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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카롤링거 르네상스

샤를마뉴 대제

 

샤를마뉴 대제. 사실 샤를마뉴라는 이름은 위대란 샤를이라는, 별명이 합해진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그러니 굳이 대제를 붙이지 않아도 위대하다는 의미는 포함되어 있는거죠. 근데 또 서유럽의 공통 조상님 같은 그의 이름을 굳이 프랑스식으로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만합니다.  그래서 대략 훑어보면... 라틴어식 이름으로 부른다면 카롤루스, 독일어식으로는 카를, 영어식으로는 찰스가 됩니다. 다만 샤를마뉴라는 이름을 가장 흔하게 본 거 같아서 여기에서도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샤를마뉴 대에 들어서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급격히 확장되었습니다. 서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오늘날 프랑스 최서단의 브르타뉴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서양에 면하게 되었고 동쪽으로는 보헤미아 지방까지 진출했습니다. 북쪽으로는 북해를 사이에 두고 영국의 앵글로색슨 왕국들과 마주보고 남쪽으로는 로마를 포함해 이탈리아 반도를 절반 정도 차지했죠. 옛 로마 제국을 연상케하는 방대한 영토였습니다. 

 

로마가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면 그곳에 속주를 설치하고 주민들을 로마화했던 것과 비슷하게 샤를마뉴는 새로운 정복지에 교구를 설치하고 그곳의 주민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켰습니다.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닌 성전이었죠. 그리고 800년,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에 화답하듯 그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봉했으니, 그로서는 정복 전쟁의 명분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그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이 그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서로마는 이제 없어진 나라이니 샤를마뉴가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서로마의 군대를 이끌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서로마의 국고를 꺼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과연 로마 교황에게 샤를마뉴를 서로마의 황제로 인정해줄 권한이 있는지도 좀 의아한 면이 있구요. 동로마에서는 황제가 여전히 로마 제국의 대를 잇는 세속군주인 동시에 동방정교의 수장이라지만 서로마 황제는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걸 로마 교황이 해도 되는 걸까요?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는 동로마의 황제도 서유럽의 황제를 인정하긴 했지만 이제 막 카롤링거 왕조가 자리를 잡아가던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 같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를 지켜보면 이 때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가 된 것은 적어도 당시 유럽의 많은 왕국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위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로마는 동로마의 황제가 지배하는 곳이라면, 옛 서로마 지역은 이제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군림하고 세속적으로는 프랑크 왕국의 왕이 다스리는 땅인거죠. 물론 훗날 교황과 황제는 사이좋게 공존하기보다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관계가 되어버리지만 일단 이 시점의 로마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은 긴밀한 협력을 통해 서유럽 세계의 패권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토가 넓어졌으니 통치 방식도 좀 달라져야 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일단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 때 천도했던 파리를 떠나 지금은 독일의 아헨이라는 도시가 된 엑스라샤펠을 새로운 수도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300개의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주백을, 국경 지방의 주에는 특별히 변경백을 파견했죠. 이들은 분명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었지만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는데요. 거기에 그 주에서 원래 영향력을 행사하던 토착 귀족들과 교회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으니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의 전 지역 구석구석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지방의 관리들과 귀족들을 감시하고자 각 지방으로 순찰관을 파견했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들어본 거 같은 제도인 거 같네요. 그렇게 천도를 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고나니 이제 수도인 엑스라샤펠의 중앙 정계에도 믿을만한 측근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인재들을 등용하고 자신과 가까운 인맥을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인 혼인 정책을 펼쳤는데요. 덕분에 다양한 지역 출신의 프랑크족 귀족들이 왕실과 결합해 중앙 귀족층으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처럼 친위대를 창설할 정도의 강력한 권력기반이 없었던 샤를마뉴는 계약을 통해 중앙군대를 창설했습니다. 신하들은 황제에게 군사적 봉사와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는 신하들에게 봉토를 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약으로 맺어진 군사들은 용병과 그닥 다르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명령을 내리면 군대는 그에 복종해야하는 일방적인 동양식 군주제에서는 용병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서양에서는 이미 이때부터 계약에 의한 군신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훗날 계약 개념에 기원을 둔 서양의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발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 샤를마뉴는 화폐와 도량형 통일을 통해 경제 개혁도 시도했습니다. 곡물의 무게를 재는 로마 시절의 중량 단위 '리브라'를 화폐 단위로 격상해 왕국 내의 화폐를 통일한 것인데요. 그래서 이 때 발행된 리브라 은화는 영국으로도 전해져 영국의 중량 단위이자 화폐 단위인 파운드의 모태가 되었죠. 그래서 파운드의 약자인 lb 또는 역시 그 당시의 화폐단위 리브라에서 기원된 것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가장 돋보이는 그의 업적은 단연 카롤링거 르네상스, 학문과 예술 분야의 부흥입니다. 일생 동안 성전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로마 카톨릭을 전파하는 데에 주력했던 그는 막상 로마를 방문해보니 그곳의 선진적이고 우수한 문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그 때문인지 그는 유럽 각지의 명망있는 학자들을 초청해 그들의 조언을 듣기도 하고 전국 각지의 교회와 수도원에 학교를 설립해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직접 필사하고 장식한 채식필사본들은 오늘날까지도 중세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하네요.

