앞에 '북'자를 붙여서 '북마케도니아 (North Macedonia)'로 국명을 바꾸는 선에서 어느 정도 합의를 본 거 같습니다. 여전히 명쾌하지는 않은 결말이네요.
마케도니아의 부상
그럼 북마케도니아가 괜히 남의 나라(?) 사람인 알렉산드로스의 나라를 통째로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는 역사 공정을 벌인건가 하면, 북마케도니아도 나름의 입장이 있습니다. 북마케도니아는 단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계라고 해서 마케도니아 전체가 그리스의 역사인 건 아니다, 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국가라는 공동체가 처음 형성될 때부터 이 지역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긴 했었죠.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2세기 무렵 도리스계의 마케데니 부족에 의해 성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여러 귀족들의 연합체 수준이었고 강력한 왕권이 존재하던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차지한 것은 해안 일부지역일뿐, 산간지역에는 여전히 일리리아 (Illyria)계 부족들이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죠. 마케도니아 왕은 자신을 추대한 귀족들의 눈치도 살펴야 하고 일리리아계 부족장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해야하니 아무래도 강력한 왕권을 갖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변화시킨 것은 기원전 413년 즉위한 아르켈라오스 (Archelaos) 왕이었습니다. 그는 성벽과 도로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확대하고, 기병 위주의 군대에 중장보병을 확충하면서 귀족 중심의 군대조직을 중앙집권화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리스 세계에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계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가장 미개한 나라 취급을 받고 있었죠. 그래서 아르켈라오스 왕은 아테네에서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들을 초청해 마케도니아의 그리스화를 꾀하기도 했습니다. 대략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마무리되어 가던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혁은 곧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아르켈라오스 왕은 암살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유독 암살 얘기가 많이 나오더라구요. 이렇게 마케도니아는 다시 그리스 세계의 변방으로 되돌아가나 싶었지만 얼마 안 가 더욱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그리스 세계의 판도를 바꿔놓게 됩니다. 그 강력한 지도자는 기원전 359년에 즉위한 필리포스 2세 (Philippos II)였습니다.
필리포스 2세는 우선 아르켈라오스 왕이 끝내지 못한 군제개혁을 마무리지으며 중장보병 부대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화한 병력으로 금이 풍부했던 트라키아 지역을 차지하면서 영토와 재정을 동시에 안정시켰죠. 이 떄 얻은 판가이온 금광의 막대한 금은 단순히 국가 재정을 부유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을 쥐락펴락하는 외교정책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죠.
아테네는 곧 마케도니아를 저지하고자 테바이와 연합군을 결정하고 선전포고를 했지만 카이로네이아 (Chaerone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며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세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파르타가 반발했습니다. 스파르타 역시 그리스 세계의 최강자이니 새로운 패권국의 등장을 순순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겠죠.
한편, 필리포스 2세는 외교에도 능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다른 주요 폴리스의 대표들을 코린토스 (Korinthos)로 불러들여 스파르타를 고립시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는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페르시아로부터 해방시키겠다며 페르시아 원정을 선언했죠. 하지만 이 원정은 그의 대에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필리포스 2세 역시 그의 반대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입니다.
마케도니아를 둘러싼 시선들
마케도니아가 갑자기 강성해지자, 그리스의 옛 패권국들은 이제 마케도니아를 보는 시선을 달리해야 했습니다. 이제 예전처럼 그리스 세계의 오지, 야만인에 가까운 나라로 취급할 수는 없었죠. 그리스 세계의 지식인들은 마케도니아를 두고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보였습니다.
아테네에서 연설가로 명성을 얻은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는 아직 다른 그리스인들이 마케도니아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시점에서부터 이들의 확장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재패하면 시민들의 자유를 억제하고 전제정치를 휘두를 것을 걱정했죠. 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비록 예전만은 못해도 아테네가 아직은 그리스의 최강국인 것에 만족했습니다. 마케도니아가 좀 성장했다고 해서 그들을 꺾어놓겠다며 또 다시 한판 전쟁을 벌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해질만도 했겠죠.
