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언젠가는 꼭 직접 가보고 싶은 나라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난 이란이나 이라크는 요즘은 여행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하고, 이집트는 갈 수는 있지겠만 역시 쉬운 여행지는 아닌 거 같은데, 그리스 정도는 가볼만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굳이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여행지이구요. 한때 국가부도 위기사태를 겪으며 추락을 거듭하던 그리스 경제도 요즘은 다시 되살아나 활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니 반갑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오리엔트 지역을 밝힌 문명의 빛은 이제 서서히 유럽 대륙으로 전해져 그리스 지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리엔트와 유럽 사이, 동지중해에서 유독 눈에 띄는 큰 섬, 크레타 (Crete) 섬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대략 제주도의 4배 정도 되는 섬이라고 하는데, 여기를 정확히 유럽을 치기에는 위치가 좀 애매합니다. 분명 유럽에 가깝긴 하지만 아프리카 북부와도 가깝고,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도 멀지 않아서요.
미노스 왕의 황소 아들
사실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람의 흔적은 기원전 9000년경의 것이라고 합니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인들이었죠. 그러다 이집트에서 메네스 왕이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지 100년 정도 뒤인 기원전 3000년 경에는 청동기 문명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하고 문자를 사용하는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크레타 섬의 문자, 선형문자 A는 주변의 다른 나라의 언어들과는 공통점이 없고 발굴된 문자의 표본 수도 적어서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사진으로만 봐도 온화한 날씨에 사람이 살기 정말 좋은 쾌적한 기후인 것 같죠? 크레타 사람들은 일찍부터 올리브나 포도 같은 작물들로 농사를 지었구요, 섬이니까 당연히 해산물도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적들을 보면 어업과 관련된 것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살기가 좋으니 인구는 계속 늘어나서 최대규모였을 때에는 8만명 정도였을 거라고 합니다. 크레타인들은 농업과 어업만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곧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크레타 섬은 지리적으로도 무역에 안성맞춤이었죠.
크레타 문명은 이들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노스 (Minos) 왕의 이름을 따서 미노아 (Minoa) 문명이라고도 합니다. 미노스 왕과 관련된 유명한 신화가 하나 있습니다. 신화라고는 하지만 전혀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겨진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이 시기의 역사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면 좋을 거 같아요.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제우스의 아들들이었죠. 미노스 왕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형제들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며, 신들의 선택을 받은 위대한 왕임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한가지 부탁을 합니다. 자신에게 훌륭한 황소를 보내준다면 그 황소를 제물로 바쳐서 포세이돈을 기쁘게 하겠다고요. 포세이돈이 보낸 멋진 황소가 미노스 왕에게 도착하자 사람들은 마침내 미노스 왕이 신들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에게 보답을 할 차례인데, 미노스 왕은 너무 멋진 황소에 욕심이 생겨서 그것을 포세이돈에게 바치지 않고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 소가 아닌 다른 평범한 소를 구해 제물로 바친거죠. 화가 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소를 사랑하게 되는 저주를 내렸고 파시파에 왕비는 황소와의 사이에서 머리가 황소인 아들 미노타우로스 (Minotaurus)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미노스 왕은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유폐하고, 유럽 대륙 끄트머리에 있던 아테네로부터 인신조공으로 받은 사람들을 미궁에 집어넣어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삼았습니다.
비록 신화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 속에서 당시의 크레타와 아테네의 관계를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크레타가 육지의 아테네로부터 인신조공을 받았다는 점에서 육지보다 먼저 강력한 세력을 이룬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죠. 크레타 섬의 위치는 당시 배를 타고 동지중해를 항해하다보면 쉽게 눈에 띄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리엔트의 선진문물이 유입되기도 쉬웠죠. 또 북아프리카와 유럽, 오리엔트 지역의 중간쯤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해상무역도시로 일찍부터 발전했던 것입니다.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6세기 경에 왕궁인 크노소스 (Knossos) 궁을 비롯한 섬 전체의 건물들이 한꺼번에 파괴될 정도로 강력한 자연재해를 경험했습니다. 그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화산폭발일 것이라는 게 제일 유력한 설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런 큰 재해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된 이후 다시 문명을 재건하고 무너진 크노소스 궁도 다시 세웠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크노소스 중은 이 때 다시 지은 부분이라고 하네요.
크레타 문명은 지중해 동부의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하면서 각종 스포츠 행사를 주최하고 이 지역의 패자 역할을 했습니다. 에게 해 남부의 다도해 지역인 키클라데스 (Cyclades) 제도 일대에서도 크레타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시기 청동기 문명이 발전했죠. 하지만 크레타 섬이 큰 섬이긴 해도 섬이다보니 인구가 더 늘어나고 도시가 팽창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겠죠? 그래서 문명의 중심지는 곧 육지인 그리스로 이동했습니다. 크레타에 복속되어 공물을 바치던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14세기에는 오히려 크레타를 침공한 것입니다.
앞서 미노타우루스 신화에서 이어지는 테세우스 신화에도 이 얘기가 녹아있습니다. 매년 크레타로 사람을 공물로 바치던 아테네에서는 아이게우스 (Aegeus) 왕의 아들인 테세우스 (Theseus) 왕자가 스스로 공물이 되어 크레타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에게서 얻은 실타래에서 실을 풀면서 미궁으로 들어갑니다. 미궁에서 미노타우루스를 해치운 테세우스는 실을 따라 미궁 밖으로 나오는 데에 성공하고 아리아드네와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는 이야기......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이제 아테네가 크레타에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의미같죠?
