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그리스의 유산일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셸리의 작품 <헬라스 (Hellas)>의 한 구절이라는데, 영국인인 그가 왜 자기네들이 다 그리스인이라고 하는 걸까요? 바로 그 뒤의 문장에 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의 법률, 문학, 종교, 예술은 모두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리스는 분명 중국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보다 더 크게 서양사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서양인들이 그리스를 서구문명의 요람으로 여기는 가장 큰 요인을 꼽으라면, 아마도 민주주의와 철학, 이 두 가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중간에 중세라는 긴 공백기가 있긴 했지만 중세 동안에도 그리스의 고전이 모두 실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들이 결국에는 그 동안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후대로 면면히 이어진 덕분이겠지요. 그렇게 중세를 지나자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근대적 민주주의로 부활했고, 그리스 시대의 정치사상은 계몽주의를 꽃피웠습니다. 그런데 왜 메소포타미아도 아니고 이집트도 아니고 그리스일까요?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지리적인 특징을 꼽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들어다보면 특별히 지형상 중심지가 없고 복잡한 해안선과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산도 많구요. 그래서 그리스의 폴리스들도 대부분 바다를 접한 항구도시들과 농사가 가능한 작은 규모의 농지들로 되어있었죠. 지도를 보면, 어디선가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 쭉쭉 뻗어나가기는 좀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소유의 소규모 농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자비로 무장을 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시민들. 이 사람들이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를 작동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작은 도시 하나가 나라를 이루는 폴리스 체제에서는 이 시민들이 모여 직접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마도 나라를 운영해나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는 어땠을까요? 이 나라들은 드넓은 영토를 지닌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아마도 도시가 생겨나기 전, 사람들이 부족단위로 마을을 이루며 살던 시절에는 그리스처럼 구성원들이 중요한 문제를 의논해서 정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운영해 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강을 중심으로 인구가 모여들어 도시가 발생하고, 점점 커지는 도시를 작동시키기 위한 인프라가 마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몇몇 개의 도시가 모여 나라가 되고,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정복하면서 식민지를 거느린 큰 나라가 되었겠죠.
농사도 짓고 전쟁에도 나가고 정치활동도 하던 그리스인들과는 다르게 이 나라 사람들은 직업도 모두 전문화, 세분화되어있었고 신분도 체계적으로 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구조의 가장 꼭대기에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복잡한 나라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모여서 모든 일을 하나씩 토론하고 협의하는 방식이 아닌, 명령을 내리는 왕과 그걸 수행할 관료들이 필요했겠죠.
이러한 지리적, 환경적인 원인을 생각해본다면 당대의 다른 정치체제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스의 민주주의만이 특별히 선진적인 제도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인들만이 월등히 뛰어나서 평등이나 자유에 대한 의식이 남달리 깨어있었던 것은 아니겠죠. 다만 필요에 의해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에서는 민주정이 발달하고, 큰 규모의 제국에서는 중앙집권체제가 각각 발전한 것이라고 보는게 더 합리적이지는 아닐지...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제도가 발전했지만 그 중에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이상적인 정치체제와 가장 유사한 제도였던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실질적인 내용 면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근대적인 의미의 평등권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우선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재산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무산계급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마저 재산의 정도에 따라 참정권의 크기도 달라지는 금권정치였습니다. 외국인과 노예는 당연히 참정권을 가질 수 없었구요, 여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정도라면,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귀족정 같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귀족정보다는 사회 전체에서 참정권을 가진 구성원의 수가 좀 많은 정도의 정치체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크레타에서부터 미케네,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테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는 대체로 오리엔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철학만큼은 그리스 고유의 것이라고 해도 사실일 것입니다. 본래 철학은 자유로운 사유를 밑거름 삼아 싹을 틔우기 마련이고, 때문에 전통적, 종교적 권위가 약한 곳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전제정치가 자리잡은 오리엔트 지역보다는 민주정이 꽃피던 그리스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 세계에서도 아테네가 아닌, 이제 막 새롭게 발전하는 중이었던 이오니아 지방에서 탄생했습니다.
