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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국민국가의 원형

노르만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들

 

윌리엄 1세

  

소아시아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서유럽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까지 서유럽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우선 영국에서부터 둘러보겠습니다. 루앙 백국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해서 노르망디 공국이 된 바이킹의 나라에서 정복자가 건너왔습니다. 윌리엄 1세는 앵글로색슨계 왕조인 웨식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잉글랜드를 차지하며 노르만 왕조를 열었지만, 원주민인 앵글로색슨족의 관습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별로 크게 관여하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왕권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논공행상에는 확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도운 신하들에게 어떻게 보상했을까요? 대륙의 봉건제적 방식으로 풀어나갔죠.

 

윌리엄 1세는 가신들에게 토지와 더불어 그 토지에 속한 농민들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봉토와 농노를 하사한 것인데요. 이로써 잉글랜드에도 드디어 대륙의 서유럽 왕국들의 최신 트렌드인 봉건제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봉건제는 자연스럽게 시작되고 정착된 프랑스의 봉건제와 달리,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조의 개창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도입된 것이었죠. 그래서 이 부분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봉건제와의 상당한 차이점을 만들게 됩니다.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자리잡은 프랑스의 경우에는 봉건제 내에서 영주들 간의 서열이 거의 비슷했고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영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왕의 권한도 다른 영주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귀족들 중 가장 높은 귀족 정도가 아니었을지... 반면에 잉글랜드의 왕은 훨씬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고 넓은 직할지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대륙과 비교해 크지 않은 나라였고, 아직 그렇게 강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나라 안에서의 왕권을 비교했을 때에는 다른 서유럽 군주들에 비해 훨씬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죠.

 

이렇게 노르만 왕조가 성립되며 봉건제가 도입되자, 귀족들간의 의사결정기구였던 위탄게모트는 자취를 감추고, 왕위 세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윌리엄 1세는 곧 전국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전국의 사법, 행정을 관장했습니다. 비록 봉건제의 도입은 서유럽보다 늦게 이루어졌지만 잉글랜드의 왕은 유럽 어느 나라의 왕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었죠. 그 전의 영지였던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를 오가며 양쪽에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그는 반란을 일으킨 첫째 아들 대신에 셋째 아들인 윌리엄 2세에게 왕위를 잇게 했습니다. 

 

 

헨리 1세

 

윌리엄 2세가 혼인을 하지 않고 후사도 없이 13년의 재위 끝에 사망하자 왕위는 동생인 헨리 1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물론 그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죠. 첫째 형인 로베르 2세가 여전히 위협적이었을테니까요. 헨리 1세는 1106년 노르망디 남쪽에서벌어진 탱슈브레 전투에서 형인 로베르 2세를 제압하며 그의 영지인 노르망디 공국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서임권 문제로 윌리엄 2세와 대립했던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 잉글랜드 내의 유력 봉건영주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죠.  

 

사실 같은 윌리엄 1세의 아들들이긴 하지만 헨리 1세는 아버지로부터 영토를 물려받지는 못했었습니다. 첫째인 로베르 2세는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공국과 멘 섬을 받았구요. 둘째 아들은 요절했지만 셋째 아들인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받았죠. 넷째 아들이었던 헨리 1세는 그저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영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즉위 초 빠르게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귀족들에게 상당 부분 권력을 양보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과세를 자제하고, 왕권을 제한하며, 교회의 신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2세에 의해 물러났던 안셀무스를 다시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죠. 

 

하지만 이렇게 왕위에 오르고 보니 윌리엄 2세가 겪었던 문제를 헨리 1세도 똑같이 겪게 되었습니다. 안셀무스 대주교가 교회 개혁을 이유로 고위성직자에 대한 임면권을 요구한 것입니다. 양측은 오랜 대립 끝에 결국 대주교가 서임권을 갖는 대신 임명된 고위성직자는 왕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는 선에서 타협을 이루고 1107년 웨스트민스터 협약을 타결했는데요. 어디선가 본듯한, 아니 볼듯한 내용입니다. 15년 뒤,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인 하안리히 5세와 교황인 갈리스토 2세 사이에서 맺어진 보름스 협약의 내용과 아주 비슷한 거 같죠?

 

이렇게 교회와의 갈등도 정리되자 이제 헨리 1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후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아들인 윌리엄을 왕세자로 정해두고, 딸인 마틸다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5세와 혼인시켰는데요. 불행하게도 윌리엄은 선박침몰사고로 죽고 사위인 하인리히 5세는 마흔도 안된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아직 20대였던 마틸다를 다시 잉글랜드로 데려와 후계자로 정했습니다. 아직까지 영국 역사에 여왕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때였죠. 강력한 군주인 헨리 1세가 재위하고 있을 때에는 귀족들도 자신들의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가 사망하고 마틸다가 왕위에 오르자 귀족들은 본격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마틸다와 스티븐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마틸다는 프랑스의 신흥 유력 귀족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재혼했습니다. 노르망디의 남부 일부를 차지한 앙주 백작령은 본래 서프랑크의 초대 국왕인 샤를 2세 때 만들어진 백작령이었는데요. 잠시 동안은 카페 왕조를 낳은 서프랑크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로베르 가문의 영지였다가 샤를 2세의 휘하에서 군공을 쌓으며 출세한 귀족 잉젤거가 개창한 잉젤거 가문에게로 넘어갔고 그 뒤에는 역시 프랑스의 유력 귀족인 블루아 가문의 가신인 샤토됭 가문으로 넘어가서 대를 이어오고 있었죠.  

