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로마를 짧게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거쳐 로마에서 일정을 보내고 이제 또 다른 도시로 출발하려고 숙소를 나오는데, 바로 그 전날까지만 해도 관광객들로 가득찼던 도시 곳곳에 펜스가 쳐져 있고 사람들의 통행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저처럼 어리둥절해하는 관광객들이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들에게 물어보니 그 날이 마침 4월 21일, 로마의 건국기념일이라고 하더라구요. 기념 퍼레이드를 위해서 미리 인파를 통제하는 거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오래 전 일의 날짜가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전해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썩 믿어지지 않지만... 우리나라도 단군 할아버지께서 처음 나라를 세우신 때를 기원전 2333년 10월 3일로 계산해서 개천절을 기념하니까 아마 나라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비슷한 방식이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
로마가 생겨나기 이전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요? 지금의 이탈리아 지역에 사람들이 처음 모여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대략 기원전 3000년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기원전 13-10세기에 청동기, 기원전 10세기 말부터는 철기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해요. 아직 눈에 띄는 나라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반도 이곳저곳에서 촌락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마치 한반도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고 동쪽은 태백산백처럼 이탈리아의 등줄기가 되는 아펜니노 (Appennino) 산맥이, 북쪽으로는 알프스가 솟아 있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이나 언덕으로 되어있고 평야는 20%가 조금 넘는 정도였죠. 근데 그마저도 당시는 지금의 프랑스인들의 조상인 갈리아인 (Gauls)들의 영역이었습니다. 살기에 안락하고 풍요로운 곳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넓지 않았지만 이탈리아의 바다는 원시적인 항해기술만으로는 항해가 쉽지 않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들처럼 해양민족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화산폭발로 화산재가 쌓인 일부 비옥한 지역에서 곡물을 생산하거나 아니면 동쪽 산악지역에서 목축을 했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했죠.
그러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이탈리아 반도에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스에서 미케네 문명이 붕괴된 후 찾아왔던 암흑시대가 끝나고 활발한 식민지 개척이 이루어지면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그리스 폴리스들이 건설된 것이었죠.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가 원정을 떠났다가 큰 낭패를 본 시라쿠사 (Siracusa)와 그 연안의 낙소스 (Naxos), 스파르타가 세운 타렌툼 (Tarentum),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고향 엘레아 (Elea) 등이 그런 폴리스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의 여느 폴리스들처럼 독립된 나라들이었고 서로 활발한 교역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본토에서 도자기나 직물, 청동제품 등의 수공예품이 이탈리아로 수입되었고 그리스의 사상과 제도, 관습 등도 함께 유입되었습니다. 아마 이 때 들어온 그리스 문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알파벳과 그리스 신화가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갑자기 쏟아져들어온 그리스의 신문물 덕분에 이탈리아 반도 내의 문명 수준은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그리스 식민지들을 '마그나 그라이키아 (Magna Graecia)'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의 탄생에 큰 도움을 준 문명이 하나 더 있었는데요. 바로 에트루리아 (Etruria) 문명입니다. 이들 역시 마그나 그라이키아와 비슷한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정착했습니다. 보통 한 민족의 기원을 따질 때에는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바탕으로 추적한다고 하는데요. 에트루리아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아직 해독되지 않아서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역시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중북부에 터를 잡은 이래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중앙집권적인 면모를 갖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베이이 (Veii), 타르퀴니아 (Tarquinia), 클루시움 (Clusium), 아레티움 (Arretium) 같은 도시국가들을 형성하는데에 그쳤죠. 그래도 에트루리아인들끼리는 다같이 모여서 큰 종교행사를 하는 등 연합체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탈리아 중부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에트루리아인들은 점차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남쪽으로는 카푸아 (Capua), 노라 (Nora) 같은 도시들을 건설하고 북부로는 알프스 아래 포 (Po) 강 유역까지 진출해 결국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로마 지배는 별로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들이 남긴 금속세공술, 관개기술, 건축술 등은 훗날 로마인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마그나 그라이키아와 에트루리아가 이탈리아 내에서 이렇게 문명을 발전시켰다면, 로마는 이들의 후손인가, 싶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훗날 로마를 이루는 사람들은 아직 이탈리아 중서부의 라티움 (Latium) 평야 지역에 모여살고 있었죠. 이들은 축축한 화산재 땅을 경작해 농경지를 만들고 평야에서 높게 솟아있는 언덕 지역에 거주지를 마련했습니다. 아직 로마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점차 도시가 모습을 갖추어가던 때였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로마를 처음 건국했다는 얘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 그보다 더 전부터 이야기를 따라가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신화와 전설은 역사적 기록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훌륭한 재료이니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굳이 배제하지는 않아도 좋을 거 같아요. 실제로 역사학자들도 신화나 전설을 연구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가설을 세우기도 하니까요.
