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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정복왕 윌리엄

노르만족과 노르망디 공국

 

샤를마뉴 대제의 거대한 나라가 셋으로 쪼개지던 9세기 초.  세 프랑크 왕국은 모두 이민족의 이동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민족들은 훗날 헝가리가 되는 마자르족과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족의 일파인 노르만족, 그리고 유럽인들은 사라센이라고 불렀던 이슬람 세력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이라는 나라가 본래 옛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게르만족의 한 일파가 세운 나라이니 이들은 아마도 이민족이 자신들의 거대한 나라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걱정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 중 노르만족은 특히나 자신들과 고향이 같은 형제 민족?이기도 하잖아요. 

 

북쪽에서 내려와 유럽 각지를 휩쓸고 다니던 바이킹족들에 대해 프랑크 왕국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쩌다가는 가끔 승리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거칠고 용맹한 바이킹 전사들의  손쉬운 약탈감이 되었죠. 그들은 유럽 각지를 약탈하며 도시를 파괴하고 인명을 살상했고 845년에는 무려 파리를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바이킹족 지도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리더십을 보인 인물이 있었는데요. 덴마크와 노르웨이인 바이킹족들을 이끌던 흐롤프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와 영국, 서프랑크 일대를 돌며 약탈로 명성을 쌓았는데요. 체구가 너무 큰 탓에 말을 탈 수가 없어서 늘 걸어다녔기 때문에 '걷는 자'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한편, 당시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와 로베르 가문의 왕위 경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 3세는 로베르 1세를 견제하고, 노르만족의 약탈도 막는 목적으로 흐롤프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했는데요. 그래서 그를 루앙 지역의 백작으로 봉하고 신하로 삼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로베르 1세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그가 카톨릭으로 개종해 세례를 받고 로베르 1세를 대부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그를 루앙 백작으로 삼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911년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으로 용맹한 바이킹족 전사, 걷는 자 흐롤프르는 서프랑크 왕국의 루앙 백작 롤로가 되죠. 

 

롤로가 루앙 지역에 정착하자 그가 이끌던 바이킹족 말고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던 바이킹족들도 차츰 따듯하고 살기 좋은 루앙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롤로도 그 전까지의 약탈을 멈추고 자신의 영지인 루앙을 돌보는 데에 집중했죠. 그러자 루앙은 점차 인구가 늘어나며 도시의 규모도 커졌는데요. 그들은 분명 바이킹족 출신이었지만 루앙으로 이주하면서 예전의 생활방식을 버리는 한편,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며 빠른 속도로 서프랑크화되었습니다. 좀 더 얌전하고 우아해지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서프랑크인들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인 바이킹족들을 노르만족이라고 불렀습니다. 

 

루앙 지역은 롤로의 사후에도 계속 성장하며 롤로의 후손들이 작위를 세습했습니다. 그러다가 롤로의 증손자인 리샤르 2세 때에는 크고 작은 백국과 자작령을 거느린 노르망디 공국이 되었죠. 동시에, 최초로 루앙 백작을 서임했던 서프랑크 왕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의 봉건적 관계도 계속 우호적으로 유지하며 노르망디 공국은 점차 강력한 나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 리샤르 2세의 손자인 기욤 2세 때인 1066년, 마침내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습니다.

 

사실, 노르만족은 노르망디 공국 말고도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도 자신들의 새로운 나라를 개척했는데요. 그 시작은 어딘가 롤로가 루앙에 정착할 당시와 좀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는 랑고바르드족이 세운 몇몇 공국들이 있었는데요. 이 중 베네벤토 공국에서 분리된 살레르노 공국은 10세기 말부터 사라센 해적들로 인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싸움을 잘하기로 유명한 노르만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것이었죠.

