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의 발전
수도회는 본래 세속적 생활에서 벗어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스스로를 신께 봉헌하고자 하는 크리스트교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면서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태의 모임은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있어왔기 때문에, 이를 크리스트교만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로마 제정 말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이래로 크리스트교는 제국의 종교로서 꾸준히 지배계층의 보호를 받아왔고, 때문에 세속화되기도 했는데요. 수도자들이 세속적 생활에서 벗어나 은둔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죠.
수도회는 이집트나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의 소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사이에 활동한 은둔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안토니우스와 공주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파코미우스 모두 이집트 출신의 수도자들이었죠. 이들은 사막이나 산 속 같은, 세속적인 삶과 단절된 외딴 곳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묵상을 통해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의 전통을 처음으로 확립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수도생활은 역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서방에도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6세기에는 성 베네딕토가 설립한 베네딕토회가 처음으로 서방식 수도회의 기본적인 형태를 마련했구요. 11세기 말에 만들어진 시토회에서는 노동과 근검, 그리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얻고자했죠. 특히 이들은 육체 노동을 통해 직접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유럽의 황무지 개간이나 농작물 관리 등의 농업기술을 크게 향상시키기도 했습니다.
1206년에는 성 도미니코에 의해서 도미니코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은 설교와 더불어 신학 교육과 연구, 이단 방지 등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발전과 대학 설립에 기여하며 전반적으로 학문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한편, 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성 프란치스코가 청빈과 겸손, 사람의 실천을 강조하며 설립한 수도회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회에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을 구제하고, 이들을 위해 사역활동을 전개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자선 사업도 같이 하는 거죠.
이런 점들을 보면 수도회는 단지 종교 기관으로서의 역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세 유렵 사회의 여러 분야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일단 이들은 초중급 수준의 교육을 담당할 학교가 없었던 시절, 유일하게 기초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구요. 13세기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던 대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학문과 지식을 보존하고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전통이 상당 부분 단절된 중세 시대 내내 이들은 그 시대의 학문과 법, 사상, 예술을 다룬 많은 저작들을 필사하고 보존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한편, 수도회는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교회법도 연구하면 이를 체계화하는데에 앞장섰습니다. 중세에는 특히 교황과 세속 군주 사이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서임권을 비롯한 민감한 교회법 이슈들이 여럿 존재했는데요. 교황 측에서 이런 논쟁에 대비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할 때 수도회가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법의 체계화에도 기여하게 된거죠. 그래서 이들이 집필한 교회법전은 훗날 유럽의 법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수도회가 늘 교황의 편을 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며 내적인 쇄신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수도회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들은 농업 기술과 토지 개간, 수로 건설 등을 통해 수도원 주변 지역의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분야에 있어서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수도회 중 시토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들은 효율적인 농업 경영으로 농업생산량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고 그렇게 거둔 결실을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식량만을 나눈 것은 아니었는데요. 병원과 각종 구호단체, 숙박시설 등도 함께 운영하면서 당시에는 매우 열악했을 복지와 의료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수도회들은 중세 내내 대체로 베네딕토회의 운영 방식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됐는데요. 그러다가 대략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즈음인 1534년, 성 이그나치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수도회인 예수회에 의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주로 묵상과 기도를 통해 활동하던 다른 수도회와는 조금 다르게, 예수회의 수도사들은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던 종교 개혁에 대응해 카톨릭 스스로의 변화를 도모하고자 보다 적극적인 포교와 이를 위한 해외진출에 앞장선 거죠. 그래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의 포교에도 이들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스콜라 철학
다시 중세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계층은 대부분 수도사나 성직자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고전문학과 철학, 과학, 역사학 관련 저작들을 끊임없이 필사하고 보존하는 일을 했었던 수도사들은 당시 그 어떤 계층보다도 학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죠. 이들은 수도원 내에 교육시설을 마련해 후배 수도사들을 양성했는데요. 훗날 대학의 모태가 되는 이 수도원 학교를 스콜라 (Schola)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쿨 (School)이랑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네요.
수도원에 마련된 학교이다보니 이곳에서 공부하던 학문은 기본적으로는 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신학의 연구룰 위해 철학 역시 깊이 연구되었죠. 이 때 발전한 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이었습니다. 왜 신학의 연구를 위해 철학이 연구되어야 했을까요? 당시까지 크리스트교는 아직 발생하지 2-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역사가 비교적 짧은 종교였죠. 그러다보니 크리스트교가 철학적으로 설명되기 위해서는 결국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찍이 5세기 경,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원용해 스콜라 철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제정 로마 말기인 354년, 당시에는 로마의 북아프리카 영토였던 현재의 알제리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 신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가 되어서 평생 설교와 연구, 저술활동에 전념했죠. 그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강조하며 그리스 철학을 신학에 접목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신앙 뿐만 아니라 이성을 활용한 학문적 탐구도 중요하다고 주장했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완전한 선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은총이 필요하다는 은총론이나, 악은 독립적 실체가 아닌 선의 결핍이며 자유의지의 오용이라는 설명도 그가 처음 발전시킨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태로 스콜라 철학은 상당히 오래 정체되었습니다. 그러다 11세기,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인간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스콜라 철학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 (Credo ut intelligam)'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계승하고 신앙을 이성의 차원에서 논하려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는데요. 무비판적, 무지성적인 믿음 대신 논리와 이성을 통한 믿음을 강조하는 한편,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추론방식을 통해 순수하게 사유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내려는 시도를 했죠.
