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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중세 말 즈음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러시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성립

 

대공위시대 

  

다시 13세기 중반 독일로 가볼까요? 124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소위 대공위시대가 열렸습니다. 제위가 비어있는 시기가 20년 동안 이어진 것인데요. 당연히 그러는 사이 신성로마제국의 중앙집권체제도 크게 약화되었겠죠? 그래서 프리드리히 1세 시절 한때나마 강력했던 황제의 권한 역시 크게 축소되었고, 이 때를 틈 타 독일 각지의 유력 제후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위가 비어있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아무도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가장 정통성 있는 후보인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콘라트 4세가 출마하기도 했구요. 독일의 대립왕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헬름 2세도 제위에 도전했습니다. 보헤미아의 왕인 동시에 오스트리아 지역의 강력한 귀족인 오타카르 2세도 나섰죠. 이들은 모두 독일 지역의 유력한 제후들이었지만 사실, 이 시기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독일의 제후들에게 그다지 인기있는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영지 안에서만큼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던 귀족들에게는 이름만 황제일 뿐 실질적인 권한은 별로 행사할 수 없는 이 자리가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았던 거죠.   

  

반면에,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가 비어있다고 하니, 독일 밖에서는 이 자리를 한번 차지해보고 싶은 도전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우선, 이탈리아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던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가 모계 혈통을 근거로 황제 선거에 출마했는데요. 이는 모친인 베아트릭스 왕비가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인 것을 내세운 거였죠. 잉글랜드의 왕인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도 출마했습니다. 마침 유럽 대륙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헨리 3세도 잘해보라며 동생을 지원해주었구요. 또 시칠리아 왕이자 앙주 백작인 카를로 1세도 제위에 도전했습니다.  

  

근데, 외국의 군주들은 왜 독일의 제후들이 마다한 신성로마제국의 제위에 욕심을 내었던 걸까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이 가졌던 강력한 통치권을 갖기 어렵다는 걸 몰랐던 걸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도 분명 강력한 제후들이 할거하던 독일 지역의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독일의 제후들이 원하는 것과는 달랐죠. 그들은 황제로서의 실권보다는 '교황이 인정하는 제위'라는 상징적인 의미, 유럽의 여러 나라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존재하는 황제라는 명예에 더 욕심을 냈습니다.

 

한편, 외국인 군주가 제위를 차지하는 것은 마침  독일 내 제후들의 이해관계와 상당히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 지역 내에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중앙집권적인 황제가 등장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독일 지역 내의 물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면, 그리고 적극적으로 통치하려는 의욕이 없다면, 독일의 제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입맛대로 황제를 쥐락펴락하기 쉬웠겠죠? 여기에 황제의 특수관계인인 교황까지 끼여들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성립되기 전까지 20 여년 간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표류하게 됩니다. 

   

미약한 시작 

  

사실 당시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의 유력 제후들의 가문에 비해 별로 특별할 게 없는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현재의 스위스 취리히 근처인 아르가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백작 가문이었는데요. 합스부르크는 '매의 성'이라는 의미하고 합니다. 10세기에 처음 성립된 이래로 이 집안 사람들은 12-13세기 내내 여러 번의 원정에 참여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충성을 보여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해왔죠.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 선거에 보헤미아의 왕인 오타카르 2세가 출마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지역 내의 유력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전해줄 대항마를 물색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권위를 억압할만큼 강력하지 않으면서도, 위협적인 영향력을 가진 제후인 오타카르 2세의 당선을 막을 수 있는 후보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4세를 출마시켰는데요. 이렇게 해서 1273년, 루돌프 4세는 루돌프 1세라는 이름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죠.  

  

당시 오타카르 2세가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은 오늘날의 체코에 위치한 나라로 풍부한 금, 은 매장량을 바탕으로 광산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빠른 속도로 부를 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독일 지역의 제후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새롭게 즉위한 루돌프 1세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오타카르 2세가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일대로 진입해서 그를 쫒아내 그 지역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분봉했습니다. 그리고 빈을 합스부르크 왕조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았죠.

