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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십자군 원정

2차 원정

 

1차 원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 새로운 십자군 국가들이 건설되었다는 소식은 곧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유럽인들이 그 나라들로 이주하기 위해 유럽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죠. 한편, 새로운 나라를 수립한 군주들의 입장에서도 역시 정착할 인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했습니다. 문제는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슬람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거였죠. 군대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 여정을 탈 없이 마치는 것은 상당한 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십자군 지도자들이 세운 국가들은 예루살렘과 그곳으로 가는 길목을 겨우 차지했을 뿐 주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되돌아보면 이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국가를 세운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요. 주변 지역에서는 여전히 셀주크투르크의 군대가 나타나 십자군 국가들을 공격하거나 예루살렘으로 드나드는 순례객들을 습격하는 일이 잦았고, 이 지역 주변을 떠도는 유목민 도적단들 역시 십자군 국가들과 순례객들에게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분열 상태였던 이슬람 세계에서도 뭔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아 지역의 태수였던 이마드 앗 딘 장기라는 걸출한 인물이 여기저기 흩어진 이슬람 세력들을 조금씩 규합해 나가며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입니다. 이 새로운 왕조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딴 장기 왕조. 이슬람 세계의 분열에 적지 않은 덕을 보고 있었던 십자군 국가들은 이 상황에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기는 1144년 가장 먼저 세워진 십자군 국가인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에데사 백국은 4대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요. 하필이면 당시는 이 네 십자군 국가들의 결속력이 상당히 느슨해졌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장기의 공격에 성을 지켜내기 위해 분전했지만 결국은 함락당했습니다. 십자군 국가들 중 하나가 다시 이슬람 세력의 손에 들어가고 만 것이죠. 이 소식을 들은 유럽인들은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겠죠? 유럽의 왕들은 이제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성지를 지키기 위한 성전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2차 원정을 위해서 곧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콘라트 3세가 주축이 되어 많은 귀족들이 참가하는 대규모의 원정대가 꾸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앞에는 험난한 원정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죠. 일단 이 둘은 모두 1차 원정 때처럼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함께 온 것이 아니고 따로 와서 따로 갑니다... 먼저 도착한 쪽은 콘라트 3세였는데요. 그는 루이 7세를 기다렸다가 함께 출발하자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슬람 세력권으로 진입했다가 룸 술탄국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니케아로 도망쳤습니다. 이미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죠. 

 

한편,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왕비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한달 늦게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서 바로 콘라트 3세가 기다리고 있는 니케아로 향했습니다. 근데 막상 가보니 2만명 정도 된다던 신성로마제국의 병력은 10 분의 1 토막이 나 있고... 어쨌든 이 두 나라의 군대는 곧 가장 가까운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룸 술탄국의 게릴라군에 의해서 여러 차례 습격을 당하고나니 천신만고 끝에 안티오키아 공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루이 7세 역시 병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원정대는 위기를 맞고 있었죠.  

 

2차 원정군이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는 루이 7세의 왕비인 엘레오노르의 삼촌인 레몽 백작이 이들을 맞이했습니다. 이 레몽 백작은 트리폴리 백국을 세우려다 죽은 툴루즈의 레몽이 아닙니다. 전 처음에 같은 사람인줄... 삼촌인 레몽 백작은 조카인 엘레오노르를 매우 환대했는데요. 너무 크게 환대를 한 건지 두 사람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었죠. 당연히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까지 와서 왜 이럴까요. 

 

사실  2차 원정은 1차 원정 때와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일단 이슬람 세계는 이제 십자군을 한번 경험해본 상태였고, 따라서 전투에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반면에, 2차 원정군은 아직 남아있는 십자군 국가들에 주둔하던 1차 원정군과 의견 충돌로 내부적으로 단합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레몽 백작은 루이 7세에게 지금 당장 이슬람 세력의 방어가 취약해진 알레포를 공격하자고 했지만 루이 7세는 원래는 없었던 그 계획에 반대했죠. 원래의 계획은 함락된 에데사 백국을 다시 탈환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루이 7세가 에데사 백국의 탈환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병력이 얼마 남지 않았던 이들 원정대에게 유럽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자 이들은 에데사 백국도, 알레포도 아닌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했죠. 본래 다마스쿠스는 전통적으로 장기 왕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십자군 국가들과는 협력관계였는데 말이에요. 이들이 갑자기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한 건, 다마스쿠스의 태수가 장기의 아들인 누르 앗 딘을 사위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다마스쿠스와의 관계를 개선해보려는 노력 대신에 공격을 선택했습니다.

