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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동서양의 첫번째 대결, 페르시아 전쟁

고대 그리스 세계는 마치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 같은 느낌입니다. 수백 개의 폴리스들이 자신들의 국익에 따라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때로는 배신을 때리기도 하는 모습이, 마치 요즘 국제사회에서 여러 나라들이 치밀한 외교전을 벌이는 모습을 연상시켜서요. 한편,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애국자와 반대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동시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역시 이 때도 그랬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 세계 밖의 커다란 적 페르시아를 눈 앞에 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일견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위시한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에서 노예부터 귀족들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해 한마음 한뜻으로 이뤄낸 위대한 승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구요. 점점 다가오는 페르시아라는 압도적인 공포를 앞에 두고, 폴리스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오니아의 반란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쪽의 방어전이었기 때문에 먼저 공격을 걸어온 페르시아에서부터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오리엔트 지역의 아케네메네 (Achaemenid) 왕조 페르시아는 기원전 522년에 즉위한 다리우스 1세 (Darius I) 때에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동쪽의 인도와 남쪽의 이집트, 리디아 (Lydia)를 정복하며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후 마침내 서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차지했으니 남은 그리스까지 차지하고자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죠.
 
한편 그리스 세계에서는 가장 동쪽에 치우쳐져 있어서 페르시아 쪽에 가까운 이오니아 (Ionia)에서부터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당시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경제적 이권을 두고 서로 다툼을 벌였는데, 지리적으로 섬이나 해안가에 고립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어떤 우세한 한 세력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거나 세력을 확대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리디아의 영향권 안에 있던 폴리스들이었다가 리디아가 페르시아에게 멸망되자 이번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게 된 상황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페르시아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도시국가 규모인 이오니아 폴리스들이 이미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해 거대한 제국이 된 페르시아를 향해 반란이라니 체급 차이가 너무 나잖아요. 그 전까지 페르시아가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는 동안 상대했던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이오니아는 한참 작은 세력이었습니다. 

 

전제군주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니, 이오니아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압제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페르시아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지 않았을까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요.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했고 그저 공물이나 잘 보내고, 전쟁을 할 때면 군대나 잘 보내는 성의를 보인다면 그걸로 만족했습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세계의 전통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고, 오히려 페르시아가 영역을 크게 확장하면서 이오니아 상인들도 해상무역으로 그 덕을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대로 참고 살만한 그런 상황 아니었을까 싶네요. 하지만 한 사람의 이기적인 결정이 이오니아에 잠재해 있었던 페르시아에 대한 불만을 수면 위로 끌어내 모두를 파국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쟁의 전초전이 될 이 반란에 처음 불을 지핀 폴리스는 밀레투스 (Miletus)였습니다. 밀레투스는 '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우는 최초의 서양철학자 탈레스 (Thales)의 고향이기도 하죠. 기원전 499년,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 (Aristagoras)는 그 즈음 정권교체로 지배세력이 물갈이된 도시국가 낙소스 (Naxos)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낙소스에서 물갈이 당한 귀족들을 규합해 낙소스를 공격하면 자신이 그 곳의 참주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리디아 지역을 관장하던 페르시아의 총독 아르타페르네스 (Artaphernes)가 보낸 지원군도 함께했습니다.

 

밀레투스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은 낙소스를 공격했지만 낙소스는 이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냅니다.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죠. 막대한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에 대한 책임은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엉뚱한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이렇게 된 거 이 참에 페르시아를 향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한 것입니다. 본국으로 돌아가 원정 패배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고 권력을 상실하느니,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해 권력을 유지하는 게 낫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 전쟁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국토를 황폐화시킬 게 분명하더라도요.

 

그러지 않아도 이오니아 전역에서는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그런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을 향해 페르시아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고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에게도 지원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군대를 보낸 건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Eretria) 뿐이었죠. 그 마저도 20척의 전함이 전부일 뿐, 다른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의 엄청난 대군을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밀레투스가 앞장 선 그리스 연합군은 리디아의 수도였던 페르시아의 도시 사르디스 (Sardis)를 공격해 도시를 함락합니다. 하지만 이 공격이 이오니아의 반란을 통틀어 그리스 연합군의 유일한 공격이었죠. 뒤이어 그리스 연합군은 계속해서 패배했고 이 과정에서 연합군으로 참전한 폴리스들도 이탈하게 됩니다. 결국 밀레투스는 페르시아 군에 의해 함락당하며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밀레투스 사람들은 대거 포로가 되어 페르시아로 끌려갔습니다.

