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왕조의 성장과 왕권 강화의 길
재위기간이 길었던 초기의 왕들
중세 유럽에서 봉건제가 제일 먼저 자리잡은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하지만 중세 초반에는 나라 안 유력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면서 왕권을 압도했는데요. 그래서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당시에도 다른 유력 가문인 로베르 가문이 왕위를 잇는 일도 있기도 했었고... 또 정작 로베르 가문 출신의 파리 공작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연 뒤 11세기까지도 왕권이 미약해서 카페 왕조의 세력권은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에 불과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왕권이 강화되고 카페 왕조도 번성해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왕가로 오랜 세월동안 존속하죠.
무엇이 프랑스의 왕들을 점점 강력하게 만들어주었을까요?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지만 일단 위그 카페의 후손들은 상당히 장수하면서 오랫동안 재위했습니다. 위그 카페는 9년을 재위했기 때문에 재위기간이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아들인 로베르 2세는 35년, 또 그의 아들인 앙리 1세는 29년을 재위했죠. 앙리 1세의 아들인 필리프 1세는 무려 48년, 루이 6세는 29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재위기간이 길 뿐만 아니라 왕위가 아버지에서 아들로 상당히 안정적으로 세습되기도 했네요. 이 기간 동안 카페 왕조는 점진적으로 왕권을 강화시켰고 결과적으로는 왕위가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로도 이어지면서 무려 850년의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996년 위그 카페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이 된 이는 로베르 2세였습니다. 당연히 정복왕 윌리엄의 장자 로베르 2세와는 다른 인물이죠. 이 때에는 중세 유럽의 가장 중요한 세 계급이 성립되었습니다. 그 세 계급이란 기도하는 자인 성직자와, 싸우는 자인 기사, 그리고 일하는 자인 농노를 의미하는데요. 성직자들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의 종교활동을 지도하고 그러면서 세금도 부과하고 노동력도 징발하면서 영주들 못지 않은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한편 기사들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전투에 참여하고 그 공을 인정받으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죠. 일하는 자는? 다른 두 신분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노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노르만족과 마자르족, 그리고 이슬람 세력 등의 약탈이 조금씩 잦어들며 안정을 되찾아가는 때였습니다.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황폐화되었던 토지가 활발하게 개간되었고 농업생산량이 늘어나자 경제적으로도 점점 여유가 생겼구요. 인구도 늘어났죠. 영주들은 늘어난 세수로 자신의 장원을 발전시켰고 잉여 생산물은 시장에서 거래되었습니다. 거래의 규모가 커지면서 무역도 활발해지고 그러면서 여러 지역을 잇는 무역로가 개척되었습니다.
잉글랜드와의 영토분쟁
긴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아직 왕권이 미약했던 앙리 1세와 필리프 1세를 지나, 위그의 증손자인 루이 6세 때가 되면 프랑스의 왕권은 크게 강화됩니다. 1108년 즉위한 루이 6세는 젊은 시절 일 드 프랑스와 오를레앙 일대의 영주들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지배력을 확보했구요. 그 다음 단계로 급격하게 세력이 확대된 잉글랜드나, 봉건 영주들 중에서도 유독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앙주 백작령, 아키텐 공작력, 플랑드르 공작령을 제압했죠. 덕분에 전사왕이라는 멋진 별명을 얻었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너무 살이 쪄서... 뚱보왕이라는 별명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한편, 루이 6세의 아들로 1137년에 즉위한 루이 7세는 아키텐 공국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엄청난 영토를 얻게 됩니다. 영토가 곧 권력이던 시절이었으니 그가 영토를 이만큼 확장했다는 것은 왕권도 그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모종의 스캔들로 그는 왕비인 엘레오노르와 이혼합니다. 엘레오노르가 결혼하면서 가져온 아키텐 공국은 재산 분할 과정에서 다시 엘레오노르에게도 돌아가고,이 일로 루이 7세도 당연히 왕권에 큰 타격을 입었죠.