전설에 따르면 로마인의 조상은 무려 트로이 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트로이 왕족 안키세스 (Anchises)와 미의 여신 비너스의 아들이자,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 (Aeneas)는 트로이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아 세상을 유랑을 하던 끝에 오늘날 로마 시내를 가로지르는 티베르 (Tiberis) 강 하류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당시 라티움 평야 지역을 통치하던 라티누스 왕의 딸인 라비니아를 아내로 맞이하며 그의 후계자가 되죠. 왕위를 이은 아이네이아스는 주변 지역을 통합하고 아들 아스카니우스 (Ascanius)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아스카니우스는 나라 이름을 알바 롱가 (Alba Longa)로 바꾸고 새로운 왕국을 수립했습니다.
아스카니우스가 건립한 알바 롱가는 14대 동안 이어졌습니다. 14대 왕인 아물리우스 (Amulius)는 형인 누미토르 (Numitor)의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했는데 이후 누미토르의 외손자에 의해 다시 왕위를 빼앗길 거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외손자가 태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딸을 신전에 여사제로 보냈죠. 하지만 늘 그렇듯 신탁은 결국 그것을 피하기 위해 했던 행위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여사제가 된 누미토르의 딸이 신전을 찾아온 전쟁의 신 마르스와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 쌍둥이들이 바로 로물루스 (Romulus)와 레무스 (Remus)죠. 이렇게 되면 로마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후손이 되네요. 사실, 마르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식이고 로마식으로는 아레스 (Ares)라고 불리웁니다.
아물리우스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할 운명을 타고난 두 쌍둥이는 티베르 강에 버려졌습니다. 하지만 강가에 물을 마시러온 늑대가 형제를 물어와 젖을 물려 키웠고 이들은 한동안 늑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근처에서 양을 치던 양치기에게 발견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죠. 양치기 부부의 손에서 자라난 쌍둥이는 신탁대로 아물리우스의 왕위를 빼앗아 외할아버지인 누미토르에게 다시 돌려주고 자신들은 그들이 처음 버려진 티베르 강가로 돌아가 새로운 왕국을 창건했습니다.
새로운 왕국이 건설되자 이제 두 형제 중 누가 이 왕국의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두 쌍둥이는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격분한 나머지 결국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칼로 찌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분이죠. 동굴에 들어가서 누가 더 잘 버티는지로 대결을 벌였던 우리쪽 전설보다는 좀 과격한 거 같아요. 조금 다른 버전으로는 두 형제가 각각 자신의 영역의 경계에 성을 쌓았는데 레무스가 로물루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를 약올리자 열이 받은 로물로스가 레무스를 해치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로물루스가 동생을 물리치고 왕이 되긴 했지만, 당시의 로마는 아직 나라라고 하기엔 좀 뭐한, 양치기들의 집단이었습니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서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번성하려면 어디에선가 여성 인구를 이주시켜야 했죠. 로물루스는 다른 부족인 사비니 (Sabini)족 마을로 쳐들어가 그곳의 여인들을 대거 납치해오는 과격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약탈혼이었죠. 그러자 딸을 잃은 사비니족 전사들이 로마로 몰려오면서 두 도시는 정면충돌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사태를 해결한 것은 사비니족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미 로마인의 아내, 어머니가 된 사비니족 여인들이 나서서 두 부족을 화해시키고 두 부족은 서로 가족이 되기로 했습니다.
로물루스의 왕위는 사비니족 출신의 누마 폼필리우스 (Numa Pompilius)가 이었습니다. 3대 왕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Tullus Hostilius) 때에는 모시인 알바 롱가 왕국을 정복하고, 그 뒤로도 4대가 더 이어지며 일곱 명의 왕이 통치했습니다. 그 동안 로마는 점차 주변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종교제의를 정리하고 원로원을 구성하고 도시의 여러 기반시설들을 건립하면서 나라의 모습을 갖추어 갔습니다. 이 때 로마의 귀족가문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거느린 피보호민, 노예들, 그리고 귀족가문이 아닌 농민과 목축민, 수공업자와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들로 구성되는 사회가 형성되었죠.
