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슬슬 서양사가 여러 가지로 갈라지기 시작하네요. 메소포타미아 일부에서 오리엔트 전역으로 그리고 그리스 지역으로 점차 서쪽을 향해 중심이 이동해온 서양사는 이제 로마가 등장하면서 한 개의 갈래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여러 개로 쪼개졌던 디아도코이들의 왕국들은 로마의 세력이 강력해진 뒤에도 한동안 역사를 이어갔으니까요. 애초에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확장하게 된 것도 동쪽에는 아직 헬레니즘 왕국들이 건재했기 때문이었죠.
그래도 아직은 여러 개의 갈래로 갈라진 역사를 번갈아가며 살펴볼만하니 로마 이외의 지역도 가끔은 돌아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물론 더 뒤로 가면 이 갈래는 또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더욱 복잡하게 뒤얽힐 예정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어느 갈래를 따라갈지 정하구요. 일단은 로마가 포에니 전쟁을 치르던 시기 즈음 로마 동쪽의 상황을 훑어보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헬레니즘 왕국들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3세라는 희대의 정복군주 덕분에 엄청나게 큰 영토를 갖게 되었지만 그게 마케도니아에게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영토를 확장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적어도 후계자는 정해두고 정복을 하러 가든지 말든지 했어야 하는 건데, 정복에만 열을 올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사후에는 나라가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니 후계자를 누구로 할거냐는 물음에도 '가장 강한 자에게." 라는 말만 남겼겠죠. 이 정도면 너희들끼리 싸워서 누가 강한지 결정하라는... 내전을 부추기는 유언 아닌가요?
결국 그의 사후, 나라는 가장 강한자를 자처하는 디아도코이들의 손에 산산조각이 났다가 수십년에 걸쳐 3개의 큰 왕국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원래 디아도코이는 후계자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라고 합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이들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쓰고 있죠. 이 때 등장한 3개의 왕국은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의 마케도니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였습니다. '웬 이집트?' 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때의 이집트는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된지 오래였고, 그의 사후에는 디아도코이인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세워진 그리스계 왕조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파라오도 그리스 혈통이구요.
이걸 고대 그리스의 멸망으로 봐야할까요, 확장으로 봐야할까요? 이제 폴리스들이 모여 합종연횡하면서 세력을 다투던 시절의 그리스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그리스의 모든 것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 문명은 헬레니즘 왕국들의 넓은 세력권 전체로 흘러들면서 전례없는 부흥을 맞이했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발칸 반도 남부와 에게 해 정도에 영향을 미쳤다가 사라졌을 그리스 문명이 오히려 문명의 발상지인 오리엔트 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가며 서구 문명의 커다란 한 축이 된 것입니다.
헬레니즘 왕국들은 북아프리카에도, 오리엔트 지역에도 존재했지만 그곳을 다스리는 왕족들은 모두 그리스인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그 왕국들에서 상류층을 차지하면서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 문화를 향유했습니다. 한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을 나갔던 인도에까지 그리스 문화가 전래되었고, 그렇게 발생한 새로운 예술양식이 더욱 동쪽으로 전파되어 극동아시아까지 닿았을 정도였으니, 그리스는 멸망했지만 그리스 문화는 오히려 최전성기를 맞이한 셈입니다.
근데 그건 그리스 문화라는 소프트파워의 얘기일 뿐이구요. 다소 허무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이제 없어졌잖아요. 헬레니즘 왕국에서는 한때 아테네가 자랑하던 민주주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구요, 이제 오리엔트식의 전제군주제가 자리잡으면서 권력을 둘러싼 각종 음모가 궁중에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제의 특징이 궁중음모라는 건 아닙니다.
