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색슨계와 덴마크계의 왕위 경쟁
알프레드 대왕의 치세 전까지 잉글랜드는 아직 부족국가 수준의 왕국이었습니다. 비록 데인족들은 데인로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잉글랜드 영토로 진출하기를 원했습니다. 때문에 이 당시는 앵글로색슨계와 덴마크계 간의 첨예한 왕권 경쟁이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잉글랜드의 국왕 에셀레드가 먼저 잉글랜드 내의 데인족을 공격하자 덴마크 국왕 스벤 1세가 이에 반격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스벤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는 다시 앵글로색슨계인 에셀레드 2세에게 돌아갔다가 그의 아들 에드먼드 2세가 즉위한지 반 년 만에 다시 스벤 1세의 아들 크누드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앵글로색슨계와 덴마크계가 번갈아가며 왕위를 주고받은 것입니다.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크누드는 스칸디나비아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국에 더 신경을 쓴 한편, 잉글랜드의 관습을 존중해 잉글랜드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에셀레드 2세의 왕비인 엠마 노르망디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에드워드를 두었고 에셀레드 2세의 사후 크누드 왕과 재혼해 다시 아들 하레크누드를 두었습니다. 크누드의 사후에는 하레크누드가 즉위해 잉글랜드 왕위를 계속 덴마크계가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하레크누드의 아들인 망누드는 잉글랜드 왕위가 아닌 스칸디나비아 왕위만 계승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잉글랜드의 귀족회의인 위탄게모트에서는 다시 앵글로색슨계인 에셀레드 2세와 엠마 노르망디의 아들인 에드워드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참회왕으로 불리우는 에드워드는 그의 별명처럼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립하고 빈민구제 정책을 시행하는 등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덴마크계와의 치열한 왕위다툼을 피해 어린 시절을 노르망디에서 보낸 데에다가 외가가 노르망디 왕가였기 때문에 자신의 외사촌이자 노르망디 공인 윌리엄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를 물려주기를 원했습니다. 한편, 에드워드의 즉위 당시 그를 강력히 지지했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은 한때 자신의 딸과 에드워드를 결혼시킬만큼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으나 에드워드의 왕권이 강력해지자 결국 대결 구도로 돌아섰습니다.
에드워드는 결국 후계자 없이 죽었는데 이를 틈타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가 위탄게모트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에드워드가 살아있었을 당시 그가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에 정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출발, 도버 해협을 건너 헤이스팅스에서 웨식스의 해럴드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하며 노르만 왕조를 열었고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이렇게 웨식스 왕조의 해럴드가 앵글로색슨계의 마지막 왕이 되었고 이후 영국의 왕조들은 현재까지도 모두 덴마크계인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의 발전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이동은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의 남하였습니다. 둘 다 기존의 유럽 세계를 확대 재편성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를 헝성하고 문명사적으로는 로마-게르만 문명, 즉 유럽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중세 문명은 크게 크리스트교와 봉건제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이 중 로마 제국이 게르만 문명에 남긴 유산은 크리스트교입니다. 클로비스, 샤를마뉴, 오토, 알프레드 등 서유럽의 정복군주들은 모두 크리스트교를 전파함으로써 정복지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실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동방정교에 비해 기반이 약한 로마 교황청 역시 이들의 정통성을 지원하는 것으로 교세를 확장시키고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유럽의 중세 초기 정복군주들과 로마 교황청은 서로 공생 관계에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 때와는 다르게 세속 권력은 프랑크 왕국에서 여러 왕국으로 분열 추세를 보였지만 종교 권력은 모두 로마 교황에게 있었고 교황권은 중세 초반 동안 계속해서 세속 권력을 압도했습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의 의미대로 보편 종교가 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성장으로 동방정교 역시 점차 세력 확대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 이 두 종교는 곧 경쟁하듯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동방정교는 아직 카톨릭이 전파되지 않은 동유럽 지역으로 활발하게 포교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노르만족의 남하에 밀려서 비잔티움 북부에 자리잡은 슬라브족을 상대로 포교한 결과 863년 비잔티움의 미카엘 3세는 지금의 체코 동부와 슬로바키아 지역인 모라비아 지역에 동방정교를 전파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포교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면서 로마 카톨릭은 독일의 동쪽으로 포교한 결과 폴란드를 개종시켰고 이어서 달마치아 지방의 크로아티아까지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한편 크로아티아의 바로 동쪽 세르비아에는 동방정교 전통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다른 두 종교가 전통으로 자리잡은 이 지역에는 훗날 이슬람교 역시 유입되면서 20세기에 들어서도 종교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동방정교는 10세기 후반에 들어 러시아를 개종시키면서 가장 큰 성과를 맞이했습니다. 988년 권력이 불안정했던 비잔티움의 바실리우스 2세는 키예프 대곡 블라디미르 1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고 블라디미르 1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비잔티움 제국과의 혼인을 요구했습니다. 이 때 양측의 거래가 성사되면서 키예프 공국은 동방정교로 개종했습니다. 러시아정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후 15C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하자 동방정교에서는 러시아정교가 전통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제2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을 이어 제3의 로마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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