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빙거 왕조의 탄생
조금 큰 그림으로 돌아가보면...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동한 문명의 중심은 로마가 멸망하면서 이제 두 축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무려 천년이 더 지나 15세기까지 수명을 이어간 동로마 제국, 다른 한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남하해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들이 세운 국가들이었죠. 게르만족에 속한 여러 민족들은 옛 서로마 지역을 차지하며 각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는데요. 그 중에서도 서고트 왕국과 동고트 왕국,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성장이 돋보였습니다. 특히 프랑크 왕국은 유럽의 한가운데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며 서로마를 계승하는 새로운 패권국으로 성장하죠.
프랑크 왕국을 세운 사람들은 게르만족 중에서도 프랑크족, 프랑크족 중에서도 살리족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살리족 출신의 메로비우스는 서로마 멸망 이전 시기 자신의 부족을 이끄는 족장인 동시에 로마로부터 관직을 받은 봉신이었는데요. 몰락해가던 서로마는 이렇게 유력 게르만족 족장들을 봉신으로 봉하고 국경지대의 수비를 맡기는 형태로 근근이 나라를 보전해가고 있었습니다. 게르만족으로 게르만족을 막는 궁여지책이었죠. 당연한 얘기지만 이 궁여지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자 메로비우스의 손자인 클로비스 1세는 481년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새로운 왕국을 건국하고 빠르게 주변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습니다. 사실 클로비스 1세는 영어식, 프랑스어식 이름이구요. 이 당시는 아직 오늘날의 영국이나 프랑스가 생겨나기 전이니 라틴어식 이름인 클로도베쿠스 1세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거 같지만... 클로비스 1세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니 그냥 이 이름으로 부르는게 편할 거 같네요. 서양사에서는 한 인물을 나라별로 각자 자신의 나라 말로 부르다보니, 새로운 인명이 나오면 한번 쯤은 각 나라의 말로 어떤 이름인지 찾아봐야겠더라구요.
그의 왕조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메로빙거 왕조라고 부릅니다. 그는 다른 프랑크족 부족의 유력 인사들을 제거해 프랑크족을 통합하는 한편, 이미 자리를 잡은 다른 왕국들과는 혼인 정책을 통해 긴밀한 외교관계를 구축하며 빠른 속도로 신생 왕국인 프랑크 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의 진짜 탁월한 선택은 당시 게르만족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있던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 대신, 아타나시우스파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것입니다. 이 선택이 훗날 게르만족들의 여러 왕국들 중에서도 프랑크 왕국을 가장 번성하게 한 신의 한 수가 되었죠.
당시 프랑크 왕국이 자리잡고 있었던 갈리아 북부 지역은 오랫동안 로마의 영향을 받은 로마화된 갈리아인, 즉 갈로-로마인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로마인으로 살아온 이들은 게르만족들이 믿는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죠. 하지만 클로비스 1세는 왕비였던 클로틸데의 설득으로 아리우스파가 아닌, 아타나시우스파 크리스트교로 개종했습니다. 덕분에 그의 선택은 갈로-로마인들에게 큰 환영을 받으며 그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었구요. 클로틸데 왕비는 오늘날에는 둘로 나뉜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 양쪽 모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합니다.
486년 클로비스 1세는 멸망한 서로마 출신의 갈로-로마인들이 세운 수아송 왕국의 시아그리우스를 물리치고, 10년 뒤에는 톨비악 전투에서 알레만니족을 몰아냈습니다. 또한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서고트 왕국에 크게 승리하고 그 기세를 몰아 옛 로마의 아퀴타니아 지역에 해당하는 아키텐을 차지했죠. 그러고나니 이제 프랑크 왕국은 명실공히 서유럽의 새로운 패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예 서고트 왕국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톨로사를 약탈하는 것에 만족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그는 파리로 천도했습니다.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은 재산을 분할상속하던 당시의 게르만족의 관습에 따라서 그의 네 아들들에게로 분할되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지역을 물려받은 그들은 함께 남쪽의 부르군트 왕국을 복속시키며 옛 로마의 갈리아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치열한 세력 대결을 벌이느라 왕국 안에서는 정치적 불안이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분할상속 관습이 그 이후로도 대를 거듭해서 이어지다보니 형제들끼리의 분열과 통합이 반복되며 쓸데없이 국력이 소모되었죠. 나라 안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왕실의 음모와 내분이 잇따랐고 결국 7세기에는 나라가 여러 개로 갈라졌습니다.
우선 프랑크 왕국에 통합되기 이전부터 원래 독립적인 성격이 강했던 프로방스 지역과 아키텐이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에서 서서히 벗어났구요. 부르군트족이 세웠던 부르군트 왕국도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지만 속국처럼 어느 정도는 자치권을 인정받았죠.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남은 부분은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아우스트라시아, 서쪽은 네우스트리아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제각각 왕이 존재하는 왕국이긴 했지만 동시에 프랑크 왕국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왕국이기도 했습니다.
