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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이슬람교의 탄생

오리엔트의 부활

 

226년, 로마의 숙적이었던 파르티아를 멸망시키며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보다 더욱 거세게 로마를 압박하며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했습니다. 이들은 이란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 동부, 남부 해안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며 번영했지만 651년, 돌풍을 일으키며 아라비아 반도 전 지역을 휩쓴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해버리고 말죠. 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그토록 강력했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한순간 중동 지역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곳은 아라비아 반도의 서해안 중간 쯤에 있는 메카라는 도시였습니다. 찬란한 고대문명이 꽃을 피웠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남쪽으로 꽤 떨어진 곳으로,  당시까지는 원시 종교에 가까운 다신교 신앙과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유목 부족시회가 존재하고 있었죠. 하지만 모두가 다 유목민은 아니었습니다.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서 일부 부족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모여살면서 유목민들을 상대로 상업활동을 했는데요. 오아시스 근처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생활을 하는 정착민들도 늘어나고, 또 이 일대에서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지던 메카가 도시로 발달하면서 점차 부유한 상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드 알딘 (Rashid al-Din) 이 쓴 자미 알 타와리크(Jami' al-tawarikh)에 삽입된 삽화. 1306-1315년 경

 

 
무함마드 역시 그런 부유한 상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번성하던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크리스트교 등의 유일신교들의 영향을 받아 610년,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습니다. 특히 당시 동로마에서는 배척당했지만 게르만족 왕국들에서는 주류 종교로 자리잡은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가 특히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그는 메카를 본거지로 삼아 자신이 세운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며 점차 세력을 형성해갔는데요. 그 모습이 초기 크리스트교가 전파되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가 이슬람교를 창시하기 전부터 메카는 이미 성스러운 곳이었습니다. 메카에는 당시 아랍 지방의 다신교 신앙에서 섬기는 많은 신들의 성지가 있었고 매년 이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을 상대로 상업 활동을 하며 부를 쌓은 상인들도 많았죠.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무함마드란 사람이 신은 오직 알라 뿐이고 다른 신들은 모두 우상이라며 배척할 것을 요구하자 상인들은 무함마드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의 이 신종 유일신교는 급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슬람교가 사람들의 호응을 얻자 상인 세력은 이제 성지 순례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무함마드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무함마드 본인이 속해있던 쿠라이쉬 부족이 그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선 것은 치명적이었죠. 결국 메카에서 상인 세력의 공격을 받던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기는 '헤지라'를 단행하는데요. 오늘날의 이슬람 달력은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622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슬람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겠죠? 더불어 메디나 역시 이슬람교에서는 메카 못지 않은 중요한 성지로 여긴다고 합니다.  

 

당시의 메디나는 여러 부족들이 모여 살며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부족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이곳에 정착한 무함마드는 이슬람교를 전파하면서 부족들 간의 다툼을 중재하고 이들을  '움마'라고 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통일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떠나왔던 메카를 다시 정복하고자 군사들을 이끌고 메카로 향했습니다. 메카는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모든 경제력과 정치세력이 모여드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메카를 손에 넣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무함마드는 결국 바드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며 메카를 차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막상 그러고 나서도 메카의 모든 부족들이 다 무함마드에게 항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메카에는 아직도 호시탐탐 그를 암살하려던 세력이 있었고, 일단 겉으로는 항복을 표시한 부족들도 언제 다시 배신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가 메카를 완전히 통치하게 된 것은 10년 이상의 시간이 더 흘러서였습니다. 그 동안 무함마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반대파들에게 화해를 청하고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메카에서 완전한 영향력을 확보해나가는 동시에, 그는 아라비아 반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여러 민족들과의 전투를 통해 아라비아 전지역을 차지하고 이슬람교를 뿌리내렸는데요. 이슬람교에서는 이를 두고 성전이라는 의미의 지하드라고 불렀습니다. 적극적인 지하드 활동으로 그의 영토는 계속 넓어져서 그가 죽었을 때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태였죠. 헤지라를 단행한지 불과 10년 만의 일이니 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슬람교를 전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자신이 차지한 지역에서 왕을 자처하며 자신의 왕조를 세울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여전히 움마의 지도자로서 통치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왕국들의 왕과 같은 의전을 받는 대신 여전히 종교 지도자로서의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유지해 많은 존경을 받았죠. 632년 그가 사망하고 난 뒤, 추종자들이 그의 혈육인 알리가 아닌, 아부 바크르를 후계자로 선출한 것도 그가 세운 공동체가 결코 왕국은 아님을 증명합니다. 

