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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프랑스의 중앙집권화와 독일의 지방분권화

프랑스의 성장

봉건제가 제일 먼저 자리잡은 프랑스에서는 각 영주들의 세력이 왕권을 압도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당시에도 다른 유력 가문이 왕위를 잇기도 했고 귀족 가문들이 돌아가면서 왕위를 잇는 일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987년 파리 공작 위그 카페가 왕위 세습을 공표하고 카페 왕조를 열었을 당시부터 11세기까지도 카페 왕조의 세력권은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스가 마침내 왕국으로서의 본격적으로 확장을 시작한 것은 1108년 루이 6세 때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는 봉신들을 단속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의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을 지지함으로써 영지 내 교회 세력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키텐 공작과 플랑드르 공작을 제압하면서 프랑스 왕국의 본격적인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는 아키텐의 엘레노어와 결혼했지만 후사 없이 이혼했습니다. 이혼한 아키텐의 엘레노어는 이후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를 여는 헨리 2세와 재혼했고 이 덕분에 이미 대륙에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를 소유한 상태였던 헨리 2세는 아키텐까지 얻었습니다. 이는 훗날 프랑스와 영국 간의 백년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후 헨리 2세는 상파뉴의 아델과 세번째로 결혼해 아들 필립 2세를 얻고 상파뉴 백작, 블루아 백작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영국 국왕이 프랑스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헨리 2세의 아들인 필리프 2세는 영국의 리차드 1세와 함께 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리차드 1세가 없는 사이 노르망디를 차지하기 위해 회군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이 즉위해 앙굴렘을 차지하기 위해 앙굴렘의 이자벨과 결혼했지만 원래 약혼자인 드 뤼지냥이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에게 탄원했습니다. 당시 영국 왕에게 프랑스 왕은 명목상으로나마 상급군주였습니다. 이렇게 빌미가 생긴 필리프 2세는 존이 봉건적 의무를 저버렸다는 구실로 앙주를 몰수했고 이에 따라 존은 독일 황제 오토 4세와 연합해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패배했습니다. 이렇게 앙주는 프랑스로 넘어가고 대륙 내의 영국 영토는 이제 아키텐만 남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때의 패배로 귀족들이 존 왕을 향해 대헌장을 선언하고 국왕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의 의회제도의 바탕이 되는 기구를 마련했습니다.

영방국가가 된 독일

서유럽 세계의 프랑스와 영국은 두각을 나타내는 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가 가속화되며 국민국가로 성장하고 있었고, 에스파냐 역시 레콩키스타 이후 다섯 왕국이 정리되며 안정화되던 시기 독일은 이에 역행한 분권화가 심해지며 영방국가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10세기 신성로마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독일은 로마 교황청과의 특수관계로 오히려 로마 교황의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11세기 작센 왕조가 끊어지고 잘리어 왕조가 들어섰지만 역시 명목만 있을 뿐 독일 황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국왕처럼 독일 영토를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제위 내내 그레고리우스 7세와 반목하며 교황권을 억제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아들인 하인리히 5세는 교황과 결탁해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축출하고 1105년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황권과 타협을 이루었지만 이는 신앙심이 깊은 독일 봉건 영주들의 권한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권 강화와는 더욱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독일 귀족의 세력에 눌린 하인리히 5세는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왕조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 이후 슈바벤을 근거지로 하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프리드리히 1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교황권과의 대결 전에 강력한 경쟁자인 벨펜 가문에 바이에른을 넘겨주고 다른 중소 귀족들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북쪽으로는 덴마크,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헝가리, 남쪽으로는 부르군트까지를 독일 제국의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독일에서 교황령으로 향하는 길목인 이탈리아의 북부의 롬바르디아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절정에 달했던 로마 교황과의 대결에서는 결국 패배해 교황권을 제압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교황령을 지나쳐 이탈리아 남부로 진출해서 아들인 하인리히 6세를 시칠리아의 쿠스탄차 1세와 혼인시키면서 시칠리아 왕국을 얻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벨펜 가문에 할양했던 바이에른을 회수하고 마침내 신성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했습니다. 이렇게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한 그는 당시까지 제위에 올랐던 독일 황제들 중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휘둘렀던 황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 참전한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사망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짧은 전성기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2세기에 그려진 프리드리히 1세의 삽화
독일의 바인가르텐 수도원 (Weingarten Abbey) 에서 발견된 궬프 연대기 (Chronic of the Guelphs)에 삽입된 프리드리히 1세의 삽화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이자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가 4세의 나이로 즉위하려고 하던 차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강력한 경쟁자인 슈바벤의 벨펜 가문 출신 오토 4세가 제위를 찬탈해 벨프 왕조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외가인 시칠리아 왕국으로 망명해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존 왕이 프랑스를 공격할 때 오토 4세가 이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지원을 받아 오토 4세를 몰아내고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복권시켰습니다. 그가 즉위하던 때 그를 지원했던 인노켄티우스 3세는 강력한 교황권을 가진 군주였습니다. 1227년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중단하자 인노켄티우스 3세의 후임인 그레고리우스 9세는 그를 파면했습니다. 이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예루살렘 왕국을 점령하고 성지를 직할지로 삼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탈리아 중부를 침략해 프리드리히 2세의 외가인 시칠리아를 고립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교황군을 격파하고 이탈리아 중부를 시칠리아 왕국에 병합했습니다. 이전까지 800년이 넘는 동안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는 서로 별개의 국가였기 때문에 만약 이 때 프리드리히 2세가 두 국가를 병합시키지 않았다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연결고리는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영향력을 크게 확장한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중앙집권화가 아닌 분권화를 선택했습니다. 직할지인 슈바벤과 바이에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모두 독립과 자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결국 1250년 그가 사망한 후 즉위한 콘라트 4세 때 왕권은 크게 약해졌고 그는 시칠리아의 왕위만으로 만족한 채 사망하며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의 독일 영주들은 프리드리히 2세때 보장받은 자치권을 기반으로 각자의 독립국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느슨하게나마 존재하던 독일의 공동체의식은 더욱 희미해졌고 독일은 본격적으로 영방국가 체제로 접어들었습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 이후 20년간 신성로마제국은 제위가 비어있는 대공위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실제로 제위가 비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습 왕조의 황제가 아닌 선제후들이 선출하는 황제가 제위를 이었습니다. 독일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도 후보를 내었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황제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선출된 황제들은 본격적인 통치 의욕을 가진 황제들이 아니었고, 심지어 독일에는 거의 방문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은 독일 제후들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를 황제로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제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것은 그것보다 한참 뒤인 15세기 중반이 되어서부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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