 

다리우스 1세의 입장에서는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한 것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그는 그리스 세계에 대한 시선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자신이 내려보낸 참주들로 하여금 이오니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이 지역에서 계속해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반란을 통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그리고 이오니아의 반란을 도운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해서도 무언가 대응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요. 장기적으로 그리스 세계는 제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가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아예 정복하는 게 나은 선택이겠죠. 다리우스 1세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지
이란 파르스 주 시라즈 시 외곽에 남아있는 페르세폴리스 유적지

 

첫번째 원정

페르시아의 원정군은 본대인 페르시아 육군을 주축으로 페니키아 해군과 키프로스 (Cyprus), 이집트까지 합세해 대규모의 다국적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병합한 국가들에서 다양한 국적의 군인들을 차출한 것이죠.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밀레투스를 시작으로 사모스 (Samos), 키오스 (Chios), 레스보스 (Lesbos) 등의 이오니아 연합군을 격파해 1년 만에 소아시아의 해안지대와 섬의 아오니아 폴리스들을 모두 점령했습니다. 

한편, 당시 아테네에서는 평민 계층의 지지를 얻은 클레이스테네스 (Cleisthenes)가 집권 중이었습니다. 그는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행정개혁을 개편하고 전 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500인회를 구성해 입법, 행정기관으로 만들었습니다. 시민들로 구성된 민회에서는 정책의 최종심의를 담당했고 10개의 영향력있는 가문을 선출해 한 가문씩 교대로 군권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도편추방법 (Ostracism)도 이 때 만들어졌죠.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원정군은 아테네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사령관으로는 다리우스 1세의 사위인 마르도니오스 (Mardonius)가 나섰죠. 일단 아테네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길 것 같은 이 원정군은 바닷길을 통해 아테네로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원정군을 가득 실은 페르시아의 함대가 폭풍우를 만나 큰 손해를 입은 것입니다. 페르시아 해군은 지중해 중앙을 가로지르지 않고 해안가를 따라 구불구불 이동했는데 원래도 풍랑이 심한 아토스 (Athos) 곶에서 폭풍우까지 만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력의 30% 정도를 상실합니다.  다리우스 1세는 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번째 원정은 결국 이렇게 페르시아 원정군이 그리스 연합군과 제대로 전투를 치러보기도 전에 큰 타격을 입으면서 다소 싱겁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원정은 전쟁의 일부로 보지 않고, 마라톤 전투가 있었던 그 다음 원정을 첫번째 원정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고 하네요. 제가 본 책들에서도 이 사건은 그냥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 다음 원정의 예고편 정도로만 다루는 경우도 많더라구요.

 

어찌됐든 일단은 페르시아가 원정을 포기하고 물러났지만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다리우스 1세의 시도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바로 두번째 원정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죠. 물론 아테네도 페르시아가 이렇게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머지 않아 페르시아가 다시 공격할 것을 알고 역시 이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습니다. 

두번째 원정

첫번째 원정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치뤄보진 않았지만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국인 아테네를 정복하지 못하면 그리스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테네 역시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그리스 세계 전체가 위험해질 것을 알게 되었죠. 양측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습니다.
 
3년 후, 다리우스 1세는 다시 한 번 정복지에서 차출한 군인들로 다국적, 다민족군을 구성하고 조카인 아르타페네스 (Artaphernes) 와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 (Datis) 두 사령관을 파견했습니다. 이번에는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 아닌, 바다를 가로질러 사모스 섬에서 키클라데스 (Cyclades) 제도의 섬들 사이를 거쳐 아테네로 직진하는 경로를 선택했죠. 저번 원정을 교훈 삼아, 풍랑이 심한 아토스 곶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원정군 함대는 그 경로에 놓은 작은 섬들은 모두 함락시키며 아테네로 진격했습니다. 

기원전 490년, 600여 척의 함선에 탄 페르시아 원정군은 마침내 낙소스 섬을 정복한 뒤, 이오니아 지방의 반란을 도왔던 에레트리아를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사실 이 당시 페르시아 원정군의 규모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을 다루고 있는 기록들에서 병력의 규모가 제각각 다르게 쓰여져 있기 때문이죠. 일단 저 600척이라는 규모는 헤로도토스 (Herodotus)가 서술한 내용입니만 1척의 함선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탑승할 수 있는지는 쓰여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원정이 아닌 다음 원정에 대한 기록에서 한 척의 함선에 44명이 탑승한다는 내용이 있어, 같은 페르시아의 함선이니 비슷한 규모일 것으로 짐작해서 18,000명에서 26,000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합니다.  그 외에 다른 기록에선 또 다른 숫자를 말하고 있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인구수와 영토, 정복지의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대략 25,000명 정도가 오늘날 생각하는 합리적인 숫자라고 하네요. 