 

 

이슬람 제국 

 

정통 칼리파 시대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는 엄청난 재력으로 무함마드의 지하드 활동을 도왔던 상인, 아부 바크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후계자라는 의미의 '칼리파'로 선출되며 무함마드가 해오던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 아닌, 측근 중 한명이었고, 그의 뒤를 이어서 그런 방식으로 세 명이 더 칼리파 직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를 정통 칼리파 시대라고 합니다. 사실 혈연적으로 완전히 남은 아니고, 좀 먼 친척이라고는 하는데 이는 부족 중심의 공동체 체제였던 당시의 이슬람 사회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일일 거 같네요.

 

칼리파는 당시 서구에 세워진 다른 왕국들의 왕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지도자였습니다. 크리스트교에 비교하면 교황과 비슷한 위치지만 교황은 서구 세계 전체의 종교 지도자로서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뿐, 교황령을 제외하면 자신이 직접 통치할 수 있는 나라를 갖진 않았습니다. 그런 통치 권력은 각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있었으니까요. 교황이 왕의 권력을 능가할 정도로 세속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는 그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반면에 칼리파는 좀 더 고대의 제정일치 지도자와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이슬람교는 정통 칼리파 시대 동안에도 엄청난 속도로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이미 무함마드 시대에 획득한 영토에서 북쪽으로는 옛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탄생했던 이라크 지역까지 도달했고 서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지금의 이란 지방까지 차지하며 그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매김했죠. 하지만 선출로 새로운 칼리파를 추대하다보니 칼리파가 바뀔 때마다 이슬람교 지도부 내부에서는 치열한 정치적 수 싸움과 내전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런 조짐은 이미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그 시점부터 보이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아부 바크르가 선출되자 이에 반대해 무함마드의 혈육만이 그를 계승할 수 있다며,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새 칼리파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이 있었던 것이죠. 결국 알리는 훗날 네 번째 칼리파로 선출되긴 했지만 알리만이 무함마드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주장했던 세력과 칼리파 선출에 혈통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세력은 각각 이슬람교의 최대 교파인 시아파와 수니파를 형성하며 지금까지도 서로 대립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세번째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 때에 이르러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그는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쉬 부족의 우마이야 가문 출신이었는데요. 칼리파로 즉위한 그는 곧 각 지역의 총독을 비롯한 요직에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임명하고 그 동안 무슬림들에게는 거두지 않았던 세금을 부과하며 점차 세속의 중앙집권국가와 같은 나라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죠. 이러한 모습은 새로운 무슬림 정착민들에게 상당히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처사였습니다. 결국 그는 암살당하고 무함마드의 사촌이었던 알리가 네번째 칼리파로 즉위했습니다. 

 

한편, 죽은 우스만의 가문인 우마이야 가문에서는 암살사건의 배후에 알리가 있을 것이라며 알리의 칼리파 즉위에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알리를 새로운 칼리파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결국 당시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 1세가 우마이야 가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칼리파 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알리의 세력과 우마야이 가문 세력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맞부딛히며 전투를 벌였는데요. 정통 칼리파 시대에서 우마이야 왕조로 넘어가던 이 시기의 혼란스러웠던 일련의 상황을 1차 피트나라고 합니다. '피트나'는 아랍어로 갈등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내전인 셈이죠. 

 

1차 피트나는 현재의 이라크 바스람 지역에서 벌어진 낙타 전투와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벌어진 시핀 전투를 거치며 알리의 세력에게 유리해지는 듯 했지만 알리가 갑작스럽게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이 칼리파 자리를 무아위야 1세에게 양위하며 끝이 났습니다. 이로써 이제 막 생겨난 이슬람 세계는 칼리파를 선출해서 나라를 통치하는 정통 칼리파 시대에서 세습 왕조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죠.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지 대략 50년이 지난 661년의 일이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

무아위야 1세는 이제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세습왕조의 군주인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정통 칼리파 시대 당시 시리아 총독이었던 그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천도하고 그곳에서 곧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조치들에 착수했습니다. 갑자기 영토가 확 넓어졌으니 이제 더 이상 메카나 메디나에서 하던 대로 각 부족의 대표들이 모여서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는 없었죠. 때문에 그는 1차 피트나 때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칼리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1차가 있다는 말은 2차도 있다는 뜻이니...