 

1148년, 마침대 원정대는 무모하게 다마스쿠스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한 패배. 이들은 나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다마스쿠스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고, 군사는 잃고... 그렇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콘라트 3세는 콘스탄티노플로, 루이 7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루이 7세는 거기서 엘레오노르와는 이혼도 했으니, 그에게는 정말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최악의 전쟁이었죠.

 

한편, 장기 왕조의 두번째 술탄으로 즉위한  누르 앗 딘은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뒤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까지 장악하며 세력을 넓혔고, 반면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은 더더욱 장기 왕조의 군대에게 포위되며 고립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2차 원정군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했던 게 오히려 분열 상태였던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꼴이 되어버린 거죠. 

 

에데사 백국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그나마 우방이었던 다마스쿠스도 잃었으니, 십자군 국가들의 상황은 2차 원정 전보다 오히려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 자신의 측근을 파견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 때 파티마 왕조의 지배계층 사이에서 불화가 생깁니다. 본래 파티마 왕조의 집권 계층과 누르 앗 딘이 파견한 고위 관리가 마찰을 빚은 건데요.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이를 고립 상황을 타개할 기회로 보고 이집트를 정벌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면 타당한 것 같지만 예루살렘 왕국에게 그럴만한 충분한 자원이 있을지...

 

초반의 원정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1167년, 예루살렘 왕국은 파티마 왕조의 내분을 이용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카이로 근처에도 군대를 주둔시키며 파티마 왕조를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는 듯 싶었습니다. 근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파티마 왕조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생각으로 카이로를 공격했다가 함락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죠. 때 맞춰 누르 앗 딘이 보낸 지원군이 카이로에 도착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혔고 결국 예루살렘의 원정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히 가만히 있던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점령에 실패했으니 이집트에 대한 막대한 금액의 피해보상도 당연히 해주어야 했겠죠?

 

예루살렘 왕국이 물러난 뒤 파티마 왕조의 내분은 누르 앗 딘이 보낸 사령관 시르쿠가 권력을 장악하며 마무리되었지만 그는 얼마 안가 죽고 그 자리는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차지했는데요. 그가 바로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서유럽의 막강한 군주들을 상대로 싸웠던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입니다. 그는 본국인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이 죽자 그가 통치하던 시리아 지역까지 장악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며 세력을 크게 넓혔습니다. 이제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그가 차지하게 된 거죠. 거기에 서유럽 세계가 동로마 제국과의 사이가 멀어진 틈을 타 동로마 제국과도 평화 협정을 맺자 예루살렘 왕국은 이제 정말로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가 내분을 끝내고 통합의 시대로 접어들던 이 때, 예루살렘 왕국은 이제 내분이 시작되었습니다. '문둥이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4세에게 후사가 없자 후계를 두고 다툼이 벌어진 것인데요. 왕국 내의 권력자들이 다툼을 벌이던 이 상황을 주목하던 살라딘은 보두앵 4세의 매부인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의 왕권을 차지하자 그 반대파인 트리폴리의 백작이자 예루살렘의 섭정, 레몽 3세의 지원 요청을 얼른 받아들였습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죠? 같은 카톨릭 세력들 간의 다툼에 살라딘이 어느 한 쪽을 도와주고 있는 게요. 

 

예루살렘의 왕권 경쟁에서 밀려난 귀족들은 이제 그 주변을 약탈하며 스스로를 그 지역의 군주로 자체했습니다. 그러자 살라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죠. 살라딘과 손을 잡았던 레몽 3세도 다시 카톨릭 세력으로 되돌아갔지만 때는 이미 살라딘이 이들을 공격할 명분으로 마련하고 난 뒤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나름 가용한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살라딘의 군대에 대비했지만 이들은 갈릴리 근처의 하틴 언덕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인 기 드 뤼지냥이 생포되고 텅텅 빈 예루살렘 왕국의 도시들은 모두 살라딘의 손에 들어갔죠. 

 

남은 것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이미 다른 도시들을 거의 잃고 병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예루살렘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항복 밖에 없었겠죠? 예루살렘은 성 안의 주민들을 모두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항복을 하고, 1187년, 마침내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이제 십자군 국가는 또 하나 줄어서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만이 남았네요.  

  

 

3차 원정

 

에데사 백국의 함락이 유럽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 생각해보면, 성지인 예루살렘을 수호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이 그들에게  얼마나 재앙 같은 일이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번에도 각국의 군주들이 총출동하면서 2차 원정 당시보다 더 큰 규모의 원정대가 꾸려졌는데요. 일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백전 노장인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참전을 약속했구요. 카페 왕조를 안정시킨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 그리고 플랜태저넷 왕조의 개창자인 잉글랜드의 헨리 2세도 참전하기로 했습니다. 