기원전 7세기가 되면서 로마는 신전과 광장, 도로와 하수시설 등을 갖춘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로마의 마지막 왕은 폭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Tarquinius Superbus)였습니다. 물론 그가 정말 폭군이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 그는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는데요. 아마 당시까지도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는 나라였나 봅니다. 폭정에 지친 로마인들 사이에서 점차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이들은 혁명을 일으켜 왕을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수립했습니다.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에트루리아의 손에서 벗어났으니 로마의 앞길도 탄탄대로일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이제 겨우 라티움 평야의 일부를 차지했을 뿐, 동쪽에는 아직도 호전적인 산악부족들이 호시탐탐 로마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남쪽에는 삼니움족 (Samnites)이 로마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죠. 뿐만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온통 켈트족 (Celts)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자리잡고 있던 곳에도 역시 켈트족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앞에는 탄탄대로는커녕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당시 로마가 자리잡고 있던 라티움 평야 지역에는 로마 이외의 다른 도시들도 여전히 강성했습니다. 로마가 이들 모두와 적대적일 필요는 없었죠. 로마는 라티움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산악부족이 동맹도시들을 공격해오면 로마가 지원군을 보내 그들과 함께 싸우고, 반대로 로마가 켈트인이나 에트루리아계 도시들의 침입을 받으면 동맹도시들 역시 지원군을 보내 로마를 도와주었습니다. 기원전 493년 맺어진 이 조약은 당시의 로마 집정관 카시우스의 이름을 따서 카시우스 조약이라고 불리웁니다.
이렇게 동맹이 된 라티움 평야의 도시들을 제외하고, 로마를 가장 괴롭힌 다른 부족 중 하나로는 삼니움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로마의 남쪽에서 목축을 하던 부족이었는데 산에서만 목축을 하는 게 아니라 겨울이 되면 덜 추운 평야지대로 가축들을 끌고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이동 경로에 위치한 도시들은 종종 이들의 침입에 시달리는 일이 있었죠. 삼니움족은 이러한 도시들을 하나둘씩 정복하며 세력을 불려나갔습니다.
원래 로마는 삼니움족과도 우호협정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이들의 침입에 치달리던 남부의 도시 카푸아가 로마와의 합병을 요청해오자 로마가 이에 응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삼니움족과의 협정에 위배되는 일이었고 결국 양측은 처음으로 충돌합니다. 이렇게 기원전 343년 로마 남쪽에서 1차 삼니움 전쟁이 벌어지지만 전쟁은 어느 한쪽의 우세를 확인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다가 다시 협정을 맺으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삼니움족과의 협정이 맺어지고나니 이번에는 앞서 동맹을 맺은 라티움의 다른 도시들의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삼니움족과 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로마가 동맹의 일부 지역을 삼니움족에게 할양했는데 이것이 라티움 동맹도시들의 반발을 산 것이죠. 기원전 340년, 결국 로마는 이번에는 라티움 도시들과의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이때는 또 삼니움족이 로마를 지원했습니다.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전쟁으로 라티움 동맹은 해체되고 로마는 남부의 캄파니아 (Campania) 지역을 얻게 되었죠.
로마는 새로 얻은 캄파니아의 프레겔라이 (Fregellae) 라는 지역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한편 삼니움족도 거기에서 멀지 않은 도시 네아폴리스 (Neapolis)를 공략 중이었죠. 당시 네아폴리스는 귀족과 평민들 간의 극심한 대립을 겪고 있었는데요. 네아폴리스로 진출하는 삼니움족을 두고 귀족들은 이들을 받아들여 도시 내에 삼니움족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했지만 평민들은 오히려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기원전 326년 네아폴리스를 둘러싼 삼니움족과 로마는 2차 삼니움 전쟁에서 다시 한 번 충돌합니다.