 

무아위야 1세가 칼리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했던 조치들에는 칼리파의 근위대를 창설한 것, 칼리파에게 순종적인 부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시행한 것, 그리고 과거 사산조 페르시아의 관료제를 참고해 보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마련한 것 등이 있습니다. 모두 과거 아랍 사회의 부족 공동체 전통에서 탈피하려는 시도였죠. 당연히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파 시대 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기존의 각 부족 공동체들은 무아위야 1세의 조치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무아위야 1세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고 판단하자 곧 서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한 역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와의 대결에 돌입한 것이죠. 물론 이제 로마는 반쪽이 사라진 동로마이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 로마는 로마였습니다. 우마이야 군의  함대는 668년부터 지중해를 오가며 동로마의 해안가에 출물하더니 곧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지나 마르마라 해까지 다다라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습니다. 

 

674년, 우마이야 군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함선에 싣고 온 각종 공성무기들을 동원해 도시 함락을 시도했지만 삼중으로 둘러진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는 것에는 실패했죠. 거기에 동로마가 앞세운 '그리스의 불'의 활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공성을 포기했습니다.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는 불을 내뿜는, 일종의 화염방사기인 그리스의 불은 우마이야 군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무아위야 1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실패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 서거하고 그의 아들인 야지드 1세가 새 칼리파로 즉위하자 그 동안 강력한 칼리파의 권위에 눌려 불만을 감추고 있었던 부족세력들이 마침내 폭발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마이야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알리의 세력이 우마이야 가문의 칼리파직 세습에 반발해 또 한번 반란을 도모한 것입니다.

 

새롭게 즉위한 칼리파 야지드 1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했을까요? 그는 반대 세력을 매우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정적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의 통치에 따르지 않는 지역에는 군대를 파견해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했습니다. 그러나 탄압에 대한 반발은 더욱 거세졌죠. 우마이야 가문의 칼리파직 세습에 대해, 첫번째 칼리파였던 아부 바크르의 가문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자 아라비아 반도 곳곳에서 반란이 연쇄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2차 피트나는 쉽사리 진압되지 않고 12년이나 계속되어 692년, 우마이야 왕조의 5대 칼리파인 아브드 알 말리크 대에 가서야 진압이 됩니다.  

 

이렇게 진통을 겪으며 겨우 혼란이 수습된 우마이야 왕조는 이후 왈리드 1세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합니다. 지하드를 통해 온세계에 이슬람교를 전파하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그는 즉위 후 대대적인 정복사업에 착수하는데요.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까지,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진출했죠. 거기에 지중해 남해안을 따라 북아프리카 일대를 평정한 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서고트 왕국이 들어서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보통 이전까지의 정복자들은 동서남북 어느 한 방향으로만 진출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 당시의 우마이야 왕조는 정말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습니다. 

 

특히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원정군이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것은 서구 크리스트교 세계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이들이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되찾는 데에는 그 뒤로 무려 700년의 시간이 걸렸죠. 그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슬람 문화가 깊숙히 뿌리내리는데요. 그래서인지 지금의 스페인도 뭔가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구분되는 특색이 있는 거 같아요. 특히 다른 유럽 국가에는 없는 이슬람 양식과 유럽 양식이 혼재된 독특한 건출물들이 그렇지 않나요? 

 

왈리드 1세의 정복활동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모순적이게도 그가 정복지에서 원주민들의 문화와 관습에 비교적 관대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그는 정복지의 문화와 관습을 강제로 바꾸려하지 않았고 심지어 '지즈야'라 불리우는 세금만 납부하면 종교마저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보장해주기도 했죠. 이 때문에 오히려 많은 비아랍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문제가 발생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관용 정책은 사실 왈리드 1세의 것만은 아닙니다. 이미 무함마드의 시대부터 종교는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후에 들어서는 이슬람 국가에서도 계속 더욱 관용적인 정책이 시행되으니까요. 

 

이렇게 아랍인은 아니지만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마왈리'라고 불리웠는데요. 아랍어로는 피보호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관습을 인정받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체제 안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에 큰 불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완전히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죠. 마왈리의 수가 많지 않았을 때 이들은 탄압을 받지 않는 것 정도에 만족할수 있었지만, 영토가 넓어지고 마왈리의 수가 많아질수록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정부가 이슬람교 전파에 대한 이들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으니 마왈리들은 점차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러한 차별 정책은 717년 우마르 2세가 칼리파로 즉위한 후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통치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거지만요. 그는 사치스러운 궁정문화를 개혁해 금욕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유지하는 동시에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 도로나 운하, 학교, 병원 같은 공공시설을 확충했습니다. 또 마왈리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아파와의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죠. 하지만 민족이나 교파와 상관없이 모든 무슬림들이 화해하고 통합하길 바랬던 그가 즉위 3년 만에 서거하고  야지드 2세가 즉위하자 모든 것은 과거로 회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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