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색슨족의 나라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 대륙을 마주보고 있는 오늘날의 영국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훨씬 오래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최대한 간략하게 앞의 이야기들을 먼저 훑어보는 게 좋겠네요. 지금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곳은 브리튼 제도라고 부릅니다. 그냥 대충 보면 오른쪽에는 잉글랜드가 있는 큰 섬, 왼쪽에는 아일랜드가 있는 조금 작은 섬, 두개의 섬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사이에는 맨 섬이라는 섬도 있고, 북쪽으로 가면 큰 섬의 해안선이 복잡해지면서 그곳에도 작은 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도라고 부르죠.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까지만 해도 이 두 섬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약 1만년 전이라고 하니 일본보다 더 최근에서야 섬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섬이 된 브리튼 제도에는 유럽 대륙에서 넘어온 이베리아인들이 이주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기원전 8세기 쯤이 되면 당시 유럽 대륙이 널리 분포해 살던 켈트족들이 브리튼 제도로도 넘어와 마을을 이루었죠. 이들은 브리튼 제도 전역으로 퍼져 번성하며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작은 왕국에서 시작한 로마가 대제국으로 팽창하자 브리튼 제도에도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의 옛 이야기를 계속 다루고 있는데 제일 앞부분의 오리엔트 지역 얘기를 빼면 한 번도 로마의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네요. 단지 영토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 서양사에 남긴 유산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로마가 브리튼 제도에 브리타니아 속주를 건설한 이래로 원래 이곳에 살던 켈트인들이 급속히 로마화되는데요. 이 사람들을 로만브리튼인이라고 합니다. 마치 로마화된 갈리아인을 갈로-로마인, 로마화된 이베리아인을 히스파노로마노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죠. 이들이 이렇게 로마화되기 시작한 원인, 즉 로마인의 브리튼 제도 진출은 로마의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 때 부터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 제도의 켈트인들이 자신의 갈리아 원정 당시 갈리아인들을 지원했다는 명분으로 브리타니아 원정을 시작했지만 그다지 큰 소득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카이사르가 원정 자체에 별로 적극적이지도 않았구요. 그러다가 정복전쟁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이미지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다시 한 번 로마의 침략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의 남쪽에 론디니움이라는 거점을 만들고 북쪽으로 영역을 확대했습니다. 이 론디니움이라는 곳이 오늘날의 런던이 되겠죠?
본격적으로 원정에 나선 로마군은 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 이상 북쪽으로는 좀처럼 치고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원래 그곳에 살던 켈트인들이 워낙 호전적이고 공격적이었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온몸에 파란색 염료로 문양을 그려서 픽트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이들이었습니다. 결국 섬 전체를 차지하는 데에 실패한 로마군은 최대한 픽트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그 경계에 성벽을 쌓았는데요. 북쪽이라고 해봐야 섬의 절반에서 좀 더 위에 있는 정도였습니다. 이 성벽이 바로 하드리아누스 방벽입니다.
로마군은 잠시나마 그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안토니누스 방벽을 쌓기도 했지만 수성에는 실패하고 다시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철수했습니다. 이제 방벽 아래는 로마의 영토에요. 그곳엔 여전히 켈트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제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대신 더 발전된 문물도 함께 받아들일 수 있었죠. 이들은 그렇게 로마화되어 로만브리튼인이 됩니다. 한편, 방벽 위쪽은 칼레도니아라고 불리우던 픽트족의 땅이었습니다. 어쨌든 방벽 덕분에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죠. 이 둘의 문화적 차이는 오늘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북쪽으로부터의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동쪽으로부터의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제국이 큰 위기에 처하던 410년까지 브리타니아 속주를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게르만족의 한 민족인 서고트족이 로마 본토를 공격하자 브리타니아 속주에 주둔 중이던 병력을 빼서 본토를 수비하는 데에 동원했죠. 로마군이 빠져나가자 그 자리에는 로만브리튼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히드리아누스 방벽 이북의 픽트족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같은 켈트인이었지만 이제는 서로 문화가 너무 달라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로만브리튼인들은 픽트족의 공격에 견디다 못해 한가지 대책을 생각해내는데요. 그건 도버 해협 건너 유럽 대륙 북쪽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앵글로족과 색슨족에게 픽트족을 몰아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공짜로는 아니구요. 그들을 고용한 것이죠. 이렇게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로만브리튼인들의 요청을 받아 픽트족과 싸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은 원래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래서 이들은 픽트족을 진작에 물리쳤지만, 다시 유럽 대륙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눌러 앉았습니다. 이렇게 로만브리튼인들은 이번에는 로마인이 아닌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게 되죠.