 

잉젤거 가문도 샤토됭 가문도 모두 생소한 이름들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 모두 프랑스의 귀족 가문들이었고 프랑스 왕의 신하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프랑스에서도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겠죠? 한편, 갑작스럽게 마틸다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고 프랑스 귀족가문과 재혼을 하는 이 모든 상황이 잉글랜드의 귀족들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틸다에게는 스티븐이라는 사촌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1세의 외손자인데요. 어린 시절에는 외삼촌인 헨리 1세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틸다와는 가까운 사이였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헨리 1세는 생전에 그에게 마틸다를 지원해줄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지만 그가 죽고 마틸다가 왕위에 오르는 상황이 되자 스티븐도 마음이 변했습니다. 게다가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마틸다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니 그는 어쩌면 자신이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을지도요. 결국 스티븐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임을 공표했고, 마틸다와 스티븐 사이에서는 왕위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전투는 마틸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제 여왕으로 즉위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막상 대관식을 위해 런던에 들어와보니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평민들도 어딘가 민심이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는데요. 그렇게 계속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 스티븐도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공격을 시작하자 마틸다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노르망디로 건너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스티븐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지만, 내전을 치르는 동안 귀족 계층은 분열되고 국정도 동력을 잃는 바람에 스티븐의 통치는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한편, 노르망디로 건너간 마틸다는 조프루아 5세와의 사이에서 아들 헨리 2세를 낳았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위는 스티븐이 차지했지만 노르망디 공국은 아직 마틸다의 것이었죠. 이제는 앙주 백작과 결혼했으니 앙주 백작의 것이기도 하지만요. 헨리 2세의 머릿속에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을 리 없었습니다. 1153년 헨리 2세는 잉글랜드로 쳐들어왔습니다. 또 한번의 전쟁이 벌어지려는 찰나였는데요. 공교롭게도 스티븐의 아들이 급사하자... 스티븐은 전의를 잃고 자신의 후계자로 헨리 2세를 지명하는 웰링퍼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스티븐은 조약 체결 1년 뒤 사망하고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2세가 즉위하게 됩니다. 

 

 

엄청난 영토를 갖게 된 헨리 2세

 

마틸다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혼인함으로써 노르망디 전체가 잉글랜드에서 앙주 가문의 손으로 들어간 상황에서 이제 잉글랜드에서는 그 둘 사이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즉위했습니다. 스티븐이 후사 없이 죽자 노르만 왕조도 문을 닫았죠. 헨리 2세도 모계로는 노르만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긴 했지만 영국사에서는 그를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 보고 그의 왕조를 플랜태저넷 왕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조프루아 5세가 투구에 금잔화 가지를 꽂아서 플랜태저넷(Planta Genista) 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정복왕 윌리엄 때에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가 한층 더 밀착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의 관계가 더 밀접해진 건 두 나라 왕실의 결혼 문제에서였습니다. 잠시 헨리2세가 즉위하기 전의 프랑스로 가서... 당시 프랑스의 왕은 십자군 전쟁에도 참전한 적이 있던 루이 7세였습니다. 그의 왕비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인데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라고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 왕보다도 더 넓은 영지를 가졌던 아키텐 공작의 딸이었죠. 때문에 이 둘의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인 것이었습니다. 

 

아키텐 공국은 당시 노르망디 공국이나 브르타뉴 공국처럼 프랑스의 속령인 동시에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하던 공국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공작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주군인 프랑스 왕에 견줄만한 세력을 떨칠 정도로 강력한 귀족들이었죠. 아마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와 혼인할 때에도 이러한 정치적인 고려가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이 혼인 관계가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로만 유지된 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상당히 애틋했다고 하네요. 루이 7세는 십자군 원정길에도 엘레오노르 왕비와 함께 했는데요. 어쩌면 그게 문제의 시초였을지도요...

 

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프랑스군은 프랑스를 떠나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십자군 국가 중 하나였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서 에데사 백국을 탈환하거나,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이 차지한 요새인 알레포를 공격할 예정이었죠. 그런데 엘레오노르 왕비가 안티오키아의 백작 레몽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 관계인데 말이에요. 결국 이 소문은 루이 7세의 귀에도 들어가고 두 사람은 대판 싸운 채로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불화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상심한 루이 7세는 이혼을 결심합니다. 프랑스로서는 뜯어 말려야 할 일이었는데... 그렇게 두 사람은 이혼하고 재산 분할 과정에서 엘레오노르는 본래 본인의 소유였던 아키텐 공국을 돌려받았습니다. 한편, 당시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자 앙주의 백작이기도 한 헨리 2세는 프랑스 왕의 신하로서 예를 표시하기 위해 루이 7세를 알현하러 파리를 방문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프랑스의 왕들은 상당한 권력을 가진 봉건 제후들 사이에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그들과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격하게 제압하기도 하는 줄타기를 해왔는데요. 그런 봉건 영주들 사이에서 앙주 백작은 늘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쉽사리 프랑스 왕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죠. 그러는 와중에 앙주 백작인 조프루아 5세의 아들, 헨리 2세가 파리를 방문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9살 연상인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죠. 2년 뒤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왕위도 물려받았습니다.

 

결혼과 즉위로 헨리 2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손에 넣었습니다. 땅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모든 권리를 얻었으니 막강한 권력 또한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게 루이 7세의 이혼에서 시작된 것이었죠. 하지만 헨리 2세의 영토 확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틸다와 스티븐이 왕위 다툼을 벌이던 시기 크게 성장했던 스코틀랜드를 제압해 봉신으로 삼고, 웨일즈의 왕도 굴복시켰습니다. 북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영토 일부도 차지했구요. 이렇게 해서 일명 앙주 제국이라 불리우는 거대한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왕비 사이는 매우 돈독했습니다. 엘레오노르는 이미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이 있었지만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여덟 자녀를 더 두었고 이들 대부분이 유럽의 여러 왕실이나 귀족가문과 혼인해 잉글랜드의 외교적 위치를 공고히 하도록 했습니다. 왕비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해서 아키텐에서 데려온 궁중 인사들을 동원해 잉글랜드의 궁중 예법을 표준화했죠. 

