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움 지역의 작은 촌락에서 시작한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동안, 나라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변 부족들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자 이 전쟁에 동원되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꾸준히 지위를 향상시켜온 것이었죠. 그렇게 로마는 외형적으로만 커졌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으로도 점차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치체제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결과는 공화정의 수립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평민권의 확대과정
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후 왕이 가졌던 권력은 누가 갖게 되었을까요? 왕을 쫒아낸 귀족들이 나눠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로마가 건국되던 시기 때부터 권력을 갖고 있었던 유력 가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귀족들은 파트리키 (Patricii) 라고도 불리웁니다. 이들은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권한을 독점했고 그렇게 결정된 정책들은 당연히 귀족들에게 유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자 권력에서 소외당한 평민들은 이에 불만을 갖고 자신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서 파트리키, 즉 귀족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플레브스 (Prebs)라고도 불리웁니다. 로마의 공화정 시기는 이들 플레브스가 파트리키를 상대로 자신들의 권한을 확대시키려는 노력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던 때였습니다.
사실, 로마가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해서 전쟁을 해오지 않고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더라면 평민들이 과연 자신들의 권리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로마의 군대는 평민 신분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군대에는 병사뿐만 아니라 지휘관도 필요하지만 군인의 대다수는 병사들일테니까요. 이들은 평상시에는 농민으로서 농사를 짓다가 소집령이 내려지면 각자 자신의 무기를 챙겨와서 전투에 투입되는 거였죠. 따라서 이들이 없다면 로마군도 없는 거였습니다. 로마군이 없다면 로마도 존재할 수 없구요.
귀족들을 향한 불만이 쌓여가는 와중에 로마에는 자신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은 평민들은 기원전 494년 처음으로 총파업을 결의했습니다. 평민들 모두가 자신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성스러운 산이라는 의미의 몬스 사케르 (Mons Sarcer) 언덕에 모인 것이죠. 이들은 이곳에서 호민관 (Tribunus plebis) 이라는 직책을 만들고 두 명을 선출해 새로운 임시정부를 꾸렸습니다. 이를 성산사건이라고 합니다.
성산사건은 이후로도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병농일치 사회인 로마에서 파업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직업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도 중단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당장 삼니움족과 에트루리아, 켈트족이 호시탐탐 로마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군대 파업이라뇨. 나라가 없어지면 귀족들의 모든 특권들도 사라질텐데 신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래서 약자에게 연대는 가장 중요한 무기인가 봅니다.
첫번째 성산사건으로 평민들은 두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평민회 (Concilium plebis)입니다. 귀족들이 자신들만의 협의체를 지닌 것처럼 평민들도 이제는 평민회를 구성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안건들을 스스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죠. 또 한가지 중요한 소득은 평민들이 선출한 호민관을 로마의 정식 관직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선출된 호민관은 평민들의 귄익을 대변하기 위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권한 또한 막강해서 귀족 출신의 집정관이나 원로원에서 내려진 결정을 거부할 수 있었죠.
한편, 로마에서는 당시까지 성문법이 없었기 때문에 평민들이 재판에서 부당한 편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관습과 전통에 의해 형성된 관습법을 기준으로 귀족 신분인 재판관에 의해 판결이 내려졌죠. 그러다 보니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갈등이 생길 때면 평민에게 불리한 판결이 내려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두번째 성산사건은 이렇게 모호하고 자의적인 관습법의 적용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기원전 450년 평민들은 다시 한 번 성산으로 모여 관습법이라는 모호한 편결기준 대신 성문법을 재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다시 총파업이 벌어지자 이번에도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해서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 (Leges duodecim tabularum)이 제정되었습니다. 12표법은 동판에 새겨져서 광장에 게시되었고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이 법 조항들을 암기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귀족과 평민간의 형평성도 크게 개선될 수 있었습니다.
12표법 이후에도 로마에서는 평민의 권한을 확대시키는 법들이 계속 제정되었습니다. 기원전 367년에는 호민관인 리키니우스 (Gaius Licinius Stolo)가 제안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Leges Liciniae Sextiae)이 제정되었죠. 이 법에서는 귀족들이 토지를 무한정 확대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 한 사람이 쇼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정해두었습니다. 이미 귀족들은 그 토지상한선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정복활동을 통해 새롭게 획득한 토지는 주로 평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죠. 한편, 이 법에서는 두 명의 집정관 중 한명은 평민 중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조항도 있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이제 귀족들만 독점하던 관직에 평민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287년, 집정관이 로마군을 이끌고 사비니족을 정벌하며 새롭게 획득한 토지를 평민들에게는 분배하지 않자 이에 불만을 가진 평민들이 다시 한 번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파업은 집정관이 원정을 나간 사이에 독재관이 된 호르텐시우스 (Quintus Hortensius)에 의해 종결되었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호르텐시우스법 (Lex Hortensia)을 제정시켰습니다. 이제 평민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원로원에서 반대할 수 없도록 한 것이었죠. 평민회의 결정사항은 곧 법이 되어 시행되는 것이니 이 법의 효력이 얼마나 막강할지 충분히 예상되죠? 이 법을 계기로 로마에서는 이제 평민 중에서도 부와 권력을 모두 갖춘 새로운 계층인 노빌레스 (Nobiles)가 형성됩니다.
