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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대학의 등장과 스콜라 철학

수도회의 발전

중세의 교회는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학문, 일상생활을 지배했으며 사법기관이자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조직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 사회는 제국의 출현 없이 각 왕국이 흩어져가는 분권화의 역사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분권화 시대에서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유럽 사회를 통합시킨 유일한 구심점이었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반목하던 세속 영주들과 달리 자체적으로 강력한 통합성을 유지했습니다.

교회는 교회와 수도원으로 나뉘었습니다. 둘은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의 관계였으며 특히 수도원은 교회의 부패를 개혁하며 종교 스스로의 자정작용을 이끌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의 쇠퇴 이후 11세기 말 새롭게 설립된 시토수도회에서는 청빈과 금욕을 강조하고 창시자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노동을 강조해 세속 군주들이 기부한 토지를 받지 않고 스스로 황무지를 개간해 수도원의 재정을 꾸렸습니다. 요크셔의 황무지를 방목지로 개간해 랭커셔의 면직물 산업에 맞서 요크셔의 모직물 산업을 발전시킨 데에도 이들의 공이 컸습니다.

13세기 초에 창설된 탁발수도회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사회개혁 운동에 충실했고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보다 종교적 가르침을 강조해 이단을 바로잡고 종교재판에 깊게 관여했습니다.

대학의 등장

수도회의 발전은 결국 대학의 창설을 가져왔습니다. 학문의 발달에 기여한 수도사들이 당시 막 생겨나기 시작한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원래 대학은 수도원에서 창설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의 학문은 신학을 의미했습니다. 중세의 대학은 동직조합, 즉 길드에서 출발했는데 길드는 수공업자들이 만든 직업적 단체입니다. 즉 대학은 교사와 학생의 교육조합인 셈입니다. 동양에서의 고등교육기관은 정부가 설립하고 운영했지만 서양의 대학은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이 모두 당시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한편 대학에 비해 시설이 작 갖추어지지 못한 대학들, 특히 건물이 없는 대학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건물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교사들이 학생들과 합숙하며 교육하는 기숙학교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이 일종의 기숙사대학인 컬리지입니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부설의 머턴 컬리지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원래 학생들의 숙박시설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단과대학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유니버시티와 컬리지는 유럽 전체에 널리 퍼졌습니다. 15세기 유럽 전역에 등장한 대학은 수가 크게 증가했고 각 지방의 군주들과 도시 자치정부들도 대학을 설립하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설립된 대학들은 주고 관료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 되었습니다.

스콜라 철학

대학의 등장 전 수도회에서는 이미 자체적인 교육기관을 운영해왔는데 이를 스콜라라고 했습니다. 스콜라는 모든 신학 연구의 중심이었고 신학의 시녀인 철학 역시 깊이 연구되었습니다. 이때 발전한 것이 스콜라 철학 즉 교부 철학이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은 크리스트교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2-3세기부터 생겨난 철학이었습니다. 당시까지 역사가 짧은 크리스트교가 철학적으로 설명되기 위해서는 결국 그리스 철학이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일찍이 5세기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원용해 스콜라 철학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 스콜라 철학은 오랫동안 정체되었습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11세기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가 인간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스콜라 철학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신앙을 이성의 차원에서 논하려는 시도는 파격적이었습니다. 그의 시도는 결국 신앙으로 회귀했지만 한편으로는 신앙을 논하는 데에 이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부각되었습니다.

12세기에 들어서는 실체와 본질이 따로 존재한다는 실재론과, 실체는 이름뿐이고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물뿐이라는 유명론 사이의 보편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이데아 개념을 정립한 플라톤 철학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플라톤이 제기한 질문은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를 이어 다루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발굴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되었습니다. 크리스트교만큼 종교적 배타성이 없었던 이슬람권에서는ㄴ 고대 그리스 철학이 편견없이 다양하게 연구되었고 과학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슬람 신학과 크게 상충하지 않았습니다. 이슬람권의 연구성과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서유럽으로 다시 유입되었습니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는 이슬람을 거쳐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 보편 논쟁을 해결했습니다. 그는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보편자는 개별자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개별자는 보편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이는 실재론과 유명론의 절충안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질료와 형상의 관계의 확장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러스트가 포함된 제단화 일부
15세기에 그려진 아스콜리 피체노 제단화 속의 토마스 아퀴나스

 

이렇게 발전한 스콜라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집대성되었습니다. 그의 저작 <신학대전>에서는 스콜라 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이슬람 철학, 유대 철학까지 당대의 모든 신학적, 철학적 논의들을 총정리했습니다. 다른 학문적 집대성의 결과물처럼 그의 철학도 다분히 절충적이지만 그전까지는 이성과 신앙, 인간과 신의 관계만 다루었던 철학의 범위가 마침내 과학과 종교의 관계로 확대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자연의 진리와 초자연의 진리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인간은 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지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하며 이는 신의 은총을 이해하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세속 학문으로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신학을 계시 신학으로, 자연에 관한 학문을 자연 신학으로 분류했는데 이 중 자연 신학이 기존의 신학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문의 영역이었습니다. 이는 세속의 영역, 이성의 영역이 열리기 시작해 곧 이어질 인간 이성의 해방, 즉 르네상스를 예고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