문제는 그 이후에 엘레오노르가 강력한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과 재혼을 했다는 건데요. 당시 노르망디 공작은 앙주 백작위도 함께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으로서도 한 수 접어주어야 하는 강력한 영주였습니다. 그런 그가 아키텐 공국을 추가로 얻은 것도 프랑스로서는 열불이 터질 일인데, 헨리 2세로 잉글랜드의 왕으로까지 즉위했으니... 이제 루이 7세로서는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로서는 잉글랜드의 세력이 계속 확대되는 것이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서쪽과 북쪽으로 반쯤 둘러싸이는 모양새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두 나라에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면서 상황도 좀 달라집니다. 다행히 루이 7세의 아들인 필리프 2세는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반대로 잉글랜드에서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존 왕은 별명이 실지왕이었죠. 누구에게 땅을 잃어버린 걸까요? 프랑스입니다.
필리프 2세에게는 다른 남자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 14살이었던 1179년부터 공동왕으로서 부왕의 통치에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공동왕 제도는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후계자의 입지를 튼튼히 하고 국정 경험을 쌓게 하는 효과가 있었죠. 그런데 그는 이미 십대 시절부터 탁월한 국정 수완을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프랑스 내의 봉건 영주들을 제압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잉글랜드의 후계구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헨리 2세의 아들들이 벌이는 반란을 배후에서 지원했죠. 그의 머릿속에는 잉글랜드가 차지한 대륙 내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야심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그에게 잉글랜드의 존 왕이 기회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존 왕이 자신의 봉신들 중 한 명인 앙굴렘 백작의 딸과의 결혼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입니다. 그게 왜 무리했냐하면... 앙굴렘 백작의 딸인 이자벨에게는 이미 다른 약혼자가 있었던 거죠. 갑자기 약혼자를 빼앗긴 이는 존 왕이 백작위를 겸하고 있었던 푸아투 지방의 귀족 뤼지냥 가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존 왕의 상급 군주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는데요. 이것이 필리프 2세에게는 마침내 존 왕을 공격할 구실을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존 왕의 주군으로서 그를 파리로 불렀습니다. 존 왕은 응하지 않았죠. 하지만 봉건제 하의 쌍무적 계약관계에서는 어느 한쪽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면 다른 한 쪽의 의무도 사라지잖아요?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 봉신으로서의 예를 다하지 않자 필리프 2세는 그가 가진 영지 중 노르망디와 앙주 지역을 몰수했습니다. 당연히 존 왕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에 반발해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4세, 플랑드르 백작 페랑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했습니다.
1214년 프랑스 북쪽의 부빈에서 벌어진 부빈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프랑스와 잉글랜드, 그리고 동맹으로 참전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일단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에서 차지하고 있던 막대한 영토를 갖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권이 크게 강화되면서 비로소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모습을 띄게 되죠. 사실 이 과정에서 존 왕은 아키텐과 앙주의 많은 영주들에게 자신의 편에서 프랑스와 싸워주길 요청했는데요. 대부분의 영주들이 이 요청을 거부하며 사실상 프랑스의 편에 섰습니다.
부빈 전투가 끝나고 프랑스의 승리가 확정되자 프랑스는 전국이 축제 분위기에 물들었습니다. 주민들과 성직자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축제를 벌였죠. 사실 그 동안에도 영토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봉건 영주들의 전투는 수없이 많았지만 평범한 주민들에게 누가 이 땅의 주인이 되는지는 사실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땅의 주인이 바뀐다 한들 자신들의 생활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의 전투는 좀 달랐습니다. 명확한 현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프랑스인들 사이에 우리는 프랑스인이라는 국민감정이 싹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전투에서 패배한 잉글랜드와 신성로마제국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한때 앙주 제국이라고도 불리웠던 잉글랜드에서는 그 엄청난 영토를 잃은 존 왕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졌습니다. 실지왕이라는 불명예쓰러운 별명도 얻구요. 결국 존 왕은 귀족 세력에게 굴복하고 그들이 제시한 대헌장, 마그나카르타에 협의할 수밖에 없었구요.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4세는 강력한 경쟁가문인 호엔슈타우펜 왕조와의 세력다툼에서 패배하며 권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갑자기 넓어지자, 필리프 2세는 이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각 지역에 바이이 (Bailli) 와 세네샬 (Sénéchal) 이라고 불리우는 행정관들을 파견해 관할 구역의 조세와 사법, 군사를 담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들 중 바이이는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들이었는데요. 신흥 시민 계급을 왕으로부터 봉급을 받는 관리로 채용해 귀족 세력에 대해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한 정책이었습니다. 한편 세네샬은 군사적으로 위험하거나 치안이 불안한 지역에 파견하는 기사 출신의 행정관들이었죠. 이 역시 지방의 하급귀족들을 관리로 임명한, 관료제의 시초 같은 모습입니다.
