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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로마와 카르타고

큼직큼직한 나라들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프리카 북부를 보면 북쪽 해안선의 거의 중간 쯤에 조금 작은 나라가 눈에 띄는데요. 튀니지입니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과 매우 가깝구요. 그래서인지 구글에서 사진을 검색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분명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인데 말이에요.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에서 좀 더 동쪽 해안가로 가면 소도시 카르타고가 있습니다. 지금은 인구 2만5천의 작은 도시가 되었지만 이 카르타고는 한 때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다시피한 강력한 고대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가 이제 막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바다로 눈을 돌렸을 때 이미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일대와 시칠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큰 섬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토를 지닌 나라였습니다. 

 

카르타고의 안토니누스 황제 목욕탕 유적지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 남아있는 카르타고 유적지입니다. 고대 카르타고 시대의 유적지는 아니구요.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난 뒤, 로마의 속주 시절의 유적지이죠. 안토니누스 황제의 목욕탕 시설이라고 하네요.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

 


전설 속의 악연: 디도와 아이네이아스

 
로마의 건국신화 기억하시나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등장하기 한참 전,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유랑길에 올라 이탈리아 반도까지 오게 된 아이네이아스 얘기가 있었죠. 처음 카르타고를 세운 디도 여왕의 전설에도 그 아이네이아스가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로마와 카르타고는 이미 포에니 전쟁을 치르기 한참 전부터 서로 얽히게 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전설에 따르면, 디도 여왕은 원래 페니키아의 번성한 도시 티레의 공주였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죽고나서 오빠와 함께 공동왕위에 올랐는데, 오빠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며 그녀를 위협하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디도 여왕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정착할만한 땅을 조금 떼어줄 것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주민들의 왕은 디도 여왕에게 소가죽 한 장만큼의 땅을 떼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봤자 한 평도 안되는 땅일텐데 말이에요. 그러자 디도 여왕은 소가죽을 길게 잘라 가늘고 긴 끈을 만들고 그 끈으로 둘러싼 만큼의 땅을 내어달라고 했죠.  이미 했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던 원주민들의 왕은 디도 여왕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디도 여왕은 결국 이렇게 얻어낸 땅에 새로운 도시, 카르타고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세상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아이네이아스가 번성한 도시 카르타고에 닿았습니다. 남편이 오빠에게 죽음을 당한 뒤 계속 혼자였던 디도 여왕은 곧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고, 그에게 카르타고에 정착해 자신과 혼인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리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는 신들의 명령을 받은 아이네이아스는 결국 디도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버렸습니다. 실의에 빠진 디도 여왕은 "당신의 후손과 나의 후손은 적이 되어 싸우게 될 것이다." 라는 저주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죠.
 
위의 얘기는 전설이구요. 실제로 카르타고가 세워진 건 로마보다 조금 앞선 기원전 9세기 또는 8세기 정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트로이 전쟁은 그보다 한참 전 얘기이니 시간상 오차가 좀 크네요. 하지만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의 도시 티레에서 온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역시 인구가 늘어나고 이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이 부족한 이유로 모시 (母市)를 떠나오게 된 것이었죠.
 
그런데 오리엔트 지방에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성장하면서 동지중해 해안에 있던 페니키아의 원래 도시들이 모두 멸망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332년에는 카르타고의 모시인 티레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했죠. 그러자 이제는 카르타고가 페니키아 식민지들의 중심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지중해의 가운데 쯤에 위치한 덕분에 동부와 서부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거점으로 크게 성장한 데에다가 페니키아 식민지들의 대장이 된 카르타고는 어느새 거대한 해상패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서부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될 즈음의 지중해 세계는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동부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세워진 디아도코이들의 왕국인 이집트와 마케도니아, 시리아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로마는 자연스럽게 서부로 확장하기로 합니다. 로마가 서부로 진출하면서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세력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큰 섬들, 이베리아 반도까지 넓은 세력권을 가진 카르타고였죠. 물론 시칠리아 일부와 몇몇 그리스계 식민시들은 아직까지 카르타고에도 로마에도 속하지 않은 채 남아있기도 했습니다.