아나톨리아 지방, 이오니아의 폴리스 중 하나인 밀레투스 (Miletus) 는 아테네에 비해 비교적 역사가 짧은 신생국이었고,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큰 부를 축적한 나라였습니다. 그리스 본토보다도 전통이나 인습에 덜 얽매이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물질적인 풍요가 철학에 처음 생명을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 이곳에서는 서양사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탈레스 (Thales)가 등장했습니다.
동시대의 다른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 탈레스의 정확한 생몰연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페니키아 계 혈통이었을 거라는 점과 밀레투스에서는 꽤 명문가에 속하는 집안 출신이었을 거라는 점 정도가 전부인 거 같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그를 최초의 철학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남긴 몇마디 주장 덕분입니다.
탈레스는 서양철학이 근대에 이르는 동안 끊임없이 던져온 “무엇이란 무엇인가?” 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첫번째 인물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답을 구하려고 시도했죠. 그는 “세상 만물을 이루는 원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세상이 물로 되어있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그의 답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날에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추상적인 대상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탐구하고자하는 시도를 했다는 데에 중요한 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슷한 시대의 또 다른 밀레투스 사람, 아낙시만드로스 (Anaximander) 는 탈레스의 제자이자 친구였습니다. 그는 탈레스가 고민한 것과 동일한 질문에 원질이란 경험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원질에 ‘아페이론 (Apeiron)’, 즉 무한한 것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역시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원질을 비경험적인 것에서 찾고자 한 철학적 사고방식을 업적으로 남겼습니다. 탈레스가 철학자로서 아무런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과는 다르게 그는 <자연에 관하여>라는 최초의 철학서를 집필하기도 했죠.
한편, 이름이 비슷한 아낙시메네스 (Anaximenes) 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원질이 공기이며, 공기의 농도에 따라 사물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봐도 상당히 합리적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게 2500년 전의 그리스 사람이라는 데에서 놀라움과 경이로움까지 느껴집니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이 세 사람은 밀레투스 학파로 구분됩니다.
애게 해 동부에 위치한 사모스 섬 출신의 피타고라스 (Pythagoras) 는 만물의 원질을 수라고 생각했으며 만물이 수에 기초한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그는 수학과 천문학 연구에 몰두했죠. 직각삼각형을 구성하는 두 직각의 각 변을 한 변으로 하는 두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은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와 같다는 증명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업적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사유했다면,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의 원리를 알아내고자 헸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고, 그 각각의 답은 오늘날의 철학의 큰 갈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밀레투스와 더불어 그리스 최대의 무역도시였던 에페소스 (Ephesus) 출신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는 철학사에서 최초의 현실주의자로 손꼽힙니다.
기원전 5세기, 에페소스의 유력한 귀족가문 출신인 그는 집안 대대로 물려받던 제사장 자리를 사양하고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민중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주의에 큰 혐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에페소스의 민주정을 정치인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정치와도 거리를 두었죠. 이웃국가들이 페르시아와의 전쟁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탁월한 정치적 안목으로 국가적 위기를 피해갔었던 탈레스와는 조금 다르네요.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처럼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의 결과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시도 멈춰있지 않고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불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는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이루어진다고 했죠.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만물의 대립과 변화는 아무런 규칙이 없는 엉망진창의 상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한 세계의 모든 대립과 변화를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우주와 만물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법칙인 로고스 (Logos)가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그 로고스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무작위적이고 불규칙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만물의 원리를 로고스에 따른 끊임없는 변화에서 찾으려고 한 그는 변화와 감각을 중요시한 최초의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헤라클라이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것과 동일한 <자연에 관하여>라는 저작을 남겼다는데, 이것도 현재는 몇개의 문장만으로만 남아있다고 하네요. 여러 모로 수수께끼같은 인물입니다.
