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황제의 해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어딘가 엉성한 제정은 5대 째인 네로 대에 이르러 마침내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가 계속된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군대 지휘권을 가진 속주의 총독들이 하나둘씩 '네로 타도'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이죠. 그 중 네로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한 것은 네로보다 40살이 더 많은 노장 갈바였습니다. 그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있던 시절 갈리아 총독 빈덱스, 그리고 오늘날의 포르투갈 지역에 해당하는 루스타니아의 총독 오토와 함께 네로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고 68년,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와 혈연적으로 무관한 첫번째 황제였죠.
이제 제위에 오르는 데에 더 이상 혈통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갈바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다시 공화정 말기의 군사독재 시절처럼 좀 한다하는 장군들이 한번쯤 권좌를 노려볼만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다음해인 69년 게르마니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일부 군인들의 지지를 얻으며 갈바의 후계자로 떠오르자, 네로를 폐위시키고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던 오토가 나서서 갈바를 몰아내고 제위를 차지했습니다. 내심 자기가 다음 순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텔리우스의 부상으로 자신은 아무런 실속도 챙기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선수를 친 것입니다.
하지만 비텔리우스가 그대로 제위를 놓칠 리 없죠. 제위는 이제 빼앗은 자의 것이니까요. 게다가 자신은 병사들의 지지도 받고 있으니 당위성 측면에서도 자신이 더 제위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을거예요.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베드리아쿰에서 마주쳐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비텔리우스의 군대가 승리합니다. 그렇게 오토가 자결하면서 제위는 비텔리우스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소모적인 내전의 연속이네요.
황제로 즉위한 비텔리우스는 오토와의 내전에서 오토의 편에 섰던 병사들을 탄압하며 무자비한 폭정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반기를 들게할 명분을 제공하는 일이었죠. 병사들은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옹립하며 그와 함께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가 황궁을 포위하자 비텔리우스는 재빨리 몸을 숨기려 했지만 결국 도주에 실패하고 병사들에 의해 붙잡혀 폐위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갈바 황제가 오토에 의해 제위를 잃은 시점부터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몰아내고 즉위할 때까지의 모든 일은 69년 한 해 동안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무려 네 명의 황제가 재위했고 그 몇 달의 텀을 두고 로마는 극심한 내전에 반복적으로 휩싸인 거였죠. 그 동안 과연 제대로된 통치가 이루어졌을까요? 국정은 갈 길을 잃고 로마군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내전이 벌어지면서 국방력도 약화되었습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이번에는 군대가 괜찮은 인물을 선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최초의 기사 계급 출신의 황제로 그의 집안은 본래 징세청부를 가업으로 삼아 부를 축적한 가문이었습니다. 대대로 귀족인 파트리키나 고위 관료를 배출하는 평민귀족인 노빌레스에 비하면 출신은 보잘것 없었지만 오직 본인의 능력과 인품만으로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죠. 그는 가족들이 대대로 세금징수원을 한 것과는 다르게 일찍이 군에 입대한 것을 시작으로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등 속주 이곳저곳을 안가본 곳 없이 굴러다니며 공직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시리아 속주로 파견되어 유대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한참 진땀을 빼고 있던 사이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가 쫒겨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동안 내전이 계속되었고 네 황제의 해에 벌써 세번째 황제가 즉위하면서 폭정을 휘두르자 황제에게 반대하는 군인들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추대했습니다. 그는 유대 지역의 전장을 아들인 티투스에게 맡겨두고 일단 로마로 와서 마침내 그 해의 네번째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황제가 되고 보니 수습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일단 비텔리우스가 엉망으로 만든 도시를 재건해야 했구요. 속주의 총독들이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는 일을 막기 위해 속주의 군대 운영을 군단 단위로 축소해 반란의 가능성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또한 징세청부업자 가문 출신답게 인구조사를 실시해 세수를 확보하고 부정부패를 적발하면서 세금 낭비를 줄여 앞선 황제들이 탕진한 국고도 상당부분 정상화시켰죠.