필리프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루이 8세는 카페 왕조의 다른 왕들만큼 오래 재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즉위한지 3년 만에 사망하면서 1226년, 12살의 어린 아들이 루이 9세로 즉위했는데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즉위한 덕분에 그는 무려 44년 간 재위하면서 프랑스 최고의 성군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군주가 됩니다. 별명도 성왕. 생루이 (Saint Louis) 입니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요. 1209년에 창설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지지해서 그들의 행동 강령을 따르고자 매우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빈곤층을 위한 구제사업과 복지정책들을 시행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죠.
그는 대부분의 유럽의 군주들의 관심이 식어가고 있었던 십자군 원정에도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 7차와 8차 두번에 걸쳐서 직접 원정에 참여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혀 고생도 하고 아들도 둘이나 잃고... 종국에는 본인도 전사했지만 그는 끝까지 두터운 신앙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지방의 봉신들과 분쟁이 발생해도 같은 카톨릭 신자들끼리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영토를 양보하는 대인배스러움을? 과시하기도 했죠. 그래서 푸아투와 가스코뉴, 귀엔느 지방이 잉글랜드로 넘어가긴 했지만요.
실리적인 면에서는 큰 손해를 본 것 같지만, 루이 9세는 이러한 영토 할양의 대가로 잉글랜드 왕에게 봉신으로서의 예를 확실히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평소에도 경건하고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존경을 받았고 도덕적이고 청렴한 군주로서도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그로서는 비록 영토는 양보했을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향상시키고 왕권을 확대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영방국가가 된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벨프 가문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가 가속화되고 에스파냐에서는 레콩키스타가 시작된 이후 다섯 왕국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독일은 이러한 서유럽 세계의 흐름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분권화가 심해지며 영방국가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건데요. 주된 원인을 살펴보면 거기엔 교황청이 있습니다. 10세기 신성로마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로마 교황청과의 특수관계가 오히려 족쇄가 되어 로마 교황의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죠.
11세기 독일에서는 작센 왕조가 끊어지고 잘리어 왕조가 들어섰지만 역시 이름만 있을 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국왕처럼 독일 영토를 실제로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제위 내내 그레고리우스 7세와 반목하며 교황권을 억제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성과를 거두는 데에는 실패했죠. 하인리히 4세! 하면 우리 머릿속에는 카노사의 굴욕이 떠오를 뿐...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는 교황과 결탁해 아버지를 축출하고 110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황권과 타협을 이루려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신앙심이 깊은 독일 봉건 영주들의 권한을 더욱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권 강화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된거죠. 시종일관 독일 귀족의 세력에 눌려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하인리히 5세는 왕권이 크게 약화된 상태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잘리어 왕조도 끝이 납니다. 프랑스 카페 왕조의 초기 군주들이 매우 오랜 시간 재위하며 통치의 안정을 도모한 게 프랑스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었는지가 새삼 느껴지네요.