 

효과는 바로 나타났습니다.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4세는 노르만족 용병대장 라이놀포의 도움으로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쳤는데요. 그 덕분에  999년 라이놀포는 세르지오 4세로 부터 아베르사의 백작으로 서임받는데 여기가 바로 노르만족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얻은 최초의 땅입니다. 하지만 이건 하나의 사례일 뿐이구요. 노르망디 공국 출신의 로베르 기스카르는 롤로가 그랬듯이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아풀리아, 시칠리아, 그리고 칼라브리아 지역을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거기 정착하는 김에 시칠리아의 사라센 인들을 쫒아내 달라는 부탁도 들어주었죠. 

 

로베르는 자신의 동생 루지에로 1세와 함께 시칠리아 공격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중요 거점인 팔레르모를 차지한 이후로 원정이 10년 이상을 끌며 길어지자 로베르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정복활동에 전념하기로 하고 시칠리아 쪽은 동생 루지에로 1세가 전담하게 되었죠. 그리고 혼자 남은 그는 고군분투 끝에 1072년 마침내 사라센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시칠리아 전역을 차지하며 백국을 세우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영토는 1130년 아들인 루지에로 2세가 물려받아 통치하다가 왕국을 선포하며 오트빌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를 맡기로 한 로베르 기스카르 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071년 로베르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구요. 여세를 몰아 살레르노 공국의 지술포 2세를 몰아내고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차지했습니다. 사라센인들을 쫒아내기 위해 불러들인 노르만족이 박힌 돌을 빼내고 아예 새로운 나라를 차린 거죠. 그가 획득한 영토는 그의 사후, 아들들에 의해서 분할되어 통치되다가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에 의해 통합되었습니다. 로마 멸망 이후 랑고바르드족과 동로마 제국의 다툼으로 계속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도 처음으로 통일 왕조가 들어섰네요. 근데 그 왕조는 노르만족 왕조...

 

노르망디 공국의 노르만족들처럼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족들도 이미 카톨릭으로 개종을 한 상태였지만 이들은 종교에 상당히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루지에로 1세기 팔레르모를 점령하던 당시에도 그곳에 거주하던 사라센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보장받을 수 있었는데요. 그 덕분에 팔레르모에는 지금도 카톨릭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이 공존하던 시기의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마치 후 우마이야 왕조 시절의 이베리아 반도에 건설된 알 안달루스 지역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요?

  

 

사라센인들은 누구?

  

그럼 노르만족들로 하여금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차지할 빌미를 주었던 사라센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기본적으로 사라센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원래 사라센이라는 말은 이슬람교가 성립하기도 전부터 있던 말이었다고 하는데요. 본래는 로마 제국 말기에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남부 사이에서 살던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슬람교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시킨 이후로는 그냥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라센인들이 유럽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 원인은 이들이 지중해에서 자행하던 해적 행위 때문이었는데요. 그 시작으로 거슬러 가보면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지중해에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이 해적질을 시작한 것이 기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동쪽으로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실패로 끝나고, 서쪽에서는 샤를 마르텔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군을 막아내면서 어느 정도 차단이 되었지만 바다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던 거죠. 

 

이들의 근거지인 북아프리카는 한때 로마의 빵바구니라고 불리웠을 정도로 농업에 유리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농사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라센인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해적행위를 위한 베이스캠프를 구축했죠. 해적행위가 이슬람교의 율법상 나쁜 짓이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행위는 이교도들을 상대로 펼치는 성전, 지하드 활동이었죠. 심지어 아바스 왕조나 파티마 왕조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들의 행위를 권장하고 공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지중해가 사라센 해적으로 들끓자 로마 시대, 아니 그리스 시대부터 활발했던 지중해 해상무역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약탈할 배가 많이 오가지 않자 사라센인들은 이제 지중해 해안에 상륙해 근처의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했죠. 제일 타겟이 되기 좋은 곳은 어디였을까요?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큰 섬들이죠. 몰타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코르시카가 이들 손에 떨어졌고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바리와 타란토 같은 도시들도 함락당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랑고바르드 계열의 공국과 동로마 제국은 이들을 떼어내려고 노르만족들을 불러들여 도리어 그들에게 이탈리아 남부 전체를 내어주게 된 것입니다. 