군사력이라는 하드파워의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제 페르시아 전쟁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처럼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시민병은 없어지고 돈을 받고 적당히 싸우는 용병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죠. 고만고만한 왕국들 사이에 전쟁은 끊이질 않는데 그 전쟁에서 싸우는 건 대부분 용병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나라에 재정적 부담만 될 뿐 어느 한 나라가 딱히 패권을 차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탈리아 반도 안에만 머물던 작은 나라였던 로마가 어느새 지중해 서부를 장악하고 이제 동쪽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 정복
로마는 이미 2차 포에니 전쟁 중에도 그리스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케도니아가 한니발의 편에 서면서 수세에 몰린 로마를 더욱 위협했으니 그들을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거에요. 비록 마케도니아가 도중에 다시 한니발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면서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긴 했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 자신들을 위협한 그리스는 분명 언젠가 정복해야 하는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나자 마케도니아 문제는 다시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한편, 마케도니아는 로마와의 강화조약 이후 헬레니즘 왕국끼리의 세력다툼에 집중했습니다. 우선 또 다른 디아도코이 왕국이었던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와 함께 이집트 원정에 나섰습니다. 마침 이집트에서는 새로운 파라오가 6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나라가 살짝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두 나라가 서로 밀착되자 그 사이에 있던 왕국인 페르가몬이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들은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로부터 독립한 왕국으로 로마와는 대체로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나라였죠.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지중해 서부를 손에 넣은 로마에게는 기다려왔던 기회가 마침내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너무 요즘의 국제정세관일지도 모르겠지만 새로운 패권국이 된 로마로서는 이제 지중해 세계의 질서를 자신들이 관리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을지도요. 마치 오늘날 미국이 전세계 대부분의 국제분쟁에 관여하듯이 말이에요. 로마는 그리스로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기원전 197년, 총사령관인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그리스에 도착해 필리포스 5세가 직접 이끄는 마케도니아의 군대와 테살리아 남부의 키노스케팔라이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 초반에는 마케도니아 군이 우세를 보이는 것 같았지만 전투가 벌어진 언덕지형에서 너무 급하게 군대를 움직인 탓에 치밀한 조직력을 앞세운 로마군에 크게 패배했습니다. 필리포스 5세는 힘겹게 전장을 빠져나와 마케도니아로 귀환했고 로마도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갔죠.
이렇게 마케도니아가 패배하자 이번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가 그동안 마케도니아의 세력권이었던 그리스 남부와 에게해를 차지하고자 나섰습니다. 로마군은 다시 한번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그리스를 차지하겠다는 원대한 야심과는 다르게 막상 전투에는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나봅니다. 전투에서 형편없이 패한 그가 소아시아 지역으로 도망가자 로마군은 이 기회에 소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기원전 190년, 로마에서 출발해 마침내 지금의 튀르키예 서쪽 해안에서 멀지 않은 마그네시아에 도착한 로마군은 자신들보다 두 배는 많은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와 충돌했지만 결과는 로마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군의 총사령관은 무려 한니발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죠. 안티오코스 3세는 절반이 넘는 군대를 잃고 겨우 살아남아 도망쳤고 이제 이 지역의 판세는 로마의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페르가몬 왕국으로서는 큰 힘 들이지 않고 거둔 성과네요.
마케도니아가 로마에게 큰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아직 망한 건 아니었죠? 우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의 뒤를 이은 페르세우스 왕은 그리스 세계에서의 패권을 되찾고자 병력을 증강하며 전쟁을 준비했지만 그건 오히려 완전한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168년, 그는 초반 몇번의 전투에서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정작 로마가 새롭게 보낸 총사령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맞아 피드나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로마군의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때 그리스 세계를 넘어 소아시아 전체를 호령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제국이 이렇게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성장의 부작용
이제 지중해 세계 대부분이 로마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평민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랜 기간 군에 복무하며 최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해왔던 평민들의 처지는 오히려 악화되었죠.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규정한 리키니우스법이 유명무실화 되면서 정복 활동으로 새롭게 획득한 영토 대부분이 귀족들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반면에 농민들은 끝없는 전쟁에 계속 동원되면서 자신의 경작지를 돌볼 수가 없어 농토가 황폐해졌습니다.