장원제와 봉건제
서로마가 멸망한 직후, 로마의 속주로서 번영을 누리던 갈리아 지방은 게르만족과 훈족의 침입으로 도시가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단순히 도시의 외관이 파괴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로마의 모든 사회적 기반, 법과 행정체제, 관습 등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큰 혼란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도시를 떠나 한적한 농촌 지방으로 이주했죠. 그런데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귀족들은 농촌에 새롭게 정착해 방어시설을 갖추고 그 안에서 살 수 있었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던 농민과 노예 계층은 스스로 무장을 하기는커녕 당장의 생계가 막막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의 농지에서 경작을 하고 그 대가로 농산물의 일부를 귀족에게 바치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벗어나면 신변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어서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이주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들을 시장에서 팔아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죠. 농산물 외에도 농기구나 무기, 의복을 비롯해 모든 생산물들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대신 그 지역 내에서 자급자족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었습니다. 이렇게 농촌 지역에는 귀족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장원 경제가 생겨났습니다. 뭔가 굉장한 퇴보가 일어난 느낌이 듭니다.
한편, 농촌 지역에 자리잡은 귀족들은 이제 각자가 넓은 농지와 그 농지를 지킬만한 군사력을 갖춘 정치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약탈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농민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멀리 수도에 있는 왕이 아닌, 우리 동네의 귀족들일테니까요. 게르만족과 훈족에 의한 혼란이 잦아든 뒤에도 각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이들은 서로 자신의 세력을 더욱 넓히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그 결과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이들끼리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죠. 전쟁이 잦아지자 이들은 자신의 휘하에서 싸울 보다 많은 전사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귀족들의 필요에 의해 모인 전사들은 전쟁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그에 대한 대가로 귀족들의 토지 일부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급받은 토지 안에서는 다른 귀족들처럼 농민들을 자신의 토지에서 경작시키고 그 대가를 받았죠. 그들은 그 자신도 전사들을 모집해 전쟁에 참여하고 자신을 위해 싸운 전사들에게 또 토지를 나눠주었는데요. 그 결과 대귀족들의 휘하에는 그보다 낮은 계급의 귀족들이 존재하고 또 그 휘하에는 더 낮은 계급의 귀족들이 존재하는 봉건제적 사회구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른 주종관계가 형성되었고, 그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는 왕이 있었죠.
카롤링거 왕조의 탄생과 동서 교회의 분리
메로빙거 왕조가 세워진지 200여 년 쯤 지나자 왕실은 형제들 간의 왕위다툼과 궁중음모로 점차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번 왕위가 바뀔 때마다 형제들 간의 분할상속이 이루어져 한동안 이들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그 결과 어느 한 명이 왕국 전체를 차지한 뒤 사망하면 또 그 자식들이 왕국을 분할하여 상속하고 다시 경쟁하는 일이 반복된 것입니다. 그렇게 불필요한 정쟁과 무력충돌이 이어지며 왕실 전체가 약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왕실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을 쥐게 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궁재라는 관직에 있던 이들이었는데요. 본래 이들은 궁정의 살림을 운영하는 동시에 재상의 업무도 겸하는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정치불안으로 너무 어린 후계자가 왕위에 즉위하면 이들의 섭정을 맡기도 하고 종종은 왕이 성년이 된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들은 점차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더욱 나아가서는 궁재라는 직책도 마치 왕위처럼 어느 한 가문이 독점해서 세습하게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 내의 작은 왕국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궁재 가문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732년, 이베리아 반도에 알 안달루스를 건설하고 유럽 내륙 깊숙히 진출하려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격퇴한 샤를 마르텔은 역대 궁재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른, 강력한 궁재였는데요. 그의 이름 역시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라는데 좀 생소하네요.
샤를 마르텔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 우마이야 군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퇴하며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 새계를 구해내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후로도 이슬람 세력은 유럽 내륙으로 더 세력을 넓히려는 시도를 계속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751년 그의 아들인 피핀 3세 때에 이르면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킬데리크 3세로터 왕위를 넘겨받고 즉위해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기에 이르죠.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 로마 교황청이 크게 반발할 거 같지 않나요? 클로비스 1세가 아타나시우스파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이래로 메로빙거 왕조와 로마 교황청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피핀 3세가 메로빙거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연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만도 하니까요. 그런데 의외로 잠잠했습니다. 726년 동로마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린 이래로 동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청 세력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느라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파트너를 모색해야 했던 것입니다.
원래 유일신교 전통에서는 신을 형상화한 성상을 숭배하는 것이 그리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헬레니즘적 전통이 아직 남아있는 일부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그 당시까지도 신상을 제작하고 이를 숭배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죠. 이러한 경향은 동로마가 차지하고 있던 소아시아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기시한 이슬람교가 세력을 확장하자 이 지역의 크리스트교 내에서도 성상 숭배에 대한 전통에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동로마 황제 레오 3세는 이를 정치적인 기회로 봤습니다. 성상을 숭배하는 교회를 이단으로 몰아 그들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고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으로서는 레오 3세의 이러한 조치가 불만스러웠죠. 성경을 읽거나 미사를 집전하는 것에 비해 성상을 보여주는 것은 당시 글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포교를 하기에 매우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도구였는데 레오 3세가 이를 동로마 내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금지시킨 것이니까요.