  

  

앵글로색슨계와 덴마크계의 왕위 경쟁

 

알프레드 대왕의 등장 전까지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7왕국은 아직 부족국가 수준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형태의 왕국이었습니다. 비록 데인족들은 데인로에서의 자치권을 인정받으며 잉글랜드에 정착하긴 했지만 그래도 잉글랜드가 생각보다 더더욱 취약한 구석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데인로를 벗어나 잉글랜드 영토로 더 진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앵글로색슨계와 덴마크계 간의 첨예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되었죠.

 

사실 알프레드 대왕도 데인족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어떻게든 그들이 데인로 안에서 조용히 살도록 달래며 앵글로색슨계 왕국의 완전힌 멸망을 막으려 애썼던 것이죠. 통일된 잉글랜드의 첫 왕조인 웨식스 왕조의 애설레드 2세는 그런 데인족들이 또 공격의 조짐을 보이자 데인족에게 일종의 회유책으로 공물을 건네기로 결심했습니다. 회유책이긴 한데 사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죠. 어쨌든 그래서 '데인겔드'라는 이름으로 세금을 걷고 그걸 데인족에게 보내 평화를 약속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식스 왕조의 왕위는 한때 데인족에게로 넘어가 스벤 1세가 잉글랜드를 통치했는데요.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먼드 2세는 당연히 데인족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갰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다시 전쟁... 하지만 뿌리가 뽑혀지는 건 에드먼드 2세였구요. 잉글랜드는 결국 데인족에게 패배하고 웨식스 왕조의 왕위는 1016년, 데인족 왕인 스벤 1세의 아들, 크누트 2세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데인족이 잉글랜드의 왕이 된 것인데요. 이렇게 잉글랜드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으면 데인족들인 잉글랜드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잉글랜드를 약탈하던 데인족 군대를 대부분 해체하고 데인족과 잉글랜드인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데인족과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공평하게 처리되록 각종 법안을 만들었구요. 데인족들이 대거 카톨릭으로 개종하도록 힘썼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애설레드 2세의 왕비였던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했습니다. 그러자 잉글랜드인들도 이에 화답하며 크누트 2세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 역시 영국의 역사에서는 알프레드 대왕의 필적하는 업적을 달성한 대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크누트 대왕. 자국 역사에 딱 두 명있는 대왕의 칭호 중 하나를 외국인 왕에게 준 영국인들의 포용력도 좀 신기합니다.

 

사실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영국이 보여준 포용의 역사는 로마인들을 능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로마인들을 맞이한 켈트인들은 로만브리튼인이 되어 살아가고 이후에 영국에 들어온 앵글로색슨인들에 맞선 아서 왕을 영웅으로 추대하지만 앵글로색슨계 왕으로서 데인족에게 맞선 알프레드 대왕 역시 대왕으로 칭송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지배한 데인계 지도자인 크누트 대왕, 그리고 훗날 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도 영웅으로 생각하죠. 켈트인, 로마인, 앵글로색슨족, 데인족, 노르만족이 모두 그들에게는 이방인이 아닌 자신의 조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무의식적으로나마 한 나라의 역사는 한 민족의 역사라고 여겼던 저에게는 좀 신기한 대목이에요.

 

한편, 애설레드 2세와의 첫번째 결혼에서 아들 에드워드를 두었던 왕비 엠마 노르망디는 애설레드 2세의 사후 크누트 2세와 재혼해 다시 아들 하레크누드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크누트 2세의 사후에는 당연히 하레크누드가 즉위해 잉글랜드 왕위를 계속 덴마크계가 계승했는데요. 문제는 이후 하레크누드의 아들인 망누드가 잉글랜드 왕위는 계승하기 싫고 스칸디나비아 왕위만 계승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잉글랜드의 귀족회의인 위탄게모트에서는 다시 웨식스 왕조의 에셀레드 2세와 엠마 노르망디의 아들인 에드워드를 왕으로 추대했죠. 이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웨식스 백작 고드윈이었습니다. 결국 에드워드는 그의 딸과 결혼합니다.

