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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군사독재와 카이사르의 등장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동서 양쪽으로 팽창한 로마가 아직 가지 않은 길이 있었습니다. 갈리아인들과 게르만족이 차지하고 있는 북쪽이었죠. 이들의 문명 수준은 로마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아직 부족 연맹체를 형성한 정도였지만 언제라도 로마를 공격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 역시 로마로서는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제 게르만족이 새롭게 등장했네요. 게르만족은 보통 오늘날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독일, 그리고 체코 일부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통칭합니다. 게르만이라는 말 자체는 아직까지도 어디에서 온 말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기원전 8세기 쯤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에서 발생해서 꾸준히 남하해 갈리아인들 일부를 몰아내고 로마의 북쪽 국경 일부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외적의 침입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면 그만큼 군대의 역할이 중요하겠죠. 계속된 정복활동으로 로마군은 당대 어느 나라의 군대보다도 체계화되어 있었고 전투경험도 많은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내부에는, 아니 군대 뿐만이 아닌 로마 사회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에도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가 일찍이 깨닫고 걱정했었지만 그들의 개혁이 실패하면서 이미 한번 해결 기회를 놓쳤던 그 문제였습니다. 
 
로마군은 이때까지도 병농일치의 시민군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경작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소집이 되면 자비로 무기와 방어구를 준비해 병역을 이행하는 방식이죠. 하지만 정복전쟁이 계속되고 전투에 투입되는 기간이 늘어나자 자신의 경작지를 돌보지 못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농사를 못지으니 가난해지고, 그러면 자비로 자신의 무기와 방어구를 준비할 수도 없고... 로마군을 구성할 자영농 시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정치권은 여전히 당쟁만 일삼았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 이후 원로원에는 보수적인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귀족파, 옵티마테스에 대항하고자 호민관 세력을 중심으로 뭉친 민중파, 포풀라레스가 형성되었습니다. 귀족파와 민중파 두 파벌을 중심으로 당쟁이 격화되자 로마는 곧 내란 위기로까지 내몰렸죠. 그런 상황에서 로마의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킴브리족과 튜턴족이 빈번히 로마의 북쪽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로마에게 닥친 위협은 게르만족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막상 식민지를 거느린 거대한 영토를 전설하고 보니 이제 관리해야 하는 영토는 크게 늘어났는데 귀족층은 분열되어 국가적 역량이 낭비되고 있었으니 이 때를 틈 타 이미 정복한 곳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112년, 로마의 식민지 관리가 허술해진 틈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왕인 유구르트가  일으킨 반란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라쿠스 형제의 걱정처럼  로마군도 약화되어 있으니 반란은 쉽사리 진압되지 않았죠.
 
누미디아의 반란을 진압한 이는 민중파의 가이우스 마리우스였습니다. 2어절만으로 되어있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로물루스, 그리고 켈트족의 로마 침입 당시 로마를 구해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이어 제3의 건국자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으며 단기간에 로마 시민의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병영생활을 할때면 늘 일반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막사에서 자며 진지공사를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는데, 그게 사실일지는... 
 
그 역시 현재의 로마군으로는 앞으로 늘어날 군사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곧 군사개혁에 착수했죠. 그는 우선 기존의 시민병 제도를 대신해 돈이 없는 무산시민들도 원하면 군대에 입대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군대란 각 사령관들이 군사들을 직접 고용하는 형태의 일종의 사병부대였습니다. 다만 무산시민들은 무기나 방어구를 스스로 갖출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으니 그런 것들은 사령관들이 자신들의 비용으로 충당하고, 급여 역시 사령관들이 자비로 자신의 병사들에게 지급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옛 로마군의 군사력을 회복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곧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기원전 102년, 그의 군대가 북쪽에서 내려온 30만 규모의 게르만족을 대파하고 크게 승리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개혁에 커다란 부작용도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었죠. 조국에 충성해야할 군대가 이제는 자신들을 지휘하는 사령관들에게 충성하며 사병화된 것입니다.
 