사실 로마는 기원전 508년 카르타고와 우호조약을 맺고 이후 200여 년 동안 계속 조약을 갱신하며 우호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조약의 내용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지중해 서부로는 진출하지 않는 대신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사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이 조약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할 때까지는 잘 지켜졌습니다. 로마는 당장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에트루리아나 삼니움족, 켈트족을 상대하느라 바빴고, 카르타고 역시 드넓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두고 굳이 상황이 복잡한 이탈리아 반도 내로 비집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로마의 세력이 더 이상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 마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조약은 위태로워졌습니다. 로마는 영토 확장을 위해 반드시 지중해 서부로 진출해야했죠. 이제 카르타고와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디도 여왕의 오랜 저주가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두 세력이 부딪힐만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지도를 보면 한눈에 봐도 여기다 싶은 곳이 있습니다.  마치 이탈리아 반도에서 북아프리카 중앙을 향해 놓인 징검다리 같은 섬, 시칠리아였죠. 
 
전쟁이 일어나는 데에는 수많은 시나리오가 있겠지만 가장 흔한 유형 중 하나는 작은 나라들끼리의 다툼에 큰 나라들이 군대를 파병하면서 전쟁의 판이 갑자기 확대되는, 그런 시나리오인 거 같습니다.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이었던 시라쿠사와 메사나 사이의 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원전 271년, 시라쿠사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갑자기 세력을 일으킨 라틴인 용병 무리가 다른 도시국가인 메사나를 차지하자 시라쿠사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메사나를 포위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이 용병 무리들은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죠.  
 
카르타고는 이들의 요청을 수락해 함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냥 지원군을 보내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고 곧 이들에 대한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그러자 이들은 이번에는 로마에 지원 요청을 보냈습니다. 이제 상황은 시라쿠사와 메사나 둘 사이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내부에서는 군대를 보내야 할지, 보내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팽팽하게 의견이 대립했습니다. 사실 이제 막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해서 아직은 좀 정신이 없는 데다가 군대를 요청한 이 용병 무리들은 애초에 명분도 없는 약탈자들인데 굳이 카르타고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군대를 보내주어야 할 이유는 없었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통일 직후의 어수선함이 가라앉지 않은 로마의 바로 코 앞에 카르타고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도 로마에게 영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카르타고가 원래 약속되었던 군사적 지원만 하고 깔끔하게 돌아갈 거 같지가 않았죠. 이들은 이미 시칠리아 섬 전체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시칠리아 섬이 완전히 카르타고의 손에 들어간다면 곧 이를 징검다리 삼아 로마로도 들어오게 될 게 뻔했죠. 결국 로마는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칠리아 섬 내의 라틴인 용병 무리가 일으킨 소란이 지중해 세계를 재편할 큰 전쟁으로 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차전: 시칠리아 쟁탈전

 
기원전 264년, 로마와 카르타고는이제 시칠리아 섬 안에서 처음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로마는 이제 막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을 뿐 국력 자체는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오랫동안 전쟁을 치뤄온 만큼 로마의 군대는 훈련도 잘 되어 있었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죠. 군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식량 조달이나 인력 동원 등 군대 외적으로도 전쟁에 대한 대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였죠. 물론 그 때까지 로마군은 육지에서만 싸웠기 때문에 이 역시 육군에 한정된 얘기입니다. 당시까지 로마는 제대로 된 해군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카르타고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업대국이었습니다. 당시의 카르타고의 인구가 25만 정도였구요. 항구에는 200대의 상선이 동시에 배를 댈 수 있었다고 하니 규모만큼은 요즘의 항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겠네요. 항구와 인접한 곳에는 짐을 하역하거나 배를 수리할 수 있는 다른 항만 시설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시내에는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5-6 층 규모의 석조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시가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제일 놀라운 부분이에요. 6층 집의 수도에서 물이 나온다는 얘기잖아요. 기원전 3세기인데... 그만큼 카르타고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문명을 지닌 나라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나라이긴 하지만 카르타고는 제대로 된 시민군의 규모가 매우 작았다고 합니다. 방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시민군은 본토 도시를 수비할 정도의 병력 정도로만 운영되었고, 무역로와 항만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용병을 고용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누미디아 출신의 기병들이나 그리스 출신의 해군들이 이에 해당했습니다. 거기에 카르타고의 영토 자체가 해안가를 끼고 있다보니 육군은 해군에 비해 전력이 더 떨어졌죠. 이 정도라면 로마로서도 한번 해볼만한 전쟁이었을 거 같습니다.
 