그는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 틈에서 기사계급 출신으로 긴 시간 공직에 있으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원만한 문제해결에 도가 튼 통치자였죠. 그래서인지 이전의 황제들과는 다르게 원로원과의 관계도 좋았구요. 그러는 한편 또 반대로는 제위계승에 관한 법을 명문화해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를 친아들에게로 확정지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 1 시민이니, 존엄한 자니 하는 애매한 호칭으로 기를 쓰고 황제가 되기를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후계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가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나 인품인 덕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여러 분야에서 쌓은 풍부한 공직 경험 덕분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을 때에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백전노장이었죠. 내전으로 초토화가 되다시피한 로마를 떠맡은 이래로 이토록 훌륭한 통치를 보여준 그는 10년의 재위기간을 채우고 열병으로 79년 숨을 거두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은 것은 아버지가 즉위하던 시점부터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다음 제위를 준비했던 아들 티투스였습니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똑같이 물려받았네요.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번째 황제인 그는 불과 2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는데요. 사실 즉위하자마자 현재의 나폴리 근처인 폼페이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 대규모로 분화하면서 어마어마한 국가재난을 맞이하는 바람에 2년 내내 그 뒤치닥거리만 해야했습니다. 그렇게 너무 고생만 해서 그런지 불과 41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죠.
그런 티투스의 최대 업적을 꼽으라고 하면 오히려 황제로 즉위하기 전 유대인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는 원래 황제가 될 운명이 되기 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유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이었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그 일을 이어받아 무사히 마무리하면서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전까지 유대 지역은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자신들의 왕조를 유지하던 상태였는데요. 이 반란이 진압되면서부터는 자치권을 완전히 잃고 로마의 속주가 되어버리죠.
티투스는 앞선 황제들과 다르게 가장 무난하게 제위를 세습받은 황제였지만 아들이 없는 채로 일찍 사망하자 다음 제위는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되어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비하면 성공적인 상속인거 같은데... 문제는 그의 성격이 아버지나 형과는 영 딴판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나 형이 원로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를 안정시켰던 것과는 반대로, 그는 원로원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독단적인 통치를 펼쳤죠. 결국 그의 통치는 96년 암살로 끝이 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도 불과 3대만에 문을 닫게 됩니다.
오현제 시대의 황제들
폭군에 의한 지긋지긋한 폭정을 또 겪으며 전제정치에 대한 경계심이 커진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사후에 벌어질 혼란을 잠재우고자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황제의 궐위를 틈타 또다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가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나설 수 있었으니까요. 원로원이 다음 황제로 추대한 인물은 고령이면서 친족이 없고 무난한 성품을 가진 네르바였습니다. 말이 좋아 무난한 성품이지 사실상 자신들이 조종하기 쉬운 인물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대대로 원로원 의원들을 배출해온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온화하고 원만한 성격에 오랫동안 플라비우스 왕조를 섬겨온 그는 원로원이 로마 시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만한, 적합한 황제 후보였죠. 본인 스스로도 네 황제의 해와 같은 극도의 혼란이 또 발생하는 것을 염려해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전 황제인 도미티아누스가 비록 원로원과는 사이가 안좋았다지만 군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를 밀어내고 세운 황제인 네르바는 항상 군대의 불만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죠. 즉위 당시 이미 65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곧바로 후계자 선발작업에 착수했고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으면서도 원로원이 딱히 반대하지 않을 인물을 골라 양자로 입적시켰습니다.
학자들은 네르바로부터 시작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다섯 명의 황제가 양자 상속의 방식으로 즉위하며 이어진 이 왕조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라고 부릅니다. 2년에 채 못미치는 짧은 재위에, 별다른 큰 업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네르바가 오현제 중 한 명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마 양자 상속의 전통을 안정시켜서 ‘팍스 로마나’로도 불리우는 평화의 시대를 시작한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당시에도 양자상속이 이루어졌으니 로마 역사에서 처음 벌어진 일은 아니었지만요.
98년, 네르바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의 본래 이름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였습니다. 최초의 속주 출신의 황제라고도 알려져 있는데요. 이후부터 로마에서는 최초의 뭐뭐 출신 황제라는 소개가 자주 보이기 시작합니다. 본래 그의 가문은 라틴 일족이지만 조상대에 히스파니아로 이주하고 그곳 여성들과 혼인하면서 트라야누스 본인은 그곳에서 태어나서 자란, 라틴-히스파니아 혼혈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력가문의 청년들이 그러하듯이 군에 입대해 장교로 복무하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로마 제국의 제위가 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플라비우스 왕조가 문을 닫고 네르바 황제가 이미 고령인 상태로 즉위하자 당시까지 군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온 트라야누스가 점차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더니 결국은 군대의 지지를 받아 다음 황제로 낙점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네르바의 서거 이후 별다른 이견 없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두번째 황제로 즉위했죠.