병사들은 이제 더 좋은 처우, 더 높은 급여를 보장해주는 사령관들에게 충성했고 사령관들은 정치적으로 물리력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령관과 병사들 사이에는 일종의 클리엔텔라 관계가 형성되었고, 병사들은 제대를 한 뒤에도 클리엔테스로서 자신들의 파트로누스인 옛 사령관에게 충성을 보이는 상황이 연출되었죠. 
 
그러는 와중에 기원전 91년, 로마에는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로마의 동맹시들이 로마인과 자신들의 차별적인 대우에 분노해 자신들에게도 참정권이 포함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라며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로마는 원래 자신들이 정복한 피정복지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한편으로는 병역의무를 지워 정복전쟁 때마다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 동맹시 시민들은 자신들이 로마에 병역의무를 다하는 데에 비해 로마 시민과는 다르게 참정권이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갖게 된 것이죠.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게르만족이나 갈리아인 같은 야만인들이 아닌, 얼마 전까지 로마군으로서 훈련받고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이었으니까요. 로마군은 자신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자신들과 똑같은 전투력을 가진 적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과 싸우는 것처럼요. 로마는 몇몇 지휘관들을 파견에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태는 결국 마리우스가 나서고 나서야 해결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마리우스가 군제개혁을 통해 로마군을 질적으로 개선시키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네요. 무엇보다도 개혁을 통해 누구보다도 큰 이득을 얻은 것이 본인이었으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도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거대한 사병 집단을 거느리는 것 역시 가능하리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마리우스가 동맹시 전쟁 이후 동맹시의 시민들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유권자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끌어들였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마리우스는 이미 그 당시 집정관으로서 여섯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로마군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존경받는 군인이었구요. 심지어는 한때 로마군이었던 동맹시의 반란군들조차도 인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때 마리우스의 나이는 이미 60이 넘은 때였어요. 근데 이때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돋보이는 전공을 세운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마리우스의 뒤를 이은 새로운 권력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였습니다.

 
 

술라의 공포정치

 
술라는 마리우스와 달리 로마에서 손꼽히는 귀족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마리우스가 민중파 출신으로서 권력을 손에 넣자, 귀족파에서 이에 대항하고자 내세운 인물이 바로 술라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술라에게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일만한 기회가 왔습니다. 그 기회란 바로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야심을 저지하는 일이었습니다.
 
폰토스는 디아도코이 전쟁 당시 마케도니아에서 독립해 아나톨리아 지역에 세워진 왕국이었습니다. 왕가의 혈통은 페르시아계였지만 막상 내용물을 들여다보면 제도나 문물은 헬레니즘 왕국 스타일이었죠. 폰토스 왕국은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는 물론이고  흑해 북쪽까지도 차지하면서 그리스 세계의 부활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새롭게 즉위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로마군을 몰아내고 영토를 크게 확장 중이었죠.  
 
로마에서는 누가 폰토스 원정의 총사령관이 될 것인지를 두고 평민들 중심의 마리우스파와 귀족들 중심의 술라파가 격렬한 유혈충돌을 벌였습니다. 원래 그 자리는 술라에게 돌아갈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우스 일파가 과격하게 술라 일파를 진압하자 술라는 가까스로 피신해 로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폰토스로 향했습니다. 마리우스는 원정 기회를 놓쳤지만 그 대신 로마를 접수했습니다. 
 
