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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등장과 영국 프랑스의 의회제도

스칸디나비아 세계에 찾아온 변화

 

지금까지 서양사에서 보여준 바이킹족들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정복왕 윌리엄이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얘기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요. 이미 그 전에 루앙에 터를 잡은 롤로와 그의 후손들,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한 크누트 대왕, 러시아의 역사를 연 류리크,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던 루지에로 1세까지 중세까지의 서양사에서 바이킹족들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더라구요. 그런대 정작 이들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은 이 때까지도 사실상 변방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렇게 노르만족이 모험을 떠나고 인구가 대거 줄어든 스칸디나비아 일대는 소왕국이 난립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이 잦아들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12세기 쯤이었죠. 그 사이 북유럽의 토착 신앙을 신봉하고, 영주도 기사도 없는 비교적 평등한 부족사회였던 스칸디나비아 세계에도 점차 서유럽의 문물이 전파되면서 크리스트교가 받아들여지고 봉건제가 차츰 자리게 되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러한 변화는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제일 가까운 덴마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발전한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제일 먼저 국가가 형성된 곳은 지금의 덴마크 지역이었습니다. 사실 덴마크를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라고 하기는 좀 뭐한게,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는 지리적으로 약간 떨어진, 유럽 대륙 북부의 유틀란드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인 스웨덴, 노르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죠.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덴마크를 스칸디나비아 3국 중 하나에 포함시키는 것 같습니다.   

 

독일 지역에서는 오토 대제가 등장하며 신성로마제국이 막 모습을 갖춰가던 970년 경, 덴마크와 노르웨이 일대에도 처음으로 통일 왕국이 건설됩니다. 블루투스라는 상표명의 기원이 된 하랄 1세 블로탄이 970년 경 통일 왕국을 수립한 이래로 그의 아들인 스벤 1세와 손자인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에도 크누트 왕조를 세우며 한때 북해 제국이라고도 불리우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것인데요. 그런데 이 제국이라는 게 제대로 된 체제를 갖춘 나라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나라가 느슨하게 뭉친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대의 서유럽의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낙후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북해 제국도 얼마 안가 무너지고 이 일대는 다시 혼돈 속으로...

 

크누트 왕조의 북해 제국은 크누트 대왕의 사후, 얼마 가지 못해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잉글랜드는 참회왕 에드워드가 다시 왕좌를 차지하며 웨식스 왕조가 복원되구요.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는 각각 다른 왕조가 들어선 것인데요. 덴마크에서는 1047년 에스트리드 왕조의 첫번째 왕인 스벤 2세가 즉위해 왕권과 교회 체제의 강화를 위한 각종 개혁을 단행하고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힘쓰며 나라도 잠시 안정을 찾는 듯 했습니다. 

 

사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이 워낙 두드러져보이다 보니 왕권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교회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싶었는데요. 생각해보면 로마 제국이나 프랑크 왕국에서도 크리스트교는 황제나 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곤 했었네요. 이 지역에서도 처음에는 크리스트교가 왕권 강화, 중앙집권화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근데 속도가 매우 느렸죠. 하랄 1세 블로탄이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선포한 게 965년 경이었는데, 민중들 사이에서 크리스트교가 깊숙이 자리잡기까지는 200 - 250 여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하니까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사실 강력한 왕의 등장을 가장 경계했던 것은 지방의 유력한 귀족들이었습니다. 스칸디니비아 사람들이 아직 작은 부족 단위로 모여 살던 시절에는 부족장이었던 사람들이었겠죠? 부족 사회에서 북유럽의 토착 신앙을 고수하던 이들은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각 지방에 교구를 세우며 권력을 장악하려는 왕의 등장이 여간 싫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스칸디나비아 세계의 크리스트교 수용은 단순히 종교의 전파가 아니었습니다. 스칸디아비나 세계가 마침내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의 길을 따라갈 거라는 의미였죠. 