한편, 헤라클레이토스보다 조금 늦은 시기, 이탈리아 반도의 한적한 도시 엘리아 (Elea) 출신의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정말 말장난 같은 그의 주장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였습니다. 당연한 말 같기도 하고 언어유희 같기도 한 이 말은 어절 단위로 찬찬히 뜯어보면 그 의미가 언뜻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중입니다. 있음을 의미하죠. 하지만 없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무언가가 없다'라는 방식으로 얘기하지만 없다는 것은 그 무언가 자체를 지칭할 수도 없죠. 없는 그 무언가를 가리키는 순간 그것은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럼 세상에는 있는 것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또 이상한 얘기를 덧붙입니다.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 세상에는 없는 것은 없으며 있는 것은 하나만 있다니, 그럼 이 세상은 하나의 큰 덩어리란 말일까요? 그에 따르면 있는 것이 여러 개 존재하려면 있는 것들 사이에 없는 것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분리된 여러 개의 있는 것이 존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없는 것은 없으므로 있는 것은 하나의 있는 것으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말장난처럼 들리는 이 논증은 훗날에도 계속 이어질 '존재론'이라는 철학 분야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세상이 진실된 것이 아니었고, 이성과 논리를 통해서 추론한 세계만이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철학사에 있어서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고, 파르메니데스는 그들 중 맨 앞에 선 최초의 이상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본토에 철학을 들여온 소피스트들
탈레스나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모두 그리스 철학자들이지만 그리스 본토의 철학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해 철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이오니아에서 그리스 본토로 철학을 옮겨온 이들은 소피스트 (Sophist)들이었죠. 이들이 활동하던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민주정이 발달했고 따라서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시되었습니다. 평민도 수사학과 논리학에 능하다면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공직자가 되기 위해 아테네로 몰려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소피스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지혜를 쌓고자 여러 폴리스들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았고 각 지역의 언어와 관습, 문화를 다양하게 익혔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프로타고라스, 고르디우스, 프로디코스 등의 중요한 소피스트들은 모두 아테네 출신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교사나 변호사, 외교관 등으로 활동하다가 아테네에서 자리를 잡은 인재들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이 중시했던 것은 실용적인 수사학과 논리학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철학의 발전 자체에 크게 기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갈고 닦은 수사학과 논리학을 사용해 법정에서 변론을 하거나 외교무대에서 협상을 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자연히 자신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시켜야 할테니,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철학에 기여한 부분은 탐구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만물은 무엇으로 되어있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질문에만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들은 진리를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은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아테네의 철학계는 약간의 혼란을 겪었지만,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나타나 마침내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하도록 하는 바탕이 마련되었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
이오니아에서 발생한 그리스 철학은 소피스트들에 의해 아테네로 들어와 마침내 아테네 출신인 소크라테스 (Socrates) 때 크게 발전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지식의 상대론을 주장한 것과 다르게 절대적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방법을 추구해, 스스로 진리를 깨닫도록 대화와 질문을 하는 산파술이라는 교육방법을 고안했죠. 비록 그는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지만 그에게 교육을 받은 훌륭한 제자들에 의해 그의 학문적 업적이 이어지면서 후세에 더 큰 명성을 쌓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 경 전성기에 접어든 아테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산파였습니다. 다른 철학자들처럼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니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자란 것 같습니다. 당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였는데 소크라테스 역시 중장보병으로 참전한 기록이 전해지는 걸로 봐서는 적어도 그 정도의 재산은 있었겠네요.
그도 젊은 시절에는 석공이었습니다. 타고나길 우람한 체격에 힘도 세고, 용감하기까지 해서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아테네로 들어온 많은 소피스트들, 그리고 여전히 자연 만물의 근원과 원리에 대해 고민하는 자연철학자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면서 점차 철학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은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을 접하고는 왜 인간의 일이란 자연의 진리처럼 절대적이지 않은지를 고민했습니다.
