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 왕국의 등장
노르만족의 이동으로 인구가 대거 유출된 스칸디나비아는 오랫동안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다가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10세기를 전후해 전래된 크리스트교는 이후 토착 종교들을 압도하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널리 퍼졌지만 봉건제는커녕 영주도 기사도 없었고 따라서 당시 서유럽의 강대국들이 대거 참전한 십자군 원정에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제일 먼저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10세기 후반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덴마크 왕들은 노르만족의 이동 후반에 영국에 진출했고 1016년 잉글랜드의 왕이 된 크누드가 덴마크 왕,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면서 스칸디나비아 제국, 또는 북해 제국이라고도 불리우는 제국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체제는 여러 개의 나라가 느슨하게 뭉쳐진 세력에 불과할 뿐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크누드의 사후에도 덴마크의 영토는 스웨덴까지 확대되었지만 왕위 세습은 여전히 안정되지 못하고 극심한 내전이 계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 때가 되어서야 왕위 세습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즈음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노르웨이를 포함한 덴마크, 그리고 스웨덴 이 두 나라로 분리되었습니다. 이 때에도 스칸디나비아 세력권은 팽창을 계속하며 발트 해 연안의 슬라브족들을 모두 복속시키고 북유럽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스칸디나비아의 세 나라는 서로 경쟁, 또는 공조하며 안정화를 꾀하고 14세기에 들어서면 마침내 서유럽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덴마크는 19세기까지 노르웨이를 지배했고 스웨덴은 일찍부터 독립국으로 자립해 17세기에는 30년 전쟁에 참여하며 근대 유럽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했습니다.
영국의 모델의회
영국에서는 윌리엄 1세가 노르만 왕조를 성립한 이후 십자군 원정을 거치면서 왕권이 무너지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마그나카르타가 선포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플랜태저넷 왕조 때에는 독립국으로서의 지휘가 약화되면서 프랑스 앙주 왕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봉신이 되었습니다. 다만 영국에서는 봉건제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프랑스 봉건제가 겪어야 했던 폐해를 거치지 않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를 거쳐 왕이 귀족 세력에 굴복하자 영국의 귀족들은 대륙의 봉건제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군주인 영국 왕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는 이에 저항해 왕권을 다시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헨리 3세는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수복한다는 구실로 국내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며 다시 왕과 귀족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1258년 귀족들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헨리 3세는 귀족들이 제시한 옥스포드 조례에 합의하면서 왕권은 15인의 귀족위원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귀족위원회의 대표인 시몽 드 몽포르는 귀족지배를 제도화하고자 귀족, 성직자, 도시대표로 구성된 통치기구를 출범했는데, 이 기구는 오늘날 영국의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원래 몽포르를 지지했지만 귀족위원회가 제도화될 조짐을 보이자 몽포르를 제압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헨리 3세의 사후 왕위를 이은 에드워드 1세는 왕실재판소를 설립하고 귀족 관료를 임명해 사법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로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영국은 ‘앙주의 멍에’에서 벗어나 국제를 확립하고 영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몽포르의 귀족위원회에 각 지방의 하급기사들과 성직자들을 포함시켜 귀족의 권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모델의회로 불리우는 이 기구에서 훗날 귀족위원회는 상원으로, 하층기사들과 하급성직자들은 하원으로 발전했습니다.
프랑스의 삼부회
카페 왕조가 전성기를 누렸던 필리프 2세 이후 손자인 성왕 루이 9세는 필리프 2세가 확장한 영토를 기반으로 대내적 안정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법학자들을 고용해 왕실 내에 재판소를 마련하고 이것이 좋은 호응을 얻자 항구적인 고등법원을 설치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영국이 의회를 마련했다면 프랑스는 법원을 마련한 것입니다.
한편 루이 9세는 대외적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황제권과 교황권의 다툼과 영국의 헨리 3세와 귀족들 간의 다툼에도 관여해 프랑스의 이익을 반영한 중재안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툴루즈, 랑그도크, 프로방스 등 현재의 프랑스 남부를 획득했습니다. 북부와는 문화적으로 이질감이 있었던 남부 프랑스의 통합으로 오늘날의 프랑스 역시 남부를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헨리 3세와는 파리 조약으로 아키텐의 일부인 가스코뉴를 영국에 내어주는 대신 영국 왕의 충성서약을 받아 양국의 관계를 향상시켰습니다. 프랑스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영국 왕실과 좋은 관계를 맺은 사례였습니다.
루이 9세의 아들인 용담왕 필리프 3세는 툴루즈와 푸아투에 작게 남아있던 영국령을 접수해서 이제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는 가스코뉴만 남게 되었습니다. 필리프 3세의 동생 미남왕 필리프 4세는 스스로를 프랑스의 황제라 선언하고 플랑드르와 아키텐의 영유권을 두고 에드워드 1세와 대결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고자 성직자에게 과세를 하며 교회의 반감을 샀습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그가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한 시점에 이미 반감을 가졌는데 교회에 세금까지 징수하자 결국 대립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목상이지만 로마 교황이 임명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과의 대결에 앞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에드워드 1세의 모델의회와 유사하게 1302년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도시대표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내적인 준비를 마친 필리프 4세는 1303년 측근인 노가레를 보내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납치하여 아나니의 교황 별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시민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결국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정적이었던 교황이 죽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인인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세우고 1309년에는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습니다. 그 결과 영국에 이어 프랑스의 왕권 역시 전에 없이 강력해졌고 반대로 교황권은 추락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이 사건을 헤브라이인들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라고 불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플랑드르와 아키텐 문제를 풀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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