로마의 마리우스는 군인 계층의 지지에 힘입어 7번째로 집정관에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원래 집정관의 연임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잖아요. 임기도 1년으로 아주 짧구요. 이런 견제장치는 모두 왕정의 폐해를 경험한 로마인들이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들이었는데 군대가 사병화된 이 시점부터는 이러한 견제도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합니다. 집정관을 뽑는 켄투리아회에서는 자신들의 사령관을 집정관으로 선출하려고 할테니까요. 공화국 로마에 군사독재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기원전 89년 폰토스 왕국의 영역에 도착한 술라는 이곳에서 사령관으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며 손쉽게 미트리다테스 왕의 군대를 제압했습니다. 사실 이 전쟁은 여러 모로 술라에게 매우 불리한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일단 홈 그라운드 경기가 아닌, 원정을 온 것이니 지리나 기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불리했을 거구요. 보급도 따로 해야 하죠. 병력도 크게 열세였습니다. 로마군이 4만이고 폰토스 군은 그 3배 정도인 12만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시대의 기록에서는 사람 수에 대한 내용이 잘 안 믿어지더라구요.

 

하지만 술라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껄끄러웠던 것은 자신이 여기에서 미트리다테스 왕과 싸우는 동안 로마를 접수했을 마리우스 일파였을 거에요. 등 뒤에 적을 두고 앞에서는 또 다른 적과 싸우는 상황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라의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는 먼저 폰토스 왕국에 동조했던 다른 그리스 도시들에게서 로마에 대한 충성서약을 받고, 이에 거부하는 도시들을 거침없이 진압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폰토스 군과 부딪혀 그들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죠. 

 

아마 술라가 로마에 있는 자신의 정적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던 상황이라면 폰토스 왕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로마의 마리우스 때문에 그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전쟁의 결과가 어느 정도 확실해지자 곧바로 폰토스 왕국과 강화협상을 시작했고, 덕분에 일단 미트리다테스 6세는 간신히 왕좌를 보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폰토스의 상황이 정리되자, 술라는 이제 로마로 향했습니다. 이제 곧 마리우스와의 일전이 벌어지는줄 알았는데, 사실 마리우스는 집정관으로 취임한지 며칠 되지 않아 병환으로 사망했네요. 민중파에서 딱히 마리우스의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권력은 다시 로마로 돌아온 술라의 손으로 들어갔습니다. 

 

정권을 잡은 술라는 당연하게도 민중파를 숙청하고, 귀족파가 장악한 원로원을 앞세워 종신독재관으로 취임했습니다. 종신독재관. 원래 로마의 독재관은 임기 6개월의 임시직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두 명의 집정관이 정사를 총괄하다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의 위기가 닥치면 두 집정관 중 한 명이 독재관으로 취임해 사태를 수습했죠. 그렇게 급한 일이 끝나면 독재관은 다시 권력을 내려놓고 집정관 체제로 돌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신독재관은 평생 권력을 독점하는 자리이니... 이렇게 술라에 의해 나쁜 선례가 한번 만들어지면 그 뒤에 누군가는 그 선례를 이용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겠죠. 

 

그렇게 과거 로마의 어떤 권력자보다도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게된 술라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쳤습니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민중파를 해체시킨 것은 물론이고, 민중파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반기를 들만한 인물들이나 정계에서 영향력을 가질만한 인물들은 사정없이 제거했죠. 또한 그 동안 로마가 평민권의 확대를 위해 걸어온 길을 역행하며 그라쿠스 형제가 제정한 곡물법과 평민회의 권리를 규정한 호르텐시우스법을 폐지시켰습니다.  
 
술라의 이런 공포 정치는 모두 공화국의 개혁을 위해 시행된 것들이었습니다. 누가봐도 이건 공화국을 망가뜨리는 조치들로 보이는데, 술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봅니다. 아마도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강력한 민중파 인사가 귀족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애초부터 민중파 정치인이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만한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의 시대를 기점으로 공화국 로마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렇게 여생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나 싶었던 그는 기원전 80년, 단 2년 만에 종신독재관 자리에서 내려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바로 이 행보 때문에 지금까지도 술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고 하네요. 자신의 혈족에게 권력을 상속하지 않고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거죠.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급사한 것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이미 술라가 지병 때문에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을 거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술라의 시대가 다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비운의 영웅 폼페이우스

 

이제 누구든 능력만 있으면 로마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일인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마리우스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던 술라가 그걸 보여주었죠. 그리고 그가 정계를 떠나자 이제 권력은 당시 가장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손으로 들어가는 듯 싶었습니다.