 

제일 먼저 출발한 것은 1189년 독일을 출발해 동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을 프리패스로 통과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였습니다. 그는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했지만 아르메니아 왕국에 이르러 강을 건너던 중 급작스럽게 익사했습니다. 연로한 나이에 갑자기 찬물에 들어가서 그런 거라는 얘기도 있고, 갑옷이 무거워서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죠. 갑자기 지도자를 잃은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결국 상당수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네요.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도 좋지 못한 일이 생깁니다. 아들들이 각자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던 것인데요. 그러지 않아도 잉글랜드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있었는데 아들들과의 불화가 겹치자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다 막내 아들인 존에게 영토의 일부를 상속하게 하겠다는 자신의 결정에 반발한 셋째 아들, 리차드의 공격에 시달리며 병세가 악화되었죠. 결국 이 일로 헨리 2세는 병사하고 잉글랜드의 왕위는 사자의 마음을 지닌, 리처드 1세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잉글랜드 국가대표도 리차드 1세로 교체되었구요.  

 

이렇게 해서 1190년,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십자군이 각각 출발했습니다. 2차 원정에서 콘라트 3세와 루이 7세가 육로를 이용해 예루살렘까지 이동했던 것과는 달리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해로로 이동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리처드 1세는 함대가 일부 난파되어 키프로스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키프로스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었지만 총독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상태였습니다. 리처드 1세는 이들을 손쉽게 제압하고 키프로스를 차지했죠.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습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곧 트리폴리 백국과 예루살렘 왕국 사이의 카톨릭 도시인 티레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고 살라딘에게 사로잡혔던 기 드 뤼지냥이 이곳으로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은 티레와 가까운 또 다른 항구도시 아크레를 공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지만 먼 길을 온 탓인지 두 왕은 건강이 급격이 악화되었습니다. 아크레 공략은 성공적으로 끝나서 이들은 일단 하나의 도시를 더 차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필리프 2세는 건강을 핑계로 원정에서 발을 빼고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공표했습니다. 이제 원정군은 리처드 1세가 이끌게 되었죠.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다음 목표는 지중해의 동해안을 타고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보이는 항구도시 야파였습니다. 이미 살라딘이 서쪽의 내륙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와중에 내륙으로 살짝 들어가 있는 예루살람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중해의 동해안 도시들을 하나씩 차지하면서 최대한 예루살렘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일 테니까요. 두 지도자가 서로를 견제하며 군대를 이끌던 때와 다르게 리처드 1세가 혼자 통솔하는 십자군은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일사불란해진 상태였죠. 결국 그의 군대는 살라딘의 군대를 제압하고 야파를 차지했습니다. 

 

상황이 리처드 1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곧 양측의 계산도 복잡했습니다. 리처드 1세는 더 남쪽에 있는 또 다른 항구도시 아슈켈론을 공격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전 배후를 더 확실히 하는 방법도 고려했지만 이제 살라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옅어진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곧장 진군할 것을 더 원했죠. 한편, 굳이 물리적인 충돌 없이 이 쯤에서 협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리처드 1세를 제외한 다른 귀족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리처드 1세가 다른 선택을 한다면 이들은 십자군에서 이탈해 회군하겠다고까지 협박했죠. 하지만 이들의 말대로 예루살렘을 차지한다 한들 내륙의 그 많은 지역들이 다 살라딘의 손 안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상황은 예루살렘 왕국이 함락되기 직전의 고립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죠. 거기에 유럽에서는 리처드 1세가 부재중인 동안 동생인 존과 먼저 돌아간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가 결탁해 리처드 1세의 영토를 공략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192년, 양측은 평화 협정에 들어갔습니다. 살라딘은 리처드 1세가 차지한 도시들을 그대로 두는 한편, 카톨릭 국가에서 오는 순례객들의 예루살렘 방문을 허용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일단 카톨릭 세력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 근처에까지 카톨릭 도시들을 만들어 놓았으니 원정에서 얻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성지순례 자체는 십자군 원정이 있기 전에도 허용되던 일이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굳이 유럽에서 오는 순례객들을 막을 필요가 없었죠.  

 

결국 리처드 1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상황은 여기에서 더 개선되지 못하고 리처드 1세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중간에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 생포되어 엄청난 몸값을 내고 나서야 석방되었구요. 그렇게 해서 다시 먼길을 지나 잉글랜드로 돌아와보니... 동생인 존은 반란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영토 분쟁을 일으켜 그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 단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서로 뒤통수를 치고 있었으니, 애초에 원정이 쉽지 않았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요?