시칠리아 섬 내에서 벌어진  양측의 충돌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투는 분명 땅 위에서 벌어졌으니 막강한 육군을 보유한 로마가 이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죠. 전투의 양상이 로마의 승리로 흘러가자 시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시라쿠사를 비롯해 몇몇 도시들이 로마의 편으로 돌아섰고 로마는 이제 시칠리아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칠리아가 섬이다보니, 섬만 차지해서는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시칠리아를 둘러싼 바다를 장악해야만 비로소 섬을 차지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죠. 
 
전투는 자연스럽게 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점에서 로마는 군대 운용에 대한 새로운 고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칠리아 섬 연안까지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제 육군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요. 그리고 단지 시칠리아 문제 뿐만이 아니라, 이후의 일을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르타고라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제  제대로 된 해군이 필요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해전의 초반에서 로마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퀸퀴어림'이라고 불리우는 5단 노선을 앞세운 카르타고 해군의 공격에 로마 해군은 항구를 봉쇄당하고 제대로 된 전투는 해보지도 못했죠. 사령관도 카르타고 군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카르타고의 해군을 경험해보고나니 로마도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일단 자신들이 자신있는 육군의 장점을 해전에서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병사들이 상대방 함선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일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각 함선에 배치했습니다. 
 
일명 '까마귀'라고 불리우는 이 장비는 끝에 길고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달린 폭 1.5m, 길이 10m 정도의 널빤지 모양 가교였습니다. 함선 위에 세운 채로 적 함선 가까이로 접근해서 그 쪽으로 넘어뜨리면 스파이크가 적 함선에 푹 꽂히면서 다리가 만들어졌죠. 그렇게 함선 사이에 가교가 준비되면 병사들은 가교를 건너서 적 함선으로 올라 타 적군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로마는 그렇게 나포한 카르타고의 함선을 끌고와서는 자신들도 이를 모방한 5단 함선을 새롭게 건조했습니다. 결국 로마군은 이 까마귀와 5단 함선을 활용해 해전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일단 해전에서도 한 번 승리를 하고나니 자신감이 들었나봅니다. 로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해군을 조직하고 230척 규모의 함대를 마련해 원정에 나섰습니다. 카르타고 해군은 그보다 좀 더 많은 병력이기는 했지만 이제 로마군도 딱히 해군이 밀리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불리하지는 않았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카르타고 본토에 상륙하는 데에 성공했죠. 
 
이 때 위기에 빠진 카르타고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 크산티포스를 고용해 로마군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크산티포스는 로마군 사령관을 사로잡으며 카르타고 시내로 진입하는 로마군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죠. 크산티포스의 군대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친 로마군은 본국에서 보낸 함대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되었지만 마침 큰 폭풍우를 만나 그 함대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로마의 카르타고 원정은 그렇게 한 번 실패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 카르타고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카르타고는 또 자신들 나름대로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누미디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죠. 원래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 원주민들로 오랫동안 카르타고에서 용병으로 일했던 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르타고가 로마와의 전투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리비아인들과 함께 카르타고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건 누미디아인들이었지만 사실 카르타고는 식민도시들과의 유대감이 약하고 이해관계도 다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위험도 적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식민도시들 간의 결속력이 약해질 법도 한데 카르타고와 달리 식민도시들과의 결속력과 상류층의 자발적인 희생으로 비교적 쉽게 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 카르타고가 반란을 진압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이 로마는 폭풍우로 입었던 피해를 모두 복구하고 함대까지 재건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죠. 결국 잠시간 소강상태였던 전쟁은 양측의 재정비 후 다시 한 번 불이 붙었습니다. 
 
양측은 다시 시칠리아 섬에서 맞붙었습니다. 이번에는 현재의 팔레르모에 해당하는 도시 파노르무스에서 육지전과 해상전이 동시에 벌어졌는데요. 로마는 이제 강력해진 해군을 이용해 해상을 봉쇄하고 육지에서는 시라쿠사의 지원을 받아 파노르무스의 성을 공략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포위가 이어지자 파노르무스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습니다. 이제 로마는 시칠리아 대부분에 걸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카르타고로서는 중요한 거점인 이곳을 어떻게든 다시 되찾아야만 했죠. 
 