 

술라가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그랬듯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역시 술라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습니다. 불과 18살의 나이로 참전한 동맹시 전쟁에서 그는 나이답지 않은 리더십을 보이며 술라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후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마리우스 일파와 싸우며 점차 이름을 알렸죠. 술라 역시 폼페이우스가 장차 거물급 인사가 될 재목임을 알아차리고 그를 적으로 만드는 대신 자신의 사위로 삼으며 그를 계속 측근으로 두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이름 뒤에 위대하다는 의미의 마그누스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도 술라였습니다.

 

술라의 사후 기원전 77년, 폼페이우스에게는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가 맡겨졌습니다. 비록 당시 폼페이우스의 나이가 군대를 맡기에는 너무 어려서 문제이긴 했지만 마리우스와 술라 사이의 내전 때문에 쓸만한 지휘관들이 모두 숙청당해 얼마 없었고, 그렇다고 좀 능력있는 지휘관에게 덜컥 지휘권을 내어주었다가는 군대를 이끌고 오히려 로마로 진격할 수도 있으니 원로원으로서는 그나마 폼페이우스를 파견하는 것이 제일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히스파니아 반란군의 기세는 상당했습니다.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갖춘 폼페이우스도 5년이 넘게 걸려서 진압했으니 결코 쉬운 전쟁은 아니었죠. 히스파니아 반란군의 결정적인 패배 원인 역시 전투에서 패해서라기보다는 지휘부 내부의 분열 때문이었구요.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끌었던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는 영광스러운 개선식을 준비하며 로마로 귀환하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돌아오던 사이,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는 트라키아 출신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반란 진압을 맡은 이는 로마 제일의 부자로 알려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습니다. 그는 술라에 의해 마리우스 일파가 숙청당하던 당시 몰락한 마리우스 일파의 재산을 싼 값에 사들이며 재산을 축적했는데요. 워낙 자금력이 빵빵하다보니 군대 역시 엄청난 규모로 동원할 수 있었죠. 그래서 막대한 병력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을 어렵지 않게 진압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엄청나게 넓은 영토를 손에 넣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소아시아 각지에서 노예를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정복전쟁이 계속되다 보니 이들 노예 노동력은 꾸준히 로마로 유입되었죠. 덕분에 이들은 용도도 다양하고 출신지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원래 지금의 불가리아 지역인 트라키아 출신이었다고 하는데요. 이곳은 당시에도 강인하고 호전적인 부족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해서 로마에는 트라키아 출신의 검투사나 전사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를 포함해 대부분의 반란군들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 중 일부는 살아남아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다가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오던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만났죠. 폼페이우스는 이들을 모두 일소하며 로마로 돌아와 영예로운 개선식을 가졌습니다. 히스파니아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것과 스파르타쿠스의 잔당들을 정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진압은 크라수스의 공이 훨씬 큰 거였는데... 이 때문에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에 대해 별로 좋지 못한 감정을 갖게 되었죠.  

 

기원전 70년, 두 사람은 나란히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권력의 추는 폼페이우스에게로 기울어졌습니다. 당시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삼은 로마에게는 새롭게 떠오르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새롭다기보다는 지중해를 모두 차지하고나니 마침내 눈에 보이게 된 문제였죠.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은 모두 차지했는데 정작 지중해 안에는 해적들이 바글바글했던 거였습니다. 이들은 도시나 국가처럼 체계를 갖춘 세력이 아니었지만 근처 도시들을 약탈하고 공물을 받으면서 로마의 해상교역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로원에서는 폼페이우스에게 지중해 전체의 관할권을 부여하며 해적 소탕을 주문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얻은 권한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안에는 이제 그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폼페이우스가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로마를 꿀꺽할 수도 있었죠. 그는 이 권한으로 3개월 만에 지중해의 해적들을 모두 깨끗하게 소탕했습니다. 아마 원로원도 그가 그렇게 빨리 지중해를 정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원로원이 그에게 주었던 지중해 관할권의 임기는 3년이었거든요.