만약 인간 세계를 관통하는 절대적 진리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 진리에 따라 살테고, 그렇다면 법정에서의 분쟁이나 국가간의 외교마찰, 그리고 전쟁도 없어질테니까요. 소크라테스는 그 절대적 진리를 추구했지만 그는 찾던 답 대신에 다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었죠. 그는 이미 아테네에서 현명한 사람으로 통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스스로가 진리를 모른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뭘까요? 그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진리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었죠.
겸손함까지 갖춘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틀린 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틀린 점을 깨닫을 수 있을만한 질문을 던져서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깨뜨렸죠. 마치 아이를 낳는 산모를 돕는 산파처럼 지혜를 추구하는 제자들을 도와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지혜를 낳는 산파'라고 하고, 그의 교육방식은 산파술이라고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아테네의 권력자들에게는 그가 위험한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정치인들의 정치행위 하나하나에 의문을 품고 정당성을 따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자신들의 권위도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소크라테스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위협도 하고 회유도 했지만 그런 것들이 통하지 않자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를 고소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소크라테스가 자신들에게 좀 고분고분해질 거라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그는 오히려 자신이 정당하고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이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저지른 것이라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아 독배를 마시게 됩니다. 여러 번 타협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은 결백하며 반성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죠. 목숨 대신 신념을 택한 그의 행동은 과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그 어떤 가치보다도 내 목숨, 내 재산이 중요한 요즘 세상에서 신념을 위해 목숨을 포기한 그의 이야기는 깊은 생각 거리를 남깁니다.
이데아는 어디에: 플라톤
한편, 기원전 430년 경 아테네에서 태어난 플라톤 (Plato) 은 여러 모로 소크라테스와 다른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나 봅니다. 플라톤의 친가는 아테네의 왕가였다고 하고 외가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솔론의 후손이었다고 합니다. 못생김의 대명사였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외모가 준수해서 훗날 그가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갔을 때에는 두 사람의 사이를 미심쩍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당시의 아테네에서는 남성의 동성애가 그다지 금기시되지 않았다고 해요. 플라톤은 운동도 잘해서 레슬링 선수로도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전쟁에서 중장보병으로 참전한 것과 달리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기병으로 참전해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만난 플라톤은 곧 그에게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플라톤의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에 빠져든 것이죠. 아마도 깊은 학식을 지닌 소크라테스에 대해 젊고 아직은 미숙한 청년이었던 플라톤이 가진 동경심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합니다.
플라톤은 곧 그의 제자가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서게 되었죠.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에 승복해 독배를 마십니다. 존경하는 스승을 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제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어리석은 정치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미련없이 아테네를 떠나 방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테네를 떠나 그리스 남부를 거쳐 이집트를 여행하는 동안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던 소크라테스의 업적을 이어받아 이데아 (Idea)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하긴 했지만 명확하게 정립하지는 못했던 개념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아마도 추상적 사고를 훈련하고, 불변의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수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뭘까요?
우리는 종이 위에 완벽하게 직선인 선을 그릴 수 있을까요? 완벽한 정사각형이나 완벽은 원은요? 머릿속에서는 가능하지만, 종이 위에 그리든, 철사를 구부려 만들든, 현실세계에 존재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도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아주아주 작은 오차는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사각형이란 무엇인지, 원이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데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플라톤은 이 개념을 수학 뿐만이 아닌 세상 모든 것에 적용했습니다.
그는 세상 만물의 원질은 영원불변한 것이므로 수시로 변하는 현실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이데아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데아를 직접 볼 수 없고 단지 사물을 통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기틀을 마련한 이데아와 사물,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적 관계는 이후 수천 년 동안 서양사상계를 관통하는 이원론의 토대가 됩니다.