한편, 이소크라테스 (Isocrates)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합니다. 그는 그리스 세계가 옛날의 영광을 되찾고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패배를 되갚기 위해서는 모든 그리스인들이 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른바 '범(汎)그리스주의'였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마케도니아는 견제의 대상이 아닌, 화합을 이루어야 할 동지였습니다. 마케도니아를 두고 이렇게 상반된 입장이 존재했다는 것은 마케도니아가 비로소 그리스의 야만인이 아닌 그리스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이후의 전개를 보면 결국 결과는 이소크라테스가 주장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스파르타를 제외한 다른 폴리스이 모여 코린토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던 폴리스들도 잠잠해졌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데모스테네스가 우려한 상황도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동맹은 필리포스 2세의 필요에 의해서 결성된 것이었고 동맹국들은 모두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제 그리스 세계는 전쟁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란히 그의 손에 이끌려 페르시아로 진군하게 생겼습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즉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에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필리포스 2세는 이미 자신의 시대에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즉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테바이에 볼모로 붙잡혀 있어야했던 신세였으니 그의 통치기간 동안 마케도니아가 얼마나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죠.
뒤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ros III) 는 아버지로부터 뛰어난 통자자로서의 자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당대 최고의 학자를 스승으로 두기도 했구요.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두 사람의 정치 사상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긴 합니다. 정복활동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은 분명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그 부분을 제외하면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은 분명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입니다.
청년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 2세가 아테네와 테바이의 연합군을 상대로 벌인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미 이 때부터 그의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죠.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부자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필리포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 (Olympias) 왕비와 헤어지고 에우리디케 (Eurydice)라는 여성과 재혼을 하면서 다른 아들을 얻었거든요. 그 뒤로는 공공연히 그 아들이 필리포스 2세의 새로운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필리포스 2세가 딸의 결혼식에서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암살은 한 청년의 단독범행으로 밝혀졌지만 그 배후에 올림피아 왕비가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추측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의심스러운 점들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되었고 왕위는 성년이 된 알렉산드로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일단 즉위해보니 만만치 않은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군주가 없어지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모든 주변 세력들이 이때다 싶어서 마케도니아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죠. 필리포스 2세 시절에 금광을 빼앗긴 트라키아와 아직 산간지방에 남아있던 일리리아는 물론, 억지로 동맹으로 묶여있던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들, 그리고 직접적인 충돌에서 큰 타격을 입은 아테네와 테바이까지. 그리스 세계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모두를 힘으로 제압했습니다. 테살리아를 시작으로 테바이와 아테네를 굴복시킨 그는 필리포스 2세 사후 해체될 뻔한 동맹을 다시 소집하고 필리포스 2세의 정책을 계승할 것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그리스 내부가 모두 정리된 줄 알았는데... 옛날부터 늘 골칫거리였던 트라키아와 일리리아가 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눈치를 보던 아테네와 테바이 역시 다시 반기를 들었죠.
트라키아와 일리리아의 반란을 순식간에 정리한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속도로 테바이로 진격해 이번에는 테바이군을 진압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과거에 여러 번의 반란을 일으킨 테바이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테네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해 테바이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습니다. 사실 테바이의 반란에 군사력과 자금을 지원한 게 바로 아테네였는데 말이에요.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란을 선동한 주모자들만을 처벌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관용을 보였습니다. 이상하게도 마케도니아는 필리포스 2세 시절부터 아테네에만큼은 늘 관대했습니다. 늘 아테네에 대한 동경과 존중의 태도를 보여왔구요. 이렇게 반란이 정리되자 이제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필리포스 2세를 능가하는 새로운 지배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그리스 세계 전체를 손에 넣는 데에는 불과 1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반란을 진압하는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다른 폴리스들을 쥐락펴락하는 외교력 그리고 주변 세력을 다루는 결단력과 포용력 등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새로운 정복군주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였습니다.
