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게요? 독일의 지도학자인 제바스티안 뮌스터 (Sebastian Münster)입니다. 독일 통일 전 서독의 100 마르크 지폐 도안의 주인공이죠. 이 분이 지리학자가 아닌 지도학자인 이유는 '코스모그라피아 (Cosmographia)'라는 세계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6개국어로 번역되어 7만부가 넘게 팔리며 전 유럽을 사로잡은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에는 코레아에 대한 설명도 짤막하게나마 들어있다고 합니다.
지도를 만든 게 뭐 대단한 일인가 싶긴 하지만,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요.) '코스모그라피아'는 놀랍게도 저자가 현지를 장거리로 여행하거나 탐사하는 일 없이, 단지 서재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지리상의 발견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대를 살았던 뮌스터는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고, 대서양 건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지구를 한바퀴 돌아 전세계를 항해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날마다 접하고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잘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세상 구석구석에 대해 알 수 있겠는데?'
저도 어린 시절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심심하면 한번씩 사회과부도 책을 뒤적이던 때가 있었는데, 어른이 되고나니 이제 정말 방구석에서도 세계 곳곳을 골목골목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더라구요. 물론 직접 여행을 가면 더 좋겠지만,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언젠가는 꼭 가봐야지.'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왕에 방구석 세계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수집한 정보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에 이런 블로그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카테고리에서는 서양사와 관련된 여러 책들을 읽고 서양사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문명, 메소포타미아
서양사를 소개하는 많은 책들이 바로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류가 최로로 건설한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죠. 물론 인류가 문명을 이루기 전에는 분명 작은 마을을 이루어서 살았을 것입니다.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모여살기 시작한 최초의 땅은 서아시아 북부, 소아시아,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Anatolia) 고원지대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도시 유적지로 알려진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 약 12000년 전), 차탈회위크 (Çatalhöyük 약 7000년 전) 등이 이 지역에 위치해 있기도 하구요. 이 지역에서 최초로 농경과 사육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증거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대규모의 도시가 들어서기에는 다소 비좁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인구가 점차 증가하고 마을의 규모가 커지자 정착지는 이라크 지역, 유프라테스 (Euphrates) 강과 티그리스 (Tigris) 강 사이의 지역으로 서서히 이동했을 것입니다. 사방이 탁 트인 주변 지형 덕분에 강 사이의 긴 땅을 따라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최초의 도시인 우루크 (Uruk)가 건설되었습니다. 이후 우르 (Ur), 키시 (Kish), 라가시 (Lagashi) 등 여러 개의 도시국가들이 형성되었죠.
이렇게 형성된 도시국가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기원전 4500년경 두 강의 하류에 세워진 수메르인 (Sumerians)들의 도시였습니다. 수메르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지금까지도 인류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이들로 알려져 있죠. 다른 한 쪽은 캅카스 지역에서 발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셈족 출신인 아카드인 (Akkadian)들의 도시입니다. 이들은 기원전 2300년경 두 강의 중류에 아카드 문명 (Akkadian empire) 을 건설했습니다.
한편, 이들보다는 조금 마이너하지만 그보다 더 남쪽인 지금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와 요르단 지역에도 셈족의 일파들이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비록 이 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역사의 주역으로서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 명성을 능가하는 중요한 유산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일단 이 당시에는 성서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로 일컫어진 예리코 (Jericho)라는 도시가 요르단 지역에 건설된 정도였습니다.
기원전 2350년 경, 사르곤 1세 (Sargon I) 는 아카드 문명권과 수메르 문명권을 최초로 통일했습니다. 그는 통일 왕조인 아카드 왕조를 이룩하고 서쪽의 시리아에서부터 동쪽 이란 지방의 엘람 (Elam)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사계의 왕'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죠. 아카드 왕조는 그의 손자인 나람신 (Naram-Sin) 왕 때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호전적인 수수께끼의 원시부족 구티 (Guti)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기원전 21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한 구티족을 몰아낸 것은 수메르인 도시인 우루크의 우투헤갈 (Utuhegal) 왕이었습니다. 그는 구티 왕조를 몰아냈지만 자신의 왕조를 세우기 전에 사촌인 우르남무 (Urnammu)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했습니다. 그렇게 우르 제3왕조를 창건한 우루남무 왕은 나라 안팎을 정비하며 번영을 이룩했죠. 그가 편찬한 우르남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의 기록을 깨고 현전하는 최고의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르 제3왕조는 그의 후계자인 슐기 (Shulgi)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그 이후로는 도시가 인접한 두 강의 강줄기가 바뀌면서 계속된 가뭄으로 점차 쇠퇴했습니다.