  

또한 루돌프 1세는 그 전까지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과는 다르게 이탈리아로의 확대 정책을 포기하고 독일 지역에만 집중하기로 합니다. 독일 지역 내의 황제파 세력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교황청으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겠죠? 그는 독일 내 제후들과의 타협으로 내정을 안정시키고, 교황청과의 관계도 개선하면서 분열과 내전으로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던 독일 지역 내의 질서를 상당 부분 회복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신성로마제국을 순식간에 프랑스 같은 중앙집권체제 국가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아들에게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시키는 데에 실패했죠. 제위는 또 제후들간의 선거를 통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갔다가 6대가 지난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고나서야 왕조가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독일 지역 내의 귀족들의 영지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시작된 이후로도 여전히 통일되지 못하고 오히려 영방체제가 굳어졌습니다. 독일 전체에서 황제의 직속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남부의 슈바벤과 바이에른 일대 뿐이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여전히 영방 체제로 느슨하게 묶여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발트 해와 북해에 면한 도시들은 한자동맹을 형성하면서 독일의 다른 영방국가들과는 결이 다른,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죠.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는 영방국가의 제후들은 모두 독립된 군주들이며 황제 선출이나 공동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만 함께 모여 논의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수립되었지만 제위가 당연하게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세습된 것은 아니었죠.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독일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방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으니 이들의 권한은 여전히 막강했겠죠? 오히려 독일 역사에서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당시의 세습제가 이례적인 일이었던 거죠. 

 

보헤미아의 왕 바츨라프 4세의 의뢰로 제작된 금인칙서 필사본의 한 페이지. 1400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

  
이러한 선출 방식은 독일의 제후들이 황제의 권한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해왔던 것이었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특별한 원칙없이 황제가 선출되는게 좀 불안하다는 것이었죠. 황제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원칙도 없이 제후들에 의해서 황제가 선출되다 보니 여러 명의 대립왕이 난립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관습적으로 인정해오던 선제후들을 법에 명시하고자 1356년 금인칙서를 제정했습니다.

 

금인칙서에서는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들을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 세명과 작센 공작, 라인팔츠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으로 한정지었습니다. 이 선제후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사법권, 징세권, 화폐주조권을 보장받았죠. 왕과 다름 없는 권한이죠? 이렇게 각 선제후들의 권리가 공식적으로 정해지자 이들의 지위와 특권은 더욱 공고해진 반면에 황제 선출방식이 문서로서 정해지자 정치적 대립과 혼란이 잦아든 것과는 별개로 독일의 분권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후스 전쟁

   

루돌프 1세 이후 합스부르크 왕국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루돌프 1세가 새로운 왕조를 열고 내정의 혼란을 수습했지만 스의 사후 제위는 그의 아들이 아닌, 다른 가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너무 확장될 것을 경계한 선제후들이 다른 가문 출신의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죠. 이 시기에 등장한 주목할만한 군주로는 룩셈부르크 왕조의 카를 4세가 있습니다.  

  

이름은 룩셈부르크 왕조이지만 카를 4세는 본래 보헤미아의 왕이었습니다. 거기서는 카렐 1세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1355년 황제로 선출된 이후 직접 군사를 지휘해 독일의 서쪽과 남쪽의 여러 도시들로 황제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넓어진 영토를 주기적으로 순례하며 통치력을 강화했습니다. 특히 군사적 요충지인 프라하와 뉘른베르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 두 도시들을 크게 성장시켰죠. 프라하에는 프라하 대학을 설립했는데 이 때 이후로 빈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등 독일 내의 다른 도시에도 대학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카를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제위는 아들인 지기스문트가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치세 동안에는 훗날 유럽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종교개혁에 불씨를 당긴 발생하는데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끌기 100여년 전, 보헤미아 왕국 출신의 신학자인 얀 후스가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다가 사형에 처해지자 이에 반발한 후스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얀 후스가 주장했던 것은 교회의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돌아갈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성직자들이 과도한 권위를 갖는 것에 반대했는데요. 특히 당시까지 성직자들만 참여할 수 있었던 성찬식 의식을 평신도에게도 허락해줄 것을 요구했죠. 이는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결국 화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후스 전쟁은 프라하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귀족과 평민 가릴 것 없이 보헤미아인의 대부분이 후스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후스파 세력은 얀 지슈카를 비롯한 보헤미아의 걸출한 명장들의 지휘를 받아 연전연승으로 교황과 황제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종교 전쟁이 아닌, 계층을 초월해 보헤미아인의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고 기득권의 철폐를 통해 사회 개혁을 시도하는 혁명이 되어가고 있었죠.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후스파도 분열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이 중 온건파가 먼저 평신도의 성찬식 참여를 보장해줄 것을 조건으로 교황청과 합의를 이루었고, 급진파는 저항을 계속했지만 분열로 세력이 크게 쪼그라들자 전투에서 밀리면서 소멸되었죠. 이렇게 해서 1434년 후스 전쟁도 막을 내립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부상

