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족의 이동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노르만족 역시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에 살던 여러 부족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이 노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해 영국과 러시아의 원형이 발생했습니다. 노르만족의 이동은 여러가지 원인의 결합된 결과이지만 1-2 세기 로마에서 크게 확대된 문명이 점차 더욱 번져나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 다만 북유럽은 문명의 중심지가 되기에는 지리적으로 좁은 오지여서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새롭게 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노르만족이 기존의 서유럽세계로 새롭게 진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노르만족 이외에도 마자르족 역시 오토 1세의 독일을 침략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침입은 오토 1세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독일의 입장에서 샤를마뉴가 게르만족의 이동을 끝냈다면 오토 1세는 노르만족과 마자르족의 이동을 저지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마자르족은 원래 훈족의 후예였습니다. 하지만 955년 오토 1세의 방어에 이동이 가로막히자 이동 경로에 있었던 중부 유럽 헝가리 평원 지대에 정착하며 헝가리를 형성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어는 유럽 언어 중 유일하게 아시아계 언어에 속하며 핀란드어, 바스크어와 함께 인도유럽어가 아닌 언어이기도 합니다.
노르만족 역시 오토 1세에게 이동이 가로막혔습니다.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 중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슬라브족이 살고 있던 곳에 정착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지금의 러시아 지역에 첫번째 정착지를 마련해 노브고로드 공국을 세우고, 다른 일부는 더욱 남하해서 지금의 모스크바 자리에 키예프 공국을 세웠습니다. 이 키예프 공국이 이들이 러시아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한편, 원래 러시아 지역에 살던 슬라브족은 노르만족에게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중부 유럽 일대에 살던 다른 슬라브족과 합쳐졌습니다. 합쳐진 슬라브족들은 지금의 슬라브족 국가들의 원형이 되는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슬라브족 국가 중 하나였던 불가리아만 이 당시에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이루는 속국들 중 하나로 성장하며 조금은 다른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영국의 탄생
오토 1세의 독일은 슈바벤과 바이에른 등 지금의 독일 남부와 작센, 프랑켄 등의 중부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북의 북독일 지역에는 노르만족의 한 일파인 데인족이 덴마크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가 한 개 국가로 취급되었고 사실상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도 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해에 능한 이들은 북해로 진출하여 따듯한 바닷길을 통해 프랑스의 강들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도시들을 약탈하곤 했습니다. 이런 약탈에 시달리던 프랑스의 샤를 3세는 911년 이들에게 아예 영토의 일부를 주어 정착시키고 충성서약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공국입니다. 훗날 영국에 노르망디 출신의 윌리엄 공이 새운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복잡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의 브리타니아는 로마의 전통이 남아있는 속주였지만 프랑스 보다는 발전이 더딘 곳이었습니다. 당시 브리타니아에서는 서로마 멸망 이후 5-9세기 동안 게르만족의 이동 중에 독일 북부에서 건너간 앵글족과 색슨족, 유트족이 여러 개의 왕국을 건설하고 독자적으로 발전 중이었습니다. 5세기 무렵의 아서 왕 이야기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 일화는 왕과 기사들이 원탁에 모여 평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나누며 정사를 논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계와 서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왕권이 약한 왕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브리타니아는 정치적은 면에서 서로마의 선진적인 체제가 완전히 정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이미 597년 로마 교황 그리고리우스 1세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대표로 한 전도단을 브리타니아에 파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파견단은 로마 카톨릭을 브리타니아 전체에 전파하는 일에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앵글로색슨 왕과 소수 귀족들을 개종시키는 데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전도는 잉글랜드보다는 아일랜드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훗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간의 종교 갈등을 낳기도 했습니다.
옛 브리타니아는 북해 건너의 데인족의 침략을 빈번히 겪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여러 부족 종 웨식스의 왕이었던 알프레드는 데인족에게 일정한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고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3세가 강을 통해 프랑스 내륙으로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데인 족들에게 영토를 일부 할양하고 충성을 서약받았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법 덕분에 웨식스 왕국은 데인족이 영국의 다른 지역들을 침략하는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은 웨식스에서 런던까지 진출해 동쪽에 정착한 데인족과 장기적인 평화관계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데인족 자치구인 데인로를 설치했습니다. 그런 조치 때문에 데인족이 노섬브리아와 머시아를 비롯해 브리타니아의 동쪽 해안지역을 휩쓸고 다니는 동안에도 웨식스 왕국은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 대에 들어서서 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왕국에 잉글랜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비록 데인족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영국을 통일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영국사에서는 알프레드를 최초의 통일 잉글랜드의 건설자로 간주하고 대왕의 반열에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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