파노르무스 탈환을 위해 카르타고가 준비한 것은 그 전까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치렀던 전투에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코끼리 부대였습니다. 말을 탄 기병 정도만 되어도 보병의 5-10배 위력을 지닌다는데, 그보다 훨씬 거대한 코끼리라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졌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동물을 마주하게 된 로마군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져들었고 카르타고는 실로 오랜만에 로마군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카르타고가 파노르무스 성 안의 로마군을 공략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파노르무스 성 안에서 버티고 있던 로마군은 창을 던져서 코끼리들을 공격했고, 공격받은 코끼리들이 이리저리 날뛰면서 오히려 아군인 카르타고 군 병사들을 들이받자 카르타고 군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로마군은 더욱 대담하게 성 밖으로 나가 카르타고 군을 공격했죠. 결국 카르타고 군의 코끼리 부대는 로마군에게 격퇴를 당했습니다. 아마도 코끼리라는 동물은 말처럼 잘 길들이기는 어려운 동물인가봐요.
 
파노르무스를 탈환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카르타고로서도 더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미 전쟁이 상당히 오래 끌고 있었고 여러 번의 전투에서 패한 데에다가 다른 식민지들에 대한 지배력도 약해지고 있었으니까요. 카르타고의 새 사령관은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였습니다. 그는 로마군을 상대로 별로 많지도 않은 병력으로 시칠리아 섬 곳곳에서 매복과 게릴라전을 펼치며 로마군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이미 카르타고 내에서는 이제 그만 패전을 인정하고 전쟁을 마무리 짓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카르타고 군이 그때까지 이렇다할 승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데에 반해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은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보니 그에 대한 견제론도 등장했죠.  결국 카르타고 군이 로마군에게 크게 패한 아이가테스 해전을 끝으로 기원전 241년 카르타고는 로마와 종전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잘 싸우던 하밀카르의 군대는 카르타고로 철수했구요. 
 
양측이 협의한 결과는 어땠을까요? 20년을 넘게 끈 전쟁에서 졌으니, 카르타고가 많이 불리할 거라는 건 예상됩니다. 일단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과 그 주변의 작은 섬들을 모두 로마에게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섬이 어딘지는 나중에 가서 정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같은 작지 않은 섬까지도 다 로마의 손에 들어가면서 카르타고는 이제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거의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죠.  
 
돈 문제도 남아있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전쟁배상금 3200달란트를 요구했는데요.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1달란트는 오늘날의 25억 원 정도의 가치라고 하네요. 대략 80조 원 정도를 요구했던 걸로 계산됩니다. 근데 이 정도 금액은 카르타고로서는 썩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물론 큰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이 배상금을 조기에 완납했습니다. 그나마도 로마에서는 내부 협의를 거처 한 차례 높여서 부른 금액이었다는데 말이에요. 어쨌든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로마는 이제 육군 뿐만 아니라 강력한 해군을 갖게 되었고 시칠리아 섬과 그 주변의 바다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의 새 식민지 히스파니아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두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전쟁에서 진 카르타고는 사정이 좀 어려워졌습니다. 로마에 내기로 한 전쟁배상금은 모두 냈지만 일부 용병들의 급여가 밀리면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때문이었는데요. 방금 전까지 로마와 큰 전쟁을 치르느라 기진맥진해져 있는 상태인데 또 한번 용병들을 상대로 전투를 치러야 한다니, 카르타고로서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을 거에요. 직업 용병들이니 또 얼마나 잘 싸우겠어요.
 
게다가 이 용병들은 시칠리아 근처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차지하고 카르타고 군이 자신들을 진압하러 오는 기색이 보이자 얼른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로마는 그 일을 계기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까지 차지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쪽 발칸반도의 서해안인 일리리아 부근까지 진출했습니다. 당연히 그 사이의 아드리아해 역시 로마의 것이 되는 거였죠. 그런데 로마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북쪽의 켈트족까지 몰아내면서 알프스 바로 아래까지 영토를 넓히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한편, 1차 포에니 전쟁의 막바지에 시칠리아 섬으로 파견되어 로마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던 하밀카르 바르카는 본국의 철수 요청으로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온 뒤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인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식민도시들을 상당수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직 로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하밀카르 바르카는 현재의 스페인 카르타헤나에 카르타고 노바라는 도시를 세우고 히스파니아를 새롭게 개척했습니다. 그 전에도 이베리아 반도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식민지가 존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카르타고인들에게 이베리아 반도는 완전 처음 가보는 낯선 동네는 아니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곳엔 당연히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을 몰아내고 새 식민지를 세우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겠죠.
 