1042년에 즉위한 에드워드는 참회왕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립하고 빈민구제 정책을 시행하는 등의 업적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그의 후계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귀족들이 관여하면서 점차 정치적 혼란이 커져갔죠. 일단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가장 큰 공이 있었던 고드윈 백작의 가문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요. 이들의 그늘이 점차 짙어지자 에드워드는 고드윈 백작 일파를 몰아내고 그의 딸과도 헤어졌습니다. 문제는 고드윈도 죽고 에드워드도 죽은 뒤에 커졌죠.  

 

그려진 윌리엄 1세의 초상화. 작자미상, 15-16세기경, 패널에 유채, 41.4 X 56.8 cm

 

에드워드는 즉위 전, 앵글로색슨계와 덴마크계 간의 치열한 왕위다툼을 피해 어린 시절을 노르망디에서 보냈습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인 엠마 노르망디가 노르망디 귀족이었기 때문에 그는 생전에 자신의 외사촌이자 노르망디 공인 기욤 2세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를 물려주기를 원했습니다. 한편, 에드워드의 즉위 당시 그를 강력히 지지했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은 한때 자신의 딸과 에드워드를 결혼시킬만큼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니 그의 가문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에드워드의 왕위를 이을 것이라고 기대했었죠. 나중에는 에드워드가 고드윈의 가문과 결별을 하긴 했지만요. 결국 이 양측 사이에서는 대결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에드워드가 죽자, 이를 틈타 먼저 선수를 친 것은 고드윈의 가문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가 위탄게모트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인데요. 에드워드가 살아있었을 당시 그가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노르망디 공 기욤 2세는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에 정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욤 2세는 노르망디에서 출발, 도버 해협을 건너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기욤 2세는 1066년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로 즉위하며 노르만 왕조를 열었고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이렇게 웨식스 왕조의 해럴드가 앵글로색슨계의 마지막 왕이 되었고 이후 영국의 왕조들은 현재까지도 모두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들에게로 이어지게 되었죠. 이렇게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면서 잉글랜드에는 이제 노르만 문화가 들어오며 영국 역사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구요. 더불어 본래 노르망디 공은 프랑스 왕의 신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잉글랜드도 프랑스의 신하 나라가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바다 건너서 온 외국인이 갑자기 잉글랜드의 왕과 귀족들을 쫒아내고 왕이 되었다니 민심이 좋을 리는 없습니다. 거기에다, 다른 왕국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힘을 가진 자가 새 왕조를 열었으니 나도 한번 해볼까 싶은 귀족들이 연이은 반란으로 윌리엄 1세의  치세 초반기는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노르망디 공으로서 적지 않은 통치 경험을 쌓은 군주였죠. 그는 해럴드의 잔여세력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고 그렇게 얻은 땅은 다시 자신의 측근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잉글랜드에서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렇게 권력기반을 공고히 한 윌리엄 1세는 우선 그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교회 세력의 개혁에 나섰습니다. 자신이 직접 종교회의를 주관해 교회의 규율을 확립하고 재산도 단속했습니다. 자신의 측근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해 자신이 잉글랜드에 있지 않을 때에는 그를 통해 잉글랜드의 상황을 관리했죠. 또한 대대적인 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감행해 지방 영주들의 수탈을 막고 중앙 권력의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1087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왕위는 셋째 아들인 윌리엄 2세가 이었습니다.

  

  

베렝가리오 1세 이야기

 

중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을 손자들이 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상속하면서 생겨났다가 그 다음 세대에서 다시 왕국을 이탈리아, 로타링기아, 그리고 프로방스 & 부르군트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가지며 해제되었습니다. 근데 여기에서 말하는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만을 의미하는데요. 이탈리아 남부에는 아직도 랑고바르드족이 세웠던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남아있었죠. 그 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작은 공국들도 있었구요. 