물론 로마의 평민 계층이 늘 단합된 모습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승리 뒤에 벌어지는 논공행상에서는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불만은 새로운 분열을 낳죠. 평민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발생했을 거고 귀족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보호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모습들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폭동이나 내전을 겪지 않고,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해온 데에는 같은 평민들 사이의 연대의식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 또한 현재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는 부분인 거 같아요.
로마를 이끄는 사람들: 정무관
평민들의 투쟁을 통해 서서히 완성되어간 로마의 공화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평민회의 막강한 권한을 생각하면 민주정 같기도 하고, 로마의 탄생부터 줄곧 존재해온 원로원을 보면 귀족정 같기도 한데, 또 집정관이나 독재관 같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관직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들이 왕은 아니지만 왕정과 비슷한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로마의 공화정은 이 모든 정치체제들이 합쳐진 것 같은, 복잡하면서도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정치체제 같습니다.
로마의 공화정 체제는 크게 보면 정무관 (Magistratus)과 민회 (Comitia), 그리고 원로원 (Senatus)이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세워졌습니다. 세 개라는 점 때문에 자연스럽게 삼권분립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딱히 입법, 사법, 행정이 체계적으로 분리된 체제는 아니었습니다. 우선 로마의 정무관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장관들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임기가 정해진 관직이구요.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대부분 복수의 인사로 채워졌죠.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집정관은 두 명이었고 1년을 임기로 활동했습니다.
그 밖에도 사법부 역할을 하는 법무관 (Praetor), 도로나 수도 등 인프라를 관리하고 각종 국가행사의 진행을 맡는 조영관 (Aedilis), 재무와 회계를 관리하는 재무관 (Quaestor), 공중도덕을 관리, 감찰하고 인구조사를 주관하는 감찰관 (Censor) 등이 있었구요. 평민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호민관 (Tribunus plebis)도 정무관에 속했습니다. 다른 정무관들과는 다르게 평민 출신만 투표를 하고, 선출될 수 있었다는 점이 좀 특이하죠. 각 정무관들의 수와 임기는 시대에 따라 변했는데, 호민관은 나중에 10명까지도 늘어났다고 하네요.
그 외에 좀 특이한 정무관으로는 독재관 (Dictator)이 있습니다. 외적의 침입이 발생하거나, 성산사건이 벌어지거나, 자연재해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등의 특수한 상황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여러 명의 정무관들이 의논해서 대응하는 것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절차가 번거로울 수 있겠죠. 그럴 때에는 집정관 중 한 명이 그 사안에 한해서 전권을 위임받은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사태 해결에 나섰습니다. 다만 모든 권한을 독점하는 막강한 권위를 갖는 관직이라 특수한 상황에서만 임명되었고 임기도 6개월로 매우 짧았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의 대표: 민회
한편, 로마에는 4개의 민회가 있어서 법을 제정하고 중요한 재판을 담당했습니다. 각각의 민회는 생겨난 시기와 역할이 다 달랐고 구성 방식도 제각각이었죠. 로마에서 제일 처음 생겨난 민회는 쿠리아 민회 (Comitia curiata)였습니다. 로마가 아직 작은 촌락이었던 시절, 로마는 3개의 트리부스 (Tribus) 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각 트리부스의 하위에는 10개의 쿠리아 (Curis), 그리고 각 쿠리아의 하위에는 10개 겐스 (Gens)가 있었죠. 이들은 씨족을 기준으로 구성된 단위었습니다. 쿠리아 민회는 이 중 각 쿠리아의 귀족 대표들을 모아 구성한 협의체였습니다. 3개의 트리부스 안에 10개의 쿠리아가 있었으니 쿠리아 민회에는 총 30명의 대표가 모여있었죠.