이쯤되면 황제도 로마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에 원로원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을 거에요. 트라야누스 황제는 자리에 있는 내내 원로원과 큰 충돌을 빚지 않으면서 원활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원로원도 대체로 트라야누스의 통치를 지지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에 대한 기록들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죠. 비록 베스파시아누스처럼 귀족들을 다루는 데에 능수능란한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은 아니었지만 강직한 성품에 매사에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는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로마의 많은 황제들이 군인 경력을 가졌지만 트라야누스는 그 중에서도 특히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 황제였습니다. 그가 이룬 업적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아마 다키아 원정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키아는 대략 지금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호전적인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자주 출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키아인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국가 수준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죠. 심지어 이 때 세워진 다키아 왕국은 게르만족들을 몰아내고 흑해의 서해안에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할 정도로 강성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다키아의 국력은 어느덧 로마의 국경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 때에는 무려 로마에 선제공격을 해서 로마를 패퇴시키기도 했죠. 한번 승리를 하고나서는 자신감이 붙은건지, 그 후로도 다키아는 로마를 그닥 두려워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천성이 워낙 강골의 군인이었던 트라야누스는 마침 이렇게 된 거 잘됐다는 듯이 다키아를 공격해 완전히 정복하고 속주를 설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로마와 다키아 사이에 놓인 다뉴브 강 하류에 트라야누스 다리를 건설했는데요. 길이가 약 1 km, 높이가 30 m, 폭은 12-15 m 정도 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리였다고 하네요.
흑해 서해안의 다키아를 정복한 그는 이제 흑해 동해안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곳엔 로마의 오랜 적수인 파르티아가 있었죠. 마침 파르티아가 로마와의 완충지대인 아르메니아에 관해 양국이 협의한 협정을 어기고 자신들 마음대로 아르메니아 왕을 갈아치우는 일이 발생했는데요. 트라야누스는 차근차근 물자와 병력을 준비해 마침내 원정을 개시했습니다. 일단 원정이 시작되자, 그는 그동안 준비한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빠르게 점령지를 늘려갔습니다. 분쟁의 단초가 되었던 아르메니아를 시작으로 흑해 동해안, 옛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고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까지 함락시켰죠.
하지만 승리는 거기까지였습니다. 대규모 병력이 파르티아 주변으로 집중되어 있는 사이 로마 제국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브리타니아와 이집트 등의 기존 속주는 물론이고, 동쪽으로 원정을 오는 과정에서 획득한 아르메니아와 지중해의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반란들 중에 파르티아 원정에 가장 결정타를 날린 건 로마의 빵바구니라 불리우는 곡창지대 이집트의 반란이었습니다. 당장 군대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로마군은 더 이상 획득한 영토를 계속 유지하는 게 어려워졌죠.
결국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포기하고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파르티아 정복이 또 한번 실패했네요. 뭐, 결국은 실패했다는 걸 현재의 우리는 알고 있지만 당대의 로마인들에게는 정말 통한의 실패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그는 한번 정복했다가 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라도 차지하고자 했지만, 낯선 원정지에서의 극한의 스트레스는 결국 당시에 이미 67세의 노령인 그를 앓아눕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117년, 로마로의 귀환 도중 지금의 튀르키예 남부인 킬리키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파르티아 정복에는 끝끝내 실패하긴 했지만 로마는 그의 시대에 최대 강역을 이룩합니다.