    

스벤 2세가 사망한 뒤 왕위는 그의 다섯 아들들이 형제 상속을 하며 차례대로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때부터 암살과 반란이 난무하던 왕실에서는 마지막 다섯째 아들이 재위하던 시기에 그의 아들과 사촌들 간의 왕위 다툼으로 덴마크는 대혼란의 시기에 빠져드는데요. 이 혼란은 대를 거듭해서 또 그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결국 이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1157년, 스벤 2세의 증손자인 발데마르 1세가 즉위하면서부터였습니다.  

 

오랜 혼란기를 종식시칸 발데마르 1세는 곧 지방 세력을 억제하는 한편 전략적 요충지에 요새와 성곽을 건설해 중앙집권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당시 덴마크의 해안가에 출몰하던 슬라브족의 한 일파인 밴드족을 토벌해 이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켰죠. 그 결과 덴마크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포메른 지방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발데마르 1세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각 지방의 대주교들과 협력해 지방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크누트 라바르를 성인으로 시성해서 왕실의 권위를 종교적으로 강화한 거죠.

 

나라가 커졌으니 이제 나라 밖으로도 좀 목소리를 높여볼만 했습니다. 발데마르 1세는 즉위 초만 해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봉신을 자처했었는데요. 국내 상황이 안정을 보이자 당시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청 간에 벌어지던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하며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해냈습니다. 이제 막 나라가 안정되었을 뿐인데, 덴마크는 이미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대륙의 거대한 제국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한 나라가 되었네요.

 

발데마르 1세의 사후 덴마크의 왕위는 그의 아들인 크누드 6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다시 덴마크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덴마크를 침공했는데요. 크누드 6세는  이 공격을 잘 막아내 위기를 넘기고 도리어 포메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시기 북방 십자군 결성에 앞장서서 에스토니아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했죠. 

 

북방 십자군은 또 뭘까요? 이들은  발트 십자군이라고도 불리우는데요. 서유럽의 십자군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꾸려진 원정대였다면 이들은 북유럽 지역, 특히 발트해 인근 지역의 이교도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기 위해 결성된 군대였습니다. 이 이교도들이란 이슬람교 신자가 아닌, 자신들의 토착 신앙을 신봉하는 발트족, 핀족, 슬라브족 원주민들이었죠. 이 북방 십자군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지도자들은 물론 튜튼 기사단 같은 독일 기사단들도 참여했습니다. 

 

남쪽으로는 지금의 독일의 엘베 강 유역, 동쪽으로는 에스토니아 지역까지 진출하며 세력을 크게 확대한 크누드 6세는 한때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두고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벨프 가문 출신의 작센,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딸과 결혼했지만 후사를 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후에 왕위는 동생인 발데마르 2세가 차지했죠.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덴마크에서는 잠잠했던 귀족들의 반란이 잦아지더니 사후에는 왕위를 둘러싼 왕족들 간의 유혈 충돌로 정국은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들

 

아쉽게도 노르웨이와 스웨덴 지역의 역사는 덴마크 지역의 역사에 비해 남아있는 문헌이나 연구된 자료가 훨씬 적습니다. 우선 노르웨이 지역을 먼저 볼까요? 노르웨이 지역 역시 덴마크와 비슷하게 소규모의 부족 국가들이 각자 자신들이 지역을 통치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벌이던 이 부족국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적은 수로 통합되다가 872년 하랄 1세에 의해 어느 정도 통합된 나라를 수립합니다. 이 하랄 1세는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과는 다른 인물로, 최초의 노르웨이 왕으로 인정받는 군주이죠. 

 

하랄 1세가 난립한 부족국가들을 통합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토지에 징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불만이 많았던 부족민들 중 일부는 노르웨이를 떠나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로 이주하기도 했죠.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강압 통치에 억눌려있었던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다시 일어서면서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때문에 이 시대의 노르웨이의 왕들에게는 지방의 유력한 귀족들을 복속시키고 하나의 통일된 왕국을 이룩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과제였는데요. 그 중 제일 유효했던 수단이 바로 크리스트교의 전파였습니다. 