이들은 왕정 시기에는 왕의 지배를 받느라 그렇게 강력한 권한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밥안을 마련하고 수정하는 권한은 없었고 왕의 조언자로서 국정에 조언을 하거나 찬성 또는 반대를 표시하는 정도의 권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공화정 시기에 들어와서는 정무관들을 선출하고 법을 제정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이것도 잠시, 평민들의 권리 신장과 함께 평민들이 포함된 다른 민회들이 구성되면서 쿠리아 민회는 그냥 지역 대표들끼리의 종교행사 정도로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로마가 촌락 수준을 벗어나서 세력을 확대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자 쿠리아 민회의 구성단위였던 씨족 구분은 점차 의미가 옅어졌습니다. 대신 로마가 성장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로마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회가 탄생했죠. 로마군의 편제를 바탕으로 구성된 켄투리아 민회 (Comitia centuriata)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군은 100명의 병사로 구성된 켄투리아 (Centuria)를 기본단위로 편성되었습니다. 로마 시대를 다루는 영화나 미드에 흔히 나오는 백인대장이 이 켄투리아의 우두머리였죠.
그럼 하나의 켄투리아는 어떻게 구성될까요? 로마는 군대를 구성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정무관들 중에서 감찰관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인구조사였죠. 이 때 조사된 각 가정의 경제수준에 따라서 병사의 병과가 결정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자신이 스스로 병장기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병사는 말과 마구를 준비할 수 있는 기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경제적 여유가 없는 병사는 자신의 갑옷과 무기 정도만 준비해도 되는 보병이 되었죠. 병장기를 전혀 마련할 수 없다면 군대에 입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하나의 켄투리아 안에는 비슷한 경제적 수준의 병사들이 모여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의 안건을 두고 먼저 켄투리아 내에서 협의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고, 각 켄투리아의 백인대장들이 모여 각각 자신들의 켄투리아에서 내린 결론대로 또 표결을 했습니다. 백인대장을 대표로 하는 대의제였던 셈이죠.
켄투리아 민회는 기존의 쿠리아 민회가 평민 출신인 병사들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을 보완하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평민들은 병사로 복무하면서 로마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에 큰 공로가 있는데,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귀족들끼리만 모여서 결정하니 당연히 불만이 생길 수 밖에요. 초반에는 이들의 권한도 주로 군사 부문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되었지만 로마가 점차 확대되는 과정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자 켄투리아 민회의 권한도 점진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켄투리아 민회의 역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무관 임명과 법안 표결이었습니다. 각 정무관의 임기가 끝나면 켄투리아 민회에서 협의를 거쳐 다음 정무관을 임명했죠. 법안 표결의 경우에는 켄투리아 민회가 독자적으로 모든 법안에 표결한 대로 법이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로원과의 협의를 거져 법 제정에 중요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한편, 사형 등의 무거운 형벌이 걸린 중범죄 판결에도 관여하기도 했구요. 전쟁을 개시하거나 종결할 것을 결정하는 일도 했습니다.
한편, 기원전 494년 평민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자 파업을 선언하고 모두 성산에 모였던 일이 있었죠? 군대의 파업에 깜짝 놀란 귀족들이 평민들을 달래면서 파업은 종결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힘을 확인한 평민들은 이제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거나 요구사항들을 결정하고자 새로운 민회를 만들었습니다. 평민들만 참여하는 민회인 평민회 (Concilium plebis)였습니다.
평민회는 초기에는 쿠리아 민회의 구성단위였던 쿠리아 별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귀족 출신인 쿠리아의 대표가 쿠리아와 평민회 양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민회는 아예 구성단위를 부족 단위로 바꾸어 쿠리아로부터 독립을 꾀했습니다.
평민회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호민관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호민관도 로마의 정무관 중 하나였지만 호민관만큼은 켄투리아 민회가 아닌 평민회에서 선출되었죠. 그리고 그렇게 선출되어서 활동하는 호민관들은 평민회에서 구성원들의 의견을 듣고 평민의 권익과 관련된 법안을 마련하거나 귀족들에게 대항해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때 평민들에게 지지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평민회의 권한은 마지막으로 일어난 성산사건을 계기로 가장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호민관 출신으로 성산사건의 수습을 위해 독재관으로 임명된 호르텐시우스가 귀족과 평민 간의 중재를 이끄는 과정에서 호르텐시우스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이 법에 의하면 이제 평민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원로원에서도 뒤집을 수 없었죠. 이론적으로는 평민들이 정한 법이 시행하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평민회는 공화정 체제 동안 평민들이 자신들을 자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화정의 수명이 다해가면서 독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평민회의 권한도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훗날 내전을 통해 권력을 손에 넣고 공포정치를 휘두르던 술라의 통치기를 시작으로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던 평민회는 아우구스투스 시기에는 그의 법안에 찬성을 표하는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했다가 다음 황제인 티베리우스 때에는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족과 평민이 함께 참여하던 트리부스 민회 (Comitia tributa)도 있었습니다. 귀족 출신의 쿠리아 대표들로 이루어진 쿠리아 민회나 평민들만으로 이루어진 평민회와는 달리 트리부스 민회에는 귀족과 평민이 모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평민회에서 정해진 법안은 평민에게 적용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트리부스 민회에서 정해지는 법안은 로마 시민 전체에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트리부스 민회는 지역을 기준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정 시대에는 보통 같은 부족인 사람들끼리 한 지역에 모여사는 것이 일반적이다보니 부족을 기준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도시 지역, 교외지역 등의 트리부스로 나뉘었다가 로마가 정복전쟁으로 새로운 영토와 피정복민들을 얻게 되면 새로운 트리부스가 생겨나기도 했죠.