잘리어 왕조가 끝났으니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하는데 조금 애매합니다. 다음 제위를 이은 것은 작센 공작인 로타르 3세인데요. 1133년 이미 50세가 넘은 나이에 즉위한 그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가문 내의 누군가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해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것은 이미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계를 두고서도 또 갈등이 벌어졌죠. 경쟁자들은 로타르 3세의 사돈 집안인 벨프 가문, 그리고 로타르 3세가 즉위 전 제위를 두고 경쟁했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이었습니다. 이 역시 독일의 중앙집관화와는 멀어지는 상황이죠?
사실 로타르 3세는 자신을 지원했던 사돈 가문, 벨프 가문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있었습니다.벨프 가문은 작센과 바이에른 지방을 중심으로 큰 영행력을 행사하던 가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위를 손에 넣는다면 다른 지역의 제후들은 세력이 크게 약화될 여지가 있었죠. 그들의 우려가 지나치치 않았던 것이, 실제로 벨프 가문은 주변 지역들을 군사적으로 병합하고 권한을 강화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로타르 3세가 사망하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됩니다. 아, 참고로 로타르 3세는 자신이 속한 가문의 처음이나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에 이 왕조를 그의 가문 이름을 따서 주플린부르크 왕조로 부르기도 합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 내세운 인물은 콘라트 3세입니다. 그는 독일 지역에서 벨프 가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했던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독일의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생전에 로마 교황에게 대관을 받지는 못했는데요. 그래서 그는 독일의 왕이긴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위기간 동안 벨프 가문을 비롯해 지역 제후들을 제압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해 노력했던 그는 2차 십자군 원정 소식이 들려오자 직접 군대를 꾸려 원정에 뛰어들었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일단 원정은 초반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원정대가 신성로마제국을 출발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입하자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룸 술탄국의 군대에 패해 2만 정도였던 군대가 거의 전멸하고 2천여명 정도만이 남게된 거죠. 콘라트 3세는 그 과정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중병에 드는 시련을 격었지만 그래도 그대로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적은 수의 원정대를 이끌고 다마스쿠스 공략에 힘을 보탰지만 결과는 이미 지난 글에서 다루었다시피 실패로 돌아가고... 그나마 십자국 국가에 우호적이었던 다마스쿠스는 장기 왕조에 합병되어 버립니다.
어쨌든 이제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 왕위를 차지했으니 경쟁 가문인 벨프 가문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과는 계속 반목해왔던 교황청과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던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들에게 손을 내밀었는데요. 마침 이 둘 역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벨프 가문과의 협력은 상당히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일단 교황청으로서는 황제권을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구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본거지인 슈바벤 사이에 완충지대로서 벨프 가문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죠. 한편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역시 자신들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과 협력하기로 합니다.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1세
결과적으로 콘라트 3세는 교황청으로부터 황제로 인정을 받는 것에는 실패하고 그가 사망하자 제위는 1155년 그의 조카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돌아갑니다. 바르바로사는 '붉은 수염'이라는 의미인데요. 훗날 17세기 프로이센에도 똑같은 이름의 군주가 있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이 별명으로 구별한다고 합니다. 그는 일단 벨프 가문에 바이에른 지역을 넘겨주면서 그들과의 갈등을 봉합하고 주변의 다른 중소 귀족들을 제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쪽으로는 덴마크,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헝가리, 남쪽으로는 부르군트까지를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죠.