 

이렇게 목표실적을 조기에 달성한 그는 기세를 몰아 이번에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는 술라에게 거의 나라가 망할 뻔했던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 6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미 대치가 길어지면서 미트리다테스 왕도 상당히 지쳐있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의 대군이 폰토스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들을 모두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 헬레니즘 왕국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했던 미트리다테스 6세도 이 때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자신이 계획한 모든 일을 완수한 폼페이우스는 이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면 되는 걸까요? 폰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로 로마로 귀환하는 폼페이우스 군의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당연히 술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때 술라도 미트리다테스 6세가 일으킨 폰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로 돌아온 거였죠. 그리고 곧 자신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로마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잖아요. 그런데 폼페이우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폼페이우스의 공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잇따라 발생하는 반란들을 모두 진압해 나라 안을 안정시켰구요. 해적소굴이었던 지중해를 완전히 로마의 것으로 만들며 해상무역도 정상화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얻은 막대한 부는 로마의 재정을 한결 튼튼하게 했죠. 그런데도  그는 일단 군대를 해산하고 원로원에 자신의 전과를 보고하며 합당한 대우가 내려지길 기다렸습니다.  만약 로마의 정치인들이 이 기회를 잘 살렸다면, 내전과 독재를 겪는 동안 흔들렸던 공화정은 다시 정상화될 수 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원로원은 결국 이 기회를 걷어차고 결국 스스로 자신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습니다.

 

 

카이사르의 등장

 

이제 드디어 카이사르가 등장합니다. 로마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카이사르, 시저라는 이름은 알고 있죠. 그만큼 로마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네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원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조카로 민중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술라가 한창 공포정치를 휘두르던 시절, 그의 민중파 숙청에 휩쓸려 화를 당할 뻔 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데에다가 가문의 후광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죠. 

 

이후 술라 정권 동안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군 장교 생활과 유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카이사르는 술라의 사후 로마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출세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불리우는 출세코스를 착실히 밟아나갔는데요. 바로 앞서서 명성을 날리던 폼페이우스가 10대 때부터 워낙 출중한 능력을 보여서인지 그의 출세는 뭔가 더디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폼페이우스가 너무 예외적인 경우였을 뿐이지 당시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이미 가장 전도유망한 청년 정치인이었습니다. 
 

니콜라 쿠스투의 카이사르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니콜라 쿠스투의 카이사르 조각상

 
 
카이사르는 기원전 73년 36세의 나이로 최고위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로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그 다음해에는 법무관, 2년 뒤에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명문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딱히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던 그는 이렇게 선거를 치르는 동안 계속해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는데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하는 길에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채권자들이 앞다퉈서 그에게 빚독촉을 했었대요. 이렇게 빚이 많으면 밤에 잠도 안 올거 같은데, 카이사르는 오히려 로마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에게 돈을 더 빌려서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았습니다. 

 

히스파니아 총독 임기가 끝나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마침내 최고위 정무관직인 집정관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우고도 원로원의 견제로 제대로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와 결탁했습니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모두 소탕하고, 폰토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도 자신의 병사들에게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카이사르와 손을 잡는게 당장은 좋은 일 같기도 하네요. 이렇게 카이사르와 그에게 큰 돈을 빌려준 크라수스, 원로원으로부터 소외된 폼페이우스, 세 사람이 모여 삼두정치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일단 집정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능수능란하게  원로원을 제압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로마는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한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카이사르가 마침내 이 문제에 손을 대서 농지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더불어 평민 계층의 인기를 한몸에 얻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로마 밖 갈리아 지역에서 눈을 떼지 않았죠. 당시 갈리아 지역은 대규모의 민족 이동이 이뤄지면서 곧 이들 사이의 영역다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안그래도 조력자이면서도 경쟁자이기도 한 폼페이우스에 비해 전공이 한참 모자라던 그는 그 상황을 꿰뚫어보고 갈리아 지역의 평정을 목표로 자신의 다음 부임지를 갈리아로 정했습니다. 