  

1437년, 지기스문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를 마지막으로 룩셈부르크 왕조도 단절됩니다. 그러자 독일 선제후들은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했는데요. 이 때를 기점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비로소 왕위를 세습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로서 그의 제위를 이은 막시밀리안 1세는 독일 지역의 남부에서 빠르게 황제의 권위를 확대시키며 여러 영방국가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는 데에 성공했죠. 이렇게 해서 그의 시대에 독일 지역에서는 북부의 프로이센과 남부의 오스트리아가 가장 강력한 두 나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당시 독일의 각 영방 국가들은 고유의 행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요. 합스부르크 왕조는 에스파냐의 왕실을 비롯한 외국 왕실과의 적극적인 혼인 정책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켰고 그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심 도시인 빈 역시 유럽의 주요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위치도 유럽 한 가운데에 있으니 사방으로 진출하기도 좋구요. 아니나다를까, 빈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는 유럽 각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자국의 문화와의 융합을 추구하며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문화적 전성기를 마련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부르군트 왕국과 혼인 동맹을 맺어 정치적, 군사적으로 황제의 영향력을 확대했는데요. 당연히 선제후들을 비롯한 독일의 영방 제후들은 이러한 상황이 불만스러웠겠죠? 아무리 그가 이상적인 군주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권력을 추구한다면 결코 가만히 두고보기만 해서는 안될 일이니까요. 특히 남부와 서부의 제후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의 입장에서는 또 다시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도를 통해 국내 정치의 불안정을 해소하고자 영방주의의 틀 안에서 제국 의회를 개혁했습니다. 그는 제후들의 영향력을 일정 수준 인정해주기 위해 제국의 대법원을 황제가 아닌, 제국의 법정으로 개혁하고 제후들로 하여금 제국의 법정의 재정을 담당하고 그들이 재판을 통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시 옛날과 같은 분열과 대립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대신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죠.  

  

이렇게 되자 황제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을 우려한 영방 제후들은 1500년 아우크스부르크에 모여서 영방주의에 바탕을 둔 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로써 독일은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아닌 영방을 토대로 구성된 제국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죠. 근데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제국의 모든 행정이 영방제후들이 결성한 위원회를 통해 결정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각 제후들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수싸움 때문에 이 위원회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칼마르 동맹과 한자동맹

 

칼마르 동맹

 

한편, 늦게나마 통일 왕국을 이루고 유럽 대륙으로부터 크리스트교를 도입한 스칸디나비아 3국은 14세기를 전후해 공통의 경쟁자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북부에서 활발한 무역활동을 통해 빠른 속도로 상장하고 있던 한자동맹 도시들이 바로 그들이었는데요. 당시 독일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영방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들 한자동맹 도시들은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뤼벡과 함부르크, 브레멘, 쾰른 등이 그런 도시들이었구요. 리가, 탈린 같은 신성로마제국 밖의 도시들도 있었죠. 지중해에는 이탈리아의 해상무역 도시들이 있었다면 북해와 발트해에는 한자동맹도시들이 있었달까요. 

 

우선 발데마르 2세의 사후 또 다시 귀족들간의 치열한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던 덴마크에서는 1340년, 발데마르 4세가 등장해 사태를 어느 정도 수습했습니다. 당시 한자동맹의 도시들은 점점 자신들의 세력권을 넓혀가면서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을 압박했는데요. 당시의 해상무역이란 상당한 수준의 해상군사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한자동맹의 성장은 덴마크에게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군사적 위협으로도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이들은 1360년대 내내 벌어진 전쟁에서 덴마크를 압도하며 막강한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1375년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한 후 덴마크에서는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와 결혼했던 마르그레테 1세가 아들 올루프 2세로 하여금 왕위를 있게 하고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호콘 6세가 사망한 뒤에는 그를 노르웨이에서도 즉위시켰죠. 이 때의 이름은 올라프 4세입니다. 그런데 그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마르그레테 1세는 자신이 직접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망누스 4세 (노르웨이에서는 망누스 7세)가 통치하던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동군연합은 그의 다음 대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의 사후에 스웨덴의 왕위는 장남인 에리크 12세가, 노르웨이의 왕위는 차남인 호콘 6세가 차지하게 된 건데요. 스웨덴에서는 그때까지도 영토를 둘러싼 귀족들간의 치열한 대립으로 여전히 내정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망누스 4세에게 반발하던 일부 귀족들이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를 데려와 스웨덴의 왕으로 옹립하면서 반란을 일으키는 한편, 이에 반발하던 다른 귀족 세력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실권을 쥐고 있던 마르그레테 1세를 옹립했죠. 이러게 해서 결국 스웨덴의 왕위도 마르그레테 1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당시 서유럽에서는 각국이 개별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애쓰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류에 영향을 받은 스칸디나비아 세계에서도 통일 제국이 계속 유지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칸디나비아 3국의 통치자였던 마르그레테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영방체제를 모방한 느슨한 연합을 구상했는데요.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칼마르 동맹이었죠. 그는 1397년 칼마르에서 세 나라간의  동맹을 선포하고 외종손인 에리크 7세 (노르웨이의 에리크 3세, 스웨덴의 에리크 13세) 가 세 나라의 공동 왕위를 잇게 했습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권은 자신이 계속 행사했지만요.   