 

물론 덴마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랄 1세의 아들인 호콘 1세는 크리스트교의 도입을 시도했지만 지방 귀족들의 반발로 성과는 영 시원치 않았구요. 올라프 1세도 최초로 노르웨이에 교회를 설립하고 노르웨이인들에게 의무적으로 크리스트교로 개종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북유럽의 토착 신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에 앞서 덴마크 왕인 하랄 1세 블로탄이 노르웨이를 덴마크에 통합시키면서 노르웨이에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기도 했었죠. 

 

여전히 덴마크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1015년에 즉위한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의 군주들 중에는 최초로 성인으로 시성된 왕이었습니다. 비록 크리스트교의 전파에는 왕권 강화라는 세속적 목적이 수반되었지만 그래도 그의 정책 덕분에 노르웨이에는 크리스트교가 보다 광범위하게 전파되며 노르웨이 역시 다른 서유럽 왕국들에 한층 더 가꺼워지게 되었죠.   

 

그런데 크리스트교가 상당히 널리 보급된 이 시기까지도 노르웨이의 왕위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내전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각각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원을 받는 유력 귀족들이 왕위를 두고 내전과 암살을 벌였고 이러한 출혈 경쟁을 자제하기 위해 공동왕 제도로 여러 명의 귀족들이 동시에 왕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1217년 호콘 4세가 즉위하기까지 노르웨이에서는 110년 동안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호콘 4세는 사생아 출신이라 왕권을 강화하기에는 정통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즉위 초반에는 섭정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며 내전의 혼란으로부터 왕권을 지키기에 급급했는데요. 하지만 몇번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내전을 종식시키고 교황청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으며 부족했던 정통성을 확보했습니다. 내정을 안정시키고 장자상속제도를 도입해 후계를 확정지은 그는 나라 안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서유럽의 여러 선진국들과의 교역을 장려하고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히는 한편,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건설한 나라인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로 영향력을 확대했죠.  

 

호콘 4세가 왕권을 안정시킨 덕분에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상황에서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망누스 6세는 법률을 정비했고 조카인 호콘 5세는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켰죠. 한편 호콘 5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위를 잇게 할 후계자가 없는 상태였는데요. 그래서 딸인 잉에보리를 스웨덴의 망누스 3세의 차남과 혼인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호콘 5세가 사망한 후 노르웨이의 왕위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망누스 7세에게로 돌아갔죠. 당시 망누스 7세는 이미 스웨덴의 왕위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두 나라 모두의 왕이 되었습니다. 

  

스웨덴의 바이킹들

 

이런 걸 보면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은 처음 나라의 모습을 갖추어가던 당시부터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 거 같습니다. 스웨덴 역시 다른 두 나라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어갔는데요. 다만 스웨덴은 다른 두 나라보다 더 기록이 충분하지가 않아서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더 많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고유 문자인 룬 문자로 기록을 남기기는 했는데... 그게 중세까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서 지금은 잃어버린 역사로 남아있다고 하네요. 

 

그래도 스웨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대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학자인 타키투스의 기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때부터도 스웨덴 지역에는 강력한 해상 군사력을 갖춘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있었던 거죠. 그들 중 가장 세력이 강력했던 부족은 스베아족과 예아트족이라는 부족이었습니다. 이 두 부족은 각각 스베알란드와 예탈란드라는 나라를 이루었지만 995년에 즉위한 올로프 솃코눙 왕이 이 두 나라를 통합한 왕국을 수립하면서 스웨덴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올로프 솃코눙은 스웨덴 군주로서는 최초로 크리스트교로 개종을 하고 스웨덴인들에게도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전통적인 토착 신앙이 깊숙이 자리잡은 사회에 외국의 낯선 종교를 도입하는게 쉽지 않은 건, 다른 두 나라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죠. 올로프 솃코눙은 덴마크와 연합해 노르웨이를 격파하고 한때 노르웨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때에는 덴마크의 크누트 대왕이 스칸디나비아 일대를 통일하면서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올로프 솃코눙의 아버지가 창건한 문쇠 왕조는 아눈드 3세의 다음 대인 에문드 왕에서 단절되고 1060년 그의 사위인 스텐킬이 왕위에 오르며 스텐킬 왕조가 들어섰는데요. 이 왕조는 존속 내내 왕위 다툼이 끊이지 않으며 내정이 매우 불안했습니다. 올로프 솃코눙이 통합했던 스베아족 세력과 예아트족을 비롯한 각 귀족 세력이 내세운 왕이 번갈아 왕위에 올랐고 그 이후로는 스베르케르 왕조와 에리크 왕조가 각각 번갈아가면서 왕위를 차지하며 혼란이 계속되었죠. 하지만 진전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 크리스트교가 꾸준히 전파되어 지방에도 수도원이 설치되고 교구도 정비된 거죠.   