기원전 2000년경 두 강의 남부 도시들이 쇠퇴하자 그와는 반대로 새롭게 떠오른 북부 도시가 있었습니다. 역시 셈족의 한 일파인 아모리인 (Amorite)이 세운 도시 바빌론 (Babylon)이었죠. 바빌론은 동쪽의 엘람과 구티족이 연합해 우르를 함락시키자 라사 (Larsa), 이신 (Isin), 마리 (Mari) 등의 북부 도시들과 함께 신흥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다 기원전 1787년에서 1755년 사이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Hammurabi) 왕 때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석권하고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바빌로니아라는 나라 이름은 나중에도 또 등장하기 때문에 이 때의 바빌로니아를 '고(古) 바빌로니아 (Old Babylonian empire)'로 부르기도 하죠.
하지만 강력한 왕이 사라지고 나면 나라가 쇠퇴하는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되었습니다. 함무라비 왕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바빌로니아는 그의 사후에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급기야 아시리아 (Assyria)가 새롭게 독립하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차지했습니다. 한편, 아나톨리아에서는 히타이트 (Hittite)가 새롭게 등장했죠. 이 시점에 아시리아와 히타이트 중에서 바빌로니아에게 더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히타이트 쪽이었습니다.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급성장한 히타이트는 무르실리 1세 (Mursili I) 때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켜버립니다.
일단 정복을 하긴 했는데, 아직 히타이트에게는 방대한 제국을 다스릴 체계적이고 고도화된 행정력이 없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전쟁에서는 압도적이었지만 정작 그렇게 정복한 지역을 다스릴 문화적 역량은 없었던 거죠. 이들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는 그냥 두고 다시 아나톨리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떠나고 난 바빌로니아에는 카시트인 (Kassites)들이 들어와 기원전 1595년 카시트 왕조를 열었습니다. 함무라비 왕의 바빌로니아가 고 바빌로니아였던 것처럼 카시트 왕조 바빌로니아를 '중(中) 바빌로니아'라고도 해요.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새롭게 독립한 아시리아가, 남부는 바빌로니아의 카시트 왕조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아시리아와 카시트 왕조 바빌로니아는 서로 협정을 맺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한편,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기원한 새로운 세력이 이 곳 문명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인도의 드라비다(Dravidian)족을 멸망시키며 서쪽으로 이동한 인도유럽어족의 한 일파, 아리아 (Aryan)인이었습니다. 원래 유목민족이었던 아리아인은 기원전 18세기에 들어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이 발전하자 유목을 그만두고 정착할 만한 곳을 찾아 이동한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16세기, 아리아인의 한 분파일 것으로 추측되는 후르리 (Hurrian)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미탄니 (Mitanni) 왕국을 수립했습니다. 미탄니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아시리아를 차지하며 성장했죠. 그러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계속 팽창하며 시리아 일대까지 내려온 히타이트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리아는 미탄니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히타이트는 곧 미탄니와 대결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히타이트의 승리로 끝났죠. 이렇게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멸망시키자, 미탄니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시리아가 다시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서남아시아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피의 제국으로 거듭나죠.
많은 나라들이 등장했다 사라졌으니 잠깐 정리를 해볼까요? 처음 문명이 등장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수메르와 아카드 문명이 사르곤 1세의 아카드 제국으로 통일되었다가 구티족 왕조, 그리고 우르남무가 세운 우르 제3왕조를 거쳐 함무라비 왕이 통치한 고 바빌로니아에 의해 재통일되었죠. 그 후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가 독립해서 분리되고 북쪽 아나톨리아에서 내려온 히타이트에 의해 멸망되면서 카시트 왕조에게 패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이후 아시리아는 동쪽에서 밀려온 아리아인들이 세운 미탄니에 의해 복속되었다가 이들이 히타이트에 의해 멸망하자 다시 독립을 얻게 된 것이죠.