동방 원정의 시작
알렉산드로스가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기로 한 이상 페르시아 원정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는 왜 굳이 페르시아로 원정을 떠나기로 했던 걸까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전체가 아직 전쟁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이죠.
원정의 이유는 앞서서 언급된 이소크라테스의 주장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인들이 단합해 다른 신들을 섬기는 페르시아를 징벌하고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복수를 해서 정의를 바로잡겠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대의명분 뒤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건 그리스에 폴리스들이 처음 생겨나면서부터 있어왔던, 그리스 세계의 숙명적인 문제였죠.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충분한 경작지, 즉 식량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리스 지역은 농사로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은 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산악지대와 평야, 그리고 해안 지형이 공존하는 이곳은 농사도 가능하고 어업도 되고 상업 교류도 용이한 그런 지역이었죠. 하지만 아시아의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에 비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필리포스 2세의 계획에 따르면 소아시아 일대를 차지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을 뻔한 동방원정이 알렉산드로스라는 희대의 정복자에 의해 무려 인도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긴 했지만요.
그렇다면 그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세계가 한번 노려볼 만한 나라였을까요? 이미 200년을 존속해오는 동안 페르시아는 왕위 다툼을 겪으며 왕실 내부가 조금은 불안정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다리우스 3세 (Darius III)는 옛날에 그리스 원정을 감행했던 다리우스 1세와 같은 대담한 군주는 아닌... 약간 애매한 지도자였구요. 그래도 페르시아는 여전히 황금이 넘쳐 흐르던 곳이었습니다. 아직도 소아시아와 시리아, 이집트 일대를 차지한 유일무이한 대제국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립니다.
페르시아 원정
앞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는 돈이 넘쳐나서 원정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334년 처음 원정을 나설 때 용병과 동맹국의 지원군을 포함해 끌어모은 병력이 3만5천 정도라고 하니, 적은 병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 당시 수십만, 수백만을 헤아리던 병력에 비하면 수적으로 한참 부족해 보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선 헬레스폰토스 (Helesponto)에 도착해 이 중 일부 병력만을 데리고 트로이로 건너갔습니다.
페르시아 쪽에서는 각 지방의 총독인 사트라프 (Satrap)들이 모아서 보낸 병력 4만명이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리스 출신의 명장 멤논 (Memnon)이 이끄는 그리스인 용병부대였습니다. 하지만 군대의 지휘권은 멤논이 아닌, 각 총독들이 거느린 페르시아 장군들에게 있었죠. 이게 문제였습니다.
멤논은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진입할 경로를 따라 후퇴하면서 마을을 초토화시켜 적군을 고립시키는 이른바 청야 전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적진 깊숙히 들어와 보급이 어려워진 이들이 버티지 못하고 물러가거나 자멸할 것이라는 주장이었죠. 하지만 사트라프들은 자신의 관할지역이 초토화되는 것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 정도로까지 치열하게 싸우지 않아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 같기도 합니다. 군대의 규모로만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니까요.
페르시아군은 사트라프들이 각자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체제로, 현재의 튀르키예 북서부를 흐르는 그라니코스 (Granicus) 강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백병전에서 일방적으로 패했죠. 알렉산드로스를 얕보지 않고, 멤논의 주장대로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이 전투는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한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얻은 첫번째 승리였습니다.
