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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카롤링거 르네상스

서유럽의 성장

아직도 로마의 정당한 상속자는 비잔티움 제국이었지만 프랑크 왕국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자 이제 본격적인 서유럽의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느슨한 정교분리의 서유럽 체제가 비잔티움 제국에 비해 늦은 발전을 보였지만, 고대와는 달리 사회가 다원화 복잡화된 중세 사회로 발달할수록 서유럽의 적절한 분권적 질서는 더욱 힘을 발휘하며 비잔티움 제국을 추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영토가 확대된 프랑크 왕국은 과거 로마 제국처럼 단단한 행정망을 수립하지는 못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애초부터 각 주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방대한 영토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주의 토착세력들이 중세의 영주 신분으로 성장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체제의 질서를 잡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했습니다.

 

독일 아헨 시내의 전경
프랑크 왕국의 수도 엑스라샤펠이 있었던 아헨. 현재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속해있다. Copyright 2017. Sascha Faber allright reserved.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lick_auf_das_Rathaus_und_den_Dom_Aachens_aufgenommen_von_St_Jakob.jpg)


우선 경제적으로는 '리브라'라는 곡물의 무게를 재는 로마 시절의 중량단위를 화폐단위로 격상해 왕국 내의 화폐를 통일했습니다. 이 때 발행된 리브라 은화는 영국의 화폐단위이자 중량단위인 파운드가 되었습니다. 파운드의 약자인 £, 또는 lb 역시 리브라에서 기원된 것입니다. 한편 믿을만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자신과 가까운 인맥을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인 혼인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여러 지역 출신의 프랑크족 귀족들과 결합해 지금의 독일 아헨 지역인 수도인 엑스라샤펠에 중앙귀족층을 구성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지배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한편, 로마 제국의 황제들처럼 친위대를 창설할 정도의 강력한 권력기반이 없었던 샤를마뉴는 계약을 통해 중앙군대를 창설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신하들은 황제에게 군사적 봉사와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는 신하들에게 봉토를 하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약으로 맺어진 근사들은 용병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명령을 내리면 군대는 그에 복종해야하는 일방적인 동양식 군주제에서는 용병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서양에서는 애초에 계약에 의해 군신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훗날 계약 개념에 기원을 둔 서양의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발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샤를마뉴는 지방의 각 주의 전통적인 영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한편 교구를 설치하고, 중앙에는 혼인으로 결합한 중앙귀족층과 계약으로 편성된 중앙군을 두어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그가 마련한 이 시스템은 모두 서양 중세사회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지배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중세사회의 지배층을 이루는 세 신분이 확립된 것입니다.

샤를마뉴는 중세 문화의 골격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학문과 예술을 존중해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지원했고 칙령을 내려 각 주교구와 수도원에 학교들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수도에도 궁정학교를 열어 라틴어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 논리학, 수학, 고전 등의 학문과 음악, 시 등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이른바, 키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했습니다. 또한 그 스스로는 문맹에 가까웠지만 오늘날 유럽에서 쓰이는 라틴 알파벳의 소문자의 기원이 되는 카롤링거 소문자를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직접 필사하고 장식한 채식필사본들은 오늘날까지도 중세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분리

중세의 골격을 만든 샤를마뉴는 중세를 거치면서 특히 종교적 성취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아 대제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왕국은 결국 아들들에 의해서 분열되었습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지역마다 언어, 관습이 달랐기 때문에, 제국이 되기 위한 통합성은 크게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샤를마뉴의 치세 동안 통치 체제는 크게 정비되었지만 정치적 통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외부적으로도 이슬람 세력은 계속해서 에스파냐 지역을 노리고 있었고 바이킹이라고 불리는 노르만족의 남하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후 아들인 경건왕 루이 1세는 프랑크 왕국을 그 상태로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817년에 내려진 제국분할령에 따라 영토는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되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로테르는 제위와 함께 프랑크 왕국의 본토를, 둘째아들 피핀에게는 아키텐을, 셋째아들 루이에게는 바이에른을 물려주는 것이 이 칙령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 둘째아들인 피핀이 838년에 사망하자, 루이 1세가 재혼하면서 얻은 넷째아들인 샤를이 둘째아들 대신 아키텐 지역을 물려받았습니다.

840년 루이 1세가 죽자 형제들은 서로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셋째인 루이와 넷째인 샤를은 힘을 합쳐 우선 첫째인 로테르를 굴복시키고 둘 사이에는 조약을 맺어 정식으로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프랑스 서부인 서프랑크는 샤를이, 프랑스 동부와 이탈리아 북부인 중프랑크는 로테르가, 독일 서부인 동프랑크는 루이가 차지하는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루이와 샤를은 로테르의 사후 다시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두 형제는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어 다시 한 번 영토문제를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북부만을 중프랑크로 남겨두고 나머지 중프랑크 영토는 라인 강을 경계로 분할되었습니다. 메르센 조약을 기점으로 프랑크 왕국의 3개 왕국은 각각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원형이 되었고 이 중 프랑스가 제일 먼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한편 로테르 사후 남아있던 중프랑크 영토도 이후 다시 삼분되었습니다. 이 중 로트링겐은 동크랑크와 서프랑크가 나누어 가졌고 지금의 스위스 지방인 중부는 부르고뉴 왕국이, 남부는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중 동, 서프랑크가 분할해 차지한 로트링겐은 훗날 프랑스와 독일이 국민국가 시대에 접어든 이후 둘 사이에 분쟁의 불씨로 남게 되었습니다. 근대 유럽이 탄생한 이래로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두 나라 사이의 영토분쟁의 핵심이 되는 알자스-로렌 문제의 기원이 된 곳이 바로 이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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