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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중세 말 즈음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러시아

분권화의 길을 선택한 독일

대공위시대를 끝낸 신성로마제국에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들어섰지만 독일에서는 여전히 통일되지 못하고 오히려 영방체제가 굳어졌습니다. 남부의 슈바벤과 바이에른 일대만이 독일 황제의 직속령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여전히 영방체제로 느슨하게 묶여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발트 해와 북해에 면한 도시들은 한자동맹을 형성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영방국가의 제후들은 모두 독립된 군주들이며 황제 선출이나 공동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만 함께 모여 논의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수립된 이후에도 제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세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선제후들이 선출했으며 오히려 독일 역사에서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당시의 세습제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보헤미아의 국왕 바츨라프 4세의 의뢰로 제작된 금인칙서 필사본의 한 페이지. 1400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



대공위시대 이후 특별한 원칙없이 황제가 선출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영주들은 독립성을 유지하는 한편 최소한의 통합성을 유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관습적으로 인정해오던 선제후들을 법으로 확정하고자 1356년 금인칙서를 제정했습니다. 금인칙서에서는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들을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 세명과 작센 공작, 라인팔츠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으로 한정지었습니다. 선제후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사법권, 징세권, 화폐주조권을 보장받았습니다. 각 선제후들의 권리가 공식적으로 정해지자 이들의 지위와 특권은 더욱 공고해졌고 반면에 황제 선출방식이 문서화되자 독일의 분권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칼마르 동맹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독일, 엄밀하게는 독일 북부 한자동맹 도시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독일을 통해 대륙의 봉건제를 도입한 뒤 14세기 초반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왕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340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는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딸인 마르그레테 1세는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와 결혼해 아들 올루프 2세 (노르웨이의 올라프 4세)가 덴마크 왕위를 있게 하고 스스로는 직접 노르웨이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다가 올루프 2세가 일찍 사망하자 그 뒤에는 덴마크 왕위도 겸했습니다. 마르그레테 1세는 이후 스웨덴의 권력다툼에도 관여해 스웨덴 왕 알브레히트 3세를 축출하고 200년만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각국이 개별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애쓰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류에 영향을 받은 스칸디나비아에서도 통일 제국이 계속 유지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르그레테 1세는 독일의 영방체제를 모방한 느슨한 연합을 구상했습니다. 그녀는 칼마르에서 이 동맹을 선포하고 조카인 에리크 7세 (노르웨이의 에리크 3세) 가 세 나라의 공동 왕위를 잇게 했습니다. 스웨덴의 귀족들은 발트 해와 북해의 무역의 라이벌인 한자동맹 도시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 동맹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칼마르 동맹은 50년 정도밖에 존속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에 올덴부르크 왕조가 성립되면서 유명무실화되지만 수백 년 동안 분열되었던 스칸디나비아 세 국가들이 오늘날과 같은 연대성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골의 침략을 겪은 러시아

여러 개의 봉건 국가들이 분립해있던 서양과는 다르게 동양에서는 제국의 시대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발생한 몽골은 순식간에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서역을 통해 동서무역로를 점령하고자 서진을 시작했습니다. 1235년 오고타이 칸은 서역을 점령한 뒤 더욱 서진해 유럽을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20만 명의 몽골군은 뛰어난 기동성으로 러시아 남서부의 킵차크를 정복하고 랴잔, 블라디미르, 로스토프 등의 공국들을 손에 넣었습니다. 퇴각하는 러시아의 왕들을 추격하다가 어느새 키예프에 이른 몽골군은 키예프를 점령하고 1241년 슐레지엔 발슈타트 전투에서 슐레지엔과 폴란드 연합군을 무너뜨리며 비잔티움을 제외한 동유럽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폴란드가 몽골군에게 무너진다면 독일의 작센을 시작으로 유럽 전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오고타이 칸이 죽고 다음 왕위계승과정에 영향력을 가진 원정사령관 바투가 다시 몽골로 회군하자 서유럽은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한편 몽골은 이미 정복한 킵차크에는 칸국을 설치하고 러시아의 조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 공국으로부터 러시아 각지의 공물을 거두어들여 몽골에게 바치게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서유럽 군주들에게 멸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은 이 사건은 ‘타타르의 멍에’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타타르족은 몽골이 정복한 유목민족 중 하나였지만 서유럽인들은 몽골을 이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후 몽골이 몰락하자 1472년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는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차르로 칭했습니다. 이때 이후 차르는 20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가 붕괴될 때까지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 됩니다. 1480년 노브고로드, 로스토프 등 주요 공국들을 통합한 이반 3세는 당시까지 잔존해있던 킵차크 칸국을 마침내 멸망시키고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이반 3세의 성공으로 모스크바 대주교 역시 비잔티움 정교회의 뒤를 이어 러시아 정교회를 출범시키며 동방교회의 최고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모스크바는 제 3의 로마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