 

에레트리아를 함락한 페르시아 원정군은 이제 페이시스트라토스 (Peisistratos)의 아들이자 한때 아테네의 참주였다가 페르시아로 망명한 히피아스 (Hippias)의 도움으로 마라톤 (Marathon) 평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리 조국을 떠나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통치했던 그 조국을 공격하는 적을 돕다니, 씁쓸한 대목입니다. 한편, 아테네에서는 군권을 맡고있는 10가문 출신의 밀티아데스 (Miltiades)가 사령관을 맡아 11,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 군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테네에서는 페르시아 군을 맞이할 준비가 착착 진행된 것 같지만 사실,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를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동안에도 아테네 내부에서는 시민들이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했습니다. 아테네 뿐만이 아니라 다른 폴리스들도 그랬죠. 그리고 그보다 더 앞서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의 각 폴리스들에 특사를 파견해 항복 여부를 물었고, 그 때부터 많은 폴리스들은 이미 갈팡질팡 하고 있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아테네가 쫒아낸 참주 히피아스가 페르시아 쪽에 선 이상,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에 항복하고 그가 다시 권력을 장악한다면 모두 정치적 보복을 당할 것이므로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는 결국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며 페르시아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죠.
 
하지만 모든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페르시아에 맞서 싸우기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페르시아의 편에 서기도 했고, 자신들의 내부사정을 핑계로 애매한 입장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가장 강력한 육군을 가진 스파르타 (Sparta)는 축제의식 기간이라 군사를 보낼 수 없다며 지원을 미뤘고, 결국 아테네는 플라타이아 (Plataea)의 지원만을 받아 홀로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밀티아데스와 칼리마코스 (Callimachus)가 이끄는 아테네 군은 마라톤 평원에 집결했습니다. 밀집대형으로 오른쪽에 아테네 주력군, 왼쪽에 플라타이아 지원군을 배치하고 중앙에 약한 병력을 두어 페르시아 군이 중앙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한 뒤 양 측면을 공격하자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습니다. 

 

아테네 군의 계획은 잘 맞아들어갔습니다. 페르시아 궁수부대의 사정거리 밖에서부터 화살비를 맞으며 전속력으로 돌진한 아테네의 중장보병들은 상대적으로 경무장을 한 페르시아 군의 양측 날개를 꺾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의 취약한 부분의 병력을 페르시아가 뚫고 들어오자 양 측면에서 안으로 돌면서 페르시아 군을 공격했습니다. 페르시아 군은 포위당했고 일부는 해안가의 함선으로 도망쳤습니다. 

 

페르시아 군에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백병전에 능한 중장보병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아테네 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아테네 군이 192명, 지원군인 플라타이아 군이 11명 전사한 데에 비해 페르시아 군은 640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니 거의 일방적이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비록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생존한 상당수의 병력은 재빨리 도주해 함선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테네군이 마라톤에 집결하느라 텅 빈 아테네로 향했습니다. 
 
이제 아테네 군에서는 마라톤 평원을 가로질러 아테네로 돌아가 시민들에게 승전 소식을 알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아테네에 남아있던 시민들이 쳐들어오는 페르시아의 함대를 보고, 마라톤으로 나간 아테네 군이 패배한 것으로 오해해 항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다 이기고 항복하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올림픽 제전의 달리기 선수 출신인 필리피데스 (Philippides)가 전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군이 승리하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고 있으니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항전하라는 소식을 전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패하고 아테네로 들어온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외항인 팔레론 (Phaleron)에 며칠 머무르며 아테네를 주시했지만 단단히 방어태세를 한 아테네를 보니 도무지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이미 마라톤에서의 패배가 이번 원정을 결론지은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결국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도 실패한 게 되어버렸죠. 그 사이 페르시아에서는 다리우스 1세가 승하하고 그의 아들이 즉위했습니다. 이제 그리스 원정이라는 대업은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의 몫으로 넘어갔습니다. 

 

아테네는 이렇게 또 한번 위기를 넘깁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운이 아닌 실력으로 거대한 적을 물리친 것이었죠. 아테네 시민들은 이제 훌륭한 전략과 전술, 시민들의 용기와 굳건한 단합으로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에 맞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적을 앞장서서 물리쳤다는 자부심으로 그 동안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다른 폴리스들에게 아테네의 국력을 뽐낼 수도 있었죠. 

