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
봉건제는 게르만 문명 고유의 유산입니다. 물론 로마 제국 시기에 콜로나투스라는 소작제의 원형이 있었지만 게르만 사회는 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이 이전인 부족시대부터 이미 자체적인 봉건제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콜로나투스가 단지 경제적 요소에 한정된다면 중세 시대의 봉건제는 경제적 요소를 넘어 중세를 정의하는 정치 체제이기도 했습니다. 사회경제사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은 봉건제의 경제적 요소만을 강조해 봉건제를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데에 따르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로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봉건제는 중세 초기의 정치적인 동인에 의해 발생했으며 중세적 봉건제가 유지되는 내내 이러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봉건제는 군주가 가신들에게 충성을 대가로 지급하는 봉토를 기반으로 하며, 직접적인 기원은 종사제와 은대지제로 나뉠 수 있습니다. 종사제는 군주와 가신 간의 일종의 주종관계로 동양의 군신관계와는 다르게 서로에게 의무를 지는 관계였습니다. 가신은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군주는 가신을 보호할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적 전통의 피호관계와도 비슷하지만 로마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역을 정복하기 전부터 이미 이 지역에 존재하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생존이 힘들었던 고대에는 단순히 보호만으로 가신의 충성을 살 수 있었지만 사회가 발달하자 종사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은대지제가 도입되었습니다.
은대지는 군주가 가신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대여해주는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은대지가 봉토로 바뀌면서 봉건제로 발전했습니다. 은대지는 일회적인 성격의 빌려주는 땅이었지만 봉토는 토지의 소유권을 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단기적인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에는 은대지만으로도 가신들의 충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지만 나라를 세우고 영구적으로 운영하려면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충성이 필요해졌습니다. 따라서 군주가 가신에게 주는 땅 역시 장기적이고 항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군주는 토지를 가신들에게 사실상 영구히 봉토로 넘겼습니다. 봉토는 가신들의 집안에 대대로 세습되고 주로 게르만적 전통을 따라 장자에게 상속되었습니다.
영주의 권한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초기에는 은대지에 대한 대가로 상급영주에게 이용료로 세금을 냈지만 이후 은대지가 봉토로 바뀌면서 이러한 관습은 없어지고 대신 영주들은 광범위한 자치권인 불입권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상급영주라 하더라도 하급영주 봉토 내에서는 하급영주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침해할 수 없었습니다.
봉건 영주들은 장원이라고 하는 자신의 영내에 농민, 즉 농노를 소유했고 이들을 이용해 자급자족의 경제를 꾸림으로서 자치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영주는 성 안에 살면서 성 밖의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받았고 장원 내의 방앗간, 대장간, 양조장 등의 공동시설을 소유해 이에 대한 사용료도 받았습니다. 자신의 장원 내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경제적 자립, 나아가서는 정치적 자립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장원들 간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장원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러한 폐쇄성은 중세 내내 장기적인 경제발전의 침체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한편, 영주가 자신의 장원을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군사력이었습니다. 영주는 자신의 장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상급영주의 충성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장원 내에 사병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그 사병 조직에서 장교의 위치를 담당한 것이 바로 기사였습니다. 기사는 신분상 귀족의 바로 아래에 위치했지만 평기사가 아닌 귀족자제들도 아버지의 상급영주의 영지로 가서 각종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은 뒤 성인이 되면 기사 서임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훗날 기사도로 불리는 예절과 덕목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상급영주일수록 많은 기사를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기사들 중 장남은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차남 이하의 기사들은 계속해서 상급영주를 섬겼습니다. 상급영주들은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업무를 주고 이를 수행하면 봉급을 지급했습니다. 전쟁이 없는 때에는 군사훈련이나 마상시합 등으로 이들을 부양할 수 있었지만 이는 매우 한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영주들은 하급영주들이 반발의 기색이 보이면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고 기사들로 하여금 임무를 부여하고 이에 성공하면 전리품도 챙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장원 내에서 직접적인 생산활동을 도맡아 했던 농노들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영주가 모든 것을 장원 안에서 자급자족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농노들이 부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농노들은 무거운 각종 세금과 이용료를 내야했고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동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농노들은 ‘뿔 없는 소’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말하는 짐승’으로 불리운 고대 로마 시대의 노예에 비해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서양의 봉건제는 동양의 봉건제와 크게 달랐습니다. 우선, 중국의 황제들은 서양의 군주들에 비해 훨씬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중국의 황제들은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통치했고 변방의 왕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중앙정부가 그것을 진압하거나 그럴 능력이 없으면 아예 새 제국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봉건제는 그에 비해 훨씬 수평적이었습니다. 상급영주가 하급영주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을뿐더러 장원 내에서도 서양의 농노들은 동양의 노비와는 달리 영주의 소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프랑크 왕국 이후 제국이라는 정치적 중심이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서유럽의 군주들은 계약에 따른 권력기반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느슨하고 불명확한 부분이 존재하기도 했으며, 오늘날의 유럽국가들과는 매우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왕은 존재했지만 이는 가장 높은 상급영주라는 의미에 불과했고, 자신의 나라 전역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영주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따라서 왕국 안에 포함되는 영주들도 자신의 나라에 대한 큰 소속감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봉건제가 만들어낸 국제질서는 훨씬 분권적이었으며 이는 중세가 끝난 시점에 이르러서는 다양하고 복잡한 국제질서를 만들어냈습니다.
다만 이와는 다르게 교회 권력은 중앙집권적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각 교구의 대주교와 주교들이 서열에 맞게 편제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공식적으로 세속 권력을 겸할 수 없었고 따라서 교황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로마 교황의 권력이 가장 강력했던 곳이었고 교황이 세속적 질서에 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유럽 전체로 봤을 때에는 유럽 세계의 중심이 되기는커녕 독일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훗날 프랑스나 영국이 민족의식을 키우며 국민국가로 발돋움하는 동안에도 발전을 이루지 못해 독일 통일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한편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을 통해 서유럽의 세속적 질서에 개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십자군 전쟁에 이르러 가장 큰 결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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