또 다른 빛,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새겨날 즈음으로 다시 되돌아가 볼까요? 지금의 이집트 지역인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 나일 (Nile) 강 유역에서도 역시 문명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나일 강의 발원지에는 주기적으로 큰 비가 내려서 그 하류 지역도 주기적으로 물이 크게 불어나면서 범람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범람했던 지역에 물이 빠지고 나면 강물의 풍부한 유기물들이 범람지역에 남아 땅이 아주 비옥해졌죠.
사람들은 그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물이 계속 불어나있거나, 아니면 불규칙적으로 범람을 했다면 그런 농사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일 강의 범람은 규칙적이었고, 그런 나일 강을 잘 다스리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곳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농사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물이 불어나 있을 때에는 고지대로 피해 있다가 물이 빠진 시기에 다시 그곳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얻어가는 것이었죠.
나일 강변을 따라서 촌락들이 형성되어 점차 퍼져나가고, 시간이 흐르자 남쪽의 상류에는 상이집트 (Upper Egypt), 북쪽의 하류에는 하이집트 (Lower Egypt)가 생겼습니다. 이 둘 중 먼저 발전한 것은 상이집트였습니다. 상이집트의 티니스 (Thinis)라는 도시가 처음으로 주변의 다른 도시들을 정복해 상이집트 통일왕국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이집트 지역마저 정복하면서 처음으로 하나의 왕국이 들어서게 되었죠. 기원전 3100년 경, 제1왕조의 메네스 (Menes) 왕이 최초로 통일 이집트 왕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여러 민족, 여러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 비하면 이집트의 고대사는 그 보다 훨씬 심플합니다. 사료가 매우 부족한 초기왕조시대를 지나면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가 존재하며, 각 시대가 끝나면 중간기가 있었죠. 기원전 2800년경 고왕국시대로 진입한 이집트에서는 이미 파라오의 권위가 신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나일 강의 치수 능력을 바탕으로 절대권력을 손에 쥔 파라오들은 곧 자신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피라미드를 건설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피라미드들이 바로 고왕국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제일 처음으로 피라미드를 건축한 파라오는 3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조세르 (Djoser)였습니다. 그가 건립한 6층 짜리 계단식 피라미드는 아직도 사카라 (Saqqara) 지방에 남아있습니다. 피라미드라고 하는데 계단으로 된 탑 형태라 모양이 좀 특이하긴 해요. 한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각뿔 모양의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589년에 즉위한 4왕조의 쿠푸 (Khufu) 파라오가 남긴 것입니다. 쿠푸 파라오의 시대에 고왕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대단한 피라미드를 남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아들인 카프레 (Khafre) 파라오는 스핑크스를 건설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이 국가 재정에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파라오마다 경쟁적으로 선대의 것보다 더 큰 피라미드를 건설하려고 무리하게 자원을 투입하는 바람에 이집트는 곧 재정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규칙적으로 범람하던 나일 강이 범람을 하지 않으면서 뜻하지 않은 가뭄도 발생했죠. 나일 강의 치수능력으로 권위를 쌓아올린 파라오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틈타 지방의 귀족세력들이 앞다투어 독립을 선언하며 난립했습니다. 이집트의 고왕국 시대는 이렇게 혼란 속에 막을 내리고 첫번째 중간기가 찾아왔죠.
여러 귀족들이 난립하던 중간기를 끝낸 것은 테베를 중심으로 나라를 수습한 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 (Mentuhotep II) 였습니다. 이후로 이집트에는 중왕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 (Senwusret III) 때가 되면 지방귀족들은 모두 정리되고 강력한 통일왕국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죠. 세누스레트 3세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중왕국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전성기 뒤에는 쇠퇴가 찾아옵니다. 기원전 2055년 시작된 중왕국 시대는 전성기 이후 조금씩 쇠퇴하다가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내려온 셈족 유목민 힉소스 (Hyksos)족에 의해서 기원전 1650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신기하게도 고대 이집트는 당대 최고의 선진 문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까지 군대에서 전차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평평한 지형에서 말이 끄는 전차는 오늘날 탱크와 같은 위력을 가졌다는데 말이에요. 반면에 힉소스족은 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군대를 보유했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아직 기록에 따라 논란이 있습니다.