그렇게 히스파니아에서 가문 전체가 식민지 개척에 몰두하던 중에 하밀카르 바르카가 죽고 그의 아들인 한니발 바르카가 식민지 경영을 이어받았습니다. 2대에 걸쳐서 히스파니아를 경영해온 바르카 가문은 식민지의 경제력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강력하고 충성심 높은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쯤되면 왜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에 바르카 왕조를 세우지 않고 로마에 대한 복수에만 그렇게 매달렸나 싶기도 하네요.   
 

세바스티앙 슬로츠의 한니발 대리석상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세바스티앙 슬로츠의 한니발 대리석상




 

2차전: 한니발과 스키피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한니발은 기원전 219년, 먼저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 해안의 중부 쯤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을 공격했습니다. 한니발로서는 자신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에 로마의 동맹시가 있는 걸 그냥 넘어갈 수 없었겠죠. 당연히 로마에서는 이에 항의하며 군대를 다시 되돌릴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그 시점엔 로마도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두 나라는 곧 두번째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이듬해, 한니발은 코끼리 기병을 포함한 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를 출발했습니다. 히스파니아에서 로마까지는 제일 수월해보이는 해로를 이용하더라도 지중해의 거의 절반을 가로질러 가야 했습니다. 로마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의 군대가 나타날 법한 해안의 요충지들을 주시하고 있었죠. 하지만 한니발이 선택한 경로는 그보다 훨씬 멀고 험한 육로였습니다.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떠올리는 그 업적.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북쪽에서부터 남진하는 경로였죠. 
 
한니발의 이야기를 다루는 많은 책이나 영상물에서는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는 얘기기는 하지만 사실 한니발은 오늘날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를 가르는 피레네 산맥을 먼저 넘었습니다. 코끼리를 포함한 5만명의 병력이 높이 3000m 대의 험준한 산들이 첩첩이 놓인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그 지역의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여가며 행군해 또 다시 알프스를 넘었다니, 소설이라고 해도 좀 개연성이 떨어지는 비현실적인 일 아닌가요? 한니발에 비하면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 얘기는 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에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할 즈음 한니발의 군대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지만 그래도 2만이 넘는 병력이니 결코 적은 수는 아닙니다. 사실 그 정도 남아있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알프스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모두 도망쳤을 것 같은데, 한니발은 아직도 자신의 병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니발은 본격적으로 로마 침공을 개시했고 이후 로마는 한니발의 공격으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한니발을 맞이할 로마군의 사령관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들의 신뢰를 받는, 무능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한니발이라는 전쟁의 귀재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군인이었죠. 티키누스와 트레비아에서 스키피오의 군대를 섬멸한 한니발은 로마가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획득한 갈리아인들의 영역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남하해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토스카나 지방도 차지했죠. 이제 정말 로마 시내가 코앞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를 향해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한니발은 곧장 로마를 공격하는 대신 주변의 동맹시들을 돌며 공격하거나 회유했습니다. 로마의 동맹시들을 먼저 정리해서 로마를 공격할 때 지원을 보내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죠.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한니발의 작전이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동맹시들이 생각보다 로마와의 동맹을 쉽게 철회하지 않은 것입니다. 1차 포에니 전쟁 직후 카르타고를 향해 반기를 들었던 누미디아를 생각하면 이 부분은 로마가 카르타고와는 다른,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던 부분이에요.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군과 한판 승부를 겨룬 곳은 로마의 동남부 칸나에 평원이었습니다. 바짝 긴장한 로마는 8만의 병력을 동원해 한니발의 군대를 맞았습니다. 일단 탁트인 평원에서의 전투이니 병력이 더 많은 로마가 더 유리해보입니다. 양측은 모두 중앙에 보병을 두고 양측면에 기병을 두는 형태로 맞섰지만 로마는 중앙에 중장보병을 두텁고 빽빽하게 배치해서 카르타고 군의 한가운데부터 격파할 생각이었구요. 반대로 카르타고는 그런 로마군의 중앙을 안쪽으로 끌어들이고자 중앙 부분을 얇고 돌출되게 배치했습니다. 마치 로마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듯한 배치네요.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군은 한니발의 예상대로 중앙의 카르타고 군을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중앙에 배치된 한니발 군대의 보병들은 집중공격을 받으며 뒤로 밀려났지만, 양 옆의 기병들은 그 사이에 로마군을 빙 둘러싸는 데에 성공했죠. 이렇게 포위를 당하고 나니 8만이라는 숫자가 무색하게 둥글게 둘러싸인 로마군의 한가운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군은 바깥쪽부터 한겹씩 차례차례 무너져내리면서 전멸하고 한니발은 완벽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그렇게 대승을 했는데도 전쟁의 승기는 쉽사리 카르타고 쪽으로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이 로마로 원정을 오느라 정작 히스파니아 지역을 비운 사이 로마군이 그곳을 공략 중이었구요. 한니발과의 정면 승부에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한 로마는 이제 한니발의 군대를 유인해 전투는 하지 않고 이곳저곳 끌고다니면서 힘을 빼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좀 치사해 보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수밖에요.  
 
