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정치
사두정치, 테트라키아 체제로 제국을 분할통치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60대에 이르러 특별한 계기 없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으로 가버리자 권력승계가 복잡해졌습니다. 은퇴 직전까지도 강력한 전제군주로 군림하던 그는 서방 정제인 막시미아누스도 함께 은퇴시켰는데요. 그렇게 두 명의 동, 서방 정제가 물러난 자리는 각 정제의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방 부제는 갈레리우스의 친척 막시미누스 다이아, 서방 부제는 갈레리우스의 부장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차지했죠.
사두정치를 주도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라졌으니 이제 이 체제를 유지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누구나 예상하듯, 이제 네 명의 황제들은 곧 자신들끼리 우열을 가리기 위한 각축전을 시작했죠. 우선 두 명의 부제 자리가 모두 새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의 사람으로 채워지면서 권력의 추는 갈레리우스에게로 기우는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서방에서 원래 좀 병약했던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부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정제로 올라서고 부제 자리는 죽은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차지하게 되죠. 그가 바로 로마 제국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끈 콘스탄티누스 대제입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아버지의 부장으로 실력을 드러내며 휘하의 군인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실력자가 아버지의 사후에 서방 부제의 자리를 잇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는데요. 이걸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은퇴하게 된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였습니다. 이전 정제의 아들이 부제가 되어야 한다면 콘스탄티누스가 아닌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국 그는 군사를 일으켜 지금의 서방 정제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쫒아내버립니다.
남은 세 명의 황제들은 반란으로 서방 정제를 몰아낸 막센티우스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죠. 하지만 이미 그 자리는 공석이 되었으니 부제가 정제의 자리를 계승하는 원칙에 따라 콘스탄티누스가 정제로 올라서야 했는데... 황제들 중 가장 높은 서열에 있던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이 자리에 갑자기 자신의 친구인 리키니우스를 임명합니다. 이러한 처분은 두 부제를 모두 열받게 했습니다. 서방 부제인 콘스탄티누스는 물론이고 동방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 역시 원칙이 깨어진 것 때문에 이 체제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말았죠.
그런데 이 와중에 갈레리우스가 사두정치를 무너뜨릴 불씨를 야기한 채로 311년 병으로 사망해 버립니다. 이제 누가 정제인지, 부제인지, 누가 서방인지, 동방인지 하는 문제는 잊혀졌습니다. 동방 정제가 없는 상태에서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 그리고 서방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가 난립하는 내전이 시작되었죠.
콘스탄티누스는 우선 스스로를 서방 정제로 칭한 막센티우스를 제압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 양측은 이 과정에서로 로마시 근교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큰 전투를 치렀는데요.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커다란 십자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이 십자가와 함께 승리할 것'이라는 신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다음날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문양의 기를 만들어 전투에 나섰고 막센티우스에게 크게 승리하며 일단 서방 전체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죠. 이 일을 계기로 콘스탄티누스는 훗날 크리스트교를 공인했다는데요. 덕분에 그는 오늘날까지도 대제로 칭해지고 있죠.
한편, 콘스탄티누스나 막센티우스와 같은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는 서방보다는 차라리 동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리키니우스는, 이제 동방 정제를 칭하는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대결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 대결에서 승리하며 동방을 차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 경쟁자들의 남은 가족들과 지지세력들에게 너무 혹독한 처분을 내리면서 시민들의 신망을 잃었죠. 따지고 보면 제일 정통성도 없는 인물인데 말이에요. 거기에, 좀 더 훗날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는 크리스트교에 대해서도 무척 강격한 입장이었습니다. 이는 이미 상당한 교세를 확보한 중이었던 크리스트교 신자들 대부분이 콘스탄티누스를 지지하도록 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남은 두 명의 황제는 발칸반도 북부 일대에서 여러 번에 걸친 전투를 치렀지만 결과는 대체적으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였습니다. 결국 리키니우스는 항복을 표하고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로 유폐되었지만 바로 다음 해에 처형되었습니다. 이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 4분할 되었던 로마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단일한 제국으로 통일되며 소생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부흥기, 콘스탄티누스 대제
324년, 분할되었던 로마를 다시 통합한 콘스탄티누스는 행정, 군사, 법률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며 내전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단지 로마를 겉으로 통합시킨 것에서 멈추지 않고 사회 깊은 곳까지 통합을 위한 발판이 마련하기 위해 애썼죠. 그는 전제 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근위대를 해체시켜 게르만 용병들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새롭게 창설하고, 반란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해 황제 자문기구인 추밀원을 구성했습니다. 또한 그전까지 고질적으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솔리두스라는 새 금화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대제의 반열에 올려놓은 가장 큰 업적은 그 전까지 여러 번 혹독한 박해를 받아왔던 크리스트교를 로마의 정식 종교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크리스트교는 발생한 지 수백 년이 지난 종교였고 그 동안 이미 여러 종파가 발생해 있었습니다. 최초에는 소수 종교였지만 열두 명의 사도와 바울의 전도 여행으로 지중해 동부에 점차 퍼지기 시작해서, 점차 교세가 커지자 3세기부터는 로마로부터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했죠. 특히 스스로를 최고신인 유피테르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며 전제군주정을 추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는 대대적인 박해를 당했습니다.
