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링거 왕조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한 사건은 이슬람의 서유럽 진출을 저지하고 기독교 세계를 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마르텔 당시까지 유지되던 메로빙거 왕조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해 프랑크 왕국을 차지했습니다.교황 자카리아스는 피핀의 쿠데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왕국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뒤 물러나자 공백이 생긴 틈으로 롬바르드 왕국이 진출한 것입니다.
동, 서 교회의 분리
한편,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는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려 내부 교회 세력과 소모적인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원래 유일신교 전통에서는 신을 형상화한 성상을 숭배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헬레니즘적 전통이 남아있는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신상을 제작하고 이를 숭배하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있는 소아시아에서 이러한 전통은 더욱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의 확대로 이러한 전통에 대한 반감이 생기자 레오 3세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교회와 수도원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습니다.
크리스트교를 신봉하는 프랑크 왕국으로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이러한 조치가 불만스러웠습니다. 성상은 포교를 위한 유용한 도구였는데 이를 비잔티움 제국에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금지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의 성상 숭배 금지령에 반대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도 이에 반격해 로마 교황에게 위임한 서방 제국, 즉 서로마 제국의 종교적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동서 교회가 분리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는 동방정교, 즉 정교회가 되어 전통을 이어갔고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티움이 멸망한 이후에는 모스코바 공국의 러시아정교가 그 정통성을 이어받아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가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 권한은 러시아연방의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공생 관계
한편, 동방 교회로부터의 독립한 이후로 권력 기반이 미약했던 로마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751년 롬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하자 교황 스테파누스 3세는 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난 피핀의 쿠데타를 승인해 카롤링거 왕조를 공인해주고, 피핀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롬바르드로 출정했습니다. 피핀은 롬바르드 왕국을 몰아내고 라벤나를 되찾아 교황에게 기부했는데 이 때의 라벤나가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원래 라벤나는 비잔티움 제국의 총독이 관할하던 지역이었지만 롬바르드가 남하할 당시 비잔티움의 총독이 이를 막아내지 못해 롬바르드에게 빼앗겼다가 피핀이 되찾은 것입니다. 교황령은 이후 19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70년 이탈리아에 환수되어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29년 바티칸이 생기면서 교황령이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피핀이 라벤나를 교황에게 기부한 이래로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청은 서로 돕는 공생 관계가 되었습니다. 교황청은 프랑크 왕국을 크리스트교의 수호자이자 서로마의 정통성을 있는 국가로 공인했고,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청에게 물리적 보호를 제공했습니다. 왕위를 이은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이후 롬바르드 왕국을 아예 몰아내어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를 점령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손에 넣은 샤를마뉴는 이번에는 서쪽으로 진격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카탈루냐를 빼앗았습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중세 프랑스의 무훈시 ‘롤랑의 노래’는 이 당시 샤를마뉴 휘하의 장수인 롤랑이 바스크를 공략하던 중 원주민 부대에게 참패하고 전멸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반대편인 동쪽으로 진출한 프랑크 군은 색슨족을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영토도 손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샤를마뉴는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며,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복활동은 단지 물리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영역을 넓힌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복지에 교구를 설치하고 피정복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로마 카톨릭을 크게 전파했습니다. 라벤나 교황령을 받은 것에 더해, 로마 카톨릭이 크게 확대된 것에 수혜를 입은 로마 교황청은 교황 레오 3세 때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이로써 로마의 전통이 게르만족 국가인 프랑크 왕국으로 이어지는 추세가 더욱 굳어지며 중세적 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크랑크 왕국에서 독일로 (0) | 2024.02.23 |
---|---|
카롤링거 르네상스 (0) | 2024.02.20 |
아바스 왕조와 아랍 문화의 발전 (2) | 2024.02.15 |
이슬람교의 탄생 (0) | 2024.02.12 |
게르만족의 이동 (0) | 2024.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