 

한편, 마라톤 평원에서의 승리에 가장 큰 공이 있는 중장보병의 입지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향상되었습니다. 당시 아테네의 군대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방패와 창 또는 검으로 완전무장한 중장보병, 호플리테스 (Hoplite) 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스스로 병장기를 마련해 전투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중산층에 속하는 이들이었죠. 마라톤 전투는 전적으로 이들의 활약으로 승리한 전투였기 때문에 전쟁 후 아테네 사회에서 이들의 발언권이 커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세번째 원정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간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세번째 원정을 준비에 돌입했지만 그 사이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곧바로 원정에 다시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넓어진 영토만큼이나 피정복민들의 저항을 다루는 일도 만만치 않아진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반란을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다시 그리스 원정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스 정복이라는 과업을 물려받은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즉위 초반엔 사실 아버지만큼 그리스 원정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기록에서 신하들이 원정을 재촉하며 그를 설득하는 내용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그렇게 추론하는 것 같습니다. 대왕으로 칭송받는 아버지 다리우스 1세보다 조금은 소심하고 유약한 면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사실 2500년 전 인물의 성격이나 개인적 성향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네요. 확실한 건 크세르크세스가 영화 <300>에 나오는 그런 괴물같은 악당은 아니었다는 거죠.

 

기원전 479년, 이번 원정에서는 첫번째 원정과 비슷한 루트로 해군과 육군이 함께 출병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나섰구요, 함선은 1300척, 병력은 대략 2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원정을 망설였다더니 일단 시작하자 총력을 기울였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심지어 첫번째 원정 때 폭풍우로 대참사가 일어난 아토스 곶을 피해가기 위해 3년에 걸쳐 아토스 반도에 운하를 파서 함대를 이동시킬 정도였습니다. 육로로는 해안선에 가깝게 서쪽으로 이동해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는 루트를 택했습니다. 

 

페르시아로부터 듣도보도 못한 엄청난 규모의 원정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 세계는 아연실색을 하는 한편, 재빨리 방어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아테네의 병권을 쥐고 있었던 젊고 열정이 넘치는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진군하는 페르시아 군을 각각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 주장이 받아들여졌죠. 

 

근데, 정말 국운이라는 게 있는건지 페르시아가 세번째 원정을 시작하기 전 아테네에서는 대형 호재가 하나 터집니다. 아테네 영토 내 라우리온이라는 지역에서 대규모의 은광이 발견된 거였죠. 하지만 아테네에서 은광이 발견된 건 운이라고 쳐도, 그 수입으로 전통적인 육군 강국인 아테네가 대규모의 해군을 육성하기로 한 것은 분명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지닌 인물의 의지 덕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막아내고 더 훗날 아테네를 강력한 해상제국으로 발돋움시켰으니까요. 그런 현명한 선택을 내린 것 역시 테미스토클레스였습니다. 

 

우선 육로에서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1세가 300명의 스파르타 결사대를 포함한 그리스 연합군을 동원해 테르모필레 협곡을 틀어막고 페르시아 군을 기다렸습니다. 협곡은 솟아오른 절벽을 사이에 두고 우회로가 뚫려 있었는데 그 우회로는 포키스라는 폴리스의 군대가 지키기로 했죠. 그리고 마침내 페르시아 군이 협곡으로 들어왔습니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현재 모습을 찾아보니 퇴적 지형이 형성되어서 원래는 바다로 채워져있던 곳이 넓고 평탄한 땅으로 변했더라구요. 하지만 당시에는 전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지형이었다고 하니, 페르시아 군이 수적인 우세로 한꺼번에 밀어붙이는게 불가능했을 겁니다. 페르시아 군을 맞이한 스파르타의 결사대는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젊은 시절을 오직 군사훈련으로만 보낸 병사들이니 얼마나 잘 싸웠을까요.

 

레오니다스 1세와 같은 영웅이 있다면 에피알테스 같은 배신자도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군에게 협곡을 우회하는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적은 병력의 포키스 군이 지키고 있던 그 우회로이죠. 페르시아는 그 우회로로도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끝없이 밀려드는 페르시아 군에 스파르타의 결사대도, 포키스 군도 무너졌습니다. 육로에서는 패배한 게 되었지만 테르모필레에서 전멸한 스파르타 결사대의 소식은 다른 그리스 연합군들의 사기를 북돋았습니다. 이런게 바로 졌잘싸가 아닐지...

