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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중세 말 즈음의 동로마 제국, 에스파냐

십자군 원정 이후의 동로마 제국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동로마 제국이 무너지자 그곳에서는 곧 여러 개의 나라들이 생겨나 후계자를 자처했습니다. 이들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요. 우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지역에 세운 나라들이 있구요. 본래 동로마 제국의 황족이었던 이들이 십자군의 공격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망명하면서 세운 나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동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일단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서유럽의 군주와 귀족들은 라틴 제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를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로 선출해 보두앵 1세로 즉위시켰습니다. 또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도 모두 옛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해서 조금씩 차지했는데요.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변경백이었던 보니파치오 1세는 테살로니카 왕국을, 프랑스 귀족인 빌라르두앵 가문의 조프루아 1세는 아카이아 공국을, 그리고 부르고뉴 귀족인 라 로슈 가문의 오토는 아테네 공국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모두 라틴 제국의 봉신임을 자처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는, 사실상 독립국가들이었죠. 

  

한편, 십자군에 의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로 동로마 제국의 황족과 귀족들이 주변 지역으로 망명해서 건설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일단 라틴 제국의 동쪽에는 앙겔로스 왕조의 방계 황족인 미하일 1세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건국했구요. 흑해의 남부 일부 지역에는 콤니노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인 알렉시오스 1세가 트라페준타 제국을, 그리고 라틴 제국의 동쪽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테오도로스 1세가 니케아 제국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라를 건국한 곳들이 모두 주인 없는 빈 땅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 지역의 토착귀족들과 주변의 튀르크계 토후국들, 그리고 오래도록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었지만 이제는 독립국이 된 동유럽 지역의 여러 지역의 공국들과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알아서 잘 살아남아야 했죠. 특히나 동로마 제국의 그늘 아래에 있었던 불가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기회로 삼아 크게 성장하며 주변의 신생국들을 위협했습니다.  

 

이들 중 제일 먼저 무너진 나라는 십자군이 세운 제국인 라틴 제국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동로마 제국의 옛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있으니, 수도를 수복하려고 서로 경쟁하던 동로마 제국의 후속 국가들에게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라틴 제국은 보두앵 1세가 즉위한 이래로 50년을 조금 넘긴 1261년,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을 빼앗기고 멸망합니다. 한편, 이렇게 옛 동로마의 수도를 다시 차지하게 된 미하일 8세는 팔레올로구스 왕조를 열고 다시 동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았죠.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은 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소아시아 서부, 그리스 반도의 일부 정도만 갖고 있었습니다. 영토의 크기만 놓고 보자면, 서유럽의 다른 왕국들과 비교했을 때 그냥 평범한 왕국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죠.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에게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기면서 재정은 악화되고 황족들끼리의 내부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습니다. 거기에 시리아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도 튀르크계 이슬람국가들에게 내어준 상태였죠. 콘스탄티노플은 다시 되찾았지만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오스만튀르크의 등장

 

한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그 즈음, 십자군 원정대의 주적?이었던 룸 술탄국도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13세기 전반까지 번영을 누리던 룸 술탄국에도 유라시아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고 셀주크튀르크를 멸망시킨 몽골군이 들이닥친 건데요. 사실 두 나라는 몽골의 오고타이 칸 시절까지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고 몽골이 주변국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지자 관계가 악화되었죠. 결국 양국은 1243년 아나톨리아의 동부 쾨세다그에서 충돌했고, 전투는 몽골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쾨세다그 전투에서의 패배는 룸 술탄국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룸 술탄국은 몽골의 봉신이 되어 공물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구요. 13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몰락하며 여러 군벌 세력들이 이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이런 튀르크계의 군벌을 베이라고 칭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빠르게 세력을 키워가는 베이국이 있었으니... 1299년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부에 오스만 1세가 건국한 오스만 베이국이 바로 그곳이었죠.  

