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도래
필리프 4세는 카페 왕조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번영의 끝은 쇠락의 시작이죠. 필리프 4세 이후 카페 왕조의 프랑스는 조금씩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일단은 경제적인 쇠퇴가 먼저 눈에 띕니다. 11세기 이후 개간지를 늘리고 농업생산량을 확대시켜왔던 프랑스에서는 이제 개간할 땅도 없고 농업생산량도 한계에 달했습니다. 인구는 계속 늘어나는데 생산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은 건데요. 오히려 소빙하기가 도래하며 평균기온이 내려가고 흉작이 거듭되자 농업생산량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이 먹고 살기 어려워지니 잉여 생산물을 거래하는 도시에도 여파가 몰아닥쳤고, 상업과 수공업도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았죠.
이런 와중에 가공할만한 또 다른 재앙이 유럽 전체에 밀어닥치는데요. 소아시아에서 발생해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전파된 흑사병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흑사병은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 특히 더 크게 창궐했습니다.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에 흑사병의 치사율은 거의 100%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집단적 공포에 빠져들었습니다. 전지구적인 전염병의 무서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니 당시 사람들의 공포감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볼만 하죠?
흑사병의 원인이나 해결방법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자 그에 대한 공포와 분노는 곧 사회적 약자들에게로 향했습니다. 광범위한 유대인 학살과 마녀 사냥이 벌어졌고 경제가 파탄나면서 생존에 위협을 느낀 민중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도시가 파괴되고 농촌도 황폐화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1358년 프랑스 북부에서 일어난 '자크리의 난'과 1381년의 랑그도크 농민반란, 잉글랜드 에식스에서 벌어진 '와트 타일러의 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전쟁의 배경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프랑스의 영토로는 파리 주변, 우리나라로 치면 수도권이라고 볼 수 있는 일 드 프랑스와 오를레앙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왕의 직할지가 있었구요. 그 외에는 봉신들의 봉토인 부르고뉴, 플랑드르, 브르타뉴, 가스코뉴 등이 있었습니다. 이 봉토들은 모두 프랑스 왕의 봉신인 공작들이 다스리는 공작령이었죠. 프랑스 왕의 봉신이니까 프랑스 왕의 영토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왕과 봉신 사이의 봉건제적 관계는 별로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나서 보니 정말로 이들 중에는 잉글랜드의 편에 서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프랑스 왕의 봉신들에는 잉글랜드의 왕도 포함됩니다. 사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영토 분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죠.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이 된 이래로 잉글랜드는 줄곧 프랑스 내에 영토를 가졌고, 또 헨리 2세 때에는 이 영토가 크게 불어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러던 중 루이 9세가 가스코뉴 지방을 잉글랜드에 할양하자 프랑스의 귀족들은 잉글랜드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오랜 영토문제는 결국 전쟁의 형태로 해결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필리프 4세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 세 아들, 루이 10세와 필리프 5세, 샤를 4세가 차례대로 왕위를 이어받았는데요. 형제 간 상속이 이루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중 누구도 그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죠. 그러자 필리프 4세의 딸인 이사벨라와 그의 남편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왕위계승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 게르만족의 전통적 관습법인 살리카법을 근거로 내세우며 에드워드 3세의 왕위계승에 반발했습니다. 아들이 아닌 이사벨라에게는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이 없고, 그러므로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 역시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인데요. 그럼 누가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느냐... 프랑스인들은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하죠.
프랑스인들이 잉글랜드인을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땐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같은 한민족이라는 관념이 깊숙이 뿌리박힌 한국인에게는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이 시대의 유럽인들에게는 그게 꼭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영지를 차지하거나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고, 그렇게 영지나 나라의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그곳 사람들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부빈 전투 때에 나타났던 프랑스인들 사이의 희미한 국민감정이 이제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프랑스인들이 잉글랜드인인 에드워드 3세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인 필리프 6세를 더 선호했다는 것은 이제 이들 사이에 '우리는 같은 프랑스인'이라는 국민감정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을 왕위에 올릴 수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필리프 6세가 즉위하고, 그를 시조로 카페 왕조의 방계인 발루아 왕조가 시작됩니다.
