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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게르만족의 이동

게르만족은 누구일까?

 

게르만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로마 주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민족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원래는 로마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북쪽 국경 일부인 라인강 너머에 살던 일부 민족을 부르는 말이었는데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보다 더 먼 북쪽에 사는 다른 민족들까지 모두 뭉뚱그려서 일컫는 말로 점차 바뀌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딱히 어느 특정 민족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거죠.

 

그들은 대체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부터 천천히 남하해 동유럽의 초원과 흑해 근처 꽤 넓은 지역에 걸쳐서 주로 목축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일부는 농사를 지어 곡물과 순무, 양배추 같은 것들을 재배하기도 했다는데 그래도 목축의 비중이 훨씬 컸습니다. 원래 목축을 하는 민족들은 가축이 먹을 풀을 찾아 초원지대를 이동하게 되는데요. 게르만족도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서 유럽 중앙으로 오면서 로마와 만날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언어도 분화되어 북부, 동부, 서부 게르만족으로 나뉘었죠. 

 

로마인들의 눈에 비친 게르만족은 키가 크고 힘이 세며 용맹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와의 접촉이 많아지면서부터는 용병으로도 많이 쓰였다고 하네요. 체력이 좋아서 힘든 노동에도 적합하니 군사력으로든, 노동력으로든 힘캐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로마보다 거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습관을 유지했는데요. 화려하고 향락적인 제정 로마 후기 귀족들의 생활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이런 모습 때문인지 과거의 일부 사학자들은 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이유를 이 부분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로마도 처음에는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중시하긴 했었죠.

 

이렇게 점차 서쪽과 남쪽으로 내려오던 게르만족은 이제는 인구가 많아지고 촌락의 규모도 점차 커지면서 민족별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에서도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으로 원정을 나서며 북쪽과 동쪽으로 경계를 확대해오자 이 둘은 딱 마주치게 되었죠.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을 엘베강 유역까지 몰아내고 게르마니아 지방까지 진출하려고 했지만 게르만족 지도자인 아르미니우스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실패했습니다. 결국 로마는 서쪽으로는 라인강, 동쪽으로는 다뉴브강을 경계로 게르만족과 마주했습니다. 게르만족은 점차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갔고 로마는 전체 상비군 전력의 30 퍼센트 정도를 게르만족 방어에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와 게르만족이 늘 대립 양상만 보인 것 같지만 로마가 게르만족에 대해 강경책만을 쓴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르마니아 일대를 로마로 편입하고 그곳의 게르만족들을 로마에 동화시키려는 시도도 있어왔죠. 제정 말기가 되면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대장들이 자신들의 주둔지에서 각자 영향력을 행사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기 한참 전, 이미 아르미니우스 시절부터 게르만족 각 부족의 유력가문 출신 청년들은 로마군에 입대해 복무하고 로마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로마 사회에서 기사 계층으로 볼 수 있는 에퀴테스 계급까지 진출하기도 했죠. 

 

시간이 흐를 수록 게르만족의 세력은 로마 안팎에서 계속 확대되었습니다. 이들은 문명적으로는 로마인이나 그리스인, 동방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져 있었지만 출산율이 높아서 인구가 빠르게 늘었죠. 게다가 목축 만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약탈하다보니 군사력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로마 안 게르만족 용병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동안 로마 밖의 게르만인 역시 강력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마 지역에서 게르만족의 영향력이 강력해지니 이 지역은 상업 위주로 경제가 크게 발전해 있던 동방에 비해 문물이 상당히 뒤떨어졌습니다. 게르만족은 그들의 화려한 도시 문물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죠. 이들은 아직도 부족 단위로 오두막이나 움집에 살며 가축을 키우는 자신들의 옛 생활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단지 북쪽보다 훨씬 온화한 기후를 가진 로마의 영토만큼은 이들에게도 늘 관심의 대상이었지만요. 