트라야누스에게는 즉위 전부터 이미 자신이 양자처럼 키운 오촌조카인 하드리아누스가 있었습니다. 트라야누스의 치세 동안에 눈에 띄는 큰 공을 세운 것은 없었지만 파르티아 정벌 기간 동안 시리아 총독으로 재임 중이었던 그는 황제가 서거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일생 동안 광대한 로마의 속주들을 두루 순행한 덕분에 '여행 황제'라는 별명을 었었는데요. 그렇게 로마 구석구석을 순행하며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최대로 확장된 로마의 영토들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비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다소 무리하게 추진한 파르티아 정벌이나 브리타니아 완전 정복도 포기하기로 하고, 대신 브리타니아 속주를 순행하면서 지금의 잉글랜드 섬에서 로마의 영토, 즉 브리타니아 속주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마치 만리장성 같은 성벽을 쌓았죠.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성벽이 로마의 복쪽 경계로 결정되자 성벽을 기준으로 남쪽은 로마의 영향을 받은 잉글랜드 문화권이, 북쪽은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에 해당하는 칼레도니아 문화권이 각각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인의 입장에서는 이 방벽이 문명의 경계인 셈이죠. 이 성벽은 무려 17세기까지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경계 역할을 했구요. 역설적이게도 스코틀랜드 고유의 문화를 오늘날까지 보존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현재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와도 얼추 비슷하다고 하네요.
일생 동안 여행을 그렇게 많이 했다면 그 동안 나라는 어떻게 다스리나요? 놀랍게도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시 안에 있지 않으면서도 그 많은 정무를 서신 교환으로 통치했습니다. 본래가 매우 꼼꼼, 세심한 성격에 효율성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대대적인 관료제 개편으로 교통 및 통신을 담당하는 행정부서를 신설해 조직을 정비했습니다. 트라야누스 시대를 거치며 로마의 영토가 또 한번 크게 확대되었으니 이러한 개혁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들이었죠.
또 한가지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법률개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로마 사회는 동양의 가부장제 저리가라할 정도의 매우 가부장적인 사회였다고 합니다. 부인과 미성년의 자녀들은 가장인 아버지, 남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고 가장은 식구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졌습니다. 그 가족에게 속한 노예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하드리아누스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가장의 생사여탈권을 박탈해 가정 내 약자들을 보호하고 노예를 학대하거나 비인도적인 목적으로 거래하는 것도 불법화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분명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실제로 그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군주였다고 하네요. 그리스의 철학에 관심이 많아 당대의 학자들과 토론을 즐기기도 했구요. 그리스 예술에 심취해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리스와 관련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황후에게 무척 다정한 애처가인 동시에 남성 연인도 있었던, 양성애자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순행과 과중한 업무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수명을 갉아먹었습니다. 그 당시의 여행이라는게 요즘처럼 쾌적한 것도 아니고, 극단적인 환경 변화를 온몸으로 맞는 데다가 풍토병의 위험이 도사리는 일이니 그런 와중에 국정을 돌보는게 분명 일반인의 체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에요. 게다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성격상 모든 일에 너무 과도하게 열정을 쏟아부었을 테고, 또 쉽사리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는 그런 속 편한 성격도 아니었으니, 60대에 들어서는 눈에 띄게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황후인 비비아 사비나와의 사이에서 친자식이 없었던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일찌기 생각해둔 후계자가 있었습니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중신 가문 출신에 원로원과 사이가 가까웠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바로 그였죠.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가 아직 공직 경험이 부족하고 좀 병약한 게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를 판노니아 속주,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의 총독으로 파견했는데, 그는 거기서 그만 요절했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하드리아누스에게는 무척 절망스러운 일이었을 거에요. 결국 그는 자신의 얼마 없는 인척 중에서 인품이 훌륭하고 귀족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안토니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얼마 안 가 같은 해인 138년에 서거했습니다.
안토니누스 황제의 이름 뒤에 붙는 피우스는 별명입니다. '자비로운' 이라는 의미라는데요. 이름처럼 그는 자비로운 통치를 펼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로마의 오현제 시대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인재가 즉위함으로써 만들어진 시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군인 기질의 트라야누스가 확장시킨 로마를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하드리아누스가 단단하게 다지고, 온화하고 겸손한 안토니누스가 평화의 시대를 이어간 것 같아서요.