2차전에서 로마군은 삼니움족을 상대로 대체로 우위를 보였습니다. 이미 라티움 평야 지역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부족들을 상대해본 로마군은 그 과정에서 조직을 체계적으로 효율화하고 실전을 통해 병사들의 역량을 향상시키며 강력한 군대로 거듭나 있었습니다. 한편,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마그나 그라이키아 지역을 평정한 삼니움족 역시 용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삼니움족은 기원전 321년 벌어진 카우디움 (Caudium) 전투에서 로마군을 압도하며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일진일퇴가 반복되면서 조금씩 로마군 쪽으로 기세가 기울었습니다. 로마는 전쟁 도중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도로망을 건설하고, 보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공격을 도모했는데 그런 발빠른 대응이 효과를 본 거였죠. 결국 조금씩 로마군에게 격퇴를 당하던 삼니움족은 기원전 304년 로마와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다시 연도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사실, 로마가 삼니움족과의 대결에서 이렇게 고전한 이유는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유럽의 중부와 서부는 거대한 세력을 이룬 켈트인들 역시 로마에 손을 뻗쳐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이탈리아 반도 내로 진입해 에트루리아계 도시들을 하나씩 집어삼키며 북부지방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일 뿐 통일된 나라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와 충돌하는 켈트족은 포 강 유역으로 내려온 일부였을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이들을 갈리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원전 390년 족장 브렌누스 (Brennus)가 이끄는 켈트족 군대의 침입을 받은 에트루리아계 도시 클루시움 (Clusium)이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에는 로마도 그 요청을 거절했지만 결국 둘 사이의 전투에 휘말리며 뜻하지 않게 켈트족의 공격을 받게 되었죠. 이렇게 벌어진 알리아 (Allia) 전투에서 로마는 대패하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로마군과 시민들은 시내에서 벗어나 카피톨리움 (Capitolium) 언덕으로 대피했는데요. 이때 로마는 마르쿠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Marcus Manlius Capitolinus)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켈트족을 막아냈습니다. 로마를 완전히 공략하는 데에 실패한 켈트인은 로마로부터 막대한 양의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물러났습니다.
이후로도 켈트족은 틈만 나면 로마로 쳐들어와 거센 공격을 퍼붓고 재물을 약탈해가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들은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보다 이렇게 가끔 찾아와 재물을 강탈해 가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것을 깨닫았죠. 로마를 차지한다고 한들, 그 지역을 다스릴 만한 역량이 없기도 했구요. 로마로서는 도시가 복원되어갈 때 쯤이면 쳐들어와서 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떠나는 이들이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켈트족의 공격이 반복되자 로마도 이제는 점차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독재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Marcus Furius Camilus) 는 마침내 켈트족 군대를 쳐부수는 데에 성공하며 로마의 제2의 건국자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구요. 로마 내부에 성벽을 더욱더 견고하게 쌓아올려 켈트족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도시를 강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켈트족과 삼니움족 모두를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되자, 이제 로마도 이탈리아 반도의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한편, 켈트족은 로마를 공격하는 일이 예전처럼 쉽지 않자, 로마에게 격퇴당한 삼니움족 일부와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로마군은 북쪽의 움브리아 (Umbria) 지방의 센티눔 (Centinum)에서 이 연합군과 격돌했는데요. 삼니움족과는 벌써 세번째 전쟁이었죠. 기원전 295년의 센티눔 전투는 이후의 이탈리아 반도의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로마는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의 최강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로마는 크고 작은 다른 부족들과의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로마를 위협할만한 세력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았죠. 이제 로마에게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손에 넣기 위한 마지막 관문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기원전 290년 아드리아 해 까지 영역을 확대한 로마는 마그나 그라이키아 식민지인 투리 (Thurii)와 타렌툼 (Tarentum)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며 투리에 로마군을 주둔시켰습니다. 그러자 타렌툼은 로마와 결전을 벌일 것을 결정하고 이웃의 에페이로스 (Epirus)에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1세 (Pyrrhus I)는 상당한 야심가였습니다. 그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이 벌어지자 그 틈을 타서 자신이 그 힘의 공백을 차지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죠. 피로스 1세는 타렌툼의 구원요청에 응해 2만 5천명의 병력을 끌고 진격해 헤라클레이아(Heraclea) 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과는 에페이로스의 승리였지만 승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에페이로스 역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지, 훗날 '너무나 큰 대가를 치뤄서 별 이득이 되지 않는 승리'를 의미하는 '피로스의 승리 (Pyrrhic victory)'라는 관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죠.
에페이로스와의 전쟁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해부터 양측은 무려 네번을 다시 격돌했습니다. 하지만 최종승리는 로마에게 돌아갔죠. 이렇게 마지막 남은 관문도 통과한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 내의 유일무이한 패자가 되었습니다.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전역의 요충지마다 식민지들을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개별적인 도시였지만 이 도시들의 군사권은 모두 로마의 수중에 있었으니 사실상 로마의 도시나 다름없었습니다.