물론 아직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좀 더 나중의 일이구요.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니케아 공의회를 처음 열어서 교리를 정비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크리스트교는 여러 교파로 갈라져있었는데요. 그래서 단일한 세력으로 콘스탄티누스를 강력하게 지원해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회의를 개최해 먼저 이단 논쟁을 마무리지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 기독교와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가 대립했는데 325년 니케아 공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이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정작, 콘스탄티누스 개인적으로는 계속 세례를 받기를 미루다가 말년이 되어서야 그마저도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에 귀의했습니다. 이단으로 판정되어 로마 제국에서 퇴출된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는 이후 소멸하지 않고 로마 밖의 게르만족에게 퍼졌습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개혁이 제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옛 제도나 관습이 깊숙히 뿌리박힌 로마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시로 천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와 문물의 중심인 동방에 새 수도를 건설하기로 했죠. 그가 통일된 로마의 새 수도로 낙점한 곳은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폴리스였습니다. 영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이 더 유명하죠. 근데 이 이름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로 새로 지어진 이름이었구요. 원래는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의 무역 도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선택을 받은 이후 이곳은 천년이 넘는 동안, 그리고 로마가 멸망하고 이교도들이 새로운 제국을 새운 이후에도 변함 없이 수도로 기능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총 31년 동안 제위에 있다가 337년, 65세의 나이로 서거했습니다. 그의 사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제국은 다시 분열되는데요. 이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치세를 쇠퇴하던 로마의 짧은 부흥기 정도로 보는 관점도 있죠. 하지만 이후 다시 분열된 로마의 반쪽이나마 천년 이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룬 공적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개혁을 통해 마련한 것들, 콘스탄티노플, 크리스트교, 솔리두스 금화 등이 모두 로마의 남은 수명 내내 함께 존속했으니까요.
이민족의 침입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기 잠깐 하락세를 멈추었던 로마의 국력은 그의 죽음과 함께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4세기 후반부터는 로마의 국경을 둘러싼 이민족들이 점차 과감하게 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요. 콘스탄티누스의 다양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여전히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와중에, 점차 거세지는 외세는 로마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후 즉위하는 황제들은 사방에서 로마의 국경을 물어뜯는 이민족들과의 전쟁에 사활을 걸어야 했죠.
이민족의 침략은 일회성의 위협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 밖 멀리,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수백 년에 걸져 이어지면서 민족과 국가, 문화적 경계가 확연히 변화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민족들의 위협도 그만큼이나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질 예정이었죠. 이들은 왜 자신들이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이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게르만족은 원래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서부에 분포해 있었는데요. 주로 중앙아시아에 터를 잡고 살던 강력한 훈족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서고트족을 자극하자 이들의 앤쇄적인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훈족에게서 쫒겨난 서고트족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서쪽으로, 다른 한쪽은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들 중 서쪽으로 이동하던 서고트족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마케도니아의 하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마는 황제 발렌스가 전사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의 패배는 로마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그전까지와는 달리 게르만족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죠.
뒤이어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서고트족과 평화조약을 맺고 그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장 동방에서 사산조 페르시아도 압박을 가해오는 상황에서 그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서고트족의 입장에서도 훈족에게 쫒겨나 로마의 영역으로 밀려들어올 수밖에 없게 된 입장에서 로마군에 취업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도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구요. 근데, 그렇게 밀려드는 서고트족을 계속 로마군으로 편입하다보니 이제 로마군 내에서는 로마 군단 본대보다 용병 부대의 수가 더 많고, 병력도 더 강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뭔가 큰 부작용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내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공인했던 크리스트교를 완전히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이제 로마는 크리스트교 국가가 된 거에요. 그는 외세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인하하고 물가 정책을 완화하는 등 내치에 힘을 쏟으며 로마의 부흥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사후 로마는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번 분열은 완전한 분열이었고, 동, 서로마는 이제 다시는 통합되지 않습니다. 물론 로마는 계속해서 게르만족의 공격에 시달렸구요... 로마 내의 게르만족이 너무 많아지다보니 이제 상황이 로마군 게르만족 용병부대 VS 로마 밖 게르만족의 대결로 흘러갔습니다.