안토니누스는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였지만 겸손한 성품 덕에 주변의 신뢰가 두터웠습니다. 거기에 소박하고 검소한 사생활이 잘 알려져 있어서 더더욱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드리아누스가 유능하긴 하지만 다소 독단적이고 냉정한 성격으로 원로원과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탓에 안토니누스 황제는 즉위 초에 원로원으로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의 정책들을 폐지하라는 압력을 상당히 강하게 받았는데요. 그는 그들을 인내심있게 설득하는 한편, 원로원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이들과의 관계 개선에 애썼습니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확대하고 하드리아누스가 정비한 로마를 물려받아 23년의 치세 동안 문제 없이 다스리면서 로마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는 그의 치세에 대해 '별로 쓸게 없다.' 라는 말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나쁜 뜻이 아니에요. 그만큼 평안하고 무탈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거 같습니다. 하지만 강성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운영이 쉬운 것은 아니죠. 멀쩡한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우선 그는 검소한 사생활만큼이나 국정 운영에서의 낭비를 없애고 국고를 확충했습니다. 이렇게 절약한 자금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속주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로 지출해 속주의 경제를 개선하고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도록 했죠. 당시 로마는 동방에 비해 서방의 경제가 눈에 띄게 낙후되는 양상을 보였는데요. 결과적으로 보면 이는 훗날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면서 각자의 역사를 걷는 결말을 맞게 되지만 적어도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치세 동안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무척 골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는 군사활동과는 거리가 먼 군주인 것 같죠? 즉위 전,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다르게 군대에서의 경력이 거의 없는 건 맞지만, 그는 재위기간 동안 벌어진 반란이나 무력도발에는 무척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브리타니아 속주에 설치된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160 km 정도 북쪽에 설치된 안토니누스 방벽이 그 증거죠. 하드리아누스 방벽 이북의 칼레도니아 인들이 지속적으로 국경을 넘보자 그들을 더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 방벽을 세운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 방벽은 계속 지켜지지 못하고 로마군은 다시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후퇴했지만요.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르만 인들이나 스키타이 인들의 공격에도 초반에 강력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도발이 확산되는 것을 재빨리 차단했죠. 이런 빠른 대응은 각 속주의 국경을 맡고 있는 군대, 그리고 속주를 담당하는 총독들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조그만 실책도 어떻게든 끄집어내서 비판하길 좋아하는 듯한 후대의 역사가들 역시, 어떻게 보면 다소 노잼으로 보일 정도로 평화롭기만 한 이 시대를 다스린 안토니누스 황제를 두고 그저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통치자가 아닌, 현명한 통치자로 평가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제정 로마의 전성기이자 평화의 시대를 이끌었던 안토니누스 황제는 161년, 74세를 일기로 서거하면서 23년 간의 긴 치세를 마무리합니다. 사인은 노환이라고 하는데요. 자신의 거처에서 잠들듯 평온하게 숨졌다고 하니, 최후마저도 성격에 어울리는 모습같네요. 그는 친아들이 있긴 했지만 일찌기 요절했기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로 사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명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제위는 무난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로 돌아가고... 그는 곧 남은 생애 내내 끝없이 고군분투합니다.
역사가들이 로마 최고의 성군으로 꼽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즉위 전부터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착실히 후계자 수업을 받았던 인재였습니다. 근데 그 후계자 수업이라는 게 안토니누스 황제의 스타일이 많이 반영되다보니 당시의 로마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군사적 업적과는 거리가 멀었죠. 대신 그는 후계자 시절부터 이미 황제의 정무를 도우며 풍부한 행정 경험을 쌓았습니다.
본래가 사색적이고 진지한 성격이었던 그는 문학과 과학, 역사학, 철학에 두루 관심이 많은 학자적 소양이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시대가 평범하기만 했더라도 그는 세련된 도시 안의 화려한 궁정을 거닐며 제국 각 지역 출신의 학자들과 토론을 나누고 지식을 교류하는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재위기간 내내 그가 처한 현실은 참담했죠. 그의 저서 <명상록> 역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가는 지옥같은 전장에서 자신이 몸소 깨닫은 삶의 정수를 담아 탄생시킨 고전이 아닐까 합니다.
안토니누스 황제의 사후 그는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공동 황제라는 게 좀 낯선 개념이기는 하지만, 이제 한 사람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로마가 너무 광활한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두 형제는 즉위 직후부터 커다란 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안토니누스 황제 몫의 재난을 한꺼번에 때려맞기라도 하는 양, 홍수와 가뭄, 지진이 제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안으로는 브리타니아의 반란이, 밖에서는 게르만족과 파르티아가 로마를 위협했죠.