소아시아 진입에 성공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르디스 (Sardis)를 점령하고 에페수스 (Ephesus)와 밀레투스 (Miletus)를 거쳐 두번째 전투가 벌어질 할리카르나소스 (Halicarnassus) 에 도달했습니다.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 이 때까지 밀레투스에서의 작은 충돌을 제외하고는 전투도 없이 손쉽게 도시들을 손에 넣었죠. 하지만 페르시아의 무역중심지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멤논을 맞이해 힘겨운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할리카르나소스 전투는 공성전이었습니다. 전투 초반 알렉산드로스는 제대로 된 공성무기가 없었던 데다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 페르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명장 멤논의 항전으로 고전했습니다. 격렬한 공격을 퍼부어 성이 일부 무너져도 곧바로 다시 보수가 되었고 거기에 아테네에서 페르시아로 망명한 또 다른 그리스인 용병대장 에피알테스의 지원으로 전투는 더더욱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갈피를 갑지 못하던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공성 장비들이 준비되자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총력전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군사들이 전사했는데 그 중에는 지휘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죠. 알렉산드로스는 공성무기들을 동원한 격렬한 전투 끝에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4개월이 넘는 치열한 공성전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권에 있던 도시들을 차지했지만 그들의 자치권은 보장해주었습니다. 이오니아계 도시들에는 사트라프를 대신할 민주정을 수립하고, 페르시아 원주민들의 도시에서도 자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그들의 제도와 문화 등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 3세는 이제 전력을 다해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을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리카르나소스 전투에서 패해 가까스로 탈출한 멤논은 이번에는 마케도니아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마케도니아군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점령한 해안도시들을 통해 물자를 보급받고 있었는데 멤논은 이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멤논의 주장은 항상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멤논이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이 계획도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맞아할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병력의 규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다리우스 3세는 직접 60만명 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소스(Issus)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다리우스의 입장에서는 그 주변의 페니키아계 도시들을 단속하기 위해 이소스로 이동한 것이었지만 사실 이소스는 바다와 산으로 양 측면이 막힌 좁은 지형이라 페르시아의 대군이 소수의 마케도니아군을 상대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반대로 마케도니아군에게는 유리한 일이었죠.
두 군대는 결국 이소스에서 맞붙었습니다. 마케도니아군의 장창부대는 초반부터 페르시아군의 주력군에 돌진해 이들을 빠르게 격파했고 페르시아군은 당황하며 전의를 상실하고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마케도니아군은 알렉산드로스가 황금갑옷을 입고 최전선에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자 사기가 올라 파죽지세로 페르시아군을 몰아붙였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직접 페르시아군 속으로 파고들어 다리우스가 있던 후방까지 도달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는 호위병들이 그들을 막아서는 동안 겨우 도주해 다마스쿠스 (Damascus)로 물러났습니다. 마케도니아군은 비록 다리우스를 놓치긴 했지만 황후를 비롯한 황실가족 대부분을 사로잡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인질 석방의 대가로 마케도니아군이 정복한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해주겠다고 했지만 이미 페르시아 전체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제안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후 다리우스를 더 추격하지 않고 남쪽으로 진격해 다리우스가 걱정했던 대로 시리아 연안의 페니키아계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했습니다. 페르시아 해군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죠. 그리고 더 남하해 이집트로 진입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는 마케도니아군을 환영하면서 알렉산드로스를 파라오로 추대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이집트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나일강 하류에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죠. 이후로도 그는 정복한 지역에 30개가 넘는 새로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지만 이 알렉산드리아는 지금도 카이로에 이어 이집트 제 2의 도시로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여유있게 이소스 주변지역을 정리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페르시아 내륙으로 도망간 다리우스와의 최후의 일전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진군했고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질 곳은 평야가 넓게 펼쳐진 가우가멜라 (Gaugamela)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넓게 펼져진 가우가멜라 평야 지형을 활용해 전차 부대가 마케도니아군을 타격하고나면 기병이 남은 적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군은 전차의 방향 전환이 쉽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달려오는 전차들이 그냥 통과해버리도록 전열의 간격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의 좌우익을 벌려 고립시키고 그 사이로 중앙부대가 파고들어 후방의 다리우스에게로 진격했습니다.
