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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오현제 시대의 황제들

네 황제의 해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어딘가 엉성한 제정은 5대째인 네로 때 이르러 마침내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가 계속된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군대 지휘권을 가진 속주의 총독들이 하나둘씩 '네로 타도'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이죠. 그 중 네로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한 것은 네로보다 40살이 더 많은 노장 갈바였습니다. 그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있던 시절 갈리아 총독 빈덱스, 그리고 오늘날의 포르투갈 지역에 해당하는 루스타니아의 총독 오토와 함께 네로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고 68년,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와 혈연적으로 무관한 첫번째 황제였죠. 
 
이제 제위에 오르는 데에 더 이상 혈통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갈바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다시 공화정 말기의 군사독재 시절처럼 좀 한다하는 장군들이 한번쯤 권좌를 노려볼만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다음해인 69년 게르마니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일부 군인들의 지지를 얻으며 갈바의 후계자로 떠오르자, 네로를 폐위시키고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던 오토가 나서서 갈바를 몰아내고 제위를 차지했습니다. 내심 자기가 다음 순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텔리우스의 부상으로 자신은 아무런 실속도 챙기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선수를 친 것입니다.
 
하지만 비텔리우스가 그대로 제위를 놓칠 리 없죠. 제위는 이제 빼앗은 자의 것이니까요. 게다가 자신은 병사들의 지지도 받고 있으니 당위성 측면에서도 자신이 더 제위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을거예요.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베드리아쿰에서 마주쳐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비텔리우스의 군대가 승리합니다. 그렇게 오토가 자결하면서 제위는 비텔리우스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소모적인 내전의 연속이네요. 
 
황제로 즉위한 비텔리우스는 오토와의 내전에서 오토의 편에 섰던 병사들을 탄압하며 무자비한 폭정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반기를 들게할 명분을 제공하는 일이었죠. 병사들은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옹립하며 그와 함께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가 황궁을 포위하자 비텔리우스는 재빨리 몸을 숨기려 했지만 결국 도주에 실패하고 병사들에 의해 붙잡혀 폐위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갈바 황제가 오토에 의해 제위를 잃은 시점부터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몰아내고 즉위할 때까지의 모든 일은 69년 한 해 동안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무려 네 명의 황제가 재위했고 그 몇 달의 텀을 두고 로마는 극심한 내전에 반복적으로 휩싸인 거였죠. 그 동안 과연 제대로된 통치가 이루어졌을까요? 국정은 갈 길을 잃고 로마군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내전이 벌어지면서 국방력도 약화되었습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이번에는 군대가 괜찮은 인물을 선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최초의 기사 계급 출신의 황제로 그의 집안은 본래 징세청부를 가업으로 삼아 부를 축적한 가문이었습니다. 대대로 귀족인 파트리키나 고위 관료를 배출하는 평민귀족인 노빌레스에 비하면 출신은 보잘것 없었지만 오직 본인의 능력과 인품만으로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죠. 그는 가족들이 대대로 세금징수원을 한 것과는 다르게 일찍이 군에 입대한 것을 시작으로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등 속주 이곳저곳을 안가본 곳 없이 굴러다니며 공직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시리아 속주로 파견되어 유대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한참 진땀을 빼고 있던 사이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가 쫒겨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동안 내전이 계속되었고 네 황제의 해에 벌써 세번째 황제가 즉위하면서 폭정을 휘두르자 황제에게 반대하는 군인들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추대했습니다. 그는 유대 지역의 전장을 아들인 티투스에게 맡겨두고 일단 로마로 와서 마침내 그 해의 네번째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황제가 되고 보니 수습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일단 비텔리우스가 엉망으로 만든 도시를 재건해야 했구요. 속주의 총독들이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는 일을 막기 위해 속주의 군대 운영을 군단 단위로 축소해 반란의 가능성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또한 징세청부업자 가문 출신답게 인구조사를 실시해 세수를 확보하고 부정부패를 적발하면서 세금 낭비를 줄여 앞선 황제들이 탕진한 국고도 상당부분 정상화시켰죠.  
 