다행이라면 이 공동 황제 제도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이전투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토니누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된 두 사람은 친형제도 아니었고 성격도 영 딴판이었지만 돈독한 우애를 바탕으로 힘든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갔습니다. 우선, 파르티아 전선으로 파견된 루키우스 베루스는 명장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신속하게 사태를 수습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들을 함락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죠. 가까스로 전란을 수습한 로마의 앞에 전염병이라는 또 다른 난제가 등장했습니다.
'안토니누스 역병'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강력한 전염병은 순식간에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번졌습니다. 광범위한 전염병 창궐이 인류의 문명에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는 현대의 우리 모두가 몇 년 전 뼈저리게 경험했죠.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2세기의 로마는 당연히 더더욱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방에서 시작된 이 전염병은 곧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로 번졌고 이집트와 게르마니아까지 휩쓸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분서주하며 이 전염병을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은 국경지대의 약화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머리맡을 위협하던 게르만족은 하나의 통일된 부족이 아닌 여러 갈래의 다양한 부족들이 서로 세력을 과시하며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들 중 다뉴브 강을 경계로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던 부족들이 약해진 국경을 비집고 들어와 그 근처의 속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미 전염병 때문에 국경지대의 병력의 상당수를 상실한 로마에서는 이들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병력을 충원할 수밖에 없었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노예들을 대거 해방시켜 입대시키고 하고, 주변의 다른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끌어들이며 국경의 병력을 보충했습니다. 전염병이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와 군대를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침입자들을 막아냈죠. 그 결과 당장 제일 큰 위협에 처해 있던 이탈리아 북부의 아퀼레이아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 해당하는 노리쿰, 그리고 헝가리 지역에 해당하는 판노니아를 탈환하며 결국은 국경을 지켜냈습니다. 이 전쟁은 당시 가장 위협적이었던 게르만족 일파의 이름을 따서 1차 마르코만니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1차가 있다는 건 2차도 있다는 거겠죠?
게르만족의 침입은 잠시 잦아들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정사를 책임지던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자신의 막내 아들이 차례로 요절하고 만것입니다. 이제 거대한 제국은 결국 오롯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맡겨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잠잠했던 게르만족은 또 다시 로마의 국경을 노립니다. 황제는 다시 다뉴브 강 유역의 전선으로 직접 출병해 게르만족 부족들을 하나하나 격파했습니다. 후계자 시절 딱히 군사적인 재능이 돋보이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정말 놀라운 대목이에요.
여기까지만 봐도 한 사람의 치세 내에 벌어진 일이라기에는 너무 가혹한 일인 것 같은데... 그는 또 한 번의 절망스러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앞서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명장이자,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측근,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황제가 전투 중 전사했다는 가짜 뉴스를 듣고 황제의 어린 아들이 즉위할 것을 예상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부하의 손에 제압되었습니다. 반란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충직했던 그의 배신은 황제에게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분노보다는 깊은 슬픔, 마음 속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에게 닥친 개인적, 국가적 불행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카시우스의 반란을 정리하기 위해 아시아 속주를 방문한 사이, 한동안 뜸했던 게르만족이 다시 로마의 국경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른바 2차 마르코만니 전쟁이죠. 또 다시 지긋지긋한 전선으로 이동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족을 몰아내고 인근 속주에 포로로 잡은 게르만 인들을 이주시켜 로마 제국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결국 로마에 동화되어 제국의 일부가 되는 데에 성공했죠.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막고 또 막으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건 자신의 수명을 댓가로 치르며 간신히 버텨가는 꼴이었죠. 원래도 그렇게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던 그는 결국 아직 게르만족과의 전쟁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180년, 현재의 오스트리아 빈에 해당하는 빈도보나의 병영에서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찌기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철학자인 통치자, 즉 철인왕이 통치하는 사회를 상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바로 그 이상적인 철인왕이라고 칭송했죠. 하지만 대략적으로나마 훑어본 그의 삶은 고결하고 숭고한 것인 동시에 참담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처럼 보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마지막으로 로마의 가장 찬란한 시절도 이제 끝납니다. 그 뒤의 로마는... 물론 그 뒤로도 난장판과 수습기를 번갈아가며 거치면서 근근히 수명을 이어가긴 하지만, 크게 보면 이제 로마는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서로마 멸망까지 아직 300년이나 남았는데 쇠퇴는 무슨 쇠퇴? 싶지만... 이제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우리가 익히 이름을 알고 있는 위대한 황제들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