이 당시 봉건제적 위계상 잉글랜드의 왕은 프랑스 왕에게 가스코뉴 공이라는 작위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필리프 6세가 즉위하자 에드워드 3세는 그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신종서약을 했는데요. 필리프 6세는 서약이 미비하다는 핑계를 대며 서약을 받아들이기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다 에드워드 3세가 1330년 스코틀랜드 정복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자신의 봉신인 에드워드 3세가 아닌, 그의 경쟁자 스코틀랜드를 지원했죠.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가스코뉴 공작위가 아닌 프랑스 왕위를 내어줄 것을 요구하며 전쟁을 선포하고 플랑드르로 건너갑니다. 왜 플랑드르였을까요?
에드워드 3세의 행동에, 필리프 6세는 당연히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했습니다. 당시 가스코뉴는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던 지방으로 엄청난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경제적 요충지였습니다. 한편 에드워드 3세가 전쟁 선포 후에 향했던 플랑드르는 양모 가공으로 유명한 수공업 중심지였구요. 한 마디로 두 곳 다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알짜배기 지역인거죠. 그런데 플랑드르는 양모를 가공하기만 할 뿐 원재료인 양모 자체는 잉글랜드에서 수입해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플랑드르의 귀족들은 당연히 프랑스보다는 잉글랜드 쪽에 밀착할 수밖에 없었죠. 이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엄청난 자금을 지원합니다.
기사와 장궁병
이 당시의 프랑스는 인구나 경제력, 병력 등 어떠한 면에서 보나 잉글랜드보다 훨씬 강력한 유럽 대륙의 최강국이었습니다. 양국의 군대만 보더라도 프랑스에서는 중무장한 기사들이 주축을 이루는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가벼운 무장만을 갖추고 장궁을 주무기로 하는 자영농 출신의 궁보병들이 주력 무대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투가 벌어지고보니 이 장궁병들의 활약이 대단했던 겁니다. 길이가 2미터 가까이되는 장궁은 프랑스 기사들의 철갑을 뚫고 박히거나 그들이 탄 말을 공격해서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잉글랜드군은 전력이 훨씬 우세한 프랑스군을 압도하며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모든 무기가 그렇겠지만 활은 특히나 사용법을 익히는 데에 훈련과 연습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궁병은 육성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장궁은 길이가 길고 장력이 강해서 시위를 당겨 목표물을 명중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오랜 동안 활쏘기를 전국민적인 오락거리 또는 생활체육의 일종으로 널리 보급해왔고, 그러다 마침내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의 활쏘기 실력이 빛을 발하게 된거죠.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인들이 완강한 저항을 벌이던 칼레를 함락시키고 일단 잉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더 이상 원정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지자 양측이 휴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요. 그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아들인 장 2세가 즉위했습니다.
전쟁은 장 2세가 즉위한 후 7년 뒤인 1357년부터 다시 이어졌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장궁 부대가 푸아티에에서 장 2세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그를 포로로 잡은 것인데요. 이미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장궁 부대를 경험해보았다면 충분히 패배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번에도 프랑스군은 강력한 원거리 공격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을 향해 정면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이런 무모한 공격은 당연히 막대한 피해를 낳았고, 왕이 포로로 잡히며 패배로 이어진 거죠.
1363년 장 2세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사망하자 프랑스에서는 왕세자인 샤를 5세가 왕위에 올라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샤를 5세는 이미 장 2세가 포로로 잡혔을 당시부터 섭정을 시작했는데요. 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농민반란까지 일어나다보니 도무지 상황을 타개할 방안이 보이지 않자 결국 잉글랜드와 브레티니 협정을 맺고 다시 휴전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이 협정으로 프랑스는 아키텐과 칼레 전체를 잉글랜드에 할양하기로 했지만 보석금이 너무 비싼 나머지, 장 2세를 석방시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장 2세는 결국 런던에서 죽었습니다.