그는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 틈에서 기사계급 출신으로 긴 시간 공직에 있으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원만한 문제해결에 도가 튼 통치자였죠. 그래서인지 이전의 황제들과는 다르게 원로원과의 관계도 좋았구요. 그러는 한편 또 반대로는 제위계승에 관한 법을 명문화해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를 친아들에게로 확정지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 1 시민이니, 존엄한 자니 하는 애매한 호칭으로 기를 쓰고 황제가 되기를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후계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가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나 인품인 덕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여러 분야에서 쌓은 풍부한 공직 경험 덕분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을 때에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백전노장이었죠. 내전으로 초토화가 되다시피한 로마를 떠맡은 이래로 이토록 훌륭한 통치를 보여준 그는 10년의 재위기간을 채우고 열병으로 79년 숨을 거두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은 것은 아버지가 즉위하던 시점부터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다음 제위를 준비했던 아들 티투스였습니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똑같이 물려받았네요.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번째 황제인 그는 불과 2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는데요. 사실 즉위하자마자 현재의 나폴리 근처인 폼페이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 대규모로 분화하면서 어마어마한 국가재난을 맞이하는 바람에 2년 내내 그 뒤치닥거리만 해야했습니다. 그렇게 너무 고생만 해서 그런지 불과 41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죠.
 
그런 티투스의 최대 업적을 꼽으라고 하면 오히려 황제로 즉위하기 전 유대인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는 원래 황제가 될 운명이 되기 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유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이었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그 일을 이어받아 무사히 마무리하면서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전까지 유대 지역은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자신들의 왕조를 유지하던 상태였는데요. 이 반란이 진압되면서부터는 자치권을 완전히 잃고 로마의 속주가 되어버리죠. 
 
티투스는 앞선 황제들과 다르게 가장 무난하게 제위를 세습받은 황제였지만 아들이 없는 채로 일찍 사망하자 다음 제위는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되어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비하면 성공적인 상속인거 같은데... 문제는 그의 성격이 아버지나 형과는 영 딴판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나 형이 원로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를 안정시켰던 것과는 반대로, 그는 원로원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독단적인 통치를 펼쳤죠. 결국 그의 통치는 96년 암살로 끝이 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도 불과 3대만에 문을 닫게 됩니다. 
 
 

오현제 시대의 황제들

 
폭군에 의한 지긋지긋한 폭정을 또 겪으며 전제정치에 대한 경계심이 커진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사후에 벌어질 혼란을 잠재우고자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황제의 궐위를 틈타 또다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가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나설 수 있었으니까요. 원로원이 다음 황제로 추대한 인물은 고령이면서 친족이 없고 무난한 성품을 가진 네르바였습니다. 말이 좋아 무난한 성품이지 사실상 자신들이 조종하기 쉬운 인물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대대로 원로원 의원들을 배출해온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온화하고 원만한 성격에 오랫동안 플라비우스 왕조를 섬겨온 그는 원로원이 로마 시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만한, 적합한 황제 후보였죠. 본인 스스로도 네 황제의 해와 같은 극도의 혼란이 또 발생하는 것을 염려해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전 황제인 도미티아누스가 비록 원로원과는 사이가 안좋았다지만 군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를 밀어내고 세운 황제인 네르바는 항상 군대의 불만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죠. 즉위 당시 이미 65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곧바로 후계자 선발작업에 착수했고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으면서도 원로원이 딱히 반대하지 않을 인물을 골라 양자로 입적시켰습니다. 
 
학자들은 네르바로부터 시작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다섯 명의 황제가 양자 상속의 방식으로 즉위하며 이어진 이 왕조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라고 부릅니다. 2년에 채 못미치는 짧은 재위에, 별다른 큰 업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네르바가 오현제 중 한 명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마 양자 상속의 전통을 안정시켜서  ‘팍스 로마나’로도 불리우는 평화의 시대를 시작한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당시에도 양자상속이 이루어졌으니 로마 역사에서 처음 벌어진 일은 아니었지만요. 