그들 중 일부는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피해 브리타니아 남서쪽, 지금의 웨일즈 지역으로 이동해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450년에 귀네드 왕국을 세워 13세기까지 나라를 이어가죠. 그리고 다른 일부는 바다를 건너 서쪽에 있는 아일랜드에 정착했습니다. 한편, 브리타니아 남쪽을 차지한 앵글로색슨족들은? 무려 일곱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북쪽에서부터 노섬브리아, 머시아, 이스트앵글리아, 에식스, 웨식스, 서식스, 켄트, 이렇게 일곱 개 입니다. 참고로 나라가 생긴 것은 켄트 왕국이 455년에 제일 먼저 생겼고 노섬브리아 왕국이 653년으로 가장 마지막에 생겼습니다.
앵글로색슨족에 의해서 다시 북쪽으로 밀려난 픽트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들은 옆의 아일랜드 섬에서 살던 스코트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세운 리아타 왕국에 흡수되었습니다. 그러다 843년에 스코틀랜드 왕국이라는 통일왕국이 생겨나죠. 지금은 스코틀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북쪽에 있지만 그들의 원래 고향은 오히려 아일랜드였던 셈이에요. 사실 아일랜드 섬의 이름도 원래는 스코트 섬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되면 섬의 북쪽에는 스코틀랜드 왕국이, 남쪽에는 앵글로색슨족의 칠왕국이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로만브리튼인들도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로만브리튼인들의 영웅, 아서 왕의 이야기를 보면 로만브리튼인들도 나름대로 앵글로색슨족을 몰아내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서 왕은 앵글로색슨족을 완전히 물리치거나, 옛 브리타니아 지역을 통일하는 데에는 실패한, 전설 속의 인물이죠. 그 전설 속에서 왕과 기사들은 원탁에 모여 평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나누며 정사를 논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위계와 서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왕권이 약한 초기 왕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로만브리튼인들의 땅에 앵글로색슨족이 일곱 개의 왕국을 세운 이래로 그레이트브리튼 섬에는 또 새로운 이민족들이 들어옵니다. 그들은 본래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에서 살다가 5세기부터 조금씩 지금의 덴마크 지망으로 이주한 데인족들인데요. 이들 역시 당시 유럽 대륙을 휘젓고 다니던 바이킹족의 한 일파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냥과 항해에 능숙하고 호전적이며 용맹한 민족이었죠. 그들은 787년 처음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상륙해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더니 점점 그 빈도가 잦아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매년 습격을 반복했습니다.
그러자 앵글로색슨족에 맞선 로만브리튼인 영웅 아서 왕처럼 이번에는 데인족에게 맞선 앵글로색슨족 영웅이 출현합니다. 871년 칠왕국 중 웨식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알프레드 대왕이 바로 그 새로운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데인족의 칩입에 맞서 왕국을 지켜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설득해 이스트앵글리아 지역에 정착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약탈을 잠재우기도 했습니다. 마치 샤를 3세가 서프랑크에 침입한 노르만족들을 루앙 지역에 정착시킨 것처럼요. 이렇게 만들어진 데인족들의 영역을 '데인로'라고 합니다.
옛부터 브리타니아는 로마의 속주이긴 했지만 지리적인 이유로 갈리아나 히스파니아에 비해서는 문물이 조금 뒤떨어져 있었는데요. 이는 앵글로색슨족의 칠왕국이 존재하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알프레드 대왕은 데인족의 침략을 막아낸 왕이기도 했지만 학문을 융성하게 하고 교육을 장려해 내치를 안정시키려 노력한 성군기도 했는데요. 그는 유럽 대륙에서 유명한 학자들을 초청해 강연을 열기도 했구요. 라틴어로 쓰여진 유명한 저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도록 하고 본인 스스로도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당시 일부 유럽의 왕이나 귀족들이 평생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학문에 특별히 깊은 열의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잉글랜드라는 나라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 때 즈음입니다. 그 때까지 일곱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던 앵글로색슨족들의 왕국을 통일하고 사람들에게 '우리는 잉글랜드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심어준 것도 바로 알프레드 대왕이었죠. 그래서인지 그 뒤로도 영국에서는 탁월한 군주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영국의 역사에서 영국인들의 왕으로서 대왕의 칭호를 얻은 것은 알프레드 대왕이 유일합니다.