이왕에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해가며 휴전 협정을 맺었으니 샤를 5세로서는 이 기회를 발판삼아 어떻게든 내정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신중한 태도로 차근차근 개혁을 성공시켰는데요. 세제를 개편해 부족한 재정을 안정시켰구요. 무엇보다도 해군력을 강화하고 상비군 제도를 마련해 프랑스군의 전력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할양했던 아키텐 지방의 귀족들과 물밑 접촉해 그들로 하여금 잉글랜드의 통치에 저항하도록 설득했죠.
샤를 5세가 이렇게 절치부심하는 사이 잉글랜드에서는 좀 반대되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에드워드 3세가 대부분의 정사를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맡기고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든 건데요. 문제는 흑태자 에드워드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상황은 아니었던 거죠.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샤를 5세가 에스파냐의 카스티야 왕국과 연합해 함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갑자기 출정을 하게 된 잉글랜드 해군은 프랑스 해군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 일로 프랑스는 브레티니 협정을 잉글랜드에 할양했던 영토 상당 부분을 되찾았죠.
이후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양국에서는 새로운 왕이 즉위합니다. 잉글랜드에서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으로 사망한 뒤 에드워드 3세 역시 숨을 거두면서,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 2세가 10살의 나이로 즉위했구요. 프랑스에서는 샤를 5세가 42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12살에 불과한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즉위했습니다. 그러자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인 곤트의 존이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잡게 되었구요. 프랑스에서도 샤를 6세의 삼촌들이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양국 모두 어린 왕들의 통치가 평탄하지는 않았겠죠? 곤트의 존이 섭정하는 잉글랜드에서는 무거운 세금과 임금을 제한하는 노동 조례의 공포로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사실 흑사병의 창궐로 노동력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임금을 제한하는 조치가 제대로 시행되기는 어려웠죠. 노동조례와는 반대로 임금이 치솟기 시작하자 농민과 빈민, 도시 노동자와 수공업자에 더해 일부 부유층과 귀족 계층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여기에 와트 타일러의 난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왕실과 귀족들의 대립까지 격화되자 리처드 2세는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4세에게 왕위를 내어주었고, 그렇게 플랜태저넷 왕조도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도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샤를 6세의 사촌인 부르고뉴 가문과 동생인 오를레앙 가문의 다툼이 격화되어 국정아 혼란에 빠진 것인데요. 이들은 모두 왕실에 속한 가문이었지만 부르고뉴 가문은 북부와 동부를 차지하고 오를레앙 가문에서는 남부와 서부를 차지한 채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프랑스인들의 일상은 점점 피폐해졌고 왕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잔 다르크의 등장
랭커스터 왕조의 첫번째 왕으로 왕위에 오른 헨리 4세는 재위 내내 왕권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일단은 리처드 2세를 다시 복위시키고자 하는 귀족 세력의 반란이 이어졌구요. 이를 진압하고나니 이번에는 잉글랜드의 웨일스 지배에 대한 저항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는 잉글랜드 내의 유력한 봉신인 노섬벌랜드 백작이 그에게 도전했죠. 이러한 무력 도발이 이어지면 왕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이를 진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잉글랜드는 의회의 승인이 없는 한 왕이 함부로 증세를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으니... 헨리 4세는 의회로부터 재정에 관해 끊임없는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헨리 4세는 곧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측근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아들인 헨리 5세를 섭정으로 내세우려고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헨리 4세의 측근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죠. 헨리 4세는 곧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지만, 재위 초반 내내 반란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조차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헨리 4세가 왕세자와 그의 추종자들을 정치에서 배제시키면서 양측 사이의 불화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왕위는 예정대로 헨리 5세가 이어받았죠.