 

세 나라는 다시 이탈리아와 프로방스, 그리고 로타링기아와 부르군트 이렇게 두 나라가 되었지만 이탈리아와 프로방스 지역은 서프랑크 왕국이 한 때 차지했다가 다시 이탈리아와 프로방스로 나뉘고, 나중에 로트링겐 공국이 되는 로타링기아는 동, 서프랑크 왕국이 나뉘어 가졌다가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부르군트는 앞의 이탈리아와 결별?한 프로방스와 합쳐져 하 부르군트 왕국이 되었죠.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게 된 이탈리아 왕국에 대해서 얘기를 먼저 해볼까 합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단절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왕국 내의 여러 귀족들이 치열한 권력쟁탈전을 벌였습니다. 887년,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된 이는 프리올리 변경을 통치하던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였는데요. 이 지역은 과거 슬라브족이나 아바르족이 프랑크 왕국을 침입할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했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각지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쟁하던 와중에 선출된 왕이니 상황은 동프랑크 왕국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재위 중에 많은 귀족 세력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선은 교황 스테파노 5세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스폴레토 공국의 귀도 3세가 왕위를 빼았기도 했구요. 교황이 포르모소로 바뀌자 이번에는 포르모소가 내세운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자 베렝가리오 1세는 그의 휘하에서 봉신이 되었죠. 하지만 귀도 3세의 아들인 람베르토가 이탈리아의 왕위를 주장하자 이번에는 람베르토와 연합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시기의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의 역사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데... 아쉽지만 일단 뛰어넘기로 하고, 람베르토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왕국은 마침내 베렝가리오 1세가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시기가 마자르족이 한창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때라... 베렝가리오 1세는 이들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계속 패배했고 결국 900년,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하 부르군트 왕국의 루이 3세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옹립하기로 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 하에서 주군이 자신의 봉신을 보호주지 못하면 봉신이 주군에게 충성을 바칠 의무도 사라지는 거죠. 

 

근데 다행히도? 루이 3세 역시 마자르족의 침입 앞에서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자르족 방어에 실패하자 베렝가리오 1세는 다시 그를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915년, 이번에는 사라센의 침입에 시달리게 되었죠. 이 때가 벌써 그의 나이 75세 때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현재의 나폴리에서 80km 정도 떨어진 가릴리아노 강 유역에서 사라센 인들을 맞아 대승하며 이슬람 세력의 북상을 막아냈죠. 그리고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교황 요한 10세로부터 드디어 황제의 관을 수여받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한번 마자르족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던 베렝가리오 1세는 이후 대체로 마자르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게르만족의 침입을 겪언던 로마도, 노르만족의 침입을 겪었던 프랑크 왕국도 이런 방식으로 최대한 전쟁을 피해보려고 노력했으니 딱히 잘못은 아닌 거 같은데 이러한 정책은 이탈리아의 강경파 귀족들에게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상 부르군트 왕국의 루돌프 2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베렝가리오 1세는 의문의 독살을 당했죠. 924년, 84세이니 이미 노인의 나이이긴 했지만 마지막까지도 그의 일생은 편안하지가 않네요.

 

그렇게 상 부르군트 왕국의 루돌프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긴 했지만 그의 재위는 채 2년 남짓한 기간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이번에는 아를 지방의 위그 백작을 새 왕으로 옹립했죠. 하지만 그가 자신의 친족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전횡을 일삼자 이번에는 독일의 오토 1세를 끌어들이고 결국 이탈리아 왕국은 오토 1세 때부터 독일 왕국과 함께 신성로마제국이 되었습니다. 

 

이 동네의 역사가 이렇게 복잡해진 것은 애초에 중프랑크 왕국이 동,서 프랑크 왕국 사이에 끼인 데에다가 가운데에 알프스 산맥이 놓여 있어서 지리상 불리했던 이유도 있구요. 나라 안에 교황령이 있다보니 교황 역시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세력 다툼에서 매우 중요한 플레이어였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황제를 임명할 권한을 가진 교황은 당연히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누구를 지원할지를 결정할테니 교황령을 둘러싼 주변의 귀족들은 안그래도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더더욱 치열하게 경쟁했겠죠. 거기에 이탈리아의 각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대로 왕을 폐위시키고 새 왕을 옹립할 정도로 왕권은 계속 불안정했습니다. 