마자르족의 나라
현재의 헝가리에서는 자신들의 민족적 기원을 마자르족에서 찾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로는 헝가리라는 이름이 한때 로마를 멸망으로까지 몰고 갔던 유목민족인 훈족에게서 기원했다고 해서 훈족이 헝가리 민족의 기원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는데요. 훈족이 현재의 헝가리인들의 유전자에 적은 비중으로 섞여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헝가리인의 조상이 훈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자르족이 지금의 헝가리 땅에 정착하기 전까지 이 곳에는 다양한 나라들이 거쳐갔습니다.
로마가 이 지역에 판노니아 속주를 설치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는 역시 켈트인들이 널리 퍼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가 포에니 전쟁 이후 정복 전쟁에 나서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앞서 브리타니아 속주에 비하면 훨씬 이른 시대에 이미 로마의 속주가 되었네요. 일단 지리적으로 로마에서 상당히 가까우니까요. 당시의 판노니아 속주는 오늘날의 헝가리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그리고 지금은 헤체된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도죠.
판노니아 속주는 제정 로마 후기로 가면 바로 위의 일리리아 속주와 함께 여러 명의 군인과 황제들을 배출하는 주요 속주가 됩니다. 그러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사두정치 때 서로마의 동쪽 끝 지역으로 편입되고, 서로마가 멸망하고나서는 다양한 게르만족들이 들어와 살았죠. 이 때 판노니아 속주의 동쪽 지방에 자리를 잡은 게르만족은 게피드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게피드 왕국은 다른 게르만족 왕국들 간의 각축전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하고 랑고바르드 왕국, 그리고 아바르 칸국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아바르 칸국. 칸국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를 세운 이들은 인도유럽어족 민족이 아닌 몽골계 민족이었습니다. 아직 그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아바르족은 몽골 초원 지대에 살던 선비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렇게 중앙아시아에서부터 판노니아 지역까지 이동한 이들은 558년 동로마 제국의 북쪽에 국경을 접해 나라를 건국하고 7세기 초반부터는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그러나 아바르 칸국의 전성기는 채 10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한때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나설 만큼 강성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이 워낙 난공불락의 요새이다보니 함락에 실패했고, 원래도 결속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부족들이 모인 칸국에서 하나 둘씩 이탈하는 부족들이 생겨나면서 나라가 점차 쇠퇴했죠. 또 마침 서쪽에서 명성을 떨치던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가 동쪽으로 진격하며 아바르 칸국을 사정없이 공격하자 한때 프랑크 왕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바르 칸국이 멸망한 판노니아 평원 동쪽 땅에 드디어 새 주인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려 우랄 산맥 남쪽이 고향인 유목 민족 마자르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도 유럽어를 쓰는 게르만족, 라틴족, 슬라브족이 아닌 핀 우그르어파 계통이었는데요. 오늘날의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헝가리의 언어, 그리고 러시아 연방의 일부 국가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이 핀 우그르 어파에 속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들 중 헝가리만이 유럽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네요.
이렇게 우랄 산맥 남쪽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던 마자르족은 9세기 초가 되면 마침내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남서쪽으로 이동해 아바르 칸국을 멸망시켰던 동, 서프랑크 왕국을 괴롭히기 시작하죠. 당시 동,서프랑크 왕국은 노르만족에게도 빈번하게 약탈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자르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습니다. 895년 이들은 판노니아 평원 동쪽에 헝가리 대공국이라는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틈만 나면 서쪽으로의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955년 동프랑크 왕국의 뒤를 이은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에게 크게 패한 뒤로는 더 이상의 서방 진출을 포기했죠.
헝가리 대공국은 건국 전후 시기에만 해도 우랄 산맥 근처에서 살 때의 유목민족스러운 성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판노니아 평원 동쪽의 슬라브족 원주민들과의 통합과정에서 점차 농경국가화 되었는데요. 초대 군주인 아르파드 대공이 아르파드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의 손자 때인 탁쇼니 대공과 증손자인 게자 대공 때에는 자신들의 토착종교를 버리고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이면서 유럽 국제사회로의 편입을 시도했습니다. 바로 밑에 있던 불가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공국이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것을 보면 아마도 헝가리 대공국이 이 당시 로마 카톨릭의 남방한계선이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카톨릭 국가가 된 헝가리 대공국은 게자 1세의 아들인 이슈트반 1세 때가 되면 부족국가의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하며 당시 유럽의 다른 게르만족 왕국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의 왕국이 됩니다. 997년 즉위한 이슈트반 1세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사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강력한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는 한편, 영향권 내의 다른 부족들을 편입해 헝가리 왕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초대 국왕으로 봉해졌습니다. 약간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 같은 느낌이네요.