마케도니아군에게 중앙이 뚫리자 다리우스는 다시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렇게 탈출에는 성공하지만 이미 전투는 마케도니아의 승리로 결정된 상태였고 페르시아는 이 결정적인 패배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Babylon) 과 수사 (Susa),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 등 페르시아의 주요도시들을 점령해나가며 마침내 거대한 제국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페르시아를 손에 넣고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마케도니아는 원정을 계속하기 위한 전쟁자금을 마련하느라 허덕거리지 않아도 됐죠. 필리포스 2세의 사후 약 1300 탈렌트의 적자로 시작했던 마케도니아의 재정은 18만 탈렌트로 불어났고 페르시아 본국과 식민지의 엄청난 물자가 그리스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침체되었던 그리스의 경제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우스 3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두번째 탈출 이후 몽진길에 오른 다리우스는 이제 모든 실권을 상실하고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소스 (Bessus)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알렉산드로스는 베소스를 처형하고 다리우스의 장례를 치뤄주었습니다. 수차례 전투를 치뤘던 적의 수장이었지만 앞으로 페르시아 지역의 주민들을 통치하는 데에도 그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죠.
기원전 329년 페르시아 전역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엑바타나 (Ecbatana)에서 원정이 완료되었음을 선언하고 원정군을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복의 끝은 아니었죠. 이후 방대한 영토를 손에 넣은 알렉산드로스는 지금까지의 통치체제로는 이 커다란 제국을 다스릴 수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점령지를 빠르게 안정시키는 새로운 과제가 남겨졌습니다.
우선 그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시행한 사트라프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페르시아인 사트라프가 행정관으로서 자신의 관할지를 관리하는 것이었죠. 물론 군사와 재정 등 통치에 핵심적인 요소는 그리스인이 담당하게 했지만요. 또한 페르시아 원주민들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그리스인들과의 적극적인 통혼정책도 추진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페르시아의 궁정에서는 그들의 방식대로 의전을 시행했습니다. 일부 그리스인들은 전제군주를 과도하게(?) 신성시하는 동방군주제 특유의 궁정의례가 그리스의 신들을 모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군주를 알현할 때 엎드려 절하는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에는 큰 거부감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적절한 선에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쪽의 문화를 조화시키는 정책들을 시행했습니다.
한편, 갑작스럽게 나라의 덩치가 커지면서 페르시아의 귀족들이 마케도니아의 지배계층으로 유입되고 이에 대해 기존의 마케도니아의 기득권층이 불만을 갖는 일이 벌어지자 곳곳에서 위태로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를 노린 암살 시도도 있었구요. 그는 일련의 숙청을 단행해 측근을 정비하고 급격히 확대된 군대조직을 개혁해 군대에 대한 귀족의 장악력을 견제했습니다. 이렇게 내부를 단속한 그가 다음으로 눈을 돌린 곳은 서구의 문명이 도달한 적 없었던 또 다른 문명, 인도였습니다.
인도 원정
새로운 원정에 앞서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놓였던 박트리아 (Bactria)와 소그디아 (Sogdia)를 평정하고 그곳에서 결혼도 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그리스인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다민족 군대를 결성했습니다. 그 중 일부는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세계를 평정하던 시기부터 함께해온 병사들도 있었죠. 하지만 끝없는 전쟁이 계속되자 이에 지쳐 이제 원정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인도 원정은 세계 정복을 위해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샤한샤를 능가하는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가 가졌던 영토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정복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인도가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마지막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위로 히말라야를 지나면 또다른 강력한 동방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나봐요.