 

하지만 모든 일이 다 잘되는 것만 같았던 헨리 2세의 인생에도 불행이 찾아옵니다. 근데 엄청난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왔던 것처럼 불행도 빡세게 찾아왔죠.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에게는 요절한 아들 외에 헨리, 제프리, 리처드, 존 이렇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요. 첫째인 청년왕 헨리를 후계자로 삼고 상속에 대한 문제는 일찌감치 마무리했지만 최종적인 통치권만큼은 그에게 이양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막내아들인 존을 특히 편애했는데, 평소의 불만에 더해 편애를 당한 나머지 세 아들들이 이에 반발해 결국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반란의 배후에는 왕비 엘레오노르가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9살이나 연상인 엘레오노르가 점차 헨리 2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자 결국 아들들의 반란을 부추긴 것이죠. 거기에 평소에도 헨리 2세를 미워하던 프랑스 왕 루이 7세, 스코틀랜드 왕실과 봉건 귀족들까지 반란에 힘을 보태겠다고 하자 그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반란은 금새 진압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들들을 모두 처벌할 수는 없으니 사면해주긴 했지만 얼마 안 가 이번에는 아들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죠. 

 

일찌기 리차드는  어머니 소유의 영토인 아키텐을 상속받았습니다. 타고난 무인 기질이 있었던 그는 아키텐의 귀족들을 상당히 강압적으로 다루었는데요. 그러자 귀족들은 그의 형인 청년왕 헨리, 그리고 제프리를 부추겨 리처드를 아키텐에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헨리 2세의 입장에서는 리처드가 자신의 상속지를 잃게 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귀족들이 걷잡을 수 없이 반항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사태가 심각하게 번지는 걸 걱정하고 있는 사이, 황당하게도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가 모두 요절했습니다. 반란은 크게 터지지 않았지만, 두 아들을 모두 잃어야 했던 헨리 2세에게 고통스러운 결말인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아들은 리처드와 존 둘만 남았습니다. 형인 리처드에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그리고 앙주 백작령까지 아버지의 드넓은 영토를 모두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건데요. 그런대 동생인 존이 아키텐을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들어줄 수 없는 청을 했습니다. 다른 막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키텐은 자신이 성장한 고향같은 곳인 데에다가 형제들 중 자신을 제일 아끼는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영토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노르망디나 앙주를 달라고 했으면 쉽게 떼어주었을까요? 한편, 존을 편애했던 헨리 2세는 당연히 존의 편을 들었는데요. 그러자 리처드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겠다며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리처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또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합세했습니다.  그리고 왕위가 바뀌어 필리프 2세가 즉위하자 그 역시 리처드를 돕기로 했죠. 리처드는 파죽지세로 헨리 2세를 추격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번 헨리 2세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일이 생기는데요. 그가 가장 아꼈고, 또 반란의 불씨가 되었던 막내아들인 존이 갑자기 리처드에게 항복하며 그의 편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두 아들이 합세해서 자신을 공격할 거라는 소식에 헨리 2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안은 채 1189년 투르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리처드의 세상이 왔죠.

 

 

사자의 마음? 리처드 1세

 

이렇게 플랜태저넷 왕조의 두번째 왕으로서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왕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왕이죠. 십자군 원정 영웅담의 주인공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왕위에 오르기 전 몇번이고 반란을 획책했다는 점이나 왕위에 오른 뒤 원정을 떠나느라 오래도록 내치에 소홀한 점, 그나마도 돌아오는 길에는 포로로 잡혀서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던 점 등 막상 그의 치세를 들여다보면 그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좀... 어쨌든 그의 시대도 한번 훑어보겠습니다.   

 

리처드 1세의 치세는 그의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행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미 헨리 2세와의 결혼 생활 동안에도 상당한 권력을 쥐었던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마침내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니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 리처드 1세의 넓은 영토가 그녀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죠. 어떻게 보면 중세 유럽의 여성들 중 가장 이름이 남을만한 인물이 아닐까합니다. 

 

정말로 엘레오노르는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곧 정치에 보다 깊숙히 관여하며,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리처드 1세를 대신해 실제로 나라를 통치하다시피 했습니다. 사실 나라 안에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내정을 맡고 있지 않다면 왕이 그토록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마음 놓고 참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한편, 엘레오노르가 젊은 시절 이혼한 남편인 프랑스의 루이 7세 역시 재혼을 하고 아들을 두었습니다. 필리프 2세인데요. 일찍이 리처드 1세가 마지막으로 일으킨 반란에서 그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맹세하고 지원을 얻어냈던 일이 있었죠? 아마 프랑스로서는 단지 헨리 2세에 대한 미움을 넘어서 그가 어마어마한 영토를 차지하면서 프랑스를 위협하게 될 것을 염려한 움직임이었을 거에요. 프랑스의 안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취해야 할 조치였죠.

 

그런데 정작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명예욕, 무엇보다도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원했던 그에게 '이교도들로부터 성지를 탈환한 자'라는 명예는 그가 그 무엇보다도 갈망할만한 것이었죠. 결국 그는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기사들을 모아 원정길에 오릅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2세도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로 하죠. 아마 벌써부터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3차 십자군은 트리폴리 백국 근처의 십자군 도시인 티레에서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예루살렘까지 영역을 넓혀가려고 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벌어진 아크레 전투에서 승리하며 원정이 원활하게 진행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리처드 1세와 사이가 틀어진 필리프 2세가 건강상의 이유로 프랑스로 돌아가버리며 십자군 내부에도 불화의 불씨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다름아닌 리처드 1세였죠. 그는 예루살렘  공략을 앞두고 괜한 분란을 만들어서 훗날의 곤란을 자초합니다.

