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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등장과 영국 프랑스의 의회제도

스칸디나비아 세계에 찾아온 변화

 

지금까지 서양사에서 보여준 바이킹족들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정복왕 윌리엄이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얘기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요. 이미 그 전에 루앙에 터를 잡은 롤로와 그의 후손들,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한 크누트 대왕, 러시아의 역사를 연 류리크,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던 루지에로 1세까지 중세까지의 서양사에서 바이킹족들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더라구요. 그런대 정작 이들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은 이 때까지도 사실상 변방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렇게 노르만족이 모험을 떠나고 인구가 대거 줄어든 스칸디나비아 일대는 소왕국이 난립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이 잦아들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12세기 쯤이었죠. 그 사이 북유럽의 토착신앙을 신봉하고, 영주도 기사도 없는 비교적 평등한 부족사회였던 스칸디나비아 세계에도 점차 서유럽의 문물이 전파되면서 크리스트교가 받아들여지고 봉건제가 차츰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요. 그래서인지, 변화는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제일 가까운 덴마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발전한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제일 먼저 국가가 형성된 곳은 지금의 덴마크 지역이었습니다. 블루투스라는 상표명의 기원이 된 하랄 1세 블로탄이 970년 경 덴마크와 노르웨이 일대에 통일 왕국을 건설한 이래로 그의 아들인 스벤 1세와 손자인 크누트 때에는 잉글랜드에도 크누트 왕조를 세우며 한때 북해 제국이라고도 불리우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것인데요. 그런데 이 제국이라는 게 제대로 된 체제를 갖춘 나라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나라가 느슨하게 뭉친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대의 서유럽의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낙후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북해 제국도 얼마 안가 무너지고 이 일대는 다시 혼돈 속으로...

 

크누트 왕조의 북해 제국은 크누트 대왕의 사후, 얼마 가지 못해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잉글랜드는 참회왕 에드워드가 다시 왕좌를 차지하며 웨식스 왕조가 복원되구요.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는 각각 다른 왕조가 들어선 것인데요. 덴마크에서는 1047년 에스트리드 왕조의 첫번째 왕인 스벤 2세가 즉위해 왕권과 교회 체제의 강화를 위한 각종 개혁을 단행하고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힘쓰며 나라도 잠시 안정을 찾는 듯 했습니다. 

 

사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이 워낙 두드러져보이다 보니 왕권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교회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싶었는데요. 이 지역에서도 처음에는 크리스트교가 왕권 강화, 중앙집권화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속도는 매우 느렸죠. 하랄 1세 블로탄이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선포한 게 965년 경이었는데, 민중들 사이에서 크리스트교가 깊숙이 자리잡기까지는 200 - 250 여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하니까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사실 강력한 왕권의 등장을 가장 경계했던 것은 지방의 유력한 귀족들이었습니다. 스칸디니비아 사람들이 아직 작은 부족 단위로 모여 살던 시절에는 부족장이었던 사람들이었겠죠? 부족 사회에서 북유럽의 전통 신앙을 고수하던 이들은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각 지방에 교구를 세우며 권력을 장악하려는 왕의 등장이 여간 싫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크리스트교 수용은 단순히 종교의 전파가 아니었습니다. 스칸디아비나 세계가 마침내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의 길을 따라갈 거라는 의미였죠. 

    

스벤 2세가 사망한 뒤 왕위는 그의 다섯 아들들이 형제 상속을 하며 차례대로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형제 상속을 하던 시기부터 암살과 반란이 난무하던 왕실에서는 마지막 다섯째 아들이 재위하던 시기에 이 형제의 아들끼리의 왕위 다툼으로 덴마크는 대혼란의 시기에 빠져드는데요. 이 혼란은 대를 거듭해서 또 그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결국 이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1157년, 스벤 2세의 증손자인 발데마르 1세가 즉위하면서부터였습니다.  

 

오랜 혼란기를 종식시칸 발데마르 1세는 곧 지방 세력을 억제하는 한편 전략적 요충지에 요새와 성곽을 건설해 중앙집권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당시 덴마크의 해안가에 출몰하던 슬라브족의 한 일파인 밴드족을 토벌해 이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켰죠. 그 결과 덴마크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포메른 지방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발데마르 1세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각 지방의 대주교들과 협력해 지방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크누트 라바르를 성인으로 시성해서 왕실의 권위를 종교적으로 강화한 거죠.

 

나라가 커졌으니 이제 나라 밖으로도 좀 목소리를 높여볼만 했습니다. 발데마르 1세는 즉위 초만 해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봉신을 자처했었는데요. 국내 상황이 안정을 보이자 당시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청 간에 벌어지던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하며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해냈습니다. 이제 막 나라가 안정되었을 뿐인데, 덴마크는 이미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대륙의 거대한 제국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한 나라가 되었네요.

 

발데마르 1세의 사후 덴마크의 왕위는 그의 아들인 크누드 6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다시 덴마크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덴마크를 침공했는데요. 크누트 6세는  이 공격을 잘 막아내 위기를 넘기고 도리어 포메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시기 북방 십자군 결성에 앞장서서 에스토니아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했죠. 