개의 이데아는 무엇일까요? 완벽한 개란 존재할까요? 현실에서 우리가 보는 개는 개의 특징을 담고있는 동물일 뿐 완벽한 개 그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개로 분류할 뿐이죠. 이러한 원리는 추상적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정의의 이데아는 무엇일까요? 정의의 이데아는 다수결이나 이익, 불이익의 잣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정의의 이데아를 알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 존재하며, 그런 사람이 나라를 다스릴 때 사회가 정의의 이데아에 가까워 지는 것이죠. 비록 이데아 그 자체가 사회에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플라톤은 어리석은 다수에게 통치를 맡겨 공동체의 파멸에 다다를 위험이 있는 민주정보다는 현명한 철학자 같은 통치자가 통치하는 사회를 더 바람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철인통치론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반대자들이 플라톤을 비판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빌미가 될 수도 있겠네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테네를 떠나 유랑하던 플라톤은 결국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정치에 뛰어드는 대신 후학을 양성할 학교를 설립하고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제자들에게 기하학, 철학 등을 가르쳐 자신의 이론을 실현시킬 철인통치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Alfred N. Whitehead) 가 남긴 말입니다. 플라톤은 팔십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앞선 철학자들과 다르게 그 저작들이 상당부분 현전하고 있습니다. 다른 앞선 철학자의 저술이 남아있었더라면 화이트헤드의 저 말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지만, 플라톤은 기하학과 천문학, 수사학, 정치학, 심지어는 음악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존재, 정의, 영혼 등 훗날의 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화두들을 남기기도 했죠.
그가 남긴 저 화두들은 현대인에게도 큰 의미를 가진 질문입니다. 오늘날에는 플라톤처럼 대단한 철학자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도 가끔씩 곰곰히 생각해보는 주제죠. 2500년 전을 살았던 플라톤은 인류의 그 오랜 물음에 처음으로 논리적인 해답을 내놓고자 했던 철학자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유럽 지성의 근원: 아리스토텔레스
탈레스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위의 철학자들을 거치며 점차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죠. 하지만 철학사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한 인물인 이유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단지 고대 그리스에서 끝나지 않고 중세의 기독교 사상으로 이어졌고, 근대에 들어서면 많은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반박으로 새로운 철학을 수립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그리스 세계에서는 다소 변방으로 여겨지는 스타기라 (Stagera)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그리스의 역사를 대강이나마 정리하면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이름인 것으로 봐서는 아테네나 스파르타쿠스 급의 큰 도시는 아니었나봅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어느 정도 중산층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플라톤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의사, 그것도 마케도니아 왕실의 주치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잃고 친척어른의 손에 자라다가 십대 후반에 아테네로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잘사는 집안의 청년이라면 아테네로 유학을 오는 것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에서 제일 잘나가는 학교는 플라톤이 지도하는 아카데미아였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카데미아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플라톤의 눈에 띄는 학생이었습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뛰어났고, 열정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원래 천재인데 노력도 열심히하면 누구도 이길 수가 없는 일인자가 되겠죠.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두고 '아카데미아의 정신'이라고 칭찬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곳에서 20년 이상 공부하면서 플라톤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업적을 그대로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현실 세계에보다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추상적 세계에 몰두하며 수학이나 기하학을 중시했던 플라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현실의 삶에서의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행복은 무절제하고 쾌락을 쫒는 행복은 아니었죠.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쾌락과 도덕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중용 (Mesotes) 은 거기에 다다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럼 중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가 말하는 중용은 양 극단을 피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양 극단을 밝혀내려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 그리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했죠.