   

오스만 1세는 셀주크튀르크와 룸 술탄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한 뒤 여러 베이국들이 할거하던 아나톨리아 지역을 빠르게 통합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베이인 오르한 가지는 1324년, 마르마라 해를 사이에 두고 콘스탄티노플의 남쪽에 위치한 제국의 동로마 주요거점 부르사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죠. 부르사는 아나톨리아 지역에 남아있던 동로마 제국의 도시들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상실은 동로마 제국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부르사 함락으로부터  17년 뒤인 1341년, 결국 오르한 가지는 아나톨리아의 모든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한편,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장 큰 세입이 발생하는 아나톨리아 지역을 모두 상실한 이래로 국가적 재정난이 계속되는 와중에 황족들은 제위를 둘러싸고 격렬한 내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황족과 장군들이 목숨을 잃었죠. 그렇게 내정이 엉망진창이 되는 동안 제국 전역에는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구요. 설상가상으로 1354년에는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여러 전략적 요충지의 요새들이 무너졌습니다. 한바탕 공성전을 벌여야 할 요새들이 저절로 무너졌으니 오스만 베이국에게는 뜻밖의 행운이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이렇게 국내외적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오스만 베이국은 이제 술탄국임을 선포하고 오스만튀르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지진 이후 무너진 동로마 제국의 요새들을 접수하며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성큼 다가왔죠. 마침 동로마 제국이 힘을 잃은 이후로 크게 강성했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이 때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오스만튀르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들을 집어 삼키며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기세라면 나라 꼴이 엉망진창이 된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건 한 순간일 것 같은데... 근데 마침 오스만튀르크에게도 걱정거리가 하나 생깁니다.

 

이 즈음 동쪽의 초원지대에서는 몽골계 군벌인 티무르가 징기즈칸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나타났습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며 튀르크화된 몽골인들로 이루어진 티무르 세력은 곧 티무르 제국을 건국하며 중앙아시아의 드넓은 초원지대를 장악했는데요. 서쪽으로도 세력을 넓혀오던 이들이 마침내 오스만튀르크와 마주쳐 한바탕 대결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티무르는 1402년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가 이끄는 오스만튀르크 군을 격파하고 바예지트 1세를 포로로 붙잡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붙잡힌 바예지트 1세는 가혹한 포로 대우 때문에 병들어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전투에서 패한 게 분해서 홧병이 나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러네요. 

  

바예지트 1세가 죽자, 오스만튀르크에서는 그의 아들들이 후계를 두고 내전을 벌였습니다. 내전 끝에 형제들을 제거하고 최종적으로 술탄으로 즉위한 메흐메드 1세는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내정을 안정시키느라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 수 없었는데요. 그 때문에, 동로마 제국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해도 큰 마찰 없이 비교적 온건한 정책으로 일관했죠. 어쩌면 동유럽 국가들에게는 이때가 국력을 신장시키고 단합을 도모할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난장판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국의 멸망

 

메흐메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라트 2세는 내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곧바로 서쪽으로 진격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동로마 제국은 동유럽 국가들에 도움을 구했고, 그들은 동로마 제국의 요청에 화답해 지원군을 보냈는데요. 이 때 지원군을 보낸 나라들을 보면,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이나 폴란드 왕국과 같은 동유럽 국가들 이외에도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 같은 카톨릭 국가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황청도 군대를 보냈죠. 동로마 제국이 정교회를 로마 카톨릭에 종속시키는 대가로 받은 지원군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요청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사실, 카톨릭 국가들의 입장에서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완전히 멸망해버리는 것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은 이슬람 세력 같은 이교도가 아닌, 크리스트교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동로마 제국이 없다면 카톨릭 세계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전투력을 갖춘 이슬람 세력과 바로 국경을 마주해야 하니...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거에요. 그런 와중에 마침 동로마 제국이 교회의 종속이라는 괜찮은 조건을 내걸며 도움을 청해오니 그에 응한 게 아닐까 합니다.  