 

혼란스러운 상황은 1250년, 스베르케르 왕조와 에리크 왕조 양쪽의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발데마르 왕이 즉위해서 풀쿵아 왕조를 열며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망누스 3세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면서 혼란을 바로잡았는데요. 그는 일단 교구를 재정비하고 교회법을 강화해 교회에 사법재판에 대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국정 운영을 체계화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 관료 계층이 참여하는 일종의 원로원을 구성하기도 했죠.

   

한편, 그는 1279년 알스뇌 조례를 반포함으로써 서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사회체제를 확립시키고자 했습니다. 알스뇌 조례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상류층들에게 군마와 기병을 제공하도록 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그들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이었는데요. 이 조례로 스웨덴에도 '프렐세 (Frälse)'라는 세습 귀족 계층이 등장하게 됩니다. 평민들을 위한 조항도 있었습니다. 귀족들이 여행 중 여행지의 평민들의 재산이나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하거나 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이 불법으로 규정되었죠. 알스뇌 조례로 스웨덴에도 이제 봉건제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중세 스웨덴 사회 역시 큰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이렇게 대대적인 내정 개혁을 추진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망누스 3세는 아쉽게도 성공적으로 왕위를 세습하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이미 죽기 전에 아들인 비르예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르예르의 형제들과 귀족들이 왕위를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것이죠. 결국 망누스 3세의 사후인 1290년부터 손자인 망누스 4세가 즉위한 1319년까지 약 30여년 간 또 다시 길고 긴 내전이 벌어지고 맙니다. 망누스 4세는 망누스 3세의 차남 에리크 망누손과 노르웨이의 왕인 호콘 5세의 딸 잉에보리 사이의 아들이었는데요. 이후 노르웨이에서도 왕위를 이어받아 망누스 7세로 즉위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동군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모범의회

  

리처드 1세가 죽고 즉위한 존 왕은 계속된 실책으로 헨리 2세 때에 획득했던 어마어마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고 실지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앙주 제국이라 불리우던 거대한 나라가 이제 잉글랜드와 아키텐 정도로 쪼그라들었죠.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며 세금은 세금대로 걷고, 그나마 전쟁에서 패해 또 엄청난 배상금을 프랑스에 물어주고... 지금도 영국인들에게는 영국사에서 가장 나쁜 왕, 하면 손에 꼽힐 정도이니 당대의 잉글랜드의 귀족과 농민들에게는 더더욱 증오의 대상이었겠죠?  

  

존 왕의 똥볼이 계속되니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더 이상 그를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귀족들 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몰수당한 성직자들, 그리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나 도시민들까지 누구 하나 존 왕의 편이 아니었죠. 결국 귀족들은 1215년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향했고 런던 주민들은 성문을 열어 그들을 무혈입성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면 존 왕도 결국 이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는 결국 귀족들의 요구사항을 문서화한 마그나 카르타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세계사에 처음 싹을 틔우게 되었으니 존 왕에게는 불행이었겠지만 나머지 잉글랜드인들에게는 전화위복이 아닐까요?   

   

여기까지만 보면 마그나 카르타는 군주의 과도한 과세에 대한 귀족들의 항의 정도로 느껴지지만 마그나 카르타가 훗날 전세계의 민주주의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거대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중세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던 시점에 잉글랜드에서는 그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왕권을 자유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 아래에 두는 정치적 실험이 시작된 것이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른 수많은 나라들도 결국 같은 길을 따르게 됩니다.   