한편, 로마 밖 게르만족 중 서고트족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로 진출하고,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진출하던 즈음 로마의 속주였던 브리타니아 역시 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는데요. 스코트족, 픽트족, 색슨족 등이 계속해서 로마의 브리타니아 국경을 공격하고 주변 섬들을 약탈하자 당대의 명장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이를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고트족 군대가 로마 본토를 공격하자 그가 이를 막기 위해 원래 주둔해있던 브리타니아의 속주군까지 모두 데리고 브리타니아를 떠나 로마로 향하고, 브리타니아는 그냥 무방비 상태로 남을 수 밖에 없었죠.
스틸리코가 서둘러 로마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로마를 점령한 서고트족 군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인데요. 서고트족의 부족장인 알라리크가 이끌던 이 군대는 결국 410년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에게 약탈당하는 로마를 보는 로마인들은 얼마나 큰 충격에 빠졌을까요... 심지어 그는 본래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대규모로 기용된 서고트족 용병부대 출신으로 게르만족을 상대로 수차례 전투에서 상당한 공을 세우며 능력을 인정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로마가 그렇게 탈탈 털리고 있는데, 스틸리코의 로마군은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도시를 약탈하던 알라리크는 서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와 평화조약을 맺고 보상금까지 받아내고나서야 히스파니아로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포기한 히스파니아에 서고트 왕국을 세우죠. 히스파니아의 서고트 왕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무너지는 틈을 타서 게르만족의 각 부족장들은 각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며 왕을 자처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는 반달 왕국, 갈리아에는 부르군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 등이 들어섰구요. 로마 제국으로 통일되었던 유럽 대륙에는 이제 거대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451년 더 큰 일이 일어납니다.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몰아냈었던 훈족이 직접 로마로 진격한 것입니다. 게르만족도 골치 아픈데 그들을 몰아낸 훈족은 얼마나 더 골치일까요. 훈족의 왕인 아틸라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이제는 서로마에 나타나 로마를 공격했습니다. 서고트와 프랑크, 부르군트 왕국 등이 이들을 막으려 애를 썼지만, 온 유럽을 휘젓고 다니며 마음껏 도시들을 파괴한 그들은 교황 레오 1세가 나서서 설득한 뒤에야 철군했습니다. 선뜻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긴 합니다. 크리스트교나 로마 제국의 권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아틸라 왕이 레오 1세의 어떤 설득에 뜻을 접었을지 궁금한데 그 내용은 분명하게 밝혀진 게 없다고 하네요.
455년, 이번에는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했습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기에 북아프리카에 터를 잡은 반달족은 서고트족과 훈족이 로마를 공격하는 사이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일부를 점령하며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했는데요. 로마에서 그들이 물러나자 이번엔 자신들이 로마를 점령한 것입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로마로 들어온 그들은 로마시를 파괴하고 약탈했죠. 그러자 이번에도 교황인 레오 1세가 나서서 비무장한 시민들을 살상하지 말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약탈은 완전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야만적인 파괴행위는 '반달리즘'이라는 단어를 남겼을 정도였죠.
이렇게 다양한 이민족들이 여러 갈래로 로마를 침략하는 내내, 로마는 동서로 분열된 상태로 존재했습니다. 동, 서로마에는 분명 황제가 존재했지만 나라의 실권은 황제가 아닌 게르만족 용병부대 출신의 장군들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동로마는 그나마 영토를 유지하며 존속했지만 서로마는 계속해서 침략하는 게르만족 군대에게 야금야금 속주를 잃고 이탈리아 반도만 남은 상태로 전락했죠. 이렇게 유명무실해진 서로마는 게르만족 출신으로 서로마에서 출중한 실력을 보였던 장군인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시키며 476년 나라의 문을 완전히 닫게 됩니다.
사실, 서로마는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영토를 동, 서로마로 분할하고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하면서 서로마를 포기하다시피 했던 시점부터 멸망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합니다. 몰락의 길을 걷던 로마를 잠시나마 부흥시켰던 두 황제의 결정이 서로마의 멸망에 결정타였을 수 있다니 아이러니한 얘기긴 하지만요. 결국 이러한 응급조치는 로마 제국 전체에서 서로마를 버리고 동로마만이라도 생존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유럽 대륙을 하나로 아우르던 거대한 제국은 이제 유럽 역사상 다시는 등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