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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아바스 왕조와 이슬람 문화의 발전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

야지드 2세가 통치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끝내고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연 칼리파는 히샴입니다. 야지드 2세가 병사하자 그의 이복 동생인 히샴이 즉위한 건데요. 사실 전성기라고 하기는 좀 그런 게, 이미 우마이야 왕조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히샴은 단지 그걸 약간 늦추는 정도였을 뿐 왕조를 부활시키는 못했죠. 그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해 많은 저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이를 학교에서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영토 확장에도 관심이 많아 동서로 정복 사업을 전개했지만 하지만 왈리드 1세 정도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서 확보한 영역을 알 안달루스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이 알 안달루스에 파견된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에게 피레네 산맥을 너머 유럽 깊숙히 진출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카를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 군이 버티고 있었죠. 결국 이슬람 세력은 프랑크 왕국에  의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 원정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물론 그 뒤로 들어선 이슬람 왕국들도 유럽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계속 하긴 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급격한 팽창만큼이나 급격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던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중흥기를 떠받치던 히샴이 서거하자 우마이야 왕조의 후계는 다시 불안정해졌습니다. 칼리파직은 야지드 2세의 아들인 왈리드 2세가 승계했지만 그를 비롯해서 이후의 칼리파들은 모두 무능했고, 마왈리를 차별 대우하던 아랍 우월주의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는 반란이 들끓었죠. 결국 시작부터 이미 빈번하던 반란으로 위협을 받아왔던 우마이야 왕조는 또 한번의 피트나를 겪으며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에 반기를 든 여러 반란 세력을 통합한 이는 무함마드의 삼촌의 후손임을 자처한 아부 알 아바스였습니다. 그는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평등한 무슬림 세계를 만들 것을 천명하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정통 칼리파 시대부터 줄곧 반란을 일으켜온 시아파 세력과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우월주의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던 비아랍인 출신 군인 세력을 통합해 749년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우는 데에 성공하죠. 그는 남은 우마이야 왕조의 귀족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했지만 그 중 살아남은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의 알 안달루스 지역으로 피신해 후 우마이야 왕조를 건립했습니다. 

 

한편, 무함마드의 시대 이래로 순식간에 오리엔트 지역과 북아프리카를 차지하고 유럽을 위협했던 이들이 남긴 유산은 오늘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요. 이슬람 세력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자 원래는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북아프리카와 동로마에 속해 있던 발칸 반도 일부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이슬람 세계로 편입된 것입니다. 이 때의 영향으로 지금도 이곳의 국가들은 이슬람교 국가로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크리스트교 문화권인 이베리아 반도에도 이슬람 문화가 널리 전파되었구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역시 이 당시에 이슬람화되어 지금까지도 이슬람교의 세력권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바스 왕조

 

서양사의 범주를 벗어나는 얘기긴 하지만...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던 이 시기 중앙아시아 건너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중국에서는 당 왕조가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오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수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이 중앙아시아 지역의 작은 나라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서진해왔죠. 이들은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경계인 호라산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와 마주쳤고, 두 나라의 군대는 현재의 키르키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사이의 탈라스 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결과는 수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던 아바스 왕조의 승리였지만 전쟁의 결과보다는 이 전투가 당시까지 급격하게 팽창하던 이슬람 세력과 동양이 처음 서로를 마주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전투를 통해 불교의 영향권이었던 중앙아시아에 이슬람교가 처음 전래되었구요. 엉뚱하긴 하지만 당나라의 제지 기술이 아랍 세계를 통해 유럽으로까지 전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단지 탈라스 전투의 결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아바스 왕조가 존속하는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아바스 왕조가 동양과 서양을 잇는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한 것이죠. 

 

왕조가 세워지자마자 당과 한바탕 전투를 벌여야했던 아바스 왕조는 두번째 칼리파인 압둘라 알 만수르가 즉위하며 왕조가 안정되고 첫번째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왕조를 개창한 아부 알 아바스의 이복 형이었던 그는 페르시아계를 비롯한 능력있는 비아랍계 무슬림들을 대거 등용하고 페르시아의 앞선 행정 체계를 도입하며 한편으로는 아랍인 우대 정책들을 폐지했는데요. 아랍인들이 불만을 가질만도 하지만... 이러한 평등주의는 이슬람교 교리에 부합하는 것이니 불만이 있다고 해도 그걸 내세울 명분은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한 그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훨씬 동쪽에 있는 바그다드로 천도를 하면서 그곳에 원형으로 된 거대한 성을 축조하고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러자 아랍인과 폐르시아인들 같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동로마인, 아프리카인, 중앙아시아인 등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인종이 모이며 자연스럽게 이들의 문화와 언어, 종교, 관습이 공존하게 되었죠.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지니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바그다드로 몰려들고... 그렇게 바그다드는 인구 150만명에 육박하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마치 현재의 뉴욕 같은 느낌 아니었을까요? 

  

 

이슬람 세계에서 부활한 헬레니즘 문명

 

사실 서양에서는 서로마가 멸망한 중세 초기, 아직 찬란했던 로마의 유산이 제대로 유럽에 자리를 잡지 못하며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럽의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고도의 이슬람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문화와 예술을 장려한 칼리파들의 지원에 힘입어 서방의 헬레니즘 문명과 동방의 당 제국으로부터 중국 문명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 것입니다.

 

특히 아바스 왕조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보다 더 철저하게 신분과 민족에 관계없이 능력 본위의 인재선발 정책을 폈고, 덕분에 관직이나 학계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가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무슬림이 아닌 이교도 출신이 요직에 등용되기도 했죠. 이슬람 문화는 이렇게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어우러지면서 세계문화적 성격을 갖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당대의 메트로폴리스 바그다드가 있었스니다. 

 

알 하리리의 마키마트 삽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 중인 알 하리리의 <마카마트> 에 묘사된 도서관 모습

 


예를 들어, 의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등 현대 과학의 기초가 되는 대부분의 자연과학 분야가 유럽에서 뿌리를 내리기 전 이미 이슬람 세계에서 먼저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오히려 이슬람 문명에서 계승되어 그의 저작들이 아랍어로 부활했죠. 특히 7대  칼리파인 알 마문 칼리파 때에는 이른바 '지혜의 집' 으로 불리우는 '바이트 알 히크마'라는 학문기관이 설립되어 그리스어로 쓰여진 수많은 고전이 본격적으로 아랍어로 번역되고 연구되었습니다. 건축에 있어서는 아라베스크 양식과 모자이크가 유행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전래되었구요. 음악에서는 초기의 기타 형태인 류트가 알 안달루스를 통해 유럽에 전래되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거의 실전되다시피했던 학문과 예술이 이슬람 세계에서 부활하다니 이슬람 문명이야말로 르네상스를 이룬 것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이렇게 이들이 이룬 학문적 성취는 이후 다시 유럽 세계로 흘러들어가 스콜라 철학, 그리고 더 훗날에는 유럽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동서양 문명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덕분에 양 문명의 영향을 골고루 받은 동시에, 또한 유럽 세계를 동서 양쪽으로 둘러싸고 있어 자신들의 문물을 양방향으로 유럽에 전달했던 거죠.

 

하지만 이슬람 세계는 결국 유럽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동쪽에서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스 4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내면서, 서쪽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유럽 세계가 양쪽으로부터의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막아낸 것이죠. 그 덕분에 유럽 세계는 스스로의 정치적, 종교적 정체성은 지켜내면서 이슬람 세계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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