 

그런 게르만족에게 또 한번의 큰 변화가 닥쳤습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목축을 하던 훈족이 목초지를 구하기 위해 서쪽으로 대거 진출한 것입니다. 이들은 흑해 북쪽 일대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인 고트족 마을을 습격했고 이에 쫒겨 서쪽으로 이동한 고트족은 연쇄적으로 로마로 들어왔습니다. 그 동안 서서히 진행되던 서로마 지역의 게르만화가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대이동으로 급격히 가속화된 것입니다. 

  

 

서로마가 무너진 자리

 

그렇게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 게르만족은 결국 서로마를 무너뜨렸습니다. 서고트족은 갈리아 지방을 거쳐 히스파니아로 진출했구요. 북아프리카 지역은 반달족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했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방에는 프랑크족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차지한 로마의 영토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는데요. 각 게르만족 민족들의 입장에서 서로마 멸망 전후까지의 상황을 되돌아볼까요.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반달족

반달족이 처음 어디에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게르만족 대부분의 민족들이 그렇기도 하고, 원래 민족의 기원을 따지는 일은 쉽지가 않다고 하네요.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시절의 일이니 이걸 역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도 좀 애매하구요. 어쨌든 이들은 아마도 다른 게르만족들처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부터 남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게 남하하다 다뉴브강 근처에서 로마와 충돌하던 이들은 훈족이 이동하자 로마 국경 안으로 갑작스럽게 떠밀려 들어왔습니다. 

 

오늘날의 헝가리, 오스트리아 즈음인 판노니아를 지나 갈리아, 그리고 프랑스 남부인 아퀴타니아를 거친 이들은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406년, 히스파니아까지 들어왔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닙다.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남쪽 끝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로 이동했죠. 그리고 429년 반달 왕국을 세운 이들은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 카르타고, 시칠리아를 차지하며 세력이 크게 확대되자, 지중해 중부를 장악하고 다시 로마까지 북진해 로마 시내를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북아프리카 지역은 당시 로마의 여러 지역들 중에서도 매우 부유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로마로서는 매우 큰 손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달 왕국은 피정복민들에 대한 가혹한 통치로 이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존에 북아프리카에 살던 로마인들은 원래부터 당연히 반달족에게 불만이 많았고, 북아프리카의 토착 부족 중 하나인 베르베르인들 역시 때때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북아프리카에서는 이 당시 아타나시우스파 크리스트교, 즉 정교로 일컫어지는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다른 게르만족들처럼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신봉하던 반달족들은 이들을 매우 강경하게 탄압했습니다. 

 

결국 반달 왕국은 이들이 독립할 때마다 조금씩 영토를 잃으며 쇠퇴했죠.  그렇게 쇠퇴의 길에 접어든 반달 왕국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동고트족에 의해 시칠리아를 잃고, 533년에는 동로마의 명장인 벨리사리우스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이후 이 지역 대부분은 최초의 이슬람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올 때까지 동로마의 영토가 됩니다.

 

한편, 반달족이 지나쳐간 히스파니아에는 서고트족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원래 흑해 연안가에 살면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인 트라키아 속주를 약탈하곤 했는데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한번 크게 공격을 받은 뒤로는 로마에 공물을 바치는 대신에 평화를 약속받고 한동안 잠잠했지만, 발렌스 황제 때 다시 로마 곳곳을 약탈하더니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는 그를 전사시키며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로마의 용병부대로 대거 받아들여지면서 로마에 정착하나 싶었습니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

그런데, 이 때 로마군에서 복무하던 서고트족 출신의 알라리크가 용병에 대한 로마의 처우에 불만을 갖고 자신을 따르는 서고트족 용병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알라리크는 로마의 정규군에 소속되고 싶어했지만 로마에서는 서고트족을 용병부대가 아닌 정규군에 배치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를 파견에 알라리크를 막으려 했는데요. 하필 이때 동방에서 사산조 페르시아가 로마를 공격해오자 스틸리코는 동방으로 파견되어 버립니다. 결국 로마는 알라리크를 진압하는 데에 실패하고, 알라리크는 로마를 실컷 약탈하다 시칠리아로 이동하던 중에 병사했죠. 