 

물론 마그나 카르타가 공포된 이후 곧바로 입헌주의 체제가 도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다음에 즉위하는 헨리 3세부터 마그나 카르타의 효력을 대놓고 무시했고, 이게 사회적 대변혁의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싸한 느낌을 받은 교황청에서도 역시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때처럼 잉글랜드의 왕권이 절정에 달했던, 본격적인 절대왕정의 시대는 아직 오지도 않았죠. 하지만 존 왕이 귀족들의 요구에 못이겨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그 순간 보편적 민주주의를 향한 긴 여정은 일단 첫 발을 뗀 것이었습니다.

    

마그나 카르타를 거쳐 왕이 귀족 세력에 굴복하자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대륙의 봉건제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군주인 잉글랜드의 왕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는 이에 저항해 왕권을 다시 강화하려고 했는데요. 그래서 그는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수복한다는 구실로 국내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정확히 존 왕이 과거에 했던 실수를 그 아들이 또 다시 저지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말입니다.  

 

헨리 3세가 마그나 카르타를 백지화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며 다시 왕과 귀족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이 때 헨리 3세에게 반발하던 귀족들을 이끌던 인물이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인데요. 이름만 들으면 영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 같죠? 프랑스계 잉글랜드 귀족이었던 그는 잉글랜드 내의 다른 유력 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진격해 헨리 3세를 압박했고, 헨리 3세가 여기에 굴복하자 그에게 군주의 자의적인 통치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긴 옥스포드 조례에 합의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1258년 헨리 3세는 결국 아버지가 그랬듯 귀족들이 제시한 옥스포드 조례에 합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왕권은 15명의 귀족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넘어가게 되었구요. 이 귀족 위원회의 대표인 시몽 드 몽포르는 왕권을 제한하고 귀족 지배를 제도화하고자 귀족, 성직자, 도시 대표로 구성된 통치 기구를 출범시켰습니다. 위원회는 재판권을 갖는 동시에 왕이 걷던 세금을 수납하는 새로운 관청을 설립하고 고위관리들을 임명할 권리도 가졌으니 사실상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고 봐도 되겠죠?   

 

하지만 훗날의 다른 혁명 정부들이 흔히 겪게 되는 문제점들이 이미 몽포르 정권에서 예고되고 있었습니다. 개혁의 수준을 두고 정권 내부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거죠. 시몽 드 몽포르는 왕을 연금하고 위원회에 평민 대표를 참여시키는 급진적인 개혁을 원했지만 이러한 급진성은 일부 다른 봉건 귀족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개혁을 주도한 귀족들 사이에서 미묘한 불화가 감지되자 헨리 3세도 다시 한 번 복귀를 시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헨리 3세의 복귀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1세는 시몽 드 몽포르를 제압하고 다시 권력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죠. 

 

에드워드 1세가 다시 국정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니 지금까지의 개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몽포르가 설립한 귀족위원회에 각 지방의 하급 기사들과 성직자들을 포함시켜 강력한 귀족들을 견제하는 용도로 활용했죠. 모범 의회라고 불리우는 이 당시의 의회는 귀족 위원회는 상원, 하급 기사와 성직자들의 의회는 하원으로 발전해서 오늘날 영국의 의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한편 왕실 재판소를 설립하고 귀족들을 관료로 임명해 사법제도를 정비하기도 했죠.

 

 

프랑스의 삼부회

 

카페 왕조가 전성기를 누렸던 필리프 2세 이후 손자인 성왕 루이 9세는 필리프 2세가 확장한 영토를 기반으로 대내적 안정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법학자들을 고용해 왕실 내에 재판소를 마련하고 이것이 좋은 호응을 얻자 항구적인 고등법원을 설치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영국이 근대적인 의회의 밑바탕을 마련했다면 프랑스는 법원을 마련한 거죠. 그리고 단지 법원 마련한 데에 그치지 않고 전근대적인 신성재판을 금지해 합리적인 재판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신성재판은 뭘까요? 중세의 재판이라고 해서 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날에 비해 과학적인 증거 수집 방법이나 체계적인 사법 절차가 마련되기 전인 당시에는 피고인의 죄를 밝혀내기 위해 신에게 유무죄를 묻는 방식이 빈번히 사용되었는데요. 그 방식이 좀 황당합니다. 피고인을 물에 빠뜨리거나 불 속에 집어넣어서 그가 다치지 않고 살아남으면 신께서 그의 결백함을 보여주시는 거다, 라고 생각해서 그의 무죄를 인정해주는 방식이죠. 물론 무죄를 인정받는 일은 거의 없었겠지만요. 또 양자 간의 잘못을 다투는 재판에서는 결투를 벌여 승리하는 쪽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는 결투재판 역시 신성재판의 한 종류라고 합니다. 