 

 

오토 대제

 

루트비히 4세를 마지막으로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독일 지역의 5개의 부족공국에서는 프랑켄 공국의 콘라트 1세를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했었죠? 콘라트 1세는 수많은 백작령들을 정리해 최대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독일의 중앙집권화를 앞당겨보려고 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과 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독일의 지방 귀족들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갖고 있었고, 독일 지역으로 노르만족과 마자르족, 슬라브족까지 정신없이 밀려들어와 약탈을 일삼자 이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부족공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이는 분명 콘라트 1세의 의도와는 반대 방향으로의 움직임이었죠. 

 

콘라트 1세는 카롤링거 왕조 이후의 첫번째 군주로써 별다른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자신의 동생에게 왕위 계승을 포기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떴습니다. 아직 왕권이 강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족공국의 견제를 받으며 무리하게 왕위를 차지하려고 하다가 또 다시 동프랑크 왕국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재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을 것입니다. 독일에서 왕권이 얼마나 미약했는지, 지방분권적인 성격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싶네요. 

 

918년, 콘라트 1세가 사망하자 부족공국들은 그의 치세 내내 가장 강력한 지원을 보냈던 작센 공국의 하인리히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하인리히 1세는 콘라트 1세보다는 좀 더 강력한 왕이었는데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슈바벤과 바이에른 공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독일을 계속 괴롭혀왔던 마자르족을 공격해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죠. 그리고 10세기 들어서 부쩍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한 슬라브족을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이전보다는 조금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인리히 1세는 귀족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해 왕위를 세습하기 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망하자 오토는  936년 부족공국들의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되며 오토 1세로 즉위했는데요. 하지만 역시 독일의 귀족들은 그리 순순히 자신들의 권력을 내어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인리히 1세 때에는 충성을 맹세했던 바이에른 공국이 시간이 좀 지나자 반란을 일으켰고 과거 로타링기아 지역이었던 로트링겐 공국도 프랑스 쪽에 속하기를 원하며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든거죠. 그래서 오토 1세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을 굴복시키느라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하인리히 1세보다 더욱 강력한 군주였습니다. 즉위 후 약 5년 간 내부 통합에 힘쓴 그는 955년 마자르족이 대군을 이끌고 독일을 공격해오자 각 지역의 귀족들을 규합해 아우크스부르크 근처에서 벌어진 레히펠트 전투에서 승리하며 그들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마자르족은 유럽 서쪽으로 더 진출하지 못하고 판노니아 평원 동쪽에서 헝가리 대공국을 건국했죠. 이렇게 마자르족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자 독일 각 지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부족공국들도 오토 1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한편, 이 당시 독일 남쪽의 이탈리아 왕국도 독일 못지 않은 정치적 혼란기를 겪는 중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에서 중프랑크 왕국으로 분할되고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이래로 각 지역의 귀족들이 서로 왕권에 도전하거나 새로운 왕을 옹립하며 다시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는데요. 961년, 오토 1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탈리아 왕국 내의 왕위 문제에 적극적을 개입해 일부 귀족들과 교황청을 지지를 업고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일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게 되었죠. 

 

이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좀 숨통이 트이게 된 이탈리아의 일부 귀족들과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오토 1세가 자신들의 권위를 지켜줄 새로운 수호자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은 그에게 '오토의 특권'이라는 조약을 체결했는데요. 내용인즉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세속적 권한을 보장해준다는 것이었죠.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새로운 교황의 즉위를 추인한다는 내용... 좀 묘하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옛 서로마 제국의 황제 지위를 인정해주는 게 교황인데 그 교황의 권한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보장해주고...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이 미묘한 관계는 십자군 원정 전까지 몇번이고 크고 작은 마찰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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