 

이때부터 서고트족의 정착을 위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알라리크 사후 이탈리아 반도를 떠돌던 이들은 알프스를 넘어서 갈리아 지방에 진입했지만 이미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에게 정착지를 얻어내지 못하고 더욱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한때 갈리아 일부 지방에 머물기도 했지만 로마의 공격 때문에 계속 서진하던 중 마침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하지만 거기엔 먼저 도착한 반달족이 있었습니다. 

 

한편, 로마에서는 히스파니아를 차지한 반달족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요. 때마침 히스파니아로 들어온 서고트족이 이 계획에 합류하며 그제서야 로마와 서고트족 간의 동맹이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418년, 이 둘의 연합군은 반달족을 히스파니아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들은 더 부유한 지역인 북아프리카로 떠났지만 거기도 따지면 로마의 속주인건 마찬가지인데... 어쨌든 히스파니아에서 반달족을 몰아내는 데에 공로를 인정받은 서고트족은 로마로부터 갈리아 남부 일부 지역을 받고 정착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프랑스 툴루즈에 해당하는 톨로사를 수도로 삼아 서고트 왕국을 건설했죠. 이 때의 서고트 왕국을 툴루즈 왕국이라고도 합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은 451년 훈족의 아틸라 왕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에도 로마와 다시 한번 연합군을 결성해 훈족들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로마와 서고트 왕국이 그 뒤로도 계속 사이좋게 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고트 왕국은 로마 내에서 제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하거나 다른 게르만족이 침략해 로마 내의 사정이 어려울 때마다 로마의 영역을 침범했고 서고트 왕국이 점차 강력해지는 것을 염려한 로마 역시 프랑크인이나 부르군트족 등과 연합해 서고트 왕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 애쓰기도 했죠. 

 

이후 서고트 왕국은 466년 에우리크 왕이 즉위하면서 첫번째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에우리크는 아직까지 로마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갈리아 남부지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히스파니아로 방향을 바꿔 이베리아 반도 끝의 또 다른 게르만족 왕국인 수에비 왕국만을 남겨둔 채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했죠. 이렇게 영토를 크게 확대한 에우리크 왕은 로마 출신의 지식인들을 등용하고 성문법을 반포하는 등 내정개혁에 힘쓰는 한편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왕국을 세운 테오도리크

서고트족 말고 동고트족도 있었죠. 이들은 일찍이 흑해 연안에 살던 시절,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며 4세기 무렵에는 발트해와 흑해 사이 드넓은 영역을 차지했지만 아틸라 왕이 훈족을 이끌던 시절, 다른 많은 게르만족들과 함께 훈족의 지배하에 놓입니다. 그러다가 453년 아틸라 왕이 죽자 독립해 동로마의 허락을 받아 판노니아 지역에 정착하는데요. 동로마는 이들의 거주를 허락하는 대신 동고트족은 부족장의 아들을 동로마에 인질로 보내는 방식으로 양측의 우호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동고트족의 왕자인 테오도리크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로마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고 식견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왕이 죽자 동고트족의 왕으로 즉위했죠. 한편, 476년, 이탈리아 반도 정도로 영향력이 크게 쪼그라들은 서로마가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이었던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오도아케르는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지 않고 동로마가 임명한 서로마의 총독을 자처했는데요. 그래서 처음에는 동로마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발칸반도 서부의 달마티아까지 차지하며 점차 세력이 커지자 동로마로서는 그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영역을 상당히 잘 다스리기까지 했거든요.  

 

동로마에서는 이제 자신들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오도아케르를 제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로 생각해낸 것이 동고트족이었죠. 동로마의 제노 황제는 테오도리크에게 오도아케르를 토벌하고 그가 차지했던 서로마, 즉 이탈리아 반도와 달마티아 지역에 정착할 것을 권했습니다. 판노니아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던 동고트족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일만한 제안이었을 거에요. 