로마 밖의 땅
이제 드디어 로마가 닿은 적이 없었던 땅으로 갑니다. 근데 좀 묘한게... 1453년, 동로마 제국이 강력한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튀르크에게 멸망한 후, 모스크바 대공국이 동로마 제국의 종교적 정통성을 이었다고 해서 러시아를 흔히 제 3의 로마라고도 한다더라구요. 제1의 로마는 로마 제국, 제2의 로마는 신성로마제국이라면 제3의 로마는 모스크바 대공국이고 그 뒤를 이은 루스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이 계속 동로마의 권위를 물려받는다는 해석이죠. 따라서 러시아는 적어도 종교적 측면에서 봤을 때 로마와 무관하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역시나 러시아의 초기 역사로 가볼까요?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정말 광활합니다. 유럽의 동부에서부터 더, 더, 더 동쪽으로 가서 극동지방까지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하지만 이는 러시아가 적극적인 시베리아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이구요. 러시아의 역사는 사실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사이 쯤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지금은 러시아와 사이가 매우 안좋아진 우크라이나인들이 '우리가 근본'이라고 하는 근거가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슬라브족이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인도유럽어 내에서도 게르만족과는 상당히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었구요. 서쪽의 게르만족이 강성하던 시기에는 게르만족의, 동쪽 초원의 투르크 계열 민족이 강성하던 시기에는 또 투르크 계열 민족들에게 지배를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특히 게르만족에 의한 지배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종종 보였던 경향이었죠. 그래서 영어 단어 Slave 의 어원이 슬라브족에게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기억나네요.
슬라브족은 유럽 동부에 꽤 광범위하게 분포했는데요.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을 동슬라브족,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인을 서슬라브족,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발칸 반도에서 그리스를 제외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남슬라브족으로 구분합니다. 북슬라브인은 따로 없네요. 이 중 동슬라브족이 있던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지역으로 루스족이 내려오면서 이 지역에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루스족은 또 누구일까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슬라브족과의 혼혈로 러시아인들의 유전자 속에 남아있을 뿐이지만 루스족은 본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또!) 에 살던 바이킹족의 한 분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대략 8세기 경에 지금의 스웨덴 지역에서 동유럽 지역으로 건너와서 그곳에 거주하던 동슬라브인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형성했는데요. 안타깝게도 연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세력은 점차 팽창하면서 8세기 말에서 9세기 중반 사이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카간국이라는 말에서 추측해보건데 이들은 분명 당시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카간이나 칸은 보통 몽골이나 튀르크 계열의 왕국에서 최고지도자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루스인 지도자 류리크가 현재의 러시아 노브고로드 지역에 터를 잡고, 그의 후계자인 올렉이 키예프까지 영역을 넓혀 키예프 루스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사실 올렉이 류리크의 아들이었거나 다른 혈연관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올렉 공부터를 대략 러시아 역사에 최초로 등장한 류리크 왕조로 치는 것 같습니다.
본래 슬라브 전통 신앙을 간직하던 키예프 루스는 류리크의 손자인 스비야토슬라프 1세 때에 처음으로 동방정교를 받아들였구요. 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1세 때에는 아예 국교로 지정하며 본격적으로 정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1세 때에는 마침내 전성기를 이룩하며 서방의 다른 유럽 왕국과 혼인 동맹을 맺고 본격적으로 유럽의 역사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죠.
그 사이 영토도 크게 확대되어 지금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쪽 끝을 차지하며 당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영토라는건 근대 국가의 개념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요. 키예프 루스의 상인들은 드넓은 영토의 최남단 흑해와 최북단 너머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를 오가는 교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가로 당시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현재의 드네프르 강 유역은, 지금도 그렇지만, 전세계적으로 가장 비옥하기로 유명한 땅이기도 했으니 식량자원도 상당히 풍부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성기를 누리던 키예프 루스도 12세기 들어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이 불붙기 시작하고 13세기에는 동쪽에서 유목민족들의 거센 공격이 밀려들어오자 안그래도 취약하던 왕권이 더더욱 약화되며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수즈달, 스몰렌스크, 랴잔, 체르니고프, 키예프 등이 그 나라들인데요. 각 나라들의 형성된 시기와 존속한 기간은 다릅니다. 그리고 그 뒤는 우리의 선조들도 겪은 바가 있는 몽골의 대대적인 침략과 지배... 신의 형벌이죠.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의 초가을 (0) | 2024.02.29 |
---|---|
정복왕 윌리엄 (0) | 2024.02.27 |
동크랑크 왕국에서 독일로 (0) | 2024.02.23 |
카롤링거 르네상스 (0) | 2024.02.20 |
프랑크 왕국의 수립 (0) | 2024.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