 

육로가 뚫리자 아르테미시온 해협의 그리스 해군은 일단 아테네로 철수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즉시 성인 남성들을 징집해 해군을 살라미스 섬 앞에 집결시키고 여성과 노약자들은 살라미스 섬으로 대피시켰죠. 아테네로 들어온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시민들이 도시를 비우고 피난을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그리스 해군이 포진해있는 살라미스 섬으로 이동해 섬을 포위했습니다. 세번째 원정의 마지막 분수령이 될 살라미스 해전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군보다 유리한 점이라면 살라미스 섬 주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겠죠? 이들은 그리스 육군이 페르시아 군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막으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살라미스 해협의 좁은 지형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해협은 좁은 지형으로 인한 병목현상도 문제지만 그 사이를 지나는 거센 물살도 문제잖아요. 그리스 해군의 생각대로 페르시아의 대규모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전열이 흐트러졌습니다. 

 

당시 그리스 해군의 함선들은 뱃머리에 충각이라고 하는 뾰족한 청동 돌출부가 있는 삼단노선이었습니다. 트리에레스라고도 하는 이 함선은 이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승리로 인기가 많아지면서 고대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운용됩니다. 그리스 해군은  트리에레스의 청동제 충각을 페르시아 함선 측면에 들이받아 공격한뒤 함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또는 페르시아의 함선들 사이로 끼어들며 양 옆의 함선들의 노를 부러뜨리기도 했죠.

 

이렇게 좁은 해협의 거센 물살과 그리스 해군의 공격으로 고전하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파도의 방향이 바뀌며 페르시아 함선들은 살라미스 섬으로 진입하는 반대 방향으로 떠밀렸습니다. 그러자 그 뒤로 주욱 늘어서 있던 다른 함선들도 서로 뒤엉키며 난장판이 되었죠.  페르시아 군의 전사자는 4만 명이 넘고 함선은 200 척이 넘게 파손되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르도니우스와 일부 병력을 그리스에 남겨두고 자신은 페르시아로 귀환했습니다. 

 

3차 원정은 끝났지만 그리스 연합군은 그 뒤로도 이오니아 지방을 되찾기위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양측의 전쟁은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죠. 전쟁이 끝나고 난 뒤 그리스 세계의 수호에 혁혁한 공을 세운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같은 외부 세력의 공격에 대비하는 상호방위체제를 마련하고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던 중장보병들의 사회적 입지가 전쟁 후 크게 향상되었던 것 기억하시나요? 살라미스 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삼단노선 한 척의 승선인원 200명 중 170명을 차지한 노잡이 병사들이었습니다. 구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노를 저으며 함선을 민첩하게 움직이는 역할을 한 이들은 전쟁 이후 자신들의 발언권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죠. 이들은 중장보병들처럼 비용을 들여서 무장을 단단히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주로 무산계급, 하층민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살라미스 해전은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사회 하층부까지 깊게 뿌리내리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페르시아 전쟁이 끝났네요. 주로 그리스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흘러가다보니 페르시아가 마치 악의 제국처럼 보이진 않을까 싶은데요. 그리스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그런 국뽕에 찰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당시의 페르시아야말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뒤를 이어 오리엔트를 재통일한 전세계 최고의 패권국가였으니...... 당시의 영토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보다도 넓었고,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고 하네요.

 

또한 페르시아는 다방면에서 그리스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의 선진 문물을 가진 제국이었습니다. 아테네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민주정마저도 당시의 관점으로는 페르시아의 전제군주제보다 후진적인 정치체제였다고 하네요. 여러 나라를 정복한 제국이다보니 다민족 국가였고, 그 때문에 피정복 민족의 문화와 다양성이 받아들여지는 관용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복잡한 민족 구성을 가진 나라가 200년 이상 번영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죠. 

 

일례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사의 왕 고레스는 바빌론 유수 때 붙잡혀온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바빌로니아가 빼앗은 그들의 성유물을 돌려주면서 성전을 건축할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배타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유대인들마저도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고레스 왕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며 칭송했죠. 바사의 왕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 2세였습니다. 

 

한편, 이토록 어마어마한 규모의 원정이 쫄딱 망했으니 페르시아의 국운도 이제 기울기 시작하니 않을까 싶지만, 잠시 간의 침체를 겪었을 뿐 페르시아는 그 뒤로도 100년 이상 존속했습니다. 당시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의 많은 주변 세력들 중 제법 강성한 세력일 뿐 결코 대등한 상대는 아니었죠. 이 강력한 제국은 그리스 세계 최고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3세가 등장하고나서야 멸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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