 

수년에 걸쳐 오도아케르를 토벌하고 수도인 라벤나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한 테오도리크는 493년, 동로마로부터 약속받은 옛 서로마 땅에 동고트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는 불필요한 전쟁을 줄이고 외교를 통해 세력을 다지는 동시에 내치에 힘쓰며 동고트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죠. 하지만 그가 죽고 동고트 왕국의 후계가 다소 불안정해지자 옛 서로마 땅의 회복을 노리던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또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해 동고트 왕국을 공격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파죽지세로 라벤나를 점령하며 동고트 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동로마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동로마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가 동로마를 공격하면서 벨리사리우스가 그쪽으로 파견을 가게 된 것이죠. 이를 틈타 동고트 왕국에서는 새롭게 즉위한 토틸라 왕이 재빨리 정국을 수습하고 동로마에게 빼앗긴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지만, 동로마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이번에는 벨리사리우스에 필적할 만한 또다른 명장인 나르세스를 파견했습니다. 

 

나르세스의 군대는 3만 정도의 대군으로 동고트군의 두배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로마시를 포위한 나르세스의 동로마군은 일방적으로 동고트군을 몰아부쳤고 그렇게 로마를 손에 넣은 뒤 얼마 가지않아 남아있던 동고트군을 섬멸하며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켰습니다. 553년, 이렇게 동고트 왕국의 영역은 동로마의 손에 들어가게 되구요. 이후 동로마는 이 지역에 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하고 나르세스를 총독으로 임명해 관할하게 했습니다. 

 

 반달족이나 고트족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일부와 스위스 지역에 부르군트 왕국을 세운 부르군트족도 있습니다.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시 부르고뉴의 기원이 되기도 한 민족이죠. 이들 역시 기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긴 세월에 걸쳐 조금씩 이동해 3세기 쯤에는 라인강 상류까지 도달했는데요. 다른 게르만족들이 훈족을 피해 대거 이동하던 시기, 라인강 너머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들어와 411년에 부르군트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세우고 보니 사방팔방으로 다른 민족들, 그리고 로마 사이에 끼게 되었습니다.

 

이들 역시 훈족의 아틸라 왕이 온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때에는 멸망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겪었다가, 아틸라 왕 사후 훈족이 몰락하고 474년 군도바트 왕이 즉위한 이래로는 어느 정도 나라를 재건하며 잠시 동안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군도바트 왕 사후 얼마 가지 않아 534년, 프랑크 왕국의 침입을 받아 결국은 프랑크 왕국으로 복속되어 버리죠. 그런데 프랑크 왕국에 속한 뒤로도 이들은 왕국 내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이 독립성 덕분에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사후에는 프랑크 왕국에서 빠져나와 다시 왕국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하죠.

  

하지만 서로마가 사라진 자리에 단지 이들만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유럽 중앙에서 서부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 걸쳐서는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며 서로마를 계승하는 프랑크 왕국이 생겨났구요. 로마가 철수한 영국 섬에는 원래 그곳에 살던 브리튼족의 왕국 이외에 앵글로색슨족과 유트족이 7개의 왕국을 새우며 서로 각축전을 벌입니다. 한편 서고트족이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끄트머리, 지금의 포르투갈 자리에는 수에비족이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구요. 동로마 제국의 북쪽, 지금의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쯤에는 게피드족이 게피드 왕국을 건설했죠. 아직 왕국을 건설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민족들도 있었습니다.

 

서로마의 멸망 이후 생겨난 이 세력들은 이제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합니다. 그 결과 어떤 부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발전시켜가며 오늘날까지 후손을 남기기도 했지만 또 어떤 부족들은 다른 힘센 부족에게 흡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기도 했죠. 이 경쟁은 단시간 내에 끝나지 않고 수백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유럽의 정세를 끊임없이 변화시켰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동서로 완전히 나뉘진 로마는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자 이제 반쪽이 되어 동로마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서구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국이었고 유럽 동쪽과 아나톨리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상당한 영토를 보유한 나라였죠. 동로마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따온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웁니다.