 

살라흐 앗딘의 초상화
살라흐 앗 딘, 일명 살라딘의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알 자지리의 저서 <기발한 기계짱치에 대한 지식의 책>의 폴리오 일부, 1354 (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

 

 

4차 원정

 

3차 원정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세력은 근거지를 아크레로 옮기고 겨우 도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들도 세력이 크게 줄어들어 있었죠. 그런데 이런 사정이 유럽 세계에 큰 주목을 일으켜 다시 성지 탈환 여론이 들끓었나...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벌써 앞의 두 차례 원정이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난 데에다가 피해가 막대했으니까요. 거기에 당시는 유럽 내부의 국제 정치 상황이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터라 이들은 더 이상 유럽 밖의 일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1198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교황으로 즉위한 인노첸시오 3세가  다시 한번 성지 탈환 문제를 꺼냈습니다. 

 

그럼, 교황의 부름을 받아들여 십자군에 지원한 이들은 누굴까요? 유럽의 정치적 상황이 어지러운 이 때에 각국의 군주들은 모두 원정을 고사했으니 흔쾌히 원정에 지원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노첸시오 3세는 부지런히 원정군을 모집한 결과 영주와 기사들을 비롯해 35000 명 규모의 병력을 모았습니다. 전보다 약간 줄어든 규모였지만 상황을 고려하면 상당한 성과였죠.  

 

이제 원정도 벌써 네번째이니 십자군에게는 원정에 필요한 상당한 데이터가 쌓여있는 상태였습니다. 일단 이들은 예루살렘만 달랑 탈환한다고 해서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동쪽 시리아 지역, 양쪽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세력권 안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양쪽 중 한쪽은 제거해야 예루살렘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거였죠. 그래서 이들은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 쪽 영토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럼 거기까진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네요. 당연히 여러 국가를 지나야 하는 육로보다는 해로로 한번에 가는 게 안전하긴 합니다. 푹풍우에 의해 난파될 위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요. 문제는 원정군을 태울 만큼 대규모의 함선이 없다는 거였죠. 십자군은 당대 최대의 해상 무역 국가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접촉했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비용과 점령지 일부를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이들로부터 함선과 선원을 공급받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원정을 위한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는 와중에 가장 중요한, 베네치아 공화국에 치러야 하는 함선과 선원 대금은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마련해야 하는 대금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들인 영국이나 프랑스의 4-5년치 세입에 해당되는 엄청난 금액이었는데요. 당시까지 준비된 금액은 전체 대금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본업을 접고 십자군 원정을 지원하는 데에 국가적 총력을 다하는 상황에서 자칫 원정이 좌초되면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죠. 

 

이렇게 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십자군에게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로 자신들의 경쟁 상업 도시인 헝가리령 자라를 습격해서 부족한 자금을 약탈해보라는 것이었죠. 자라는 현재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자다르인데요. 베네치아 공화국과는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둔, 멀지 않은 이웃 도시였습니다. 이들은 분명 베네치아의 강력한 경쟁자이긴 했지만 동시에 카톨릭 국가였죠. 놀랍게도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라로 출발했습니다. 교황의 부름으로 시작된 성전이었지만 이제 원정군은 교황의 통제를 벗어나 베네치아의 용병이 되어가고 있었죠.   

 

결국 1202년, 자라를 함락시킨 십자군은 도시 전체를 마음대로 약탈했습니다. 날벼락을 맞은 자라는 교황청에 이 사실을 호소했고, 소식을 전해들은 인노첸시오 3세는 분노를 표하며 십자군과 베네치아를 파문했지만, 그들의 다음 행보는 더 놀라웠습니다. 바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것이었죠.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사키오스 2세가 폐위되고 동생인 알렉시오스 3세가 즉위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가 십자군 지도부를 찾아와 삼촌인 알렉시오스 3세를 폐위시키고 정당한 후계자인 자신을 즉위시켜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물론 그 요청에는 어마어마한 대가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그래도 자금이 부족했던 십자군은 알렉시오스가 도움의 대가로 제공하기로 한 엄청난 금액에 혹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1203년 자라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로 진격을 시작했죠. 한편, 그의 요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입장에서도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에 우호적인 인물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면 그들의 해상 활동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될테니까요. 그래서 결국 이 말도 안되는 원정에 베네치아 공화국 또한 원정군을 꾸려서 참여하기로 합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의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플을 두고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전투는 격렬하게 흘렀습니다. 십자군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고 그 동안의 경험으로 공성 능력도 탁월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그저 뛰어난 전투력만으로 공략할 수 있는 성이 아니었죠. 성은 그렇게 함락되지 않고 버텼지만... 예상치 못하게 성 안의 민심이 알렉시오스 3세에게서 급격히 돌아서면서 주민들은 이사키오스 2세와 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를 제위에 올렸습니다. 알렉시오스 3세는 급하게 도시를 빠져나갔고, 애초에 십자군이 정한 목표가 달성되자 십자군은 일단 공격을 멈추었죠.  