 

뿐만 아니라, 수도인 엑스라샤펠에도 궁정학교를 열어 귀족 자제들로 하여금 라틴어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 논리학, 수학, 고전 등의 학문과 음악, 시 등의 예술을 공부하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했죠. 그는 오늘날 유럽에서 쓰이는 라틴 알파벳 소문자의 기원이 되는 카롤링거 소문자를 제정하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은 문맹에 가까웠다고 하네요. 그래서 밤마다 머리맡에 서판을 두고 혼자 글씨 연습을 했다는데... 결국 완전히 글을 익히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로마의 정당한 상속자는 동로마 제국이었지만 샤를마뉴의 재위가간 동안 프랑크 왕국이 크게 발전하자, 이제 본격적인 서유럽 세계의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립 초, 왕국의 기반을 마련하느라 좌충우돌을 겪어야 했던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은 분명 로마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동로마 제국에 비해 비교적 더디게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사회가 고대보다 한층 더 다원화, 복잡화된 모습으로 발전할수록 선진적이고 체계적인 것으로 보였던 동로마의 체제는 오히려 구식이 된 반면, 서유럽의 적절히 느슨한 분권적 질서는 더욱 힘을 발휘하며 결국은 동로마 제국을 추월하게 됩니다. 

  

   

왕국의 분열

  
중세의 골격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샤를마뉴는 중세를 거치면서 여러 방면, 특히 종교적 성취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아 대제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아마도 중세 초기의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지만 그가 마련해 놓은 프랑크 왕국의 체제는 사실상 그의 뛰어난 리더십에 의존해 운영되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죽고 나서는 다소 혼란스러운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게르만족의 상속 관습대로 그의 손자들이 왕국을 나눠가지면서 커다란 왕국이 셋으로 분리된 것입니다.

 

물론 게르만족의 분할상속 관습은 이미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었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은 그 전에도 여러 번 분할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 아키텐, 부르군트 등이 그런 나라들이었죠. 하지만 왕이 죽으면 형제들끼리 왕국을 나누어 상속받고 경쟁을 통해 다시 합쳐지기도 하는 그 과정 속에서도 프랑크 왕국은 계속 유지되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샤를마뉴의 사후에 분할된 세 왕국은 이제 영구히 나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이라는 각각 다른 나라가 됩니다.  

 

사실 당시의 프랑크 왕국은 지역마다 언어와 관습, 제도가 달랐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가 계속 유지되기 위한 통합성은 많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샤를마뉴의 치세 동안 통치 체제가 크게 정비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내부적으로는 그런 분열의 씨앗을 품고 있는 가운데, 외부적으로는 서쪽의 이슬람 세력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북쪽에서는 바이킹족의 한 일파인 노르만족이 남하를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독일 아헨 시내의 전경
프랑크 왕국의 수도 엑스라샤펠이 있었던 아헨. 현재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인접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속해 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

 

814년, 샤를마뉴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그의 아들인 경건왕 루이 1세가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라틴어로는 루도비쿠스 1세. 사실, 샤를마뉴에게는 다른 아들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때 이미 왕국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샤를마뉴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샤를마뉴에게는 불운이었지만 프랑크 왕국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죠. 큰 분란 없이 경건왕 루이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경건왕이라는 이름은 별명입니다. 루이라는 이름의 왕이 후세에도 너무 많이 나오다보니 이렇게 별명을 붙여서 구분하는 거라고 하네요. 그는 이름처럼 깊은 신앙심을 가진 비교적 온화한 통치자였습니다. 