잉글랜드에게 다행한 일이라면 프랑스도 딱히 사정이 나을게 없다는 거였습니다. 왕실은 여전히 내분이 계속되고 있었고 내정은 흑사병과 농민 반란으로 엉망이었습니다. 헨리 5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내치를 안정시키고 다시 프랑스와의 대결을 준비해야 했죠. 그는 우선 헨리 4세 당시부터 빈번하게 발생하던 반란들을 확실히 진압했습니다. 그러자 일단 왕권은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었지만, 사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옛날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에 가졌던 방대한 영토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무력을 동원할 준비를 어느 정도 마쳐놓은 상태에서 그는 이제 부르고뉴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407년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공작인 용맹공 장이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양측의 내분은 이제 내전 상황으로 치닫았죠. 헨리 5세는 우선 부르고뉴 공의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적어도 그가 중립을 지켜줄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리고 의회를 설득해 개전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전에 뛰어들었습니다. 백년 전쟁의 두번째 국면이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1415년 센 강을 거슬러 프랑스로 진입한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은 도버 해협과 이어지는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과 맞붙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에 비해 수적으로는 세배 이상 우세였지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움푹 들어간 곳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대부분은 효율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가 없었는데요. 거기에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또! 기병을 앞세운 정면 공격을 시도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의 장궁병들에게 호된 공격을 당하고 이어지는 보병들의 측면공격으로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로 전세는 잉글랜드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파리와 가까운 대도시 루앙을 함락시키고 부르고뉴 공국과는 동맹을 맺으며 더욱 프랑스를 압박했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도 프랑스는 잉글랜드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420년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고 이 조약에 의해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며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나라,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모두 손에 넣었으니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고 할만한데요. 아쉽게도 그는 1422년 티푸스 증세를 보이며 35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샤를 6세와 헨리 5세가 또 비슷한 시점에 사망하자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은 트루아 조약을 맺은 헨리 5세의 상속자인 헨리 6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트루아 조약 전까지 샤를 6세의 왕세자, 도팽이었던 샤를 7세가 스스로를 프랑스의 왕으로 선언하며 이에 반발했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샤를 7세는 곧 오를레앙을 거점으로 삼고 헨리 6세와의 대결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1428년 잉글랜드군에 의해 오를레앙이 포위당하며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였는데요. 바로 그 때, 프랑스를 구원할 성녀가 등장하죠.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북부의 동레미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농민 출신으로 천사의 음성을 듣고 샤를 7세를 지키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그가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임무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정당한 왕으로 즉위시키는 것이었는데요. 원래 당시 프랑스에는, 왕은 반드시 랭스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랭스는 잉글랜드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샤를 7세는 부득이하게 랭스가 아닌 시농 성에서 즉위할 수밖에 없었죠. 따라서 잔 다르크의 퀘스트는 오를레앙을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쳐부수고 샤를 7세로 랭스로 데려가서 대관식을 올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쉽지 않아 보이죠?