 

스웨덴의 귀족들은 북해와 발트해 지역에서 한자동맹 도시들과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라이벌인 한자동맹 도시들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을 본 스웨덴 귀족들은 칼마르 동맹을 통해 다른 스칸디나비아의 해상세력들과 연대해 한자동맹 도시들을 견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동맹을 받아들였죠. 이웃국가인 덴마크가 한자동맹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했던 것도 큰 교훈을 주었구요. 

 

하지만 이 동맹은 어디까지나 세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던 동맹이었습니다. 동맹을 주도했던 덴마크가 다른 두 나라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거나 과도한 정치적, 경제적 부담을 떠안기려는 시도를 하자 두 나라의 귀족들은 즉각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죠. 그렇다고 덴마크가 이러한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만한 압도적인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칼마르 동맹은 50년 정도밖에 존속하지 못했구요. 덴마크에 올덴부르크 왕조가 성립되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한자동맹의 성장과 쇠퇴

 

한자동맹 얘기가 나왔으니 한자동맹에 대해서도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한자'라는 이름 때문에 중국문자인 한자와 독일의 해상무역도시들이 무슨 관련일까, 했는데 한자라는 단어는 옛 독일어의 상인길드를 의미하는 'Hanse' 에서 기원한 거라고 하네요. 12세기 말 해적이나 도적들에 의한 약탈, 또는 해상사고 등으로 인한 불안정한 해상 환경으로부터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독일 북부의 두 도시인 뤼벡과 함부르크가 동맹을 맺은 게  시작이라고 합니다. 함부르크는 지금도 독일 최대의 항구도시이지만 그 옆의 뤼벡은 이제 인구 20만 정도의 중소도시가 되었네요.    

  

시작은 그 두 도시였지만 한자동맹은 14-15세기가 되면 200여 개의 도시들이 너도나도 가입하면서 유럽 북부 전역에 걸쳐 동맹도시들을 거느린 거대한 해상세력이 됩니다.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잉글랜드의 런던, 플랑드르의 브뤼헤, 노르웨이의 베르겐, 라트비아의 리가 등 독일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도시들까지 이 동맹에 합세했죠. 물론 이들은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거니까 국가처럼 중앙정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동맹에 가입한 각 도시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원해 공동대응에 나서는 등 유럽 북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동맹도시들이 빠르게 늘어나자 한자동맹은 곧 북해와 발트해 전역에 걸쳐 주요 해상무역로를 장악했습니다. 각 도시들은 '콘토르'라고 불리우는 회관을 설립해서 상인 공동체를 지원하고 여러 무역 상대국들과 무역독점이나 면세, 치외법권 등 다양한 특혜에 대해 협상을 벌였죠. 필요할 때면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구요.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어 여러 인접국가들의 정치적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 등이 한자동맹과 치열한 무역분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이 다루던 품목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양모, 러시아의 밀랍이나 모피,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목재와 생선, 플랑드르의 모직물 등이 주요 품목들이었구요. 이들의 무역로를 따라 다양한 유럽 국가들의 예술, 건축술, 수공업 기술, 금융제도 등이 전파되기도 했습니다. 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자 도시에는 고딕 양식의 시청이나 교회, 콘토르 건물들이 들어섰구요. 그러면서 중세의 도시 문화 발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죠. 