이집트를 차지한 힉소스족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왕조를 건립했습니다. 이집트로서는 마치 우리의 일제침략기 같은 고난의 시기를 겪게 된 것이었죠. 그리고 그렇게 외국인 파라오의 통치 하에서 100 여년을 보낸 뒤, 기원전 1550년 18왕조의 아흐모세 1세 (Ahmose I)에 의해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는 3500년 고대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죠. 18왕조의 하트셉수트 파라오 때에는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상업을 부흥시키고 투트모세 3세 때에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며 메소포타미아의 미탄니를 공격해 이집트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습니다. 나일 강을 벗어나 중동으로까지 세력을 확대한 것입니다.
한편, 강력한 권위를 가진 파라오가 연속해서 등장하자, 파라오의 절대권력에 기생해 함께 성장한 사제 계급이 도리어 파라오의 권위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크나텐 (Akhnaten) 파라오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일종의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아문-라 (Amun-Ra) 신을 중심으로 한 다신교를 믿었는데, 아케나톤은 아문-라 신을 섬기는 사제들을 견제하고자 이를 폐지하고 모든 신들을 정리해 유일신 아톤을 받드는 새로운 신앙체계를 수립한 것이었죠.
하지만 아케나톤의 개혁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래서인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종교를 바꾸는게 일반 대중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정책이었죠. 그의 집권기 동안 유지되던 아톤 신앙은 그의 사후 즉위한 투탕카멘 (Tutankhamun) 때 사제 계급의 반발로 폐지되고 다시 예전의 아문-라 신앙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의 개혁은 이렇게 얼마 안 가 끝나게 되었지만 그가 남긴 일신교 신앙이 훗날 유대교라는 단일신교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기원전 1279년에는 19왕조의 람세스 2세 (Ramses II) 가 즉위해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파라오로 군림했습니다. 이미 즉위 전부터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그는 이집트가 아케나톤과 투탕카멘 시기 쇠퇴하는 동안 영향력을 키우며 남하하던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 (Muwatalli II)와 카데시 (Kadesh)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당시의 히타이트도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대제국이었던지라 비록 전투에서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요. 하지만 이 전투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인류 최초의 국제전이라는 데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승패가 확실히 나지 않고 평화조약으로 마무리되면서 이 때의 평화조약 기록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조약 기록이 되었구요.
신왕국 시대는 이렇게 람세스 2세를 끝으로 전성기를 마무리합니다. 이집트 전통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였죠. 이 전성기는 수수께끼의 바다민족의 등장으로 끝나게 되는데요.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지중해의 청동기 문명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이 바다민족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말 그대로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을 휘젓고 다니며 그 일대의 고대문명들을 모두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히타이트는 아예 멸망해버리구요, 그리스에서도 미케네 (Micane) 문명이 무너지고 암흑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집트 역시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신왕국 시대가 저물고 또 한번의 중간기가 찾아오게 되죠.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민족의 연합 해적이라는 설에서부터 소빙하기를 피해 내려온 난민이라는 설까지 다양한 얘기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국력이 쇠퇴한 이집트는 파라오의 권위가 급격히 추락하면서 다시 사제 계급이 파라오를 위협했습니다.
이후 이집트는 줄곧 외세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나일 강 상류에서는 쿠시 왕국 (Kush kingdom)이 북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한때 이들에 의해 정복되기도 하구요.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Persia)가 차례대로 등장하며 사실상 이들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마케도니아 (Macedonia)의 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ros III)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에는 또 마케도니아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죠.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벌어진 내전으로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Ptolemaic dynasty)가 들어서며 잠깐 동안의 중흥기를 맞이했다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긴 역사네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발생한 문명은 이제 지중해 한가운데의 크레타 섬으로 전해져 서구문명을 탄생시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문명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구 문명이 오리엔트의 문명수준을 따라잡는 데에는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죠. 이집트는 비록 쇠퇴하긴 했어도 그리스계의 32왕조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 Philopator)가 자결하며 로마에 정복될 때까지 문명을 이어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제국이 등장하며 서구 역사에 또 한번의 대사건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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