  

1444년, 크리스트교 세계의 연합군과 오스만튀르크의 군대는, 지금은 불가리아의 영토인 흑해 서해안의 바르나에서 마주쳤습니다. 오스만튀르크에 비해 연합군 측이 크게 열세였기 때문에 연합군은 이미 전투 초반부터 포위를 피할 수 없었는데요. 그런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만튀르크군의 포위를 뚫는 데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폴란드 왕국의 브와디스와프 3세가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다가 전사하자 급하게 퇴각하다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했습니다. 이제 정말 콘스탄티노플의 운명도 벼랑 끝에 서게 되었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다시 한 번 교황 측에 십자군을 요청했습니다. 마치 알렉시오스 1세가 우르바노 2세에게 군대를 요청했던 것 같은 상황이죠. 그래도 그때는 서유럽 각국의 내로라하는 군주들과 귀족들이 이슬람 세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들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이제 교황의 말 한마디에 수천수만의 군대를 보내줄 만큼 교황의 권위가 강력하지도 않고, 유럽 각국이 모두 전쟁 중이거나 내전을 수습 중이라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죠. 한편, 무라트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목표로,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 1480년 작,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군대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습니다. 정확한 병력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8-16만 정도라고 합니다.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던 전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네요. 거기에는 예니체리라고 불리우는 정예병이 1만명 포함되어 있었구요. 우르반이라는 길이가 8m 가량 되는 거대한 대포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는 7천 정도의 병력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죠.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약간의 병력을 보냈지만 오스만튀르크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엄청난 병력의 오스만튀르크의 군대는 쉽사리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육지 쪽으로는 보병이 계속 성벽을 공격했지만 육지를 빙 둘러싼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워낙 견고해 웬만한 공성무기로는 성벽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구요. 해군으로는 마르마라 해의 거센 해류 때문에 도시를 향해 함선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입구에 단단하게 방어선이 둘러쳐진 금각만 안으로 함선을 진입시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공격을 감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았죠. 그래서 그들은 함선을 들어 육지를 통과해 금각만 안으로 들여보내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오스만튀르크 군은 함선을 들어 육지를 통과해 금각만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육지와 금각만 양쪽에서의 공격을 다시 시작했죠.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여전히 단단했고 오스만튀르크의 해군은 해상 공격을 하기에는 부실했습니다. 성과는 미미한데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계속 소진되자 한때 초조해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이미 결사항전을 결심한 그는 항복 권유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콘스탄티노플이 천혜의 요새인 덕분에 오스만튀르크의 대군을 버텨내고 있기는 했지만 계속되는 공격에 동로마 제국 역시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말이에요. 그들은 단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싸웠습니다. 

   

여전히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동로마 군의 어이없는 실수로 뚫리고 맙니다. 평상시에 주민들이 드나들던 작은 문인 케르카포르타가 제대로 닫히지 않으면서 그 문을 통해 오스만튀르크의 병사들이 도시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간 것인데요. 일단 오스만튀르크 병사들이 도시 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도시는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일부 병사는 끝까지 저항하고 일부 병사는 항복하는 와중에 도시 안의 주민들은 각자 몸을 피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죠. 엄청난 수의 오스만튀르크의 병사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하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습니다. 2천년이 훌쩍 넘는 거대한 제국의 역사가 마침내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워낙 중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데에다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요새 도시였기 때문에 메흐메드 2세는 이 도시로 천도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아마도 도시의 함락 과정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꼈겠죠? 군대에 약탈을 멈추도록 지시한 메흐메드 2세는 곧 파괴된 도시들을 복구하고 살아남은 도시 주민들에게는 안전을 약속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건립된 소피아 대성당은 모스크로 개축했지만 다른 정교회 사원들은 그대로 두었죠. 로마 제국의 천년 수도는 술탄의 도시로 빠르게 탈바꿈했습니다. 

 

 

레콩키스타의 끝, 에스파냐의 시작

 