한니발은 나름대로 시라쿠사나 카푸아, 마케도니아 등을 카르타고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정작 이들은 로마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막상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니발의 군대가 발목이 잡히며 오히려 방해만 되었죠.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도시들을 추가로 더 로마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시민권 정책을 앞세운 로마의 외교술 앞에 그런 시도도 가로막혔습니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 갇히는 형국이 되면서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져들고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기원전 209년, 로마에도 드디어 영웅이 등장했습니다. 17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티키누스 전투에 참전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아버지랑 이름이 똑같네요. 이 가문 사람들은 몇 개의 이름만을 돌려썼다고 합니다. 20대의 청년이 된 그는 한니발의 본진인 히스파니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바르카 가문이 세운 도시, 카르타고 노바를 함락시켰습니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로마군에 승리하면서도 시종일관 로마에 붙잡여 딱히 성과를 거두지 못한 한니발에게는 답답한 일이었을 거에요. 
 
카르타고 노바를 함락시킨 이래로 히스파니아 전체를 장악한 스키피오는 이제 한때 카르타고에 강력한 기병을 제공했던 누미디아와 손잡고 카르타고 본토가 있는 북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이쯤되니 초조해진 카르타고는 강화협상을 추진해보았지만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죠. 결국 카르타고는 한니발에게 귀환할 것을 요청하고, 이제 전쟁은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결로 흘러갔습니다.  
 
양측의 군대는 카르타고 남서쪽의 자마 평원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앞서 한니발은 로마군보다 적은 병력으로 칸나에 평원에서 로마군에 대승한 적이 있었죠? 근데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군 쪽으로 붙은 데에다가 카르타고 본국이 보내준 보병들은 아직 전투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이 히스파니아를 출발할 때부터 함께 한 정예병은 대략 1만5천명 정도. 이들이 한니발 군대의 핵심전력이었습니다. 
 