결국, 로마 교황은 동로마의 성상 숭배 금지령에 반대했고, 동로마의 레오 3세도 이에 반격해 로마 교황에게 위임한 서방 제국, 즉 서로마의 종교적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포했습니다. 물론 서로마는 이미 멸망해서 없어진지 오래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지역의 종교적 권위는 로마 교황청이 이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레오 3세가 그 권위를 더 이상 보장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트교 세계는 동서 교회가 분리되는 대사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로마 교황청은 로마 카톨릭의 최상위 기구가 되었구요. 동로마의 교회는 로마 교황청과는 이별하고 동방정교, 즉 정교회가 되어 독립된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죠. 동방정교는 훗날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모스크바 공국의 러시아 정교가 그 정통성을 이어받는데요. 모스크바를 가리켜 제 3의 로마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후 모스크바 공국, 루스 차르국, 제정 러시아가 이어지는 동안 러시아 정교도 계속 이어지지만 오늘날의 동방정교는 로마 카톨릭과는 달리 각 지역의 총대교구가 동등한 독립적 위치에 있는 구조라고 합니다.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공생 관계
그런데 막상 동로마로부터 독립을 하고보니 로마 교황청은 권력 기반이 무척 미약했습니다. 동로마 황제는 정교회의 수장인 동시에 동로마라는 강력한 제국을 다스리는 세속 군주이기도 했는데, 로마 교황은 그런 세속 권력이 아닌 단지 최고 종교지도자일 뿐이었죠. 그래서 로마 교황청은 자신의 종교적 권력을 뒷받침해줄 세속 권력 파트너로 아타나시우스파 크리스트교 국가인 프랑크 왕국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잠깐, 당시 로마 교황청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 얘기를 하자면...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옛 로마 영토를 다시 회복하겠다며 활발하게 전개한 정복사업으로 동고트 왕국이 멸망한 이래로 이탈리아 반도는 동로마의 영토였습니다. 동로마는 라벤나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을 파견해 이 지역을 통치하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동로마의 나르세스와 함께 동고트 왕국과의 전투에 협력했던 랑고바르드족이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하자 이탈라아 반도 내에는 동로마의 영토와 랑고바르드 왕국의 영토가 공존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반도 내의 세속 권력은 라벤나 총독에게 있지만 서로마 지역 전체의 종교적 권위는 교황에게 있는 묘한 상황이 펼쳐지는 가운데 동로마의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이라는 불길을 지피자 라벤나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동로마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끌어들였죠. 751년 그렇게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하자 교황 스테파노 3세는 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난 피핀 3세의 쿠데타를 승인해 카롤링거 왕조를 공인해주는 대신, 피핀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라벤나로 출정했습니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몰아낸 피핀 3세는 라벤나를 되찾아서 교황에게 기부했습니다. 이 때 기부된 라벤나가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죠. 근데 딱 라벤나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로마를 포함해 꽤 넓은 면적이 교황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교황령이 됩니다. 이 교황령 안에서 교황은 사실상 세속 군주와 다를 것 없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교황령은 이후 19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70년 이탈리아에 환수되어 한동안은 존재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29년 바티칸이 생기면서 다시 복구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는데요.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긴 했지만 어쩌면 저 당시 레오 3세가 내린 성상 숭배 금지령이 오늘날 로마 카톨릭의 모습을 만든 단초가 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피핀 3세가 라벤나를 교황에게 기부한 이래로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청은 서로 돕는 공생 관계가 되었습니다. 교황청은 프랑크 왕국을 로마 카톨릭의 수호자이자 서로마의 정통성을 있는 국가로 공인했고,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청에게 물리적 보호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왕위를 이은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는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을 아예 몰아내고 수도인 파비아를 점령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손에 넣은 샤를마뉴는 이번에는 서쪽으로 진격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카탈루냐 지역을 빼앗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중세 프랑스의 무훈시 ‘롤랑의 노래’가 바로 이 당시 샤를마뉴 휘하의 장수인 롤랑의 무용담을 담고 있죠. 한편, 반대편인 동쪽으로 진출한 프랑크 군은 색슨족을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영토도 손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샤를마뉴는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손에 넣으며,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에 버금가는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복활동은 단지 물리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영역을 넓힌 것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복지에 교구를 설치하고 피정복민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켜 로마 카톨릭을 크게 전파했습니다. 라벤나 교황령을 받은 것에 더해, 로마 카톨릭이 크게 확대된 것에 수혜를 입은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파트너를 만난 셈이죠. 그래서 교황 레오 3세 때에는 샤를마뉴에게 아예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서로마는 이미 예전에 사라진 나라인데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제위를 인정해준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이는 분명 프랑크 왕국이 동로마 제국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옛 서로마 지역의 최고 종교지도자로부터 이 지역의 다른 많은 왕국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죠. 이로써 옛 로마의 전통이 게르만족 국가인 프랑크 왕국으로 이어지는 추세가 더욱 굳어지며 중세적 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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