트리부스 민회에서는 보통 군대의 중간 계급의 장교들이나 사제들, 중하급 관리들을 임명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밖에 정무관들이 낸 법안에 관해 결의안을 낼 수 있었구요. 외국과의 전쟁에 선전포고를 하거나 강화조약을 체결할 권한도 있었습니다. 관리들이 로마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했을 경우 이에 대한 재판 즉 일종의 행정소송을 맡아 판결을 내리기도 했죠.
트리부스 민회 역시 다른 민회들처럼 공화정의 쇠퇴와 함께 점차 권한을 상실했습니다. 공화정의 마지막, 카이사르의 집권기에는 선전포고와 강화조약 체결 권한을 빼앗겼구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법안에 결의안을 제출하던 권한도 내어주게 됩니다. 그러다 그나마 남아있던 관리 임명에 대한 권한도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는 상실했죠. 트리부스 민회라는 이름은 그 뒤로도 계속 존속하긴 했습니다만, 이미 그 때는 예전의 실질적인 기능은 모두 상실하고 정말 이름만 남은 기구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상징: 원로원
Se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의미로, 로마인들이 로마 공화정을 스스로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만 보아도 원로원이 로마 공화정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알 거 같아요. 로마군 즉 로마 시민이 로마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원로원은 로마를 상징하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정무관이나 민회가 일정 기간 동안만 기능했던 것과는 달리 원로원은 로마와 함께 탄생한 이래로 서로마가 멸망한 뒤 비잔티움 제국으로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원로원의 역할은 정무관들이 국정을 돌보는 데에 조언을 하는 것입니다. 조언자들의 모임이죠.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이 가졌던 영향력은 로마 공화정 시기의 그 누구보다도 막강했습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이 논의를 거쳐 집정관에게 권고를 전달하면, 집정관은 그 권고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했죠. 말 그대로 권고일 뿐인데 집정관은 왜 이를 받아들이기만 했던 걸까요?
국정을 총괄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집정관이 원로원의 권고사항을 대부분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집정관 역시 임기가 끝난 뒤에는 원로원 의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임기 1년에 불과한 집정관으로서는 자신의 임기 동안 미래의 직장 선배, 동료들이 될 원로원 의원들과 굳이 대립각을 세워야 할 이유가 없겠죠. 애초에 기득권층인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 크게 의견이 달라서 대립할 만한 사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평민들이라면 좀 입장이 다를까요? 실제로 호르텐시우스 법을 통해 원로원이 더 이상 평민회의 결정이 원로원에 의해 번복될 수 없게된 것을 보면, 그 전까지는 평민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원로원에 의해 번번히 좌절되는 일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민들이 귀족들을 향해 늘 투쟁적인 태도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는 왕정 초기부터 이미 귀족과 평민 사이에 일종의 후견인 제도인 클리엔텔라 (Clientela)라는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클리엔텔라 제도 안에서 귀족 후견인인 파트로누스 (Patronus)는 평민인 자신의 피후견인 클리엔테스 (Clientes)를 법적,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반대로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누스에게 충성 의무는 다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는 법적으로 정해진 제도라기보다는 신뢰 관계에 기반한 관습에 더 가까운 거였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사회에서 클리엔텔라는 매우 중요한 시스템이었습니다. 따라서 클리엔테스인 평민들에게는 무조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에 나서는 방법말고도, 자신의 파트로누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었던 입니다.
결과적으로 원로원은 표면적으로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 모두를 포용하는 존재였죠. 귀족들을 위한 사안들은 물론이고 평민들의 권익을 위한 사안들도 그들의 파트로누스들을 통해 결국은 원로원으로 모여 논의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 시대 내내 존속해온 가장 권위있는 기관인 원로원이 결코 귀족들만을 위해 존재했다고 볼 수는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