한니발은 먼저 대열의 맨 앞에는 코끼리 부대, 그 뒤에는 본국에서 보낸 초보 병사들을 세워서 이들을 이용해 최대한 로마군의 체력을 뺀 뒤 정예병을 이용해 지친 로마군을 격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전술이 통하지 않았네요. 맨 앞의 코끼리 부대가 로마군 진영으로 돌격하자 로마군은 대열을 벌려 코끼리들을 통과시켜버렸습니다. 남은 코끼리들을 향해서도 북을 치거나 나팔을 불며 창을 던져 코끼리들이 오히려 카르타고 군을 공격하도록 했죠. 알렉산드로스 시절부터 뭔가 코끼리는 덩치에 비해 전투에는 딱히 유용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한편 좌우 측면에 배치된 기병들은 로마의 기병들과 맞붙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강력한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군 편에 있으니 이들 역시 우세를 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양측의 기병들은 서로 엉겨붙은 채 전장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이제 양측의 보병들만이 남아 서로 치열한 전투를 펼치게 되었죠. 하지만 본국에서 보내준 병사들은 전투에 너무 미숙했고 일부는 용병들이어서 전투가 불리한 양상을 보이자 대열에서 이탈해 도주했습니다. 한니발의 남아있는 정예병들 역시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보병들 간의 전투도 한니발이 유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양측의 보병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에 카르타고 군의 후방으로 절망적인 모습이 보였습니다. 전장에서 떨어져 나갔던 양측의 기병들 중 로마군의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카르타고의 기병을 제압한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 보병을 공격하면서 후방을 막아버리자 이들은 꼼짝없이 포위되어 사방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카르타고 군은 로마군에 의해 완패했습니다. 한니발은 자신의 정예군을 모두 잃고 겨우 카르타고로 탈출했구요. 반대로 스키피오는 아프라키누스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으며 화려하게 개선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2차전도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정산의 시간이 돌아왔겠죠. 카르타고는 로마에 매년 200 달란트를 50년간 전쟁배상금을 납부하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로마로서는 1차때 너무 봐줬나 싶었나봐요. 거기에 애써 개척한 히스파니아도 통째로 빼앗겼구요. 이 때 로마 내에서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카르타고가 1차 포에니 전쟁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나라를 재건하고 또 로마를 위협한 모습을 목격한 이들로서는 이 정도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겠다 싶었을 거 같긴 합니다. 그리고 그 우려는 결코 지나친 게 아니었죠. 
 
 

3차전: 카르타고 최후의 날

 
로마와의 전쟁에서 두번 모두 패한 카르타고는 망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예전의 위상을 잃었습니다. 군대가 해체되었구요. 외교권도 박탈당해서 제대로된 외교활동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외교와 안보가 모두 로마의 손에 넘어갔으니 카르타고로서는 그저 자신들이 차지한 유리한 입지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무역활동을 계속하는 것만이 생존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꽤 잘 됐어요.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물고서도 카르타고는 그럭저럭 나라가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의 상황을 지켜본 로마 내에서는 양쪽으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우선 카르타고를 아예 멸망시켜야 후환이 없을 거라는 강경파가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카르타고가 상업에 유리한 위치에서 무역활동을 하면서 손쉽게 부를 축적해 예전의 경제력을 회복하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며 그렇게 되기 전에 카르타고를 완전히 지도 상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 때의 교훈도 있으니 이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긴 하죠. 
 
한편,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느라 또 국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온건파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로마는 이미 앞서 카르타고와 전쟁을 키르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져 있었습니다. 한때 강성했던 헬레니즘 왕국들과 카르타고의 비옥한 식민지 히스파니아를 차지한 로마는 이제 지중해의 패자로 거듭나고 있었죠. 이미 카르타고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데 굳이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힘을 쓰기 보다는 다른 식민지 개척에 집중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로마가 그리스 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상황에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로마에 식민지 통치에 반기를 드는 일이 잦아지자 식민지 정책에 대한 로마의 여론은 강경론으로 기울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 세계는 줄곧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지만 적어도 문화적 수준만큼은 자신들이 로마를 앞선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죠. 거기에 이미 오래 전부터 민주주의를 경험해온 그리스인들에게 로마식의 식민 통치를 받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겪었던 다른 도시나 민족들과는 다르게 그리스는 영 길들이기가 힘든 식민지였습니다. 
 
그렇게 강경론이 한번 대두되기 시작하니 이러한 외교노선은 로마의 대 카르타고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게다가 겨우 도시의 명맥만 유지할 줄 알았던 카르타고가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풍요로운 모습을 보니, 로마도 이제 카르타고를 그냥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겠죠.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한 명분 쌓기에 착수했습니다. 
 
로마가 전쟁을 위한 명분을 갖추기 위해 이용한 것은 2차 포에니 전쟁 때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던 누미디아였습니다. 마침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은 카르타고가 그렇게 세력이 확 쪼그라든 틈을 타 북아프리카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싶어했습니다. 로마는 이 누미디아에게 카르타고로 쳐들어가 약탈할 것을 주문하면서 군사적,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죠. 
 