 

그는 전투를 앞두고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누가 가장 먼저 요새를 점령하고 깃발을 꽂을지 내기를 하자고 한 것인데요. 당연히 자신이 있으니까 내기를 걸었겠죠? 그런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고 요새에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은 사람은 오스트리아 공 레오폴트 5세였습니다. 그러자 뒤처진 리처드 1세는 내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내려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유치한 행동을 저지릅니다. 화가 난 레오폴트 5세는 원정을 그만두고 오스트리아로 되돌아갔구요.

 

그 사건 이후로도 리처드 1세의 잉글랜드 군은 승전을 거듭했고 리처드 1세 역시 십자군 내에서 용맹함을 인정받으며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의 상황에만 집중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죠. 계속된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던 그에게, 동생인 존이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함께 자신의 영토를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때부터였을까요?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도 영 결판이 나지 않고 성과가 지지부진해졌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장기 왕조를 제치고 살라흐 앗 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기세를 올리고 있었구요. 리처드 1세는 계속된 전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과가 나지 않는 와중에 잉글랜드에서는 나쁜 소식이 전해지자 불안한 마음에 결국 그에게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십자군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점령지를 그대로 인정해주고 유럽에서 오는 성지순례객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예루살렘 공격을 철회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리처드 1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이제 그는 빨리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해로를 이용한 귀국을 시도했지만 폭풍우로 배가 좌초되어 베네치아 부근에 상륙하자 거기에서부터는 육로를 이용해서 돌아가기로 하는데요. 그게 꽤 먼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를 지나야 했죠. 그는 변장을 하고 몰래 오스트리아를 지나려고 했지만 결국 빈에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전투에서 내기를 걸었다가 패하자 자신의 깃발을 찢어버린 일을 기억하고 있던 레오폴트 5세는 곧 리처드 1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로 압송했습니다. 

 

마침 각종 내우외환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었던 하인리히 6세에게 리처드 1세는 뜻밖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곧 잉글랜드에 어마어마한 비용의 몸값과 더불어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임을 서약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말의 협상의 여지가 없었던 리처드 1세로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죠. 잉글랜드에서 국정을 돌보고 있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노력한 끝에 거금의 몸값이 치러지고 굴욕적인 봉신서약을 하고나서야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차드 1세는 곧 필리프 2세와의 대결에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그는 또 잉글랜드를 비워야 했죠. 사실 잉글랜드에서는 줄곧 그의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김 했지만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휴버트 월터의 도움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엘레오노르와 함께 리처드 1세의 석방을 위한 보석금 마련에 발벗고 나섰고, 그가 없는 동안 내정을 총괄하며 다양한 개혁을 이끌었죠. 도량형을 통일하거나 토지조사를 시행한 것, 병역 제도를 개혁한 것 등 리처드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이루어진 업적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한편, 그렇게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선 리처드 1세는 1194년 프레트발 전투와 1198년 쿠르셀 전투에서 연이어 프랑스군을 격파하며 전장에서의 명성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 허무하게도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덫나며 회복하지 못하면서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보다도 5년 빨리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해상 공화국의 부상

 

십자군 전쟁으로 역사에서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살라딘'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한 살라흐 앗 딘과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일 것 같은데요. 반면에 가장 실속을 챙긴 쪽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해상 공화국들입니다. 이들은 전쟁 때문에 늘어난 해상 무역과 수송 덕분에 이 때부터 대서양 항로가 개척되는 대항해 시대 전까지 엄청난 부를 쌓으며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이 번영은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되었죠. 그런데 이 해상 공화국들의 정체는 뭘까요? 이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는 북부의 신성로마제국과,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이 차지하고 있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아말피 공화국

 

가장 먼저 생겨난 아말피 공화국부터 볼까요? 현재의 아말피는 이탈리아의 남부, 나폴리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아말피 공화국을 다스리는 군주는 공작이지만 세습이 아닌 선출된 군주였기 때문에 그냥 공화국으로 부르는 것 같아요. 이들은 십자군 원정의 수혜를 입은 공화국은 아니지만 이탈리아의 여러 해상 공화국들의 시조 쯤 되는 나라라서 함께 얘기해보겠습니다. 아말피는 본래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었던 나폴리 공국에 속해있던 곳이었지만 958년 마스탈로 2세가 처음으로 공작으로 선출되며 자치권을 가진 공화국으로서 첫발을 떼게 되었습니다. 

 

아말피 공화국의 가장 큰 업적은 항해술과 해상법을 발전시킨 것인데요. 중국에서 전래된 나침반을 항해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아말피 공화국의 뱃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아말피 공화국에서 제정한 아말피 법전은 현대 해사법의 기원으로 꼽히는 법전이기도 하죠. 각종 해상 분쟁과 해적에 대한 조치, 선주와 선원의 권리와 의무, 선적화물에 대한 내용들까지 상당히 꼼꼼한 해사법 조항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말피 공화국의 선단은 지중해 곳곳을 다니며 사라센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는데요. 이 중에 좀 중요한 해전이 바로 오스티아 전투입니다. 849년 사라센 해적들이 오스티아  해안을 거쳐 로마로 들어오며 교황을 위협하자 아말피 공화국의 함대가 이를 막은 것이죠. 한편, 이들이 해상 무역을 통해 다루었던 주요 품목은 목재와 사치품이었습니다. 자국에서는 목재를 생산해서 그걸 북아프리카에 팔아 금을 사고, 그 금으로 동방에서 각종 사치품들을 사서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에 파는 루트였죠. 그 사치품들은 주로 보석, 비단, 향신료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서도 말했듯이 아말피 공화국은 십자군 원정의 수혜를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해상에서는 매우 강력했지만 육상에서는 별로 그렇지가 못했기 때문인데요. 결국 1034년 육로로 카푸아 공국과 살레르노 공국의 협공을 받은 아말피 공화국은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살레르노 공국의 공격으로 위기를 겪다가 남부에서 올라오는 노르만 정복자들에게 자치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137년 상대적으로 십자군 원정으로 크게 성장한 다른 해상 공화국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며 쇠퇴했습니다. 

