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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국민국가의 원형

레콩키스타와 에스파냐의 등장

1차 십자군의 원정소식은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도 전해졌습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이베리아 반도에는 서고트족이 왕국을 건설했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후, 피레네 산맥 이남 지역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의 공격을 받았고 9세기부터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칼 마르텔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을 코르도바까지 몰아낸 이후 에스파냐인들은 북쪽 끝 산악지대의 아스투리아스를 시작으로 조금씩 왕국들을 세우며 안정시켰습니다. 이후 아스투리아스는 레온으로 확대되었고 레온에서 카스티야가 분리되었습니다. 샤를마뉴 대제가 설치한 에스파냐 변경주는 10세기부터 나바라 왕국으로 독립했습니다. 나바라 왕국에서 분리된 바스크인들은 아라곤을 건설했고 동부의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이베리아반도 북부에는 다섯 개의 왕국, 남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자리잡았습니다.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 과정을 나타낸 지도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 과정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기 전, 이베리아 반도의 다섯 왕국은 코르도바 식민지정부에서 발생한 내란을 계기로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에 돌입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항해온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에게 전해진 1차 십자군 원정의 승리는 이들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카스티야는 레온을 병합해 중부 마드리드를 차지했고 아라곤은 바르셀로나를 병합했습니다. 카스티야의 일부는 분리되어 남쪽으로 이동해 포르투갈 왕국을 세웠습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경쟁하듯 레콩키스타에 주력해 13세기 후반 십자군 원정이 끝날 즈음에는 코르도바, 세비야, 발렌시아 등 이슬람 세력 하에 놓여있었던 도시들을 모두 회복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남부 그라나다까지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은 그라나다도 15세기가 되면서 에스파냐의 영토로 회복되었습니다. 이렇게 긴 과정을 거쳐 레콩키스타가 완수되자 에스파냐는 비로소 서유럽 세계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레콩키스타를 마친 에스파냐의 왕국들은 마침내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서유럽 왕실의 복잡한 혼인관계에도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는 그동안 레콩키스타에 주력하느라 서유럽의 봉건제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치르는 동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에스파냐는 이에 대한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일찍부터 서쪽의 대서양으로의 진출을 모색했고 곧 대항해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르만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

윌리엄 1세

앵글로색슨계 왕조인 웨식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영국을 차지해 노르만 왕조를 연 노르망디의 윌리엄 1세는 원주민인 앵글로색슨족의 관습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별로 크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왕권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논공행상이 필요했고 그는 이 과정을 대륙의 봉건제적 방식으로 풀어나갔습니다. 윌리엄 1세는 가신들에게 토지와 더불어 그 토지에 속한 농민들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봉토와 농노를 하사한 것입니다. 이는 봉건제의 시작으로, 영국 역시 중세 서유럽 국가들이 가졌던 봉건제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봉건제는 자연스럽게 시작된 프랑스의 봉건제와 달리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조의 개창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자리잡은 프랑스의 경우에는, 봉건제 내에서 영주들 간의 서열이 거의 비슷했고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영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왕의 권한도 다른 영주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왕은 이와 다르게 훨씬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고 넓은 직할지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대륙과 비교해 크지 않은 나라였지만 국왕의 권력을 비교했을 때에는 다른 서유럽 군주들에 비해 훨씬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봉건제가 도입되면서 위탄게모트는 폐지되고 왕위 세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윌리엄 1세는 곧 전국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전국의 사법, 행정을 관장했습니다. 봉건제가 도입되면서 영국의 중앙집권적 성격은 다른 어느 국가에서보다도 더욱 강해졌습니다.

헨리 1세

윌리엄 1세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가 차지한 땅을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1세의 아들 헨리 1세는 노르망디 지역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 위해 딸인 마틸드를, 당시 세력이 커지고 있었던 프랑스 서부의 앙주 백작 조프루아와 결혼하게 했습니다. 마틸드는 이미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와 혼인했다가 미망인이 된 상태였습니다. 한편 앙주 가문은 10세기부터 노르망디 남부를 소유했는데 12세기에는 프랑스의 유력 가문으로 상장한 상태였습니다. 조프루아 백작과 마틸드와의 혼인으로 앙주 가문은 노르망디 전체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븐

헨리 1세의 사후 조카인 스티븐이 왕위를 이어받지만 다시 미망인이 된 마틸드는 앙주 가문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의 군사력은 영국이 노르망디를 압도했지만 노르망디는 영국의 본국이었으므로 마틸드를 적대시하는 것을 꺼렸던 영국의 귀족들은 결국 스티븐의 왕위를 마틸드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한 런던의 시민들은 소요 사태를 일으켜 마틸드가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마틸드는 영국 왕위를 포기하고 노르망디로 돌아가고 스티븐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헨리 2세

노르망디는 이제 영국이 아닌 앙주 가문의 손으로 들어갔습니다. 영국의 노르만 왕조는 결국 스티븐 왕이 후사 없이 죽자 문을 닫게 되고 앙주 백작 조프루아와 마틸드 사이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즉위했습니다. 조프루아는 투구에 금잔화 가지를 꽂아서 플랜태저넷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헨리 2세가 즉위하면서 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후의 영국 역사는 프랑스와 더욱 밀착되어 전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