비슷한 시기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카스티야 왕국는 1230년 레온 왕국을 통합한 이래로 이베리아 반도 중부의 마드리드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라곤 왕국은 그보다 더 빠른 1137년, 혼인 정책을 통해 문화적으로 상당히 다른 배경을 지닌 바르셀로나 변경백국과 통합해 아라곤 연합왕국이 되었죠. 이들은 모두 이베리아 반도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각각의 카톨릭 왕국들이었지만 이슬람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그리고 같은 카톨릭 왕국들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합 왕국을 수립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럽 대륙에서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에는 이제 세력이 많이 쪼그라든 이슬람 세계가 남았고 북부에는 서쪽에서부터 포르투갈 왕국, 카스티야-레온 왕국, 나바라 왕국, 아라곤 연합왕국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프랑스가 있구요. 그리고 이 중,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레콩키스타를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13세기 후반 십자군 원정이 끝날 즈음에는 코르도바, 세비야, 발렌시아 등 이슬람 세력 하에 놓여있었던 도시들을 모두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레콩키스타에만 매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다른 서유럽의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했던 십자군 원정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영토 회복에만 올인하는 것 같았는데, 이들 중 아라곤 연합왕국은 이 와중에도 착실하게 해상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죠. 남북으로 카스티야 왕국과 프랑스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탓에 더 이상은 영토를 넓혀갈 수 없게 되자, 지중해 서쪽 바다로 진출한 것입니다. 이들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시작으로 코르시카와 사르데냐,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 서쪽의 중요한 섬들을 점령했고, 1319년에는 그리스 남부, 1442년에는 이탈리아 본토의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카스티야 왕국에서도 뭔가 일이 생깁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바람이 이베리아 반도에도 불어닥치던 15세기 후반, 스페인의 역사를 바꿀 강력한 군주가 등장한 것인데요. 귀족들간의 치열한 권력투쟁 가운데 1474년 즉위한 이사벨라 1세가 바로 그였습니다. 즉위 전, 국왕이자 이복오빠 엔리케 4세와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고자 아라곤의 왕위계승자인 페르난도 2세와 혼인한 그는 왕위에 오르자 곧 남편과 함께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는데요.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에는 카스티야 연합왕국이라는 커다란 나라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왕국들 간의 통합은 그 전에도 여러 번 있어왔기 때문에, 단순히 두 나라가 통합했다는 것 자체는 그리 대단한 사건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새로 생긴 이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북쪽의 프랑스를 위협할 정도로 거대했구요. 또 이사벨라 1세는 이후 능력 위주의 인재등용과 과감한 사법개혁, 군사개혁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할 정도로 뛰어난 군주였습니다. 덕분에 카스티야 연합왕국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영토를 회복하기에 급급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나라 안의 모든 귀족들과 신민들로부터 충성을 약속받는 굳건한 키톨릭 통일왕국으로 거듭났죠.

    

이들의 승리는 교황에게도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비록 십자군 원정에서는 체면을 구겼지만, 그래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또 다른 십자운 원정에서는 승리한 거니까요. 그래서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는 별개로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를 예루살렘의 왕으로 봉하며 이들을 치하했죠. 유럽 대륙에서는 조금씩 교회를 향한 불만이 쌓이며 종교개혁의 시동이 걸리고 있는 상황에서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탄생은 교회에게 새로운 카톨릭 세계의 수호자의 등장을 의미했습니다. 

 

근데 또 교회의 기대처럼 이사벨라 1세는 정말 카톨릭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군주였지만 유독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교회가 기대하는 카톨릭 군주로서의 역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죠. 비록 이슬람 세력이 물러나긴 했지만, 당시 이베리아 반도 내에는 여전히 무슬림과 유대교인이 서로 어우러져 살고 있었는데요. 이사벨라 1세는 이들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본래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했던 이슬람 세력은 종교와 문화에 있어서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교도나 이슬람교도, 유대교인이 모두 각자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한데 어울려 살아갈 수 있었죠. 하지만 레콩키스타의 완성으로 한껏 고조된 종교적 열광은 이베리아 반도 내의 카톨릭 교도들로 하여금 지금껏 함께 살아가던 그 이교도들을 모두 추방하도록 부채질했습니다. 같은 거주지 내의 이교도들을 색출해 추방하거나 강제로 개종하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혹독한 종교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1492년, 마침내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나르스 왕조를 멸망시켰습니다. 약 800년 동안의 국토회복운동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으면서,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카톨릭 왕국의 땅이 된 것인데요. 문제는 워낙 오랫동안 이슬람 교도들이 이 땅에 함께 살아왔다보니 혹시라도 이들이 다시 이슬람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거였죠. 그래서 이 두 왕은 이슬람 세력이 물러간 북아프리카까지도 카톨릭 교도들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505년 아프리카 원정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원정의 범위를 두고 내부의 의견이 대립하는 사이 해적의 공격으로 원정 자체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