 

피사 공화국

 

피사 공화국의 시작은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인 토스카나 변경백국의 한 도시였습니다. 근데 그 전부터도 원래 중요한 항구도시이긴 했다고 하네요.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갈리아나 카르타고로 군사를 파견할 때 이 곳을 항구로 활용했구요. 이후 동고트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때에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런 피사가 더욱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사라센 해적들 덕분이었습니다. 지중해에 들끓는 사라센 해적들에 대비하고자 9세기 초부터 프랑크 왕국이 피사 항에 대규모 함대를 보유한 해군 기지를 구축한 것인데요. 이렇게 마련된 해군은 11세기 동안 교황청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일대에서 사라센 해적들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1092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중해의 큰 섬들 중 하나인 사르데냐를 얻게 되죠. 이로써 피사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와 서쪽의 큰 섬들 사이의 티레니아 해를 장악하게 되는데요. 피사의 랜드마크인 사탑 역시 이 때를 전후해서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교황청과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으니 십자군 원정에서도 큰 활약을 했겠죠? 피사 공화국은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에 무려 120대의 함대를 파견하였는데요. 사실 그 전까지 피사 공화국은 주로 지중해 서부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에 동부에는 별다른 거점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지중해 동부에 진출해 안티오키아, 아크레, 야파, 티레 등에 거점도시들을 세우고 엄청난 상업적 이익을 얻게 됩니다. 모두 앞서서 들어본 도시들이죠? 뿐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교황청 이외에 동로마 제국에도 해상 군사력을 지원하는 대가로 여러가지 상업적 특혜를 얻었습니다.  이 때가 피사 공화국의 최대 전성기였죠. 

 

그럼 피사 공화국은 어쩌다 망하게 되었냐하면... 경쟁 관계이면서 동맹국이기도 했던 제노바 공화국에 의해서였습니다. 제노바 공화국은 피사 공화국이 11세기 내내 교황청의 요청으로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칠 때 함께 싸웠던 동맹이었는데요. 결과적으로 티레니아 해를 장악하고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이득을 독점한 건 피사 공화국이었습니다. 제노바 공화국으로서는 당연히 불만을 가질만했죠. 결국 1248년 제노바 공화국의 함대가 사르데냐를 공격하고 두 나라의 함대는 전면전을 벌이게 됩니다. 결과는 피사 공화국의 완패. 1290년 제노바 공화국의 함대가 피사 항구를 접수하면서 피사 공화국은 자치권을 상실하게 되죠.

 

제노바 공화국

 

그럼 피사 공화국을 멸망시킨 제노바 공화국은 어떤 곳일까요? 일단 위치는 이탈리아 반도의 북서쪽 끝입니다. 피사에서는 차로 두 시간 정도 북쪽에 있는 도시네요. 제노바 역시 상업도시로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자치권을 얻게 된 것은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는 혼란기 때 이탈리아 왕으로 누구를 지지할지를 선택하는 순간에 옳은 판단을 했기 때문인데요. 당시 이탈리아 왕위 후보로는 이브레아 공작 베렝가리오와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작센 공작 오토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제노바 공화국의 선택은 베렝가리오 공작이었죠. 결국 950년 이탈리아 왕위에 오른 베렝가리오 2세는 제노바 공화국에 자치권으로 보답했습니다. 

 

제노바 공화국은 콤파냐 (Compagna) 라고 불리우는 공동체에 의해서 운영되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일종의 선원 노동조합 같은 단체였지만 점차 규모가 커지고 내규가 체계화되면서 행정적인 실권을 갖고 있던 제노바 주교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노바 공화국은 콤파냐의 지도부인 콘솔레 (Console) 들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죠. 하지만 이러한 정치 체제는 훗날 도제 (Doge) 라고 불리우는 직책을 마련해서 정부 수반으로 삼으면서 한번 더 변화합니다. 

 

그렇다면 도제도 그냥 이름만 다른 선출 군주인 것 같은데  뭐가 다를까요? 일단 제노바의 도제는 반드시 귀족 출신만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339년에 선출된 제노바의 초대 도제 시모네 보카네그라는 평민 출신이었죠. 초반에는 일반 대중을 유권자로 선거를 치러 당선자를 뽑고 종신임기 동안 재임하게 했지만, 16세기 초부터는 일종의 대의원 (Gran Consiglio) 투표를 통해 선출하고 임기도 2년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편, 도제는 나라의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을 비롯한 다양한 이익집단의 견제를 받는 정부 수반이었죠. 때문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에도 반드시 대의원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했습니다.