 

북방 십자군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은  발트 십자군이라고도 불리우는데요. 서유럽의 십자군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꾸려진 원정대였다면 이들은 북유럽 지역, 특히 발트해 인근 지역의 이교도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기 위해 결성된 군대였습니다. 이 이교도들이란 이슬람교 신자가 아닌, 토착 민간신앙을 신봉하는 발트족, 핀족, 슬라브족 원주민들이었죠. 이 북방 십자군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지도자들은 물론 튜튼 기사단 같은 독일 기사단들도 참여했습니다. 

 

남쪽으로는 지금의 독일의 엘베 강 유역, 동쪽으로는 에스토니아 지역까지 진출하며 세력을 크게 확대한 크누드 6세는 한때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두고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벨프 가문 출신의 작센,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딸과 결혼했지만 후사를 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후에 왕위는 동생인 발데마르 2세가 차지했죠. 하지만 재위 기간 동안 덴마크에서는 잠잠했던 귀족들의 반란이 잦아지더니 그의 사후에는 왕위를 둘러싼 왕족들 간의 유혈 충돌로 정국은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다른 바이킹들

 

 

 

 

영국의 모델의회

 

영국에서는 윌리엄 1세가 노르만 왕조를 성립한 이후 십자군 원정을 거치면서 왕권이 무너지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마그나카르타가 선포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플랜태저넷 왕조 때에는 독립국으로서의 지휘가 약화되면서 프랑스 앙주 왕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봉신이 되었습니다. 다만 영국에서는 봉건제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프랑스 봉건제가 겪어야 했던 폐해를 거치지 않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를 거쳐 왕이 귀족 세력에 굴복하자 영국의 귀족들은 대륙의 봉건제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군주인 영국 왕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는 이에 저항해 왕권을 다시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헨리 3세는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수복한다는 구실로 국내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며 다시 왕과 귀족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1258년 귀족들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헨리 3세는 귀족들이 제시한 옥스포드 조례에 합의하면서 왕권은 15인의 귀족위원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귀족위원회의 대표인 시몽 드 몽포르는 귀족지배를 제도화하고자 귀족, 성직자, 도시대표로 구성된 통치기구를 출범했는데, 이 기구는 오늘날 영국의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원래 몽포르를 지지했지만 귀족위원회가 제도화될 조짐을 보이자 몽포르를 제압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헨리 3세의 사후 왕위를 이은 에드워드 1세는 왕실재판소를 설립하고 귀족 관료를 임명해 사법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로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영국은 ‘앙주의 멍에’에서 벗어나 국제를 확립하고 영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몽포르의 귀족위원회에 각 지방의 하급기사들과 성직자들을 포함시켜 귀족의 권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모델의회로 불리우는 이 기구에서 훗날 귀족위원회는 상원으로, 하층기사들과 하급성직자들은 하원으로 발전했습니다. 

 

 

프랑스의 삼부회

 

카페 왕조가 전성기를 누렸던 필리프 2세 이후 손자인 성왕 루이 9세는 필리프 2세가 확장한 영토를 기반으로 대내적 안정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법학자들을 고용해 왕실 내에 재판소를 마련하고 이것이 좋은 호응을 얻자 항구적인 고등법원을 설치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영국이 의회를 마련했다면 프랑스는 법원을 마련한 것입니다.

 

루이 9세의 초상화
성 루이 성경으로 알려진 톨레도의 도덕 성경(Moralized Bible of Toledo)에 실린 루이 9세의 초상화

 


한편 루이 9세는 대외적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황제권과 교황권의 다툼과 영국의 헨리 3세와 귀족들 간의 다툼에도 관여해 프랑스의 이익을 반영한 중재안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툴루즈, 랑그도크, 프로방스 등 현재의 프랑스 남부를 획득했습니다. 북부와는 문화적으로 이질감이 있었던 남부 프랑스의 통합으로 오늘날의 프랑스 역시 남부를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헨리 3세와는 파리 조약으로 아키텐의 일부인 가스코뉴를 영국에 내어주는 대신 영국 왕의 충성서약을 받아 양국의 관계를 향상시켰습니다. 프랑스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영국 왕실과 좋은 관계를 맺은 사례였습니다.

루이 9세의 아들인 용담왕 필리프 3세는 툴루즈와 푸아투에 작게 남아있던 영국령을 접수해서 이제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는 가스코뉴만 남게 되었습니다. 필리프 3세의 동생 미남왕 필리프 4세는 스스로를 프랑스의 황제라 선언하고 플랑드르와 아키텐의 영유권을 두고 에드워드 1세와 대결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고자 성직자에게 과세를 하며 교회의 반감을 샀습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그가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한 시점에 이미 반감을 가졌는데 교회에 세금까지 징수하자 결국 대립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목상이지만 로마 교황이 임명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과의 대결에 앞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에드워드 1세의 모델의회와 유사하게 1302년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도시대표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내적인 준비를 마친 필리프 4세는 1303년 측근인 노가레를 보내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납치하여 아나니의 교황 별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시민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결국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정적이었던 교황이 죽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인인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세우고 1309년에는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습니다. 그 결과 영국에 이어 프랑스의 왕권 역시 전에 없이 강력해졌고 반대로 교황권은 추락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이 사건을 헤브라이인들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라고 불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플랑드르와 아키텐 문제를 풀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