잔 다르크를 만난 샤를 7세는 지금 당장 랭스로 진격해 그곳에서 대관식을 열어야 한다는 그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고 그 뒤로도 프랑스군의 승리가 계속되자 더 이상은 그를 의심하지 않기로 하죠. 오랜 고민 끝에 랭스 진격을 결심한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연합한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며 성공적으로 랭스에 입성했고 1422년, 마침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로써 마침내 샤를 7세는 적법한 프랑스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그 이후에도 잉글랜드와의 전투에 계속 참전했습니다. 그러다 1430년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부르고뉴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는데요. 부르고뉴군에서는 프랑스로부터 보석금을 받고 잔 다르크를 풀어줄 생각이었지만 샤를 7세는 그를 외면해버립니다. 사실 샤를 7세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계속 참전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모으기 시작하던 잔 다르크의 존재를 내심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죠. 결국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측 이단심문관들로부터 이단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즈음, 백년을 끌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도 끝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잔 다르크의 투쟁에 크게 고무된 프랑스인들은 잉글랜드군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이 분위기를 타고 샤를 7세 역시 잉글랜드의 수중에 남아있던 도시들을 하나씩 탈환하며 전쟁의 화마도 점차 사그라들었죠. 양국은 1444년 투르에서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협정으로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내어주었던 도시들을 거의 모두 되찾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잔 다르크 얘기가 흥미로워서 좀 더 찾아보았는데요. 샤를 7세가 자신의 랭스 대성당 즉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잔 다르크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자신의 고향인 동레미의 세금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져서 왕정이 유지되던 프랑스 혁명 전까지 동레미는 면세구역으로 남아있었다고 하네요. 한편, 잔 다르크의 가문은 이 때 이후로 귀족 가문이 됩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원래는 그냥 평범한 농민 가문이었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귀족이 된 다르크 가문은 지금까지도 계속 혈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이 벌어진 곳은 주로 프랑스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영토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쟁 내내 막대한 전비가 소모되면서 병사들의 급료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봉기가 일어나니 안 그래도 전쟁으로 엉망이 된 농토는 더더욱 황폐해졌죠. 농민들의 삶도 그만큼 더 힘겨워졌겠죠? 정도가 덜했을 뿐 잉글랜드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칼레를 제외한, 유럽 대륙 내의 영토를 프랑스에게 빼앗긴 잉글랜드 역시 막대한 전비로 국가 재정이 휘청거렸고 이 부담은 최종적으로 잉글랜드의 농민들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를 긍정적이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장기간 벌어진 전쟁이 양국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인데요. 우선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가 백년 전쟁에 참전한 기사들을 중심으로 상비군을 편성해 프랑스의 군사적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군주들은 왕권을 크게 강화시킬 수 있었죠. 잉글랜드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지만 조금 양상이 다릅니다. 전쟁이 백년 넘게 계속되자 잉글랜드에서는 전비 마련을 위해 의회가 빈번하게 열렸는데요. 그러면서 의회의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죠.
전쟁이 끝나면서 양국에서는 봉건 귀족들의 시대가 조금씩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도중 많은 귀족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그 자리를 다른 귀족들이나 왕이 차지했고 그러면서 봉건제가 조금씩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죠. 이 때 중소 귀족들이 대귀족들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중소귀족들이 난립했던 영국의 봉건제는 한차례 물갈이되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살아남아 세력을 키운 대귀족들은 의회의 발전과 함께, 정치적 발언권이 크게 신장되었습니다.
한편, 전쟁 초반부터 맹활약을 펼친 장궁병들 역시 전쟁 후 위상이 급부상했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귀족이 아닌 자영농이나 상인들이었죠. 또, 전쟁 동안 무기와 전술이 변화한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장궁이나 화포가 도입되고, 용병과 상비군이 활약하면서부터 갑옷을 입고, 말에 탄 채로 무기를 휘두르는 전통적인 모습의 기사들이 활약할만한 공간이 없어진 것입니다.
전쟁 후 두 나라 안에서는 국민의식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백년 전쟁은 봉건 귀족들 간의 싸움이었지만 전쟁이 워낙 오래 지속되다보니, 귀족들이 아닌 일반 평민들에게도 근대적 개념의 애국심이 생긴 것인데요. 이를 계기로 서유럽 역사에서 비교적 변방에 속했던 잉글랜드는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와 대등한 전쟁을 치러냈다는 자긍심으로 대륙에 대한 열등 의식을 떨쳐버리며 서유럽의 확실한 주도세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례로, 그 전까지 잉글랜드의 왕들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전쟁 후에는 영어가 귀족 계층의 언어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죠.