기원전 327년 마침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박트리아를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카불 (Kabul) 강을 따라 몇 번의 전투를 치르며 동진하다가 인더스 (Indus) 강을 건너 지금의 파키스탄 지방인 히다스페스 (Hydaspes) 강에 이르렀죠. 그곳은 포루스 (Porus) 왕이 통치하는 파우라바 (Paurava) 왕국이 인접한 곳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인더스 강과 히다스페스 강 주변의 다른 작은 왕국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대부분 파우라바 왕국과 대치 중인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탁실라 (Taxila) 왕국은 적극적으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히다스페스 강 서안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최대한 수월하게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했지만 지형이 익숙지 않은 데에다가 계절 또한 강한 호우가 계속되는 우기였기 때문에 대규모의 군대가 물살이 거센 강을 건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강 건너편에서는 포루스 왕의 잘 훈련된 군대가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너기 위해 갖가지 속임수를 동원했습니다. 일부러 강 앞에 오래동안 주둔할 것처럼 행동해서 이들의 감시를 느슨하게 하는 한편, 계속해서 강 주변을 살피며 도강에 적합한 곳을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강을 건너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물살이 거센 강을 건너면서 일부 병력을 잃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자 그들은 포루스의 군대를 상대로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탁실라로부터 파우라바의 200마리가 넘는 코끼리부대 얘기를 들었던 알렉산드로스는 궁병을 동원해 코끼리를 모는 기수들을 재빨리 제거하고 코끼리가 포루스 군대의 대열 안에서 날뛰도록 했습니다. 포루스가 준비한 전차들 역시 이미 페르시아군의 전차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게는 무용지물이었죠. 포루스는 이들을 맞이해 용맹하게 싸웠지만 결국 마케도니아군에 사로잡혔습니다.
비록 적군에게 붙잡히긴 했지만 포루스는 여전히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군이 돌격하자 당황하다 도망친 다리우스 3세와 비교되는 모습이었죠.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파우라바 왕국을 정복하지 않고 그들의 영토를 보장해주는 관용을 베풀기로 했습니다. 다만 동맹을 맺어 앞으로의 인도 원정을 지원하는 조건으로요.
위대한 정복자의 최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가 오늘날 아대륙으로 불리울만큼 거대한 지역임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인도 원정을 결정한 것도 인도의 일부인 펀자브 지방이 페르시아의 속주였으니 거기까지는 정복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일테니까요. 하지만 펀자브 지방은 인도 전체에서 서북부 일부에만 해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로서는 인도 전체가 박트리아나 소그디아 정도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에서 동지가 된 포루스는 인도 정복을 꿈꾸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놀라운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지금 이들이 머무르고 있는 파우라바 왕국을 출발하면 12일 정도 사막길이 이어지고 그 사막을 건너면 엄청나게 넓은 강이 나타나는데 이 강을 또 건너면 거대한 제국이 나타난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마도 포루스가 말한 사막과 강은 타르 사막 (Thar) 과 갠지스 (Ganges) 강일 것입니다. 그 거대한 제국은 잠시 간 인도 북동부를 차지했던 난다 (Nanda) 제국이구요.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이자 새로운 정복지였을지 모르지만, 그의 병사들에게는 아연실색할만한 얘기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진군을 결정했지만 이제 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회군을 청했습니다. 병사들 뿐만아니라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지휘관들마저도 더 이상의 원정은 무모하다며 반대했죠. 신에게 신탁을 청해도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군대 없이 혼자서 원정을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결국 그는 군대를 돌려 수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회군을 결정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정복은 성공적이었고, 전리품도 충분히 챙겼으니 수사까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았지만 그들의 귀향길에는 험난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정한 길은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인더스 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는 길 곳곳에 행군을 방해하는 원주민 부족들의 공격이 이어졌고 이제 지쳐서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게 이들은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가까스로 인더스 강 하류에 도착한 군대는 또 다시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파키스탄 남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막 지형에 들어서자 극한의 무더위와 모래바람이 이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져온 물과 식량이 바닥나자 갈증과 허기에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수사에 도착한 병력은 처음 출발했을 때의 4 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죽음의 회군길에서 겨우 수사에 도착한 이듬해, 지금까지 정복한 정복지역들을 잇는 항로를 개척하고 서방 원정을 떠나겠다는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며 바빌론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술자리에서의 과음 이후 의문의 열병에 시달리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지난 업적을 더듬어본다면 중년이 넘는 나이가 되었을 듯한데 그는 아직도 서른 세 살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짧은 전성기, 그 후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그가 이룩한 거대한 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원정 전에 결혼한 박트리아의 공주 록사나 (Roxana) 왕비와의 사이에서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 (Alexandros IV)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는 그가 적법한 계승자로서 왕위를 이었습니다. 단, 당시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삼촌인 필리포스 3세 (Philippos III) 와 함께 공동으로 즉위했죠. 하지만 이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에 의해서 제국은 사분오열됩니다.