 

게르만족이 남하하며 서로마를 멸망시키는 동안, 동로마의 서쪽 국경도 다소 시끄러웠습니다. 이들은 때때로 동로마를 공격하기도 하고, 동맹을 맺고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도 하며 동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죠. 그러다 서유럽에 새로 생긴 왕국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527년, 동로마에서도 첫번째 중흥군주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즉위합니다. 서로마가 멸망한지 대략 50년 뒤 정도네요.

 

'대제'라는 말에서 알아볼 수 있듯 그는 로마의 옛 영광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동로마가 아직도 유럽의 최강국임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40여 년에 이르는 재위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기며 동로마를 번영시켰지만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반달족과 고트족에 대항해 옛 로마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한 업적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반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이 멸명하게 된 과정이 모두 동로마의 입장에서는 옛 로마의 영토를 수복했던 과정인 셈이죠.

 

유스티니아누스 모자이크 벽화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에 소장 중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모자이크 벽화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법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요. 그래서 당대의 관습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습니다. 이 법전은 오늘날 서구의 양대 법계 중 하나인 대륙법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이고 서구의 법률 체계를 들여온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재 법률 체계 역시 <로마법 대전>에서 최초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죠. 드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가 통일된 법 체계를 따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로마법 대전>을 통해 문화적, 관습적 배경이 다른 동로마 곳곳의  여러 지역이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랜드마크로 손꼽히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한 것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입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원래 그보다 한참 전인 330년에 이미 건축되었는데요.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봉기로 잿더미가 된 것을 그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한 것입니다. 그는 유럽 전체에 걸쳐 5개의 총대교구를 설치하며 교구 체계를 정비했는데요. 이 대성당은 재건 직후부터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긴 세월 동안 콘스탄티노플 총대교구의 주교좌 성당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모스크이자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파괴한 민중 봉기는 니카 반란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입니다. 동로마는 이미 로마 제국이 네 개로 쪼개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동방의 전제군주제를 대거 차용하며 황제권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서유럽의 여러 왕국들 틈에서 동로마를 다시 번영시킨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황제권 강화에 힘쓰던 상황이었습니다. 막대한 영토를 다시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 정벌을 시행하거나 새 법전을 반포하는 것, 교구를 정비하는 것 등 그가 했던 많은 사업들이 사실은 모두 황제의 강력한 권력을 통해 시행될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때문에 무거운 세금이나 강압적인 통치에 짓눌린 일반 대중들은 황제에게 반감을 갖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저변에는 분명 로마인들이 공화정 시절부터 유지해왔던 자유로운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끝내 황제를 자처하지 않은 것도, 로마의 제정이 전제군주정이 아닌 특이한 형태의 원수정을 고수했던 것도 모두 로마 시민들의 전제정에 대한 반감을 의식한 것이었죠. 하지만 동로마의 황제들이 조금씩 전제군주화되며 시민들을 억누르자 시민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콘스탄티노플에서 전차 경기가 열리는 히포드롬 앞에서 황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히포드롬은 전차 경기 응원을 위해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인 동시에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이는 곳이기도 했죠. 민의의 광장이랄까요. 불만의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흥분한 민중들이 모여들자 이들의 외침은 곧 황제에 대한 거센 저항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황제의 퇴위를 외치며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 무력을 동원한 반란을 일으켰죠. 

 

반란이 커지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날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 황후가 그를 막아서며 반란을 강경 진압할 것을 충고하죠.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나르세스와 벨리사리우스에게 반란의 진압을 명령합니다. 두 사람은 반란을 손쉽게 진압했지만 이 과정에서 3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참변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까지 천년을 이어온 로마의 역사에서 로마인들이 지켜온 시민으로서의 자유가 퇴보하고 동로마 제국이 전제군주정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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