 

문제는 경건왕 루이가 후계자들에게 상속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이번에도 게르만족 방식의 분할상속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첫째인 로타르 1세, 라틴어식 이름으로는 로타리우스 1세에게는 서로마의 황제라는 권위를 잇게 하고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 부르군트 등의 지방을 포함하는 프랑크 왕국의 중부를 주었구요. 그리고 둘째인 피핀에게는 부르군트 서쪽에 있는 아키텐 지방을  주었죠. 과거에도 피핀이라는 이름의 왕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 이 피핀에게는 아키텐의 피핀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루이에게는 현재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을 주었는데요. 경건왕 루이가 루이 1세라서 이 아들은 루이 2세가 됩니다. 독일의 역사에서 누가 독일의 첫번째 왕인지를 두고 몇 가지 이견이 있는데요. 일부에서는 이 왕을 사실상 독일의 첫번째 왕으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루이 2세를 독일식 이름인 루트비히 2세라고도 하는데요. 근데 또 루트비히 2세라는 이름은 휠씬 나중인 19세기 쯤에 또 다른 왕이 사용하기도 해서... 이 루이는 독일왕 루트비히라고 불렀습니다. 

 

어쨌든 경건왕 루이는 자신의 세 아들에게 이렇게 영토를 상속하려고 했는데... 그에게 뒤늦게 막내 아들인 샤를이 태어나면서 원래의 계획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다른 세 명의 형들끼리 상속 문제가 마무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상속받을 땅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왕관이 없었다는 의미로 대머리왕 샤를이라는 별명이 붙었죠. 왕관이 없는 거지 머리카락이 없는 건 아닌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정확한 유래는 아니고 추측이라고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샤를마뉴 대제를 샤를 1세로 치기 때문에 그는 샤를 2세가 됩니다. 

 

경건왕 루이는 막내 아들인 대머리왕 샤를을 매우 아꼈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세 형들은 그 상황에 상당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결국 이 세 형제는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유폐했는데요. 거기까지는 세 형제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협력했지만 일단 반란이 성공하자 이들은 다시 갈등을 빚게 됩니다. 둘째인 아키텐의 피핀과 셋째인 독일왕 루트비히가 힘을 합쳐 장남인 로타르 1세를 공격한 것이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들들의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경건왕 루이가 탈출을 하고, 또 둘째인 아키텐의 피핀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형제들 간의 영토 쟁탈전은 점점 혼돈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형제들 간의 상속 문제로 불거진 이 내전은 경건왕 루이의 치세 내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 간에는 갈등이 계속되는 와중에 북쪽에서는 바이킹족의 한 일파인 노르만족이 프랑크 왕국 곳곳을 공격하며 약탈을 벌이고 있었죠. 그렇게 프랑크 왕국 전체가 또 다시 혼란에 빠져드는 가운데 경건왕 루이가 세상을 뜨자 장남인 로타르 1세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 유일한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아키텐의 피핀의 아들인 피핀 2세와 연합했습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인 독일왕 루트비히, 막내인 대머리왕 샤를이 이에 반발하며 군사를 일으킵니다. 