페르시아가 사라진 곳은 3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어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디아도코이 (Diadochoi)라는 이들이 차지했습니다. 디아도코이는 ‘계승자’라는 의미로 알렉산드로스를 계승한 그의 측근들을 의미합니다. 디아도코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생전에는 서로 충성 경쟁을 벌이다가 그가 사망하자 곧 각자 왕조를 수립하고 대놓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는 안티파트로스 왕조 (Antipaterian dynasty) 의 마케도니아가 수립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 (Seleucus dynasty) 의 시리아가,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Ptolemaic dynasty)가 들어섰습니다. 한편, 마케도니아군이 물러난 뒤의 인도에는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 (Maurya) 제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하려고 했던 인도의 난다 제국도 이 마우리아 왕조에 의해 멸망했죠.
뿐만 아니라 이 왕국들의 수명이 다한 뒤에는 그곳에 자리잡은 그리스인들과 원주민들로 구성된 또 다른 작은 왕국들이 뒤이어 등장합니다. 이후 로마에 의해 지중해 세계가 통일되기 전까지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왕들이 등장했다 사라졌습니다. 이 왕국들을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헬리니즘이라는 용어 자체는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인 요한 드로이젠 (Johann Gustav Bernhard Droysen) 이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는 이 용어를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비그리스 지역의 그리스화'라는 관점에서 사용했죠. 다분히 서구적인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용어이지만 정작 알렉산드로스의 시대까지도 문화의 중심은 여전히 오리엔트, 동방이었습니다. 단지 용어가 그렇게 정착되었을 뿐... 일례로 알렉산드로스 사후 성립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제정치를 확립하며 마지막 중흥기를 이루었는데, 이를 두고 그리스화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따라서 알렉산드로스는 비그리스 지역을 그리스화한 인물로 보기보다는 동,서 문화의 화합을 도모한 지도자로 보는 것이 더 맞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페르시아 정복 이후 오리엔트의 전제군주식 의례를 도입하고 페르시아 귀족들을 중용하며 페르시아인들과의 적극적인 혼인장려정책을 펴 피정복민들을 포용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식 폴리스들을 건설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죠.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로는 훗날 동서양의 교역로가 되었으며, 오리엔트의 학문과 예술이 그리스 세계로 전례되며 스토아 학파 (Stoicism) , 에피쿠로스 학파 (Epicureanism), 견유학파 (Cynicism), 키레네 학파 (Cyrenaics) 등이 등장했습니다. 과학에 있어서도 그리스의 수학과 동방의 천문학이 동시에 채택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Ptolemy)의 천동설, 유클리드 (Euclid) 의 기하학, 아르키메데스 (Archimedes) 의 부력의 원리 등도 모두 헬레니즘 시대가 이룩한 성과였습니다.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와 페르시아 제국은 양쪽 모두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정작 그 두 문명의 유산은 헬레니즘 문명을 통해 새롭게 부활했다고 볼 수 있을거 같네요. 시작은 마케도니아였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제국은 그보다 훨씬 거대한 새로운 무언가였습니다.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화정 시대의 로마 (0) | 2024.02.03 |
---|---|
로마! (0) | 2024.02.03 |
그리스 철학의 탄생 (0) | 2024.01.30 |
공멸을 가져온 펠로폰네소스 전쟁 (0) | 2024.01.29 |
동서양의 첫번째 대결, 페르시아 전쟁 (0) | 2024.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