 

제노바 공화국 역시 강력한 해상 패권을 갖게 된 계기는 사라센 해적들 때문이었습니다.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함대를 육성한 것이었죠. 하지만 사라센 해적들의 입장에서도 제노바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이들의 표적이 되어 여러 번 공격을 받았는데요. 936년 벌어진 사라센 해적들의 대규모 침략 때에는 도시가 일부 약탈당하고 많은 제노바 시민들이 포로로 붙잡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노바 공화국은 일관되게 해상 군사력을 확대했고 결과적으로는 피사 공화국과 함께 사라센 해적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본래 제노바 공화국은 피사 공화국의 주요 동맹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1016년 피사와 제노바 공화국의 연합군이 사라센 함대를 격파하고 피사 공화국이 사르데냐 섬을 얻었을 때 제노바 공화국은 그 위의 코르시카 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제노바 공화국도 다른 해상 공화국들처럼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죠. 제노바 공화국의 최고 전성기라면 역시 십자군 원정 때부터입니다. 특히 프랑스의 십자군들은 특히 제노바 공화국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청해왔는데요. 제노바 공화국도 이에 화답하며 함대를 보내 1099년 예루살렘 탈환에 한 몫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군 원정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긴 제노바 공화국은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된 후 티레니아 해에서의 재해권을 두고 본격적으로 피사 공화국과 경쟁하게 됩니다. 제노바 공화국은 시종일관 피사 공화국을 압도했습니다. 전투는 주로 사르데냐와 그 인근 해역에서 벌어졌는데요. 1284년에 벌어진 멜로리아 해전이 결정타가 되어 피사 공화국의 함대는 거의 전멸하게 되고 피사 공화국이 가졌던 티레니아 해의 제해권 역시 고스란히 제노바 공화국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한편, 피사 공화국을 넘고나니, 베네치아 공화국이 제노바 공화국의 새로운 경쟁자로 떠올랐습니다. 두 해상 공화국은 1256년에서 1381년까지 지중해 동부와 아드리아 해에서 100년이 넘도록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제노바 공화국은 1298년 코르출라 해전과 1379년 키오자 전투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위협하기도 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도 끈질기게 저항했죠. 양국은 결국 강화조약을 맺었는데요. 이후에도 두 해상 공화국은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며 동방 무역로를 차단하기 전까지 지중해 무역에서 막강한 해상 패권을 행사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

 

사실 이탈리아의 해상 공화국 하면 베네치아가 딱 떠오릅니다. 사실 베네치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TV 나 유튜브 등 미디어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어서 매우 유명한데요. 잘 알려져있다시피 서로마 멸망 이후 아드리아해 북부 해안가 주민들이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석호 안에 말뚝을 박아 지반을 만들고 그 위에 주거지를 마련하기 시작한 게 도시의 기원입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하는 행정관의 통치를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선출한 도제가 점차 동로마 제국 행정관의 통치권을 압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치공화국이 되었죠. 

 

887년 완전한 독립국임을 공표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11세기 정도가 되면 아드리아 해 인근에서는 적수가 없는 해상 강국으로 부상합니다. 다른 해상 공화국들에 비해서 상당이 빠른 성장이죠? 그리고 십자군 원정 동안 그야말로 엄청난 부를 쌓으며 지중해를 장악하게 되는데요. 십자군 원정 동안 이득을 본 건 다른 해상 공화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이득을 본 국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가 동방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4차 십자군 원정이었죠.

 

4차 십자군은 본래의 계획인 예루살렘 탈환에 앞서 배후의 위협이 될 수도 있을만한 이집트를 먼저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이집트로의 원정을 계획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이집트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육로가 아닌 해로를 선택합니다. 지중해를 가로지르면 바로 이집트니까요. 그럼 그 배는 어떻게 확보했을까요?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4차 십자군에게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요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수송료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서는 국가의 사활을 걸고 십자군 원정 지원사업에 뛰어든 거였는데 정작 4차 십자군은 그럴만한 지불 능력이 없으니 결국 이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경쟁 도시들을 제거해달라는 것이었죠. 자신들의 경쟁도시를 침략해 약탈을 하면 4차 십자군은 수송료로 지불할 금액을 마련할 수 있고,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서는 수송료도 받고 경쟁 도시도 제거할 수 있으니 양측 모두에게 이로운 해결책이었습니다. 물론 그 경쟁 도시들도 같은 크리스트교 도시들이라는 점이 문제이긴 했지만요.

 

4차 십자군이 침략한 첫번째 도시는 달마티아 해안의 항구 도시 자라였습니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자다르인데요. 자라의 주민들은 십자가를 들고 나와 십자군들 앞에 내보이며 자신이 카톨릭 신자임을 알렸지만 십자군은 이들을 사정없이 약탈했습니다. 자라는 함락되어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죠. 두번째 도시는 더 충격적입니다. 십자군 원정을 처음으로 요청했었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3일간 약탈하고 알렉시오스 5세를 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기까지 했습니다. 

 

 자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쟁 도시였으니 그렇다치고, 콘스탄티노플은 왜 공격하게 한 걸까요? 사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십자군 원정 이전에도 동방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에서 들어오는 각종 사치품들을 유럽에 공급했던 것이 바로 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었죠. 그런데 동로마 제국의 상인들은 이 동방 무역에 있어서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의 가장 큰 경쟁자였습니다. 이제 이들이 사라졌으니,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서는 동방 무역을 독점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른 해상 공화국들을 압도하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베리아의 카톨릭 왕국과 레콩키스타의 전개

 

이베리아 반도의 카톨릭 왕국들

 

1차 십자군의 원정소식은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도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이곳 나름대로의 급한 사정이 있어서... 십자군 원정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이슬람 세력이 내 땅 안에 들어와 있는데, 먼 곳에 있는 이슬람 세력에 신경쓸 겨를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죠.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먼 옛날 일이긴 하지만 짤막하게 되돌아보자면...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이베리아 반도에는 서고트족이 왕국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다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세력이 건너오자 9세기부터는 이들의 본격적인 지배를 받았죠. 다행히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을 코르도바까지 몰아낸 이후 에스파냐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북쪽 끝 산악지대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시작으로 조금씩 카톨릭 왕국들을 세우며 안정되는 중이었습니다.