 

하지만 이렇게 북해와 발트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한자동맹도 15-16 세기에 들어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고 네덜란드나 잉글랜드 같은 강력한 해상국가가 부상하자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일단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대서양 항로가 개척되어 북해와 발트해의 여러 항로들이 쇠퇴하기 시작했구요. 최신의 조선술과 항해술로 무장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가 한자동맹 세력을 압도하며 새로운 해상 패권 국가로 떠올랐죠. 반면에 주로 독일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한자동맹 도시들은 신성로마제국의 영방체제 하에서 별다른 국가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알아서 잘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잘 똘똘 뭉쳐야 하는데, 애초에 중앙정부가 없는 느슨한 형태의 동맹체제였던 한자동맹 도시들은 점차 각자도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각 도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권력 다툼 같은 내부 갈등이 심화되는데, 이를 중재해줄 조정자는 없었죠. 전성기 시절에는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던 동맹 도시들 간의 공동대응도 점차 뜸해지고, 때마침 유럽 각국에서는 중앙집권화와 국민국가로의 가속화가 이루어지면서, 한자동맹들이 누리던 각종 특권들도 하나씩 거두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각국의 무역 통제와 중상주의 기조가 강화되던 가운데 유럽 한가운데에서 터진 30년 전쟁은 마침내 한자동맹에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타타르의 멍에

 

여러 개의 봉건 국가들이 분립해있던 유럽과는 다르게 아시아에서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몽골이죠. 몽골, 하면 한국 사람인 저에게는 뭔가 친근한 느낌이지만... 그건 매우 최근의 일이고, 이 당시의 몽골의 침입은 유럽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던 대재앙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그 옛날 훈족의 침입이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채찍'이었다면, 몽골의 침입은 '신의 형벌'로 일컫어졌다고 하네요.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발생한 몽골은 원래 여러 부족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흉노, 돌궐, 위구르 등 초원지대를 호령하던 여러 유목민족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13세기 초에 들어 위대한 정복군주 징기즈 칸이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초원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막강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는 능력 위주의 인재 발탁과 군사와 행정제도의 개혁을 통해 내정을 다진 뒤 민첩한 기동력을 갖춘 강력한 기병대를 양성해 곧 본격적인 정복활동에 나섰습니다. 

 

빠른 기동력과 단단한 조직력을 갖춘 몽골군은 단숨에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서역을 통해 동서무역로를 점령하고자 서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하, 호라즘을 넘어 금새 러시아까지 도달했죠. 그리고 그렇게 획득한 방대한 영토는 칭기즈 칸의 자손들에게로 나뉘어졌습니다. 마치 프랑크 왕국이 세 개의 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듯이 몽골 역시 네 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진 것인데요. 그 중  키예프 공국을 비롯한 여러 슬라브계 공국들이 위치한 곳을 정복한 게 킵차크 칸국, 징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분봉받은 칸국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에서는 몽골의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몽골의 서진이 러시아에서 멈춘 것은 아닙니다. 1235년 징기즈 칸의 뒤를 이은 아들, 오고타이 칸은 서역을 점령한 뒤 더욱 서진해 유럽을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오고타이 칸의 조카 바투가 이끄는 20만 명의 몽골군은 뛰어난 기동성으로 러시아 남서부의 킵차크를 정복하고 랴잔, 블라디미르, 로스토프 등의 공국들을 손에 넣었죠. 퇴각하는 러시아의 연합군을 추격하다가 어느새 키예프에 이른 바투의 군대는 키예프를 점령해버리고 1241년 슐레지엔 발슈타트 전투에서 슐레지엔과 폴란드 연합군을 무너뜨리며 동유럽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바로 코앞입니다. 

폴란드가 몽골군에게 무너졌으니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작센 공국을 시작으로 유럽 전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 때 오고타이 칸이 죽고 몽골의 다음 왕위 계승 과정에 영향력을 가진 사령관 바투가 다시 몽골로 회군하는 바람에 서유럽은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아마 오고타이 칸이 조금 더 오래 살아서 바투가 신성로마제국으로까지 원정을 계속했다면 유럽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죠. 