 

알렉시오스는 이제 알렉시오스 4세가 되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막상 제위를 다시 찾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와 보니 십자군에게 약속했던 사례를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였죠. 돈이 없었거든요... 혼란한 와중에 도시 밖으로 도망친 알렉시오스 3세가 대부분의 황실 재산을 가져가 버렸고, 그 자금으로 다른 도시들을 포섭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 안에 들어와 있는 십자군은 성 안의 주민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는데요. 처음에는 사소한 말다툼이나 몸싸움이었지만 얼마 안가 곧 심각한 방화와 학살로 번졌습니다.  

 

이 와중에 알렉시오스 4세의 측근이었던 알렉시오스 두카스가 갑자기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알렉시오스 5세로 즉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로마 제국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친 알렉시오스 3세와 십자군에 의해 왕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4세, 그리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그의 측근 알렉시오스 5세가 동시에 황제로 존재하는 상황이 된 거죠. 이사키오스 2세는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긴 했으니 황제가 4명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요.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을 쫒아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성 안을 정비하고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와 최후의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협상은 당연히 결렬로 끝났습니다. 사실 단돌로의 입장에서는 이제 더는 협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만한 게 없었죠. 사례금을 받을 길도 없고 베네치아에 우호적인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4세는 그 사이 제거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렸다면 십자군을 동원해 콘스탄티노플을 그대로 차지해버리는 게 가장 좋은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고 십자군은 곧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살인과 방화, 약탈이 도시 전체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졌죠. 알렉시오스 5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했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원정이 끝난 뒤

 

4차 십자군 원정은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황당한 일이었죠. 원래 계획했던 이집트 쪽으로는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으니까요. 십자군 원정은 그 뒤로도 네 차례나 더 이어졌지만 그 원정들도 모두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아이유브 왕조가 성지 순례를 허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지를 탈환해야 한다는 교황의 주장에 이제 더는 힘이 실리지 않았고, 앞선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원정을 감행한다 한들, 실익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으니 유럽 각국의 군주들과 귀족들도 이제는 원정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죠. 

 

한편,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함락되자 동로마 제국을 비롯한 그 일대 지역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단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자신들이 차지한 영토를 각각 나누어 가졌는데요. 십자군 지도자들은 그 곳에 라틴 제국을 비롯해 테살로니카 왕국과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을 세우고 각각 군주가 되었습니다. 마치 1차 원정이 끝나고 4개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던 거랑 비슷한 상황이죠. 가장 구심점이 되는 라틴 제국의 제위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가 차지하며 보두앵 1세로 즉위했습니다. 

 

동로마 제국도 나라 전체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 남아있던 황족들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며 나라를 세웠는데요. 제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니케아 제국을 비롯해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공국이 그런 나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국가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서 조금씩 국력을 키워나가다가 마침내 니케아 제국을 중심으로 뭉쳐서 다시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명분 뒤에 서유럽 군주와 귀족, 기사, 농민 등 각 계층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요. 유럽 세계가 이토록 분권적인 사회가 아닌, 적어도 동로마 제국 수준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상태였다면 아마도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의 소모적인 경쟁이나 중상모략은 좀 덜 했을테니까요. 다만, 우르바노 2세의 연설에서 시작되어 무려 200년을 끌어온 십자군 원정은 교황의 생각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서유럽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일단, 원정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제 유럽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비해 그리 열세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들어서자 지중해 제해권은 이제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 차지하게 되었죠. 이전까지 동부 지중해는 동로마 제국에 면해 있었지만 해상무역의 비중이 낮은 동로마 제국을 대신해 지중해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상 이슬람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4차 원정을 계기로 지중해가 베네치아 상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들은 지중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원동력을 얻었습니다.

한편, 원정을 기획했던 교황청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차 원정 당시에는 원정을 처음 주도할 정도로 강성했던 교황권은 원정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손상되었죠. 이는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이 갑자기 추락했다고 보기 보다는 원정이 가져온 시대적 변화가 교황권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황권의 약화는 곧 유럽 세계에서 교회가 가졌던 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중세 내내 분권화되어있던 세속 권력을 대신해 유럽 세계를 하나로 통합해온 구심점이 약화되면서 유럽 각국은 이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오늘날 유럽 국가들로의 원형을 더욱 발전시켜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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