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원정
1차 원정이 성공하고 성지에 새로운 카톨릭 왕국이 건설되자 많은 유럽인들이 이주하기 위해 성지로 모여들었습니다. 왕국을 수립한 군주들도 역시 새 왕국에 정착할 인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성지로 향하는 여정에는 이슬람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주 행렬은 종종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리아 태수 이마드 앗딘 장기는 흩어진 이슬람 세력을 모아 장기 왕조를 수립하여 셀주크 투르크의 토후국이 되고 시리아와 에데사를 탈환했습니다. 이 소식이 서유럽 군주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2차 원정군을 조직했습니다.
2차 원정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독일 황제 콘라트 3세가 주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차 원정 때와는 달리 이슬람군 역시 전투에 대비한 상태였고 2차 원정군은 십자군 왕국에 주둔하던 1차 원정군과 의견충돌로 내부적으로 단합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원정군은 무모하게 다마스쿠스를 공격했다가 패배해 빼앗겼습니다. 이마드 앗딘의 아들이자 장기 왕조의 두번째 왕 누르 앗딘 장기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뒤 이집트까지 장악했고, 예루살렘을 비롯해 시리아와 이집트까지 이슬람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이 때 등장해 원정군을 맞은 살라흐 앗딘은 공세로 전환해 지하드를 선언하고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하틴으로 진격했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기 드 뤼지냥은 살라흐 앗딘의 이슬람군을 갈릴리 언덕 평원에서 맞았습니다. 유럽의 병력은 중장기병인데에 비해 살라흐 앗딘의 병사들은 경무장의 궁기병이었으므로 공성전이 아닌 평원에서의 회전에서는 당연히 기동력이 뛰어난 이슬람군이 유리했습니다. 하틴 전투에서 살라흐 앗딘은 크게 승리하고 십자군의 2차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3차 원정
이제 이슬람군이 전력을 다해 원정군에 대응할 것이 예상되자 서유럽 세계는 3차 원정군을 조직했습니다. 1189년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등 당대 유럽 강대국의 군주들이 3차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선발대인 독일군은 소아시아에서 이슬람군에 패배하면서 프리드리히 1세가 전사했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진군을 계속해 아크레와 야파를 탈환했지만 둘 사이의 불화로 필리프는 원정 도중 회군해버렸습니다. 혼자 싸우는 처지가 된 리처드 1세는 살라흐 앗딘과 협상하여 카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허용해줄 것을 약속받고 물러났습니다. 사실, 살라흐 앗딘은 원래부터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금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리차드 1세의 후퇴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3차 원정은 오히려 서유럽 세계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리처드 1세는 귀국 길에 독일의 새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그 틈을 타 프랑스왕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를 기습했습니다. 영국 내에서는 존 1세가 포로로 잡힌 리처드 1세의 왕위를 찬탈하고 프랑스를 공격했다가 귀족들의 반발을 사며 대헌장이 공표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와의 대결인 십자군 원정 도중 외부의 적과 싸우지 위해 단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 세계 내부의 모순이 드러났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원정인 3차 원정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무리되었습니다.
4차 원정
3차 원정 이후 십자군은 원정 당시 군대의 보급을 대행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게 비용을 정산하지 못해 그 대가로 베네치아의 용병 처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해상권을 노리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비잔티움 제국이었는데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조직된 십자군이 오히려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인 비잔티움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4차 원정군은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도시 안에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원정이 끝난 뒤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명분 뒤에 서유럽 군주와 귀족, 기사, 농민등 각 계층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서유럽 세계가 이토록 분권적인 사회가 아닌, 비잔티움 제국 수준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상태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 있습니다. 다만, 교황권의 강화를 위해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에서 시작되어 무려 200년을 끌어온 십자군 원정은 이후의 서유럽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비록 원정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제 서유럽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비해 그리 열세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들어서자 지중해 제해권은 이제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동부 지중해는 비잔티움 제국에 면해 있었지만 해상무역의 비중이 낮은 비잔티움 제국을 대신해 지중해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상 이슬람 세계였다. 하지만 4차 원정을 계기로 지중해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들은 지중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비록 십자군 원정군이 지중해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유럽 세계의 일원인 베네치아가 지중해를 차지하면서 베네치아는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원동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원정을 기획했던 교회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차 원정 당시에는 원정을 처음 주도할 정도로 강성했던 교황권은 원정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이는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이 갑자기 추락했다고 보기보다는 원정이 가져온 시대적 변화가 교황권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교황권의 약화는 곧 서유럽 세계에서 교회가 가졌던 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중세 내내 분권화되어있던 세속 권력을 대신해 서유럽 세계를 하나로 통합해온 구심점이 약화되면서 각국은 이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오늘날 유럽 국가들로의 원형을 더욱 발전시켜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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