 

한편 몽골의 거대한 영토 중 바투가 이미 정복한 러시아 지역은 바투에게 분봉되었습니다. 그리고 바투가 그곳에 킵차크 칸국을 세우자 그의 후손들이 칸위에 오르게 되었죠.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 여러 공국들을 직접 지배하는 대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간접적으로 지배했는데요. 이 지배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무려 240년 동안이나 이어지면서 러시아 지역의 많은 공국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이 기간을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렀다는데요. 타타르는 본래 몽골이 정복한 많은 유목민족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아마도 당시 러시아 지역에선 몽골을 이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을 때라서 그런 용어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몽골의 지배는 러시아 지역의 많은 공국들을 어떻게 바꾸어놓았을까요? 240년이면 상당히 긴 세월인데 말이에요. 일단 몽골은 러시아 지역의 각 공국들로 하여금 세금을 내도록 하고 그들의 자치권은 어느 정도 인정해주었습니다. 이들 중 특히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통치에 적절히 협력하며 징세와 행정에 관한 각종 권한을 위임받으면서 힘을 키울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대공국으로 업그래이드도 합니다. 그러다 역설적이게도, 몽골이 쇠퇴하자 마침내 대몽골 투쟁의 구심점이 되어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활약을 하죠.  

  

몽골의 긴 지배기간 동안 러시아의 공국들은 유럽과의 교류가 끊어졌고 그 때문에 러시아에는 유럽식의 봉건제나 의회제도가 전래될 기회가 없었습니다. 뒤늦게나마 크리스트교와 함께 봉건제가 도입되었던 스칸디나비아 세계와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진 거죠. 대신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군주권과 그 군주를 정점으로하는 농민 수탈 구조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몽골이 물러가고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벗어난 이후에는 강력한 군주, 차르가 전제 권력을 휘두르는 제국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몽골은 러시아 지역으로부터의 수탈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행정, 군사, 조세제도를 도입했구요. 일부 몽골식의 법률체계가 러시아 지역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또한 농경 중심의 러시아 경제에 중계무역을 통한 상업을 부흥시키면서 러시아 지역의 현지 귀족들로 하여금 무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경제적 형편이 나아진 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무거운 수탈이 러시아를 짖눌렀고 몽골이 도입한 다양한 제도들이란 것들도 사실은 그 수탈을 좀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들일 테니까요. 강대국의 침략을 겪어본 나라의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느껴지는 거죠...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짧지 않았던 몽골의 지배하에도 러시아는 자신들의 정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까지 몽골은 '텡그리 신앙'이라는 전통 신앙을 간직했고, 훗날 이슬람교의 전파 이후에는 러시아 지역을 지배했던 킵차크 칸국이 이슬람교를 국교화했는데요. 그러면서도 러시아 정교회를 탄압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오히려 교회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면세를 비롯한 각종 특권을 부여해, 러시아의 귀족들과의 충성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그들의 반란을 막는 데에 활용했죠. 이 또한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살아남은 정교회는 러시아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 는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국가 발전에 밑거름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광활한 유라시아 지역을 호령하던 몽골도 14세기 말, 15세기가 되면 쇠퇴의 조짐을 보입니다. 칸위 계승을 두고 귀족들이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내전과 쿠데타가 반복되었구요. 14세기 중반에는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에 킵차크 칸국에도 큰 타격을 입혀서 생산 가능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그 사이에 티무르족을 비롯한 초원의 다른 유목민족들이 점차 힘을 키워서 몽골에 도전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몽골의 지배 하에서 힘을 키워오던 모스크바 대공국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시작은 1380년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반몽골 세력을 이끌던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이 킵차크 칸국의 대군을 대파한 쿨리코보 전투였습니다. 물론 킵차크 칸국은 다시 군대를 보내 자신들에게 반발한 러시아인들에게 보복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제 더 이상 몽골은 '신의 형벌'이 아니었죠. 그 동안 몽골에 대해 적개심을 품어왔던 러시아의 공국들이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여전히 몽골에 조공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독립의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쿨리코보 전투가 있은지 100년 후, 모스크바 대공국에서는 이반 3세가 즉위했습니다. 그는 티무르 제국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노브고로드, 트베리, 야로슬라프, 로스토프 등의 여러 공국들을 통일하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죠. 마침내 길었던 몽골의 지배가 끝나는 순간이네요... 그는 러시아 최조의 통일법전인 <수데브니크>를 편찬해 전제군주정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모스크바로 초청해  크렘린 궁과 성모승천대성당 등을 건립해 모스크바를 러시아 제1의 도시로 발전시켰습니다.  

  

한편, 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해 모스크바 대공국이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차르로 칭했습니다. 이때 생긴 '차르'라는 명칭은 20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가 붕괴될 때까지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 됩니다. 이렇게 이반 3세가 '타타르의 멍에'를 종식시키고 러시아를 통일하자 모스크바 대주교 역시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이어 러시아 정교회를 출범시키며 동방정교회의 최고자리에 올랐습니다. 모스크바가 제 3의 로마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