이렇게 농사를 짓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세금을 체납하던 평민들은 결국 자신의 경작지를 팔고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그 경작지를 사들인 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이제 소작농들을 고용해 엄청난 규모의 경작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대농장을 운영했습니다.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우는 이 대농장을 통해 귀족들은 더욱 큰 부를 쌓을 수 있었죠. 어찌어찌 농사를 지어가며 자신의 경작지를 유지하던 자영농들도 이 라티푼디움에서 생산된 곡물들과의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영농이 소작농 즉 피고용인이 되면 이들은 이제 고용인으로부터 임금을 받는 건데요. 그렇게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평민들이 급격히 늘어난 데에 더불어, 정복활동을 하면서 피정복지에서 얻은 노예 노동력이 로마로 잔뜩 들어오다보니 인건비 마저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가 있는데 굳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서 쓰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몰락한 평민들은 이제 소작농으로나마 먹고 사는 일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로마의 모든 평민이 농민은 아니었지만, 수공업자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영토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이제 지중해와 오리엔트 지역 각지에서 생산된 물자가 로마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경제권이 확대되면서 속주 이곳저곳에서 품질 좋고 값싼 물건이 넘쳐나게 되자 이런 상황은 곧 로마의 수공업자들을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마치 값싼 중국산 공산품들이 Made in Korea 제품들을 밀어냈던 상황처럼요.
결국 로마라는 나라는 엄청나게 거대해졌지만 그 안에 사는 로마인들 모두가 행복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과 나라는 개인이 잘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거죠. 오늘날의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그 안에는 심각한 사회문제들을 품고 있잖아요. 뭔가 자꾸 로마를 미국에 비교하는 게 좀 그렇지만 당시 로마가 겪었던 그 상황이 2천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역사가 단순한 과거의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지만 모든 평민들이 그런 어려움에 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정복사업으로 획득한 영토에는 새롭게 도로와 주택이 들어서고 각종 상하수도 시설과 관공서, 편의시설들이 들어섰는데요. 이 과정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토목, 건설 업종에 종사하다가 부를 쌓는 평민들도 있었죠. 또한 오랫동안 대규모의 정복사업이 계속되다보니 군부대에 군수물자를 납품하는 사업이나 새롭게 건설된 속주에 세금을 거두는 일을 대행하는 징세청부업 등도 유망산업으로 떠올랐습니다. 운도 잘 타고 기회를 잘 포착한 사람들이었죠.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사이, 이런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상당한 부를 쌓으면서 새로운 부유층으로 부상했습니다. 사회가 바뀌면서 손해를 보는 산업과 기회를 얻는 산업이 교차하게 된거죠. 예전에 로마의 평민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노빌레스라는 신귀족층이 등장한 것처럼, 정복전쟁의 과정에서 부를 쌓은 이들은 이제 에퀴테스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로마 내내 존재하다가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기사 계급으로 편입되며 서양 중세의 핵심적인 계층으로 활약합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참여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강화조약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돌아오던 도중 속주의 광활한 경작지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예들을 보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많은 로마인들이 경작지를 잃고 빈민으로 전락했는데 대농장에서는 노예들이 일을 하고 있다니... 이렇게 평민들이 모두 실업자, 빈민이 된다면 로마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빠졌죠. 그는 자영농의 몰락이 곧 로마군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로마군의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들인데 이들이 없으면 당연히 로마군도 제대로 운영될 수 없으니까요.
기원전 163년에 태어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일명 평민귀족으로 일컫어지는 노빌레스 계층의 명문가 출신으로 로마인들의 인기와 지지를 한몸에 받던 젊은 정치인이었습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로마의 숙적 한니발을 물리친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구요. 아버지 역시 집정관을 두번이나 지낸 영향력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비록 좀 일찍 돌아가시기는 했지만요. 어쨌든 그는 가문도 좋고, 성품도 훌륭하고, 능력있고, 외모도 잘생기고, 당연히 인기도 많은, 흠이라고는 없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서른 살의 나이로 호민관에 당선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른 살에 장관이 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아주 빠른 출세였죠. 그리고 그렇게 호민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평소 자신의 생각해왔던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그가 추진한 제일 중요한 개혁대상은 토지였습니다. 그는 리키니우스법이 흐지부지된 것을 재정비해 개인이 일정 수준 이상의 대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제한하고, 토지상한선 이상의 토지를 가진 지주에게서는 그 상한선 이상분에 해당하는 토지를 몰수해서 이를 평민들에게 나눠주는 농지법 제정을 추진했습니다.