 

기원전 58년,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카이사르의 원래 관할지역은 알프스 이남과 알프스 넘어 프랑스 남부 지역 일부에 해당했습니다. 로마가 차지하고 있었던 갈리아 속주는 사실상 드넓은 갈리아 지역의 일부에 불과했죠. 그런데 카이사르는 지역 내 여러 부족들 간의 세력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불과 7년 만에 갈리아 전역을 로마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전까지 로마가 북아프라카, 히스파니아, 소아시아 일대를 차지하면서도 갈리아인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가 세운 따끈따끈한 전공은 폼페이우스를 압도할만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갈리아인들과의 전투에서 항상 승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와의 화친을 주장한 족장을 몰아내고 군사들을 모아 로마군에 맞섰던 갈리아인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는 마을을 모두 불사지르고 주민들을 피신시키면서 후퇴하다가 로마군을 기습하는 전략으로 카이사르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부족 간 다툼을 이용해 자신들을 조금씩 정복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모든 갈리아인 부족들이 합심해 로마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리고 그의 리더십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갈리아 정복에만 전념해도 모자란 카이사르에게 로마에서도 나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점차 승전소식을 가져오기 시작하자 원로원에서 그를 견제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진 것입니다. 거기에 그에게 협조하기로 했던 폼페이우스도 등을 돌리면서 두 사람 사이의 협력은 깨져버렸습니다. 삼두정치가 무너졌고 로마 본국에서의 지원도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뭐, 결과적으로는 갈리아인들을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지만요.

 

그럼, 카이사르에게 큰 돈을 빌려줬던 크라수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 비해 크라수스는 엄청나게 많은 재산으로 카이사르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죠. 그래서 갑자기 시리아로 이동해 동쪽의 파르티아를 정벌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다른 두 사람이 너무 쉽게 전공을 쌓는 것처럼 보여서일지는 모르겠지만 크라수스의 도전은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53년, 그는 로마에 아무런 해를 끼치는 것이 없던 파르티아를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본인도 전사했습니다. 파르티아는 그 후 한참을 더 존속해 기원후 228년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무너졌으니, 애초에 크라수스가 노려볼 만한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던 거죠.

 

어쨌든 카이사르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7년 간의 악전고투 끝에 빛나는 업적을 일궈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오면 되는 거였는데... 이 기시감... 전쟁에서의 승리 후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올 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죠. 술라처럼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는 방법이 있구요. 폼페이우스처럼 군대를 해산하고 원로원의 대우를 기다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난감한 처지를 보건대,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고 덜렁 혼자 로마로 돌아올 이유는 없었죠. 기원전 51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입합니다. 

 

 

카이사르의 관대한 독재

 

로마에서는 이제 카이사르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원로원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그전까지 홀대했던 폼페이우스 정도... 한때는 동지였던 두 사람의 유혈충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우선 병력을 모을 시간을 벌기 위해 그리스로 갔습니다. 반면에 원로원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평민층의 지지로 또 다시 집정관에 당선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전투를 치렀죠. 양군의 사령관은 각자 서로에게 필적할만한 전공을 세운 영웅들이었고 병사들도 똑같은 로마군이니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길 거 같은데, 승리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이사르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디아도코이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는데요. 별안간 튀어 들어온 폼페이우스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쫒아 이집트로 들어오자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목을 카이사르에게 넘겨줍니다. 이집트 나름대로는 자신들의 미래를 카이사르 쪽에 베팅한 것이었는데, 폼페이우스의 목을 건네받은 카이사르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슬픔의 눈물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카이사르는 마지막 남은 경쟁자마저 제거하면서 로마의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포에니 전쟁 이후 차곡차곡 쌓여온 로마의 병폐가 마리우스와 술라, 그리고 폼페이우스를 거쳐 마침내 카이사르 때에 이르러 사실상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로마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게 된 카이사르는 어떤 유형의 독재를 펼쳤을까요?