 

이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것으로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레온 왕국으로 확대되었고 레온 왕국에서 카스티야 왕국이 생겨났습니다.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포르투갈 백작령이 설치되구요. 샤를마뉴 대제가 설치한 에스파냐 변경주는 10세기부터 나바라 왕국으로 독립했고, 이 나바라 왕국에서 분리된 바스크인들은 아라곤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한편, 동부에는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있었죠. 이렇게 해서 12세기 쯤에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는 레온, 카스티야, 포르투갈, 나바라, 아라곤, 바르셀로나 여섯 개의 나라가, 남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 과정을 나타낸 지도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 과정



레온 왕국은 8세기 중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1세가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칸타브리아 산맥 이남인 레온 지방의 무슬림들을 몰아내면서 처음 카톨릭 왕국의 영토를 개척했습니다. 이후 알폰소 3세 때에는 두에로 강 유역까지 남하하고, 910년 가르시아 1세 때 마침내 수도를 레온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레온 왕국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왕국으로 재탄생하죠.

 

한편, 카스티야 왕국은 본래 레온 왕국의 백작령에서 출발했습니다. 백작령이 처음 설치된 것은 860년 즈음으로 레온 왕국의 귀족 로드리고에 의해서였는데요. 당시에는 백작위가 제대로 세습되지 않아서 혼란을 겪다가 10세기 말 페르난 곤잘레스 백작이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백작위도 본격적으로 세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1세기 페르난도 1세 때에는 오히려 레온 왕국을 통합하면서 카스티야-레온 왕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 당시 이베리아 북부의 카톨릭 왕국들은 경쟁적으로 국토회복운동에 뛰어들며 영토 확장에 주력했는데요. 1085년에는 알폰소 6세가 반도 한가운데의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카스티야-레온 왕국이 국토회복운동의 주도권을 차지하기도 했죠. 이후에도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계속에서 분열되었다가 통합하기를 반복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페르난도 3세 때인 1230년에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됩니다.     

 

페르난도 3세는 근본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내의 카톨릭과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 세력 모두가 함께 평화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은 알폰소 10세는 아버지의 이상을 이어받아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 발전에 전념했죠. 그는 많은 유대인과 아라랍인 지식인들, 그리고 멀리 프랑스의 수도사들이나 음유시인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초청해 그들의 고전 작품들을 라틴어나 로망스어로 번역하고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이 때 번역된 고전들 중에는 <코란>이나 <탈무드> 같은 것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최신 학문 트렌드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 내의 지식인들에게는 매우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로 구어로 사용되어오던 중세 로망스어가 문어로서의 체계를 갖추어지기도 했죠. 알폰소 10세의 이러한 지원은 그의 왕국에서 일종의 고등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이 탄생하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대학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탈리아 반도에서였지만 카스티야-레온 왕국에 대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래로 알폰소 10세는 1254년 살라망카 대학을 설립해 지식인들의 지식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서쪽에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봉신인 포르투갈 백작령이 있었습니다. 이 백작령은 본래 아스투리아스 왕국 시절부터 있던 백작령이었는데요. 백작위 세습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다가 카스티야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 때에는 잠시 동안 왕국에 통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096년 알폰소 6세가 자신의 딸인 테레사 데 레온 부부에게 다시 백작령으로 분봉한 곳이었죠. 그러다 테레사 데 레온의 아들인 알폰수 1세 때에는 왕국을 선포하며 이베리아 반도에 또 하나의 카톨릭 왕국을 추가합니다. 

 

레온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서쪽에서, 카스티야 왕국이 북부의 중앙에서 생겨났다면 그 동쪽에서는 나바라 왕국이 발생했습니다. 여기는 원래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는데요. 일찍부터 국토회복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곳이라서 10세기 쯤 이미 이베리아 반도의 북동부에 흐르는 에브로 강 유역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러다 11세기 초반, 산초 3세 때 전성기를 맞이하며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을 점령하고 레온 왕국까지도 제압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카톨릭 왕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산초 3세는 영토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에서 수도사들을 대거 초청해 이들을 통해 프랑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개혁하는 등 이베리아 반도 내 카톨릭 세계의 문물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사후에 거대했던 왕국은 아들들에 의해 다시 분할 상속되었는데요. 장남인 가르시아 3세는 나바라 왕국을 받고, 둘째 아들인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 왕국을, 서자였던 라미로 1세는 아라곤 왕국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중 둘째 아들인 페르난도 1세가 위에서 카르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통합한 군주였죠.

 

한편, 이베리아 반도 북쪽의 동부에는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있었습니다. 아라곤 왕국은 본래 나바라 왕국에 속한 백작령이었는데요. 나바라 왕국의 산초 3세의 사후에 그의 아들 중 라미로 1세가 상속받은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 카스티야 왕국의 영토가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알폰소 1세 때인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과 혼인동맹을 맞고 그를 후계자로 삼았죠. 몰론 이 알폰소 1세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1세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어쨌든 이 결혼 동맹으로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두 나라는 본래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고, 심지어는 언어도 달랐죠. 지금의 카탈루냐어도 스페인어와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고 하네요. 하지만 두 나라는 여러 카톨릭 왕국들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연합하는 길을 택했고 이 때의 선택 덕분에 이 연합 왕국은 지중해의 마요르카나 이비사, 메노르카 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개척한 도시들에는 점차 많은 이주민들이 정착하며 자연스럽게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훗날 아라곤 연합 왕국이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갈 수 있었죠. 