 

98년, 네르바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의 본래 이름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였습니다. 최초의 속주 출신의 황제라고도 알려져 있는데요. 이후부터 로마에서는 최초의 뭐뭐 출신 황제라는 소개가 자주 보이기 시작합니다. 본래 그의 가문은 라틴 일족이지만 조상대에 히스파니아로 이주하고 그곳 여성들과 혼인하면서 트라야누스 본인은 그곳에서 태어나서 자란, 라틴-히스파니아 혼혈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력가문의 청년들이 그러하듯이 군에 입대해 장교로 복무하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로마 제국의 제위가 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플라비우스 왕조가 문을 닫고 네르바 황제가 이미 고령인 상태로 즉위하자 당시까지 군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온 트라야누스가 점차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더니 결국은 군대의 지지를 받아 다음 황제로 낙점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네르바의 서거 이후 별다른 이견 없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두번째 황제로 즉위했죠.

 

이쯤되면 황제도 로마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에 원로원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을 거에요. 트라야누스 황제는 자리에 있는 내내 원로원과 큰 충돌을 빚지 않으면서 원활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원로원도 대체로 트라야누스의 통치를 지지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에 대한 기록들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죠. 비록 베스파시아누스처럼 귀족들을 다루는 데에 능수능란한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은 아니었지만 강직한 성품에 매사에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는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로마의 많은 황제들이 군인 경력을 가졌지만 트라야누스는 그 중에서도 특히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 황제였습니다. 그가 이룬 업적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아마 다키아 원정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키아는 대략 지금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호전적인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자주 출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키아인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국가 수준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죠. 심지어 이 때 세워진 다키아 왕국은 게르만족들을 몰아내고 흑해의 서해안에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할 정도로 강성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다키아의 국력은 어느덧 로마의 국경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 때에는 무려 로마에 선제공격을 해서 로마를 패퇴시키기도 했죠. 한번 승리를 하고나서는 자신감이 붙은건지, 그 후로도 다키아는 로마를 그닥 두려워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천성이 워낙 강골의 군인이었던 트라야누스는 마침 이렇게 된 거 잘됐다는 듯이 다키아를 공격해 완전히 정복하고 속주를 설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로마와 다키아 사이에 놓인 다뉴브 강 하류에 트라야누스 다리를 건설했는데요. 길이가 약 1 km, 높이가 30 m, 폭은 12-15 m 정도 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리였다고 하네요. 

 

흑해 서해안의 다키아를 정복한 그는 이제 흑해 동해안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곳엔 로마의 오랜 적수인 파르티아가 있었죠. 마침 파르티아가 로마와의 완충지대인 아르메니아에 관해 양국이 협의한 협정을 어기고 자신들 마음대로 아르메니아 왕을 갈아치우는 일이 발생했는데요. 트라야누스는 차근차근 물자와 병력을 준비해 마침내 원정을 개시했습니다. 일단 원정이 시작되자, 그는 그동안 준비한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빠르게 점령지를 늘려갔습니다. 분쟁의 단초가 되었던 아르메니아를 시작으로 흑해 동해안, 옛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고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까지 함락시켰죠. 

 

하지만 승리는 거기까지였습니다. 대규모 병력이 파르티아 주변으로 집중되어 있는 사이 로마 제국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브리타니아와 이집트 등의 기존 속주는 물론이고, 동쪽으로 원정을 오는 과정에서 획득한 아르메니아와 지중해의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반란들 중에 파르티아 원정에 가장 결정타를 날린 건 로마의 빵바구니라 불리우는 곡창지대 이집트의 반란이었습니다. 당장 군대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로마군은  더 이상 획득한 영토를 계속 유지하는 게 어려워졌죠.  