정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철인통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삼은 플라톤과는 다르게 중산층 정도의 경제적 배경을 가진, 중간 정도의 학식을 쌓은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지나치게 큰 부를 쌓은 사람이나 너무 가난한 사람,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이나 너무 무식한 사람은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스승과의 학문적 입장이 서로 상반되었던 것 때문인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제자였음에도 아카데미아의 후계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스승의 곁을 떠나 아소스에서 머물렀고 그 동안 결혼도 했습니다. 그는 결혼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화목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아내와 자식들 모두와 불화가 없이 행복했고, 집안일을 하는 노예들에게도 인정 많은 주인이었습니다. 자신만의 확고한 행복론을 정립한 위대한 철학자이니 그의 일생이 행복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요. 정말 풍성하고 보람찬 인생이었을 거 같습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출신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그치지 않고 정치학, 윤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대부분의 학문 분야의 기틀을 마련하는 놀라운 업적을 남기기도 했죠. 또한 스승들과는 달리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왕자 시절 그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절학자가 되기 보다는 영 다른 방향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리긴 했지만요.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후원을 받아 아테네로 돌아온 이후 리케이온 학원을 열고 소요학파를 창시했습니다. 이 이름은 그가 주로 학생들과 함께 숲속을 거닐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다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학문을 전개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마침내 학문적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현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학문적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지는 이데아라는 개념 역시 현실 세계로 가져와 구체적인 사상으로 전개시켰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질료 (Matter, Hyle) 와 형상 (Form, Eidos) 이라는 개념이었죠. 용어가 다소 생소한 것은 아마도 이 용어들 역시 일본식 번역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질료와 형상이라는 용어 대신에 내용과 형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나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와 사물의 관계를 탐색했다면, 아리스토텔리스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탐구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현실과는 독립된 별개의 존재인 반면에 질료와 형상은 둘 다 사물을 이루는 개념이었죠. 플라톤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데아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각 사물에 내재해 있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 곳에서 본 적이 있는 비유입니다. 아폴론 석상이 있다고 해볼까요. 대리석으로 만든 아폴론 석상입니다. 이 석상의 질료, 즉 내용은 대리석이 될 수도 있고, 장인의 조각기술, 아이디어, 장인정신 같은 것도 될 수 있겠죠. 한편 형상, 즉 형식은 아폴론이 될 수 있겠네요.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했습니다.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곳에 영원불변의 진리가 있다한들 그것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철학은 의미를 잃는다고 했죠. 그는 세상이 정해진 불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직은 현상, 미미한 변화가 모여 세상을 만들며, 세상의 모든 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중세에 들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기독교 사상과도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니 그의 철학이 중세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 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세계를 정복하고 아테네도 결국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자, 알렉산드로스의 후원으로 리케이온을 운영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친마파? 친마케도니아파로 몰립니다. 그러자 위험을 감지한 그는 다시 아테네를 빠져나와 유랑길에 나섰지만 불행하게도 얼마 안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젊지 않은 나이에 집을 떠난 것이 그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가 남긴 업적은 유럽에서 한동안 잊혀졌습니다. 그의 학문을 이어나간 것은 유럽이 아니라 아라비아 세계였죠. 그러다 아라비아어로 된 그의 저작들이 13세기에 들어 라틴어로 번역되어 다시 유럽으로 흘러들아갔고 마침내 토마스 아퀴나스의 손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내내 기독교 사상의 모습으로 계속 이어져내려 오다가 과학혁명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적인 것, 근대과학의 족쇄로 여겨지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죠.
누군가는 근대 철학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파괴 과정이라고 하더라구요. 근대에 들어 철저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겠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철학에서 출발한 중세 신학이 얼마나 거대한 영향력을 지녀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가 아나요.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고도화된 현재, 그것들이 낳는 온갖 폐해들을 경험하는 우리와 후세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또다른 돌파구가 되어줄지도요.
이렇게 밀레투스에서 탄생한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이르러 한번의 절정기를 맞이하는 시점까지를 훑어보았습니다. 세상 만물은 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 모든 사물은 질료와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까지 약 300년의 시간이 흘렀네요. 철학사와 관련된 책을 읽게 된다면 이 부분은 다시 한 번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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