 

로타르 1세는 동생들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 형제는 다시 왕국을 셋으로 분할해 나눠서 통치하자는 제일 처음의 방안으로 되돌아옵니다. 진작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될 수도 있었던 일이었는데, 일이 꼬이려다보니 이렇게 복잡해져서 먼 길을 돌아오게 되었네요. 이렇게 해서 843년,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 조약을 통해 세 나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서프랑크는 막내 아들인 대머리왕 샤를이, 중프랑크는 장남인 로타르 1세가, 동프랑크는 독일왕 루트비히가 통치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장남인 로타르 1세 사후 세 나라는 한번 더 국경을 조정하게 됩니다. 로타르 1세가 죽자 그가 통치하던 중프랑크 왕국은 또! 게르만족의 방식대로 그의 세 아들들에게로 또! 분할상속이 되었는데요. 장남인 루도비코 2세가 아버지의 서로마 황제 지위와 이탈리아 북부를 상속받았구요. 차남인 로타르 2세는 오늘날의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 쯤인 로타링기아 지방을, 삼남인 샤를은 프로방스와 부르군트 지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셋째 아들 샤를은 다른 많은 샤를들과 구별하기 위해 프로방스의 샤를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프로방스의 샤를은 후사 없이 다른 형제들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토는 둘로 나뉘어서 프로방스 지방은 장남인 루도비코 2세가, 부르군트 지방은 차남인 로타르 2세가 각각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로타르 2세가 죽자 이번에는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로타링기아 지방을 누군가가 차지해야 했는데요. 로타르 2세에게는 사실 아들 위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의 영토를 물려받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죠.

 

중프랑크 왕국이 쪼개져 없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던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샤를과 동프랑크의 독일왕 루트비히는 로타르 2세의 영토를 자신들끼리 나누어 갖기로 했습니다. 이미 세월이 꽤 지나고 세대가 바뀌니 이제 중프랑크 왕국의 조카와 그 아들들과는 별로 같은 집안이라는 결속력도 없지 않았을까요? 거기에 로타링기아 지방은 이탈리아 반도와는 알프스 산맥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지리적으로도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는 게 뭔가 좀 부자연스럽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들은 위그를 사생아로 몰아 상속권을 빼앗고 자신들끼리 이 지역을 나누어 갖는데요. 870년에  맺어진 이 때의 조약이 바로 메르센 조약입니다. 

 

이렇게 메르센 조약을 끝으로 프랑크 왕국의 복잡했던 분할과정이 마무리 되고, 세 왕국은 각각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이 중 중프랑크는 더 작게 쪼개져버려서 바로 이탈리아가 되었다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요.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험난해서였는지 정작 분할상속이 정리되자 카롤링거 왕조는 점차 힘을 잃고 이제는 다른 가문들이 각 왕국을 차지하면서 세 나라의 모습은 점점 더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프랑크 왕국이 이렇게 나눠지게 된 원인이 꼭 후계자들간의 상속 다툼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장자가 모든 재산을 상속하던 다른 문화권의 방식대로 프랑크 왕국의 후계자가 결정되었더라면 유럽의 역사는 좀 달라졌을까요?

 

사실 프랑크 왕국이 이렇게 분열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우선 프랑크 왕국의 다른 주변의 왕국들보다 너무 큰 게 문제였습니다. 정확히는 그 큰 덩치에 비해 나라를 운영할 제도나 행정체계가  잘 마련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죠. 과거의 로마 제국과는 다르게요. 그러다보니 같은 프랑크 왕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이 많은 마찰을 빚어냈습니다. 심지어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는 서로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봉건제에서 비롯된 지방분권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프랑크 왕국에는 분명 왕이 존재했지만 지방에 자신의 영지를 보유한 귀족들, 즉, 영주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후대에 세습시키면서 그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샤를마뉴 같은 강력한 군주조차도 이들을 견제하느라 많은 공을 들여야했으니 서로 상속 다툼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던 후대에 들어서는 이 귀족들의 독립적인 권한도 더더욱 막강해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 프랑크 왕국이 하나의 단일한 왕국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장애물이 되었겠죠. 

 

마지막으로는 노르만족의 이동입니다. 게르만족의 이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면서 이제 유럽 지역이 좀 안정을 되찾아가나 싶었지만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따듯한 땅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노르만족들은 유럽 전역을 마구 휘젓고 다니며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 권력은 자신들만의 사정으로 바쁘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이 시기에 평범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의 귀족들 뿐이었던 거죠. 이 문제는 결국 위의 지방분권화 문제를 더욱 가속화시키며 프랑크 왕국의 분열을 가속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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