 

 

알 안달루스의 축소

 

그렇다면,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이슬람 세력의 정세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북아프리카를 거쳐 처음 이베리아 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줄곤 자신들의 본국인 아라비아 반도의 우마이야 왕조에 종속되어 있던 이슬람 세력은 본국에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자 그 기회에 본국으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두번째 칼리파인 압둘라 알 만수르가 우마이야 왕족들을 대거 학살하자 이로부터 피신한 우마이야 왕족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와 756년, 후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습니다. 수도는 코르도바.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압데라만 1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왕에 바그다드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나라를 열었으니 압데라만 1세는 코르도바를 바그다드보다 더 번성한 도시로 키워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이베리아에 부임하는 아바스 왕조의 총독들과는 다르게 카톨릭이나 유대인 세력에 적대적이지 않았고, 우마이야 왕족이라는 정통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베리아의 주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아바스 왕조의 세력을 몰아내고 본격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3대가 흘러 4대 아미르인 아브드 알 라흐만 2세, 압데라만 2세 때가 되면 코르도바는 정말 바그다드를 능가하는 도시가 되죠.

 

당시의 코르도바는 인구가 50만이 넘고 모스크가 700개, 도서관이 70개, 병원이 50개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의 유럽의 대도시들이 인구 5만을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하니 인구 규모만 해도 엄청난 대도시죠. 하지만 규모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고 밤이 되면 가로등이 켜지는, 당대에 가장 문명화되고 번영한, 세련된 도시였죠. 동시대에 이 정도 되는 도시를 꼽으라면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당나라의 장안 정도가 있지 않을까요? 

 

시간이 더 흘러 912년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압데라만 3세가 즉위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내의 이슬람 세계, 알 안달루스는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포용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법과 제도, 동로마 제국의 예술, 카톨릭 신학 등이 폭넓게 연구되었구요. 압데라만 3세가 스스로 칼리파임을 선언한 것도 이 때였습니다. 하지만 북쪽의 카톨릭 왕국들도 점차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이슬람 세력은 본격적으로 레콩키스타의 영향을 받게 되죠.

 

압데라만 3세의 손자인 알 하캄 2세 때부터 후 우마이야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게 됩니다. 불과 12살인 알 하캄 2세를 대신해 권신인 알 만수르가 권력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요. 이후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하고 우마이야 가문이 아닌 귀족이 칼리파 위를 찬탈하기도 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후 우마이야 왕조는 히샴 3세를 마지막 칼리파로 1031년 멸망합니다. 

 

문제는 후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 이후 뒤를 이을만한 새로운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계에는 타이파국, 유럽으로치면 공국 정도의 작은 나라들이 여러 개 들어섰지만 그 중 어느 나라도 후 우마이야 왕조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죠. 이 와중에 북쪽의 카톨릭 왕국들의 레콩키스타는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어 1085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중앙의 중요한 거점도시인 톨레도가 카스티야-레온 왕국에게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카톨릭 세력의 남하가 거세지자, 이슬람 국가들도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선택은 북아프리카의 또 다른 이슬람 국가인 무라비트 왕조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086년 이베리아 반도에 무라비트 왕조의 군대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은 이베리아의 이슬람 세력들의 바램대로 카톨릭 세력을 쳐부수기는 했는데요. 문제는 늘 그렇듯 이 무라비트 군이 전투가 끝난 뒤에도 돌아갈 생각을 안한다는 거였습니다. 이왕에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와서 카톨릭 세력까지 몰아낸 김에 그냥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아버린 것이었죠. 무라비트 왕조는 알 안달루스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국의 무라비트 왕조가 쇠퇴하자 알 안달루스에도 다시 타이파들이 난립했는데요. 이들은 북아프리카의 무라비트 왕조가 또 다른 이슬람 왕조인 무와히드 왕조에 의해서 교체되자 다시 무와히드 왕조의 총독부에 의해 통합되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카톨릭 세력의 레콩키스타는 계속 진행되었죠. 카톨릭 세력은 이슬람 세력의 영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와히드 왕조는 매우 강경한 이슬람 왕조였기 때문에 이베리아에 설치된 무와히드 왕조의 총독부 또한 카톨릭 세력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로 북쪽의 카톨릭 세력의 공격 역시 더욱 거세어졌죠. 결국 양측은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에서 한바탕 전투를 치렀습니다. 카톨릭 세력의 연합군으로는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의 군대가 참전했구요. 무와히드 왕조에서는 칼리파인 무함마드 앗 나시르가 직접 참전했는데요. 결과는 카톨릭 연합군의 승리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톨릭 세력의 레콩키스타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어오던 영토 회복이 급진전되며 알 안달루스의 주요 도시였던 코르도바와 세비야 등이 차례로 함락되어 카톨릭 세력에게로 돌아왔죠. 한편, 무와히드 왕조는 이 전투에서의 패배가 불씨가 되어 본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왕조 전체가 휘청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알 안달루스에서의 지배권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된 무와히드 왕조는 마침내 이베리아 반도에서 손을 떼고, 알 안달루스에는 여기저기 잔존한 이슬람 세력들이 군벌 형태로 남게 되었죠. 

 

한번 불이 붙은 레콩키스타는 활활 타올랐고 카톨릭 세력들은 남아있는 이슬람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해나갔습니다. 800년이 좀 안되는 오랜 세월에 걸친 국토 회복 운동이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죠. 가장 마지막으로 남게 된 이슬람 국가는 그라나다의 이슬람 국가 나스르 왕조였습니다. 나스르 왕조는 카스티야-레온 왕조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근근히 나라를 유지하다가 1492년이 되면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스페인의 유명한 이슬람 유적지인 알함브라 궁전이 이 나스르 왕조의 궁전이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