 

결국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포기하고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파르티아 정복이 또 한번 실패했네요. 뭐, 결국은 실패했다는 걸 현재의 우리는 알고 있지만 당대의 로마인들에게는 정말 통한의 실패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그는 한번 정복했다가 다시 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라도 차지하고자 했지만, 낯선 원정지에서 극한의 스트레스는 결국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던 그를 앓아눕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미 67세의 노령이기도 했구요. 그러다 117년  로마로의  귀환 도중 지금의 튀르키예 남부인 킬리키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에스파냐 출신의 트라야누스는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였습니다. 속주 운영과 행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의 치세 동안 속주의 경제력과 문화수준은 로마 본토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농민에게 농토를 대여하고 이자를 받아 ‘알리멘타’로 불리우는 빈민구제 정책을 시행했고, 제국 전체의 재정을 꼼꼼하게 운영해 국고를 확보했습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도미티아누스 때부터 로마에 저항한 다키아를 정복했는데, 이 사실은 지금도 로마 시내 베네치아 광장 인근에 남아있는 트라야누스 기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해 오랫동안 로마의 숙적이었던 파르티아를 페르시아 만까지 몰아내면서 로마의 최대 강역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정 후 로마로 귀환하는 길에 급사했습니다.

트라야누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 역시 에스파냐 출신으로 트라야누스의 정책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다만 그는 트라야누스가 활발하게 진행하던 속주 정복은 중단하고 당시의 국경을 유지하는 것으로 대외정책을 전환했습니다. 페르시아 만까지 몰아낸 파르티아를 멸망시키는 일은 완전히 포기했고 브리타니아 전체를 로마의 속주로 만드는 시도도 중단했습니다. 다만 당시까지 브리타니아 속주의 경계가 되었던 지점에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건설해 로마의 국경을 확실히 했습니다. 이 경계선은 현재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역시 브리타니아 속주에 장성 건설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당시의 장성보다 북쪽에 건설된 이 장벽으로 영국 섬의 80 퍼센트 정도가 브라타니아 속주로 편입되었지만 그 역시도 여전히 섬 전체의 정복은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역사가들이 로마 최고의 성군을 꼽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학파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정복군주의 면모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트라야누스 때 몰아낸 파르티아가 다시 끈질기게 로마의 변방을 침입하자 아우렐리우스 역시 파르티아의 완전한 정복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파르티아의 멸망이라는 로마 황제의 대를 이은 염원은 또다시 좌절되었습니다. 변방을 위협하는 세력은 파르티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북쪽의 게르만족 역시 계속해서 로마의 북변을 건드리자 엘베 강까지 국경을 확장하려고 했지만 전장에서 병사했습니다.

서양 문명의 한 축

제정 시기에 들어서 로마는 정복사업을 하지 않아도 라티푼디움 운영으로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로마 경제는 공화정 초기부터 정복사업에서 얻어진 포로들로 값싼 노동력을 충당해왔습니다. 제정 시대에 들어 정복사업의 중단과 주기적인 노예해방으로 노예의 수는 오히려 감소했지만 소작제의 일종인 콜로나투스로 라티푼디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남아 중세 장원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에퀴테스 계층 또한 중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정복 이후 로마에 가장 필요한 행정, 관리 인력으로 로마 사회의 중추가 된 이들은 중세의 주요 신분인 기사 계층을 차지했습니다.

정치적 평화와 경제적 번영으로 로마 제국은 여러 속주들을 이어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되었는데 이 때 방대한 도로망이 건설되면서 무역이 발전했습니다. 아라비아 대상무역도 이때 발생했습니다. 비단길을 따라 이동하는 아라비아의 대상들을 통해 로마에서는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향료가 거래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로마는 유럽의 언어, 사회체계, 산업, 관습, 문화, 도시 등 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모든 요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며 그리스와 함께 그레코로만 문화의 두번째 기반이 되었습니다. 로마어인 라틴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통화 체계나 법률, 무역관습 등도 로마식이 통용되었습니다. 다만 종교에 있어서 속주에는 로마의 다신교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로마 역시도 속주의 종교를 전통으로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적용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야만적 관습이 남아있는 드루이드교나 배타적인 성격의 유일신교인 유대교, 그리스도교는 탄압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재 유럽의 주요도시들인 도시들 중 상당수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동방의 도시들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지만 오늘날 서유럽 지역인 프랑스의 파리, 랭스, 아비뇽, 보르도, 스트라스부르, 스위스의 제네바, 오스트리아의 빈, 영국의 런던, 콜체스터, 링컨, 요크, 세인트올번스, 스페인의 사라고사, 톨레도, 코르도바, 독일의 쾰른 등 주요도시가 로마 제정 때 건설되어 지금까지 도시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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