카르타고는 로마의 로비를 받은 누미디아의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그 때마다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번번히 당하기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가 허락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누미디아와의 전쟁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로마가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카르타고는 어떻게 했을까요? 로마의 예상대로 카르타고는 결국 시원하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용병을 구해 누미디아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전쟁 패배에서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이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적수도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누미디아에게 패한 카르타고는 또 강화 협상을 해서 전쟁배상금을 물고 서로 물러나기로 했죠. 거기에 이 때를 기다렸던 로마는 자신들의 허락없이 군사행동을 한 카르타고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일단 일을 벌이긴 했는데, 조약 위반에 대한 로마의 추궁을 빠져나갈 길도 막히고 꼼짝없이 또 로마와의 전쟁에 직면한 카르타고는 일단 다시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군사행동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선전포고를 철회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누미디아도 못 이기는데 로마를 어떻게 이기겠어요. 물론 로마도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진 않았습니다. 로마는 도시의 모든 무장을 완전히 해제해 무기들을 로마에 반납할 것을 요구했는데 카르타고에서는 전쟁을 하느니 이게 낫겠다 싶었는지 로마의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근데 바로 이 결정이 곧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로마의 요구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르타고가 무기를 완전히 버린 것을 확인한 로마가 이번에는 카르타고에게 도시를 버리고 내륙으로 깊숙히 이주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요구만큼은 카르타고로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카르타고는 어차피 도시를 잃을 바에는 도시 안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선택했죠  그리고 로마를 향한 카르타고의 처절한 마지막 항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게 3차 포에니 전쟁인데 워낙 일방적인 전쟁이다보니 이걸 앞서 두번의 전쟁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볼 수 있는지 약간 고개가 갸웃해지긴 합니다. 그래도 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이라는 큰 맥락에서 보면 3차전이 맞긴 하죠.
 
이왕 로마와 싸울 것을 결정할 거라면 무기를 모두 버리기 전에 하지, 이제 카르타고인들은 로마군을 맺아 맨손으로 싸우게 생겼습니다. 기원전 149년, 전쟁은 카르타고 시내에 틀어박힌 카르타고인들과 카르타고를 포위한 로마군 사이의 공성전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모든 카르타고인들이 무기도 없이 성 안에 모여 전열을 갖추었고, 로마에서는 8만이 넘는 군대가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기 위해 성 밖에 와 있었습니다. 사실 카르타고가 정말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손이나 돌멩이만 들고 싸웠을 거 같진 않아요. 그래도 지중해 제일의 무역항인 도시였는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조금씩 무기를 갖춰갔겠죠.
 
카르타고는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로 3년을 버텼습니다. 쉽게 끝날 거 같았던 전쟁이 길어지자 로마에서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죠. 그래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해 파견했습니다. 긴 포위 끝에 마침내 성을 무너뜨리고 도시 안으로 진입한 스키피오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카르타고인들을 섬멸했습니다.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완전히 점령하고나자 도시 내에는 5만명 정도만의 인구만 남아있었습니다.  
 
 

전쟁 그 후

  
멸망 이후의 카르타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은 5만명 정도의 카르타고인들은 대부분 노예 신세가 되어 북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도시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었구요. 기록에 따르면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렸다고도 하는데, 그 시절에 소금이 그렇게 흔했을 거 같지는 않은데... 쉽게 믿어지지는 않네요. 아마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인들의 증오심이 그 정도로 지독했다는 얘기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인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대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인구 25만의 대도시였습니다. 도시 내의 인프라 역시 당대의 어느 도시에 못지 않게 훌륭했구요. 그런 도시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은 로마에게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막대한 손해인 일이기도 합니다. 힘들게 정복한 도시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활용하지 않고 없애버리는 거니까요. 
 
카르타고인들의 운명 역시 다른 피정복민에 비해 훨씬 가혹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원래 로마는 일단 한 도시를 정복하고나면 그 곳을 식민도시나 동맹도시로 삼아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고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카르타고인들만큼은 예외였죠. 그들은 원래 살던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자신들의 고향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노예가 되어 다른 도시로 팔려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사라졌어도 그 위치 자체는 도시가 들어서기에 너무나 좋은 곳이었습니다. 지중해 가운데 쯤에 있어 다른 도시들과의 해상무역이 용이할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비옥한 농토와도 인접해 있으니 식량 또한 풍부했죠. 로마는 카르타고가 밉긴 했지만 제정 시대가 되면 결국 카르타고를 재건하고 아프리카 속주의 중심도시로 삼았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카르타고의 고대 유적지들 역시 대부분이 로마 속주 시절의 유적지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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