장미 전쟁과 튜더 왕조의 탄생
다 이긴 줄 알았던 백년 전쟁 도중 샤를 7세가 즉위하고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이 우위를 점하며 전쟁이 마무리되자 잉글랜드에서는 왕실에 대한 불신이 커졌습니다. 그 많은 세금을 거두어 전쟁을 치르고도 유럽 대륙 내의 영토를 거의 빼앗겼으니, 그럴만도 하죠. 마침 헨리 6세는 정신 질환이 있어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그러면서도 왕위는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은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자 1455년, 모계로 에드워드 3세의 혈통을 물려받은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실인 랭커스터 가문과 이에 도전하는 요크 가문 사이에서 30년 동안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측은 모두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장미 문양을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를,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문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쟁을 장미 전쟁이라고 부르죠.
리처드 공작은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 도중 전사하면서 왕위를 쟁취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요크 가문을 따르던 많은 귀족들이 전사하거나 처형당하며 요크 가문은 한때 위기에 몰렸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죠. 리처드 공작의 아들 에드워드가 앞장서서 전열을 정비하며 요크 가문 일파를 이끈 건데요. 그 후 그는 몇 번의 전투에서 다시 승기를 잡으며 마침내 랭커스터 가문을 제압하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이렇게 요크 왕조를 열면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지만 별로 장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40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왕위는 그의 장남인 에드워드 5세가 물려받았는데요. 그 때 그의 나이는 13살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잉글랜드에서는 어린 후계자가 왕위를 물려받아 섭정을 받다가, 훗날 성인이 되면 친정을 했던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심지어 헨리 6세는 한 살이 되기도 전인 갓난 아기 때에 왕위에 올라 거의 50년을 재위하기도 했죠. 물론 그 때도 국정 운영에 애로사항이 많긴 했지만요.
에드워드 5세의 문제는 그에게 매우 야심만만한 삼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처드 3세는 어린 조카의 섭정을 맡으며 그를 보좌하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 왕위를 빼앗고 그를 런던탑에 연금시켰습니다.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도 함께요. 그리고 그 두 형제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죠.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은 잉글랜드의 귀족들의 큰 반발을 샀습니다. 그 중에는 랭커스터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사위인 헨리 튜더도 있었는데요. 그는 리처드 3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귀족 세력을 규합해 1485년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섰습니다. 랭커스터 가문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에드워드 5세의 친인척인 요크 가문의 귀족들도 그에게 합세했구요. 잉글랜드의 내분에 개입할 기회를 엿보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오랜 숙적인 스코틀랜드도 재빨리 그를 지원하고 나섰죠.
결국 리처드 3세는 그 해에 벌어진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일설에는 그가 심각한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직접 나서서 싸우지는 못했을 거라고도 하네요. 어쨌든,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삼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폭군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인지, 그는 훗날 많은 문학 작품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도 그를 소재로 쓰여진 작품이죠. 당대부터 지금까지 그를 둘러싼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참 많더라구요.
이렇게 해서 1485년, 리처드 3세를 제압한 헨리 튜더는 요크 왕조를 끝내고 튜더 왕조를 열며 헨리 7세로 즉위했습니다. 사실 그는 혈통상 왕실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귀족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즉위 초에는 정통성 문제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서 요크 가문의 지지를 얻으며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죠. 마침, 백년 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그러지 않아도 수가 많이 줄어 있었던 전통적인 봉건귀족들이 장미 전쟁 동안 더 줄어들었고, 이는 신흥귀족들과 평민 출신의 관료 계층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 귀족 가문이 대거 몰락하자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와 이들이 누리던 권력은 왕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말 즈음의 동로마 제국, 에스파냐 (1) | 2024.03.21 |
---|---|
중세 말 즈음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러시아 (0) | 2024.03.18 |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등장과 영국 프랑스의 의회제도 (1) | 2024.03.11 |
프랑스의 중앙집권화와 독일의 지방분권화 (0) | 2024.03.09 |
국민국가의 원형 (0) | 2024.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