이를 뒷바침해줄 만한 유물도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영국의 역사학자 아서 에번스 (Sir Arthur John Evans)는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면서 이 당시의 토판문서들을 대량 발굴했습니다. 이 때 발견된 문서에는 선형문자 A 와는 다르게 고대 그리스어와의 공통점이 뚜렷한 선형문자 B가 사용되었죠. 이는 크레타 문명 후기에 접어들면 이미 그리스인들이 크레타 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선형문자 B는 고대 그리스어와의 공통점 덕분에 현재는 모두 해독된 상태입니다.
크레타 문명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도 지금은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는 거 같은데요. 하나는 위에서 말한 화산폭발이 원인이라는 설입니다. 이 때의 대규모의 화산폭발로 도시가 대거 파괴되자 이를 재건하느라 국력이 소모되었고, 오래도록 화산재가 농사를 방해해 흉년이 계속되면서 서서히 쇠퇴했다는 이야기이죠.
다른 하나는 크레타 문명을 압도하는 새로운 문명, 미케네문명의 출현이었습니다. 미케네인들은 테세우스 신화의 내용처럼 원래는 크레타에 공물을 바치던 나라였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급격히 성장해 크레타인들을 공격하고 급기야 크레타 문명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하는 데에 결정타를 제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럽 대륙으로 전해진 문명
이제 문명의 빛은 크레타에서 유럽 대륙으로 전해졌습니다. 유럽에서 오리엔트 세계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할만한
그리스 지역에는 그리스의 원주민인 펠라스기 (Pelasgian)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소아시아 계통의 구석기인이었을 거라는데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하네요. 그러다 기원전 2000년 경 인도유럽어족의 한 일파인 아카이아 (Achaian)인이 유입되었습니다. 아카이아인은 그리스의 남쪽인 펠로폰네소스 (Peloponnese) 반도 지역에 정착해 필로스, 티린스, 아테네 등의 작은 왕국들을 이루었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곳이 바로 미케네 (Mycenae) 왕국이었습니다.
기원전 1600년경에 이미 크레타의 문명 수준을 따라잡은 미케네는 크레타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유적지들을 보면, 크레타의 왕궁은 사방이 탁 트인 데에 비해 미케네의 왕궁은 성벽을 둘러 요새화되어 있고요. 예술작품도 크레타 섬에 남아있는 것은 고기잡이나 춤추는 사람들, 운동경기를 하는 모습인 데에 비해 미케네 문명은 주로 사냥이나 전쟁을 주제로 한 유물들을 많이 남겼다고 합니다.
이후 미케네는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중,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서쪽 지방에서 또 다른 강력한 문명권과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인도유럽어계 민족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왕국이 바로 그들이었죠. 사실, 호메로스 (Homeros)의 <일리아드 (Illiad)>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은 오랜동안 그저 신화 속 이야기만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트로이도 전설 속의 나라에만 머물러 있었죠.
하지만 19세기에 들어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트로이 전설을 실제 역사로 믿고 유적을 발굴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 말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죠. 슐리만이 트로이와 미케네 문명의 유적을 발굴한 이야기 또한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지만... 일단은 건너뛰기로 하구요.
처음에는 그저 전설로 치부되었던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들이 발굴되자 학자들은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학설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중에는 미케네인들이 상업과 약탈을 병행하던 해적집단이었기 때문에 물자가 풍부한 트로이를 약탈했다는 얘기도 있구요. 당시 중개무역으로 큰 돈을 벌던 미케네가 자신들의 상업활동에 경쟁자가 되는 트로이인들을 멸망시킨 거라는 얘기, 또 당시 아나톨리아 지역을 지배하던 히타이트가 약화된 틈을 타 미케네인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한 거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이 미케네를 중심으로 한 아카이아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실제로 미케네인들은 트로이 전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원전 1300년경 이후에도 승승장구 발전을 계속했습니다. 아가멤논 왕의 황금마스크와 같은 금 세공품과 키클롭스의 벽, 사자의 문 등의 석조 건축물들이 미케네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죠.
하지만 미케네는 기원전 12-11세기 철기로 무장한 그리스계 민족인 도리스 (Dorian)인들이 남하하면서 점차 몰락합니다. 트로이 문명은 멸망시켰지만 도리스인들에게는 진 거죠. 사실 미케네의 몰락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스인의 남하와 더불어 수수께기의 바다 민족의 등장, 또는 지진이나 해일 등의 자연재해 등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구요.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급격한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도리스인들 말고도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민족이동이 활발하다보니 여기저기에서 몰려온 이민족들이 미케네로 들이닥치면서 몰락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바다 민족 이야기일 것 같아요. 이들은 당시 지중해 해안가에 분포된 여러 청동기 문명들을 멸망으로 이끈 수수께끼의 민족입니다. 아직 이들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의 출현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 히타이트, 그리스 등이 정치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고 일부는 아예 문명이 몰락했습니다. 미케네 문명 또한 이들의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도 매우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실 민족이동이 한 문명을 몰락으로 이끌 만큼 파괴적인 현상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오늘날 내전이나 정치불안 등의 문제로 대거 발생한 난민들이, 이주한 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더욱이 아직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지도 않았고 자원도 풍부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이들이 우리 마을로 우르르 들이닥친다는 것이 충분히 재앙과 같은 일일 거에요.
한편, 그리스 세계는 도리스인의 남하와 미케네의 몰락 이후 기원전 9-8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 암흑시대를 맞이합니다. 이 시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암흑시대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정말 문명이 모두 파괴되어 암흑같은 시절이 된 건지, 멀쩡하게 잘 살았지만 단지 기록이 없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건지 그것조차 알 수가 없네요. 근데 이 시기가 지나면 또 호메로스 같은 작가들이 이후 시대를 기록한 문헌들이 나옵니다. 그런걸 보면 모든 게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간 건 아닌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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