이렇게 시작된 존재론은 12세기에 들어서 실체와 본질이 따로 존재한다는 실재론과, 실체는 이름뿐이고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물뿐이라는 유명론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른바 '보편논쟁'이죠. 개념 자체가 어딘가 아주 낯설진 않은 느낌인데요. 이데아 개념을 정립한 플라톤 철학과 상당히 유사한 것 같죠? 그런데 정말 플라톤이 제기한 이 문제를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계속 이어서 다루었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굴한 플라톤의 철학을 발굴하내자, 누군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다시 발굴해냅니다. 바로 이슬람 세계죠.
스콜라 철학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이슬람 세계가 나오나 싶지만, 크리스트교만큼 종교적 배타성이 없었던 이슬람권에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철학이 종교적 편견없이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유럽의 신학계보다는 오히려 이슬람 신학에서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죠. 이렇게 해서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매우 깊이있게 연구되었고, 이 연구 성과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서유럽으로 다시 역수출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슬람 세계를 거쳐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12세기 초 프랑스의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에 의해 보편 논쟁을 해결하는 데에 기여하게 됩니다. 그는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보편자는 개별자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개별자는 보편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죠. 실재론과 유명론의 절충안이죠? 이 역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질료와 형상의 관계의 확장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 이슬람 세계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전수받은 스콜라 철학은 13세기에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집대성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네딕토회 소속의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 후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도미니코회에 입회 후 파리와 쾰른에서 신학을 연구하며 명성을 쌓았는데요. 특히 파리 대학에서 신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강의와 토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 <신학대전>에서는 스콜라 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이슬람 철학, 유대 철학까지 당대의 모든 신학적, 철학적 논의들을 총정리했습니다. 다른 학문적 집대성의 결과물처럼 그의 철학도 다분히 절충적이지만 그전까지는 이성과 신앙, 인간과 신의 관계만 다루었던 철학의 범위가 마침내 과학과 종교의 관계로 확대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죠.
그의 결론은 자연의 진리와 초자연의 진리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인간은 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지식을 계속 발전시키는 것만이 신의 은총을 이해하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을 발전시켜야 신을 이해할 수 있다... 마침내 세속 학문이 본격적인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신학을 '계시 신학'으로, 자연에 관한 학문을 '자연 신학'으로 분류했는데요. 이 중 자연 신학이 기존의 신학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문의 영역이었습니다. 이는 세속의 영역, 이성의 영역이 생겨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 곧 이어질 인간 이성의 해방, 즉 르네상스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죠.
대학의 등장
수도원 학교의 발전은 결국 대학의 창설을 가져왔습니다. 앞서 훑어보았듯이, 수도원 학교인 스콜라에서는 단지 신학 이외에 다른 학문들도 연구되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고전문학과 철학, 과학, 역사학 관련 저작들을 끊임없이 필사하고 보존하는 일을 했었던 수도사들은 당시 그 어떤 계층보다도 학문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학문적 전통을 바탕으로 이른바 7자유학과 (7 Liberal arts) 라고 불리우는 학과체계를 마련해 성직자 이외에도 세속 지배계층의 자제들에게 고급 교육을 제공했죠.
이 7자유학과는 문법, 수사학, 변증법의 3학과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 등의 4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3학은 약간 인문사회계열 느낌이고 4과는 자연공학계열 느낌이네요. 이 학문들은 모두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자유인으로서 사회를 이끌어갈 소양을 갈고 닦기 위해 배우던 것들이었는데요. 이것들이 수도원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교육되면서 대학의 원시적 형태인 수도원 학교가 생겨난 거죠.
수도원의 이러한 교육적 전통은 중세 도시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과거 수도원의 부속기관이었던 수도원 학교가 이제는 수도원에서 독립해서 마침내 대학 (Universtas) 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고등교육기관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죠. 물론 대학이 처음 생겨났을 당시에는 운영방식이라던가, 교수진, 교수법 등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교수님들은 대부분 학문에 조예가 깊은 수도사들이었구요. 도서관이나 연구실 같은 대학 시설들 역시 수도원 내의 시설들을 본따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볼로냐, 파리, 옥스포드, 캠브리지 등의 대학들에는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카르멜회 소속의 수도사들이 교수님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수도원 학교의 7자유학과에 더해 신학과 철학, 법학, 의학 등의 전공이 생겨났구요. 수도원에서 보존하고 있던 수많은 고전 서적들과 필사본들이 대학에 제공되었죠. 한편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학도 엄격한 생활규율과 공동식사, 공동거주 등의 관습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직문화는 파리,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 등에서 학문연구와 공동체 생활이 결합된 형태의 컬리지 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대학이 유럽의 여러 도시에 생겨나자, 수도원과 대학의 역할도 점차 분화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이제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는 시도보다는 신앙과 영성을 중심으로 한 수도 생활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고, 수도원에서 점차 독립한 대학에서는 기존의 신학 중심의 연구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학문들이 추가로 연구되었죠.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대학에서는 수도원 학교 시절의 전통이 곳곳에 남아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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