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의 부활
로마 제국은 물론,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들어서던 때 보다도 더 오래 전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오리엔트 지역은 이제 문명을 주도권을 로마 제국에게 넘겨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제정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보다 훨씬 남쪽, 아라비아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에서 새로운 문명권이 출현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 지역은 원시종교에 가까운 다신교 신앙과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유목 부족시회가 존재했습니다.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서 이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수백 명 단위로 모여살면서 유목민들을 상대로 상업활동을 했습니다. 오아시스 근처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생활을 하는 정착민들도 늘어나고 이 일대에서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지던 메카가 도시로 발달하면서 부유한 상인들이 늘어났지만 부족 단위의 규모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행정 체제에도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무함마드는 당시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크리스트교 등의 신흥 유일신교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습니다. 특히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 배척당한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는 게르만족 사회에서 주류 종교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무함마드 역시 이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에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610년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메카에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당시 메카에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상대로 상업활동을 하던 부유한 상인들은 무함마드를 견제했습니다. 당시 그들의 상업활동에는 메카로 순례를 온 순례객들을 상대로 한 일종의 관광산업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다신교를 부정하는 유일신교를 창시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자 상인 세력은 성지 순례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무함마드를 위협했습니다. 결국 메카 지배층의 공격을 받던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기는 헤지라를 단행했습니다. 오늘날의 이슬람 달력은 바로 이 사건을 원년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슬람 왕국
메디나에 정착한 무함마드는 기존 토착 지배세력과 이주민 간의 화합을 도모해 움마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포교를 시작했는데 나중에 이 움마는 우마이야 왕조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슬람교는 단순 명쾌한 교리로 쉽게 교세를 확장하며 제정일치 사회를 수립했습니다. 헤지라가 있었던 632년부터 메디나에서 이교도를 대상으로한 성전인 지하드를 시작해 자신이 도망쳐온 메카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정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함마드 사후에는 후계자인 아부 바르크가 칼리프로 즉위해,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리비아를 정복하며 넓은 영토를 거느린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무함마드 이후 4대 동안의 칼리프 제위 기간을, 종교가 정치에 우위에 있는 제정일치 체제인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합니다. 이 동안 이슬람 사회의 제정일치의 통치자인 칼리프는 세습되지 않고 추대되었습니다.
이후 661년, 영역이 크게 확장되는 가운데 칼리프가 연이어 암살되며 정국이 불안해지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는 자신이 속한 우마이야 가문에서 칼리프를 세습하겠다고 선포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했습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서 동쪽으로는 인도, 북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해 중앙아시아 일대로 진출하고 서쪽으로는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이르렀습니다. 711년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가며 아프리카의 서쪽 끝에 도착한 이슬람군의 사령관 타리크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지브롤터라는 지명은 그가 군대를 주둔시킨 곳으로, '타리크의 산'이라는 의미의 '자발 알 타리크'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서쪽의 이슬람군은 무서운 기세로 에스파냐의 서고트 왕국을 정복하며, 단 200년만에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반대쪽인 동복쪽으로 진출한 이슬람군은 당시 중국 대륙 당 제국의 무역로인 비단길과 맞닿았습니다. 또다른 거대한 문명권에 접촉한 그들은 당의 수도 장안에까지 진출해 교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단지 교역만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물을 유럽 세계에 전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의 발명품인 화약, 인쇄술, 나침반 등이 이들로 하여금 유럽으로 전해져서 훗날 유럽 세력의 동양 침략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모순적인 일입니다.
반대로, 이슬람이 이렇게 급속하게 확대되던 시기의 유럽은 로마의 멸망으로 권력의 공백기 상태였습니다. 비잔티움의 속주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주인이 없는 딸이었고, 이란은 옛 페르시아의 제국들을 계승하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들 역시 쇠락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확대되는 기세를 감안한다면 유럽 대륙 역시 이슬람권으로 편입되는 것은 머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팽창의 저지
동서 양방향에서 파죽지세로 펼쳐지던 이슬람군의 정복활동은 양쪽 방향 모두에서 저지되었습니다. 우선 동쪽으로는 비잔티움 정복에 나선 이슬람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전진을 저지당했습니다. 그 동안 포교에 적극적이었던 이슬람교는 종교적 배타성이 크지 않은 원시신앙 문화권에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지만 같은 유일신교인 크리스트교를 신봉하는 비잔티움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비잔티움은 빠르게 성장하는 이슬람교에 위협감을 느꼈고, 이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슬람 세력권이 서유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비잔티움과의 충돌은 필연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결국 비잔티움의 레오 3세는 717년, 이슬람군을 맞아 콘스탄티노플 수성전에 승리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때 건설한 요새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그리스의 불’이라는 첨단 무기가 거둔 값진 승리로, 크리스트교 문명은 멸망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반대 방향인 서쪽의 이베리아에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711년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20년 뒤에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 이후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 세력이 성장하면서 오히려 이들을 바탕으로 국력이 성장하는 중이었습니다. 귀족이었던 샤를 마르텔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동진하던 이슬람군을 맞아 승리했습니다. 이 때의 승리 이후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승리에 이어 또 한번 유럽의 크리스트교 문명권이 위기를 모면한 순간이었습니다.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크 왕국의 수립 (0) | 2024.02.18 |
---|---|
아바스 왕조와 아랍 문화의 발전 (2) | 2024.02.15 |
게르만족의 이동 (0) | 2024.02.10 |
로마의 멸망 (0) | 2024.02.09 |
몰락하는 로마 (0) | 2024.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