 

카이사르는 매우 관대한 독재자였습니다. 술라 시절에 벌어졌던 무시무시한 살육전은 펼쳐지지 않았죠. 정적을 죽음으로 내몰거나 경제적으로 파산시키는 일도 벌이지 않았구요. 원로원에서 자신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대신 원로원의 정원을 크게 늘려 원로원 핵심 세력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세련된 방법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습니다. 그만큼 원로원의 발언권도 약화되었죠.

 

또한 독재자들의 시대를 거치며 크게 확대된 속주 영토에 대한 행정체제를 정비하고 그곳 주민들에게 로마시민권이나 라틴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시민권을 부여받으면서 새롭게 유권자가 된 시민들은 누구의 지지자가 되었을까요? 당연히 카이사르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됩니다. 한편 학자나 의사와 같은 전문 직종의 대우를 크게 개선했구요. 군인들의 급여도 크게 인상했습니다. 또 당연히 이들의 큰 지지를 얻게되었죠.

 

이제 정말 그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44년, 그는 종신독재관에 취임했습니다. 술라가 한 번 선례를 남겼으니, 다시 하는 건 어렵지 않죠. 종신독재관, 임페라토르. 사실상 황제의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행보에 누구도 불만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중에는 지금이라도 독재자를 몰아내고 예전의 공화정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죠. 하지만 당장은 마땅한 기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의 제정이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데요. 하지만 사실 그가 정말 동방의 왕이나 황제들처럼 황제로서의 의례를 누리거나,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거나 하진 않았으니 딱히 그를 황제로 보기도 어려울 거 같아요. 그래도 그의 이름, 카이사르가 훗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미 황제의 의미를 같는 고유명사로 쓰이게 되었으니 딱히 그가 정말 황제로 즉위를 했는지, 안했는지가 크게 중요한 걸까 싶네요.

 

카이사르는 이제 예전에 크라수스가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임무인 파르티아 정복에 나서고자 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폰토스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그 옆의 파르티아 역시 욕심을 내볼만 했죠. 카이사르는 자신의 원정 계획을 공표하기 위해 원로원에 등원했다가 자신의 연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마르투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끌던 골수 공화주의자 무리의 피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원전 44년, 5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장수하진 못했군요.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제거했으니 이제 로마는 그들의 뜻대로 다시 공화정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로마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죠. 카이사르가 없는 로마는 이제 다음 독재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카이사르가 없으니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파들이 카이사르의 공백을 채우고 정권을 장악했을 것 같지만... 이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신념에 맞게 독재자를 제거했지만 그 뒤의 일을 수습할 역량은 없었죠. 상황을 정리한 것은 당시 집정관이자 카이사르의 휘하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생전 업적을 모두 정당한 것으로 공표하는 한편, 사건을 주도한 브루투스 일파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를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파견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습니다.  

 


2005년 HBO 에서 방영했던 롬(Rome)

 

최근 이 부분에 대한 책이랑 유튜브들을 보던 중 갑자기 이 미드가 생각나서 다시 한 번 정주행했습니다. 2005년 HBO 와 BBC 에서 제작, 방영한 <롬 (Rome)> 인데요. 벌써 오래 전이네요.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을 다룬 다른 시대물과는 달리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사는 평범한 두 로마인의 시각으로 당대를 묘사했습니다. 처음 볼 때는 귀족들의 화려한 의상이 눈에 들어왔었는데 이제보니 의상 말고도 전반적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충실히 고증한 거 같습니다. 은근한 개그 코드도 재밌구요. 매우 폭력적, 선정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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