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부흥기 콘스탄티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60대에 이르러 특별한 계기 없이 정계에서 은퇴해 고향인 달마치아로 돌아가자 권력승계가 복잡해졌습니다. 서방 정제인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와 함께 은퇴했고 부제인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의 권력 투쟁 중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밀비우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잡아 단독 황제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직도 경제와 문물의 중심이 동방에 있다고 생각해서 동방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 새 수도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전제 체제를 더욱 강화해 게르만 용병들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창설하고, 반란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해 황제 자문기구인 추밀원을 구성했습니다. 또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쇠퇴해가는 로마의 멸망을 지연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중세를 거치며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가장 큰 업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일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전투 당시 기적을 목격했다며 이듬해에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했습니다. 당시 크리스트교는 발생한 지 수백 년이 지난 종교였고 그 동안 여러 종파가 발생했습니다. 최초에는 소수 종교였던 크리스트교는 열두 사도와 바울의 전도여행으로 지중해 동부에 점차 퍼지기 시작해서, 점차 교세가 커지자 3세기부터는 로마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를 최고신인 유피테르의 현신이라고 주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는 대대적인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여 이들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어 있었다는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여러 교파로 갈라져있던 크리스트교는 단일한 세력으로 콘스탄티누스를 강력하게 지원해줄 수 없는 입장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회의를 개최해 먼저 이단 논쟁을 마무리지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 기독교와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가 대립했는데 325년 니케아 공회의에서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이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콘스탄티누스 개인적으로는 죽기 직전에야 세례를 받았으며 그마저도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에 귀의했습니다. 이단으로 판정되어 로마 제국에서 퇴출된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는 이후 로마 밖의 게르만족에게 퍼졌습니다.
이민족의 침입
로마는 점차 쇠퇴해서 4세기 후반부터 이민족들은 점차 과감하게 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타니아의 여러 부족은 연합해서 브리타니아 속주를 끊임없이 공격했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픽트족과 색슨족, 스코트족의 연합 공격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민족의 침략은 일회성의 위협이 아니었습니다. 4세기 말에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지면서 민족과 국가, 문화적 경계가 확연히 변화했습니다. 주로 중앙아시아에 터를 잡고 살던 강력한 훈족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서고트족을 자극했고, 서고트족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서쪽으로, 다른 한쪽은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들 중 서쪽으로 이동하던 서고트족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마케도니아의 아드리아노플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마는 황제 발렌스가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서고트족과 평화조약을 맺고 서고트족을 용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서고트족을 로마군으로 편입하다보니 이제 로마군 내에서는 로마 군단 본대보다 용병부대의 수가 더 많고 병력도 강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삼고 로마의 부흥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사후 로마는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습니다. 물론 로마는 계속해서 게르만족의 공격에 시달렸고 상황은 로마 내의 게르만족 용병부대와 로마 밖의 게르만족이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한편, 로마 밖의 게르만족 중 서고트족은 갈리아와 에스파냐로 진출하고,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진출했습니다. 로마의 속주였던 브리타니아 역시 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410년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는 로마를 점령했습니다. 도시를 약탈하던 알라리크는 황제와 평화조약을 맺고 보상금까지 받아내고 나서야 에스파냐로 물러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스파냐에는 서고트 왕국이 생기고, 북아프리카에는 반달 왕국, 갈리아에는 부르군트 (부르고뉴) 왕국과 프랑크 왕국 등이 들어섰습니다. 통일되었던 유럽 대륙에 분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편, 451년에는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몰아냈었던 훈족이 직접 로마로 진격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훈족의 왕인 아틸라 왕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약탈한 것입니다. 서고트와 프랑크, 부르고뉴 등은 훈족을 막으려 애를 썼지만 그들은 교황 레오 1세가 나서서 설득한 뒤에야 철군했습니다. 455년, 이번에는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했습니다. 로마 시를 파괴하고 약탈한 그들의 야만적인 파괴행위는 '반달리즘'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민족들이 여러 갈래로 로마를 침략하던 와중에도 로마는 동서로 분열된 상태로 존재했습니다. 동, 서로마의 실권은 황제가 아닌 게르만족 용병부대 출신의 장군들이 장악했습니다. 동로마는 그나마 영토를 유지하며 존속했지만 서로마는 속주를 모두 잃고 유명무실해진 상태에서 게르만족 장군인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시켰습니다. 476년 마침내 서로마가 멸망했습니다. 사실, 로마는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영토를 동, 서로마로 분할하고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를 포기하던 시점부터 멸망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응급조치는 결국 로마제국 전체에서 서로마를 버리고 동로마만이라도 생존시키기위한 전략이 되었지만 유럽 대륙을 하나로 아우르던 거대한 제국은 이제 유럽 역사상 다시는 등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