농지법은 평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실행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히 기득권의 반발이 예상되었죠. 이 경우에는 그라쿠스의 농지법 제정에서 개혁대상이 되는 대농장 라티푼디움의 소유주들이 그 기득권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그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고, 그가 호민관 재선에 출마하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왕이 되려고 한다'며 원로원의 보수파 의원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서 그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 300여명을 공격해 죽게 했죠. 결국 그는 기원전 132년, 호민관에 당선된지 7개월만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호민관에게는 원래 신체의 불가침권이라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임기 동안은 누구도 호민관의 신체에 해를 가할 수 없었죠. 그런데 호민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게 했으니 평민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지...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남긴 농지법은 결국 시행되었습니다. 이미 거의 시행 직전 단계까지 와 있었고 평민들의 지지가 워낙 강력하니 이를 뒤집었다가는 너무 큰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죠.
그의 사망으로 개혁은 일찌감치 실패하는 듯했지만 기원전 123년, 이번에는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입후보해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국가가 곡물 유통에 개입해 빈민들에게 싼 가격에 식량을 제공하는 곡물법으로 평민 세력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농지가 없는 평민들을 카르타고나 시칠리아 등 로마 밖의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서 그 곳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 정착시키는 법안도 추진했죠.
그는 에퀴테스 계층을 귀족들과 분리시켜 자신의 개혁의 지지세력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에퀴테스 계층의 속주 징세청부권을 강화하고 속주 법정의 배심원 자격을 부여하는 등 에퀴테스 계층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정책들을 시행했죠. 근데 이런 일들이 결국에는 에퀴테스 계층으로 하여금 속주에서의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착취적인 귀족들에게 대항하고자 속주에 또 다른 착취 세력을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정책들은 결국 개혁이 한 국가, 한 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혁은 한 계층의 권리를 쟁취하는 일이 그 체제에서 벗어나 있는 다른 계층을 착취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었죠.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또 다른 착취를 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만민의 이익을 위하는 보편적 개혁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이러한 모순은 그의 개혁 전반에 걸쳐서 드러났습니다. 그의 개혁대로 로마의 평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토지를 얻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더욱 활발한 정복사업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결국 그의 집권기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와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정복사업을 계속 확대해 나갈 수 밖에 없었죠.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들이 다 정복사업의 확대로 발생한 것들이었는데 말이에요.
한편, 개혁이 확대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맹시들은 로마와 동등한 정도의 시민권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가이우스의 주요 지지세력인 에퀴테스 계층은 그들이 로마시민권을 동등하게 부여받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개혁으로 제일 큰 수혜를 입은 계층이 이제는 기득권이 되어 더 이상의 개혁을 반대하자, 그 개혁이 결국 한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기원전 121년, 원로원의 보수파 의원들의 지지를 받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라는 인물이 갑자기 급진적인 개혁안을 들고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는 로마 밖의 북아프리카나 시칠리아가 아닌, 이탈리아 반도 내에 농민들에게 지급할 농지를 마련하고 지급대상이 되는 기준도 훨씬 완화해 더 많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죠. 평민들은 누구를 지지했을까요? 개혁 세력은 양분되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재선에 낙선했습니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과연 어떻게 저런 정책들을 시행할 생각이었을까요? 보수파의 지원을 받는 그가 왜 그런 급진적인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일까요? 사실 그는 애초부터 그런 정책을 시행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한가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낙선시키는 일뿐이었죠. 그리고 그의 계획은 훌륭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이 때 로마의 평민들이 내린 선택의 결과는 오늘날 투표로 대표를 선출하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결국 로마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원로원이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지지세력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자 궁지에 몰린 그는 피신하던 중에 결국 자결했습니다. 결국은 두 형제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평민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화정의 이념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일단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제정으로의 이행은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었습니다. 계속된 정복사업으로 끊임없이 덩치를 키워 온 로마는 이미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고 그로부터 발생한 부작용이 어느새 로마를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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