 

루이 9세의 초상화
성 루이 성경으로 알려진 톨레도의 도덕 성경(Moralized Bible of Toledo)에 실린 루이 9세의 초상화

 

한편, 루이 9세가 마련한 기틀을 바탕으로, 그의 손자인 필리프  4세는 보다 본격적인 관료제를 마련했습니다. 기욤 드 노가레, 앙게랑 드 마리니 같은 부르주아 출신의 전문 관료들을 중용해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귀족과 고위 성직자 세력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죠. 물론 그 전에도 많은 군주들이 중앙집권화를 추구했지만 이러한 시도가 모두 봉건제의 틀을 깨지 못한 것들이었던 반면에, 필리프 4세는 봉건제적 질서를 해체하고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확립하고자 새로운 제도와 기구를 설치하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 덕분에 훗날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일찍 중앙집권체제를 도입하며 유럽의 최강국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곧 귀족, 성직자 세력과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은 프랑스 왕의 봉신인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은 아키텐 공국의 공작이기도 한데요. 양측은 아키텐 공국 내의 가스코뉴 지방을 두고 다툼을 벌였습니다. 결국 뚜렷하게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평화협정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긴 했지만요. 한편, 필리프 4세는 플랑드르 백작과도 무력 충돌을 빚었지만 플랑드르에서는 상당한 영토를 자신의 직할지로 얻어내며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에는 막대한 전비가 소모됩니다. 필리프 4세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했는데요. 그러자 이번에는 당시 교황이었던 보니파시오 8세가 여기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필리프 4세는 교황청의 승인 없이 스스로를 프랑스의 황제로 칭하며, 교황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동등한 권위를 갖고자 했던 터라, 안 그래도 교황은 그를 도끼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필리프 4세와 교황 보키파시오 8세는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과의 대결에 앞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1302년, 에드워드 1세의 모범의회와 유사한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도시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모범의회처럼 실질적인 의결기관에는 미치지 못한, 일종의 자문기구였지만 그래도 도시 대표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면에서는 과거보다는 진일보한 모습입니다. 

 

언뜻 보기에 삼부회는 오히려 왕권을 강화시키기보다는 견제하는 기구 같은데 필리프 4세는 왜 삼부회를 설치한 걸까요? 또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삼부회에 귀족 세력을 포함하는 것도 이상하구요.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자신의 권위를 보완해줄 자문기관으로 생각하고 설치했습니다. 교황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앞두고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뒷받침해줄 각 계층의 인사들을 모은 것이죠. 그래서 회의도 왕명에 의해서 소집되구요. 훗날 절대왕정이 꽃피던 시기에는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내적인 준비를 마친 필리프 4세는 1303년 측근인 기욤 드 노가레를 보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기습적으로 납치해서 아나니의 교황 별장에 가두었습니다. 일명 아나니 사건이라 불리우는 사건인데요. 교황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납치 사건의 충격으로 얼마 안 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적이었던 교황이 사라지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인인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세우고 1309년, 신성로마제국이 로마를 점령하자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죠.

 

조금씩 왕권을 강화해오던 카페 왕조는 필리프 4세 때에 이르러 전에 없이 강력해졌습니다. 반대로 교황권은 추락했겠죠? 교회에서는 교황청이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오게 된 이 사건을 헤브라이인들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라고 불렀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1세가 몽포르 정권을 몰아내며 권력을 되찾고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4세가 귀족과 교황청을 제압했으니, 양국은 이제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플랑드르와 아키텐 문제를 풀기 위한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