승리의 비결: 로마군과 로미시민권
삼니움족과 켈트족의 침입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로마는 어떻게 이탈리아 반도를 재패할 수 있었을까요? 제일 합리적인 설명으로는 잘 훈련된 로마군, 그리고 정복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민권 제도가 꼽힙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미디어의 영향 때문인지, 로마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죠. 붉은 술이 날린 멋진 투구와 반짝거리는 철제 흉갑, 그리고 가죽 샌들 차림의 로마군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무장한 채로 하루 25킬로미터 이상 행군하는 게 가능했구요. 전투를 앞두고서는 언덕과 해자로 된 성채로 둘러싸인 야영지를 축조하는 일에도 매우 능숙했습니다. 또한 검병, 투석병, 궁병, 창병 등 다양한 병과가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편제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다양하고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죠.
병과는 주로 개인의 재산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재산이 많은 시민은 중무장을 하고 말을 탈 수 있었고 가난한 시민은 가벼운 무장의 보병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소집령이 내려지면 각자 자신이 먹을 식량과 무기를 챙겨서 집합했죠. 전투에 나서지 않는 다른 시민들은 병사들이 먹을 빵을 굽거나 병장기들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군율도 매우 엄격했습니다. 군법을 어긴 경우 태형에서 참수형에 이르기까지 죄과에 맞는 형벌이 내려졌죠. 반대로 공을 세운 경우에는 훈장과 포상, 그리고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이 주어졌습니다. 엄격한 상벌은 병사들로 하여금 전투시에 사기를 진작하고 점령지에서도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투를 거듭하는 동안 효율화와 체계화를 꽤한 로마의 군대는 훗날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는 데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물론 로마군이 처음부터 이런 체계적인 조직은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아직 라티움 평야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에 로마군은 그냥 성인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모인 조직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군대가 점차 체계를 갖추고 유럽 최강의 군대로 거듭난 이후에도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로마는 일단 다른 도시를 점령하고나면 그 지역을 식민시나 자치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식민시는 그곳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과 동일한 권한을 가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도시였구요. 자치도시는 그보다는 불완전하지만 일부 권리를 인정하는 라틴 시민권을 부여하는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강화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거나 피정복지 주민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데에 키위타스 (Civitas) 라고 불리우는 이 시민권을 이용했습니다. 요즘의 미국 시민권과 비슷한 느낌도 들지 않나요? 당시에는 로마의 일부가 되기 위해 스스로 로마와 합병되기를 요청해오는 도시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시민권이 피정복민들을 다스리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하긴 했지만 로마는 일단 로마인이 된 피정복민들에 대해서는 매우 포용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삼니움족 출신이든, 마그나 그라이키아 출신이든 그들을 차별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로마인으로 대우했습니다. 왕정 시기에는 자신들이 정복한 사비니족 출신의 왕이 즉위하는가 하면, 삼니움족과 그렇게도 치열한 전쟁을 치른지 20년 만에 삼니움족 출신의 집정관이 배출되기도 했죠. 그리고 이 포용성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마침내 지중해 세계를 차지하는 데에 있어 더욱 강력한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민권 제도가 뭔가 피정복민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거 같아서 상당히 인도적인 방법 같기도 하지만 모든 피정복민이 다 시민권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모습도 있었습니다. 일단 로마군에 의해 정복당한 도시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정복자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구요. 이는 때때로 잔혹한 착취와 약탈로 이어지기도 했으니까요. 반면에 한편으로는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무조건 2등시민, 3등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로마인과 똑같은 권리를 가질수 있는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피정복지에서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강력하게 유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가끔 이 얘기가 나오는 책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만약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자신들이 병합한 조선인들을 2등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그들에게 일본인과 완전하게 동일한 권리와 대우를 보장했다면 조선인들이 과연 그 정도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우리는 어느 정도의 관용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일까, 하는 궁금증도 듭니다. 외국계 한국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는 사회일까요?
로마는 결국 이렇게 치열한 생존경쟁 끝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왕의 폐위부터 에페이로스와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대략 300년 정도의 역사인데요. 이 기간의 끄트머리 부분은 대략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시기와 겹쳐 있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방 원정을 마무리한 이후,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열병으로 세상을 떴죠. 왕정 이후 로마의 성장과정을 이렇게 훑어보고니,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일찍 요절하지 않고 자신이 계획한 서방 원정을 끝까지 감행했더라면 이후의 서양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역사를 가정해보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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