제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1세가 가장 신경썼던 정책 중 하나는 이탈리아에 대한 정책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각자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던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들로까지 확대시켜 황제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였죠. 그는 38년의 재위기간 중 16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낼 정도로 이탈리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들은 황제의 이러한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일부 도시들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신성로마제국의 편에 서기로 합니다. 이들을 기벨린이라고 부르는데요. 피사, 스폴레토, 크레모나 등이 그런 도시들이죠. 한편 어떤 도시들은 교황청에 밀착하며 황제권 강화에 저항했습니다. 그런 도시들에는 피렌체, 제노바, 볼로냐 등이 있는데요. 이들을 구엘프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대응이 일관된 것은 아니었구요. 자신들 내부의 정치 상황과 황제와 교황과의 이해관계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 입장이 뒤바뀌기도 했죠. 이는 결국 이탈리아 반도와 신성로마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상당한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사실, 애초부터 북부의 도시국가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정치나 행정, 경제 면에서 상당히 선진화되어 있었고 자치의식도 강했던 그들은 롬바르디아 동맹을 결성해 그에게 맞섰습니다. 거기에 교황청 역시 적극적으로 그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일은 더욱 쉽지 않았죠.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권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일부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특히 아들인 하인리히 6세를 시칠리아 왕국의 쿠스탄차 1세와 혼인하게 하면서 사실상 시칠리아 왕국을 차지하죠. 한 마디로, 신성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 프리드리히 1세도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대군을 직접 이끌고 3차 원정에 나서는데요. 헝가리와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을 지나는 멀고 먼 길을 지나 마침내 소아시아 지역에 진입해서 룸 술탄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해, 오늘날 튀르키예의 킬리키아 지방에서 살레프 강을 건너던 중 물에 빠져서 익사했습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낙마를 했는데 갑옷이 무거워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고 목욕을 하다가 깊은 곳에서 발을 헛디뎠다는 얘기도 있고... 어쨌든 그 일로 그가 이끌고 온 군대 대부분이 해산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당시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휘둘렀던 프리드리히 1세의 뒤를 이어 1191년에 즉위한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아버지로부터 방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일부 계승하여 황제권을 더욱 강화시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우선 처가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왕국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직할지로 만들고 제위 역시 선출이 아닌 세습을 통해 잇게 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독일 내의 강력한 제후들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제위 세습을 정착시키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한편 시칠리아 왕국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확실히 봉합되지 않은 교황청과의 관계가 하인리히 6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교황청은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기반으로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상당히 우려했기 때문에 그가 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하는 것에도 거부감을 나타냈는데요. 하인리히 6세는 오히려 시칠리아 왕국의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며 교황청과 마찰을 빚었죠. 그러다가 시칠리아의 귀족들이 그에게 반발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또 다시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하지만 이 위기는 뜻밖의 사건으로 해소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이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를 붙잡아 하인리히 6세에게 송환한 것인데요. 사실 여기에는 리처드 1세에 대한 레오폴트 5세의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지만 잉글랜드는 호엔슈타우펜 왕실의 오랜 경쟁자였던 벨프 가문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이 상황은 여러 모로 하인리히 6세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잉글랜드로부터 몸값으로 거금을 뜯어낸 그는 시칠리아의 반란도 진압하고, 덤으로 벨프 가문의 세력도 좀 억누를 수 있었죠.
근데, 사람 일 참 알 수 없는게... 하인리히 6세는 그렇게 시칠리아의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 되지않아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맙니다. 사망할 당시 32살이었던 그에게는 3살에 불과한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2세로 제위를 잇게 되죠. 프리드리히 1세와 하인리히 6세 시절 내내 좀처럼 세력을 확대할 수 없었던 벨프 가문에게는 마침내 제위를 노려볼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 2세
아니나다를까, 벨프 가문 출신인 오토 4세는 어린 프리드리히 2세를 쫒아내고 제위를 찬탈해 처음이자 마지막 벨프 왕조의 황제로 즉위합니다. 그렇게 제위를 빼앗긴 프리드리히 2세는 1197년 외가인 시칠리아 왕국으로 망명해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하는데요.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상당히 훌륭한 통치를 보여줍니다. 사실, 이슬람 세력의 거점이었던 시칠리아는 노르만족이 그들을 몰아내고 왕국을 건설하던 당시부터 상당히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다문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가 이러한 시칠리아 왕국을 당대의 가장 세련되고 진보한 왕국으로 발전시킨 거죠.
그는 우선 1231년 멜피 헌장을 반포해 지방 귀족들의 세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이 헌장에는 행정, 토지 분야의 개혁과 재판, 형벌 체계에 대한 명시적 조항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왕이 임명하는 지방관에 의한 지방행정 집행, 그리고 귀족, 성직자, 시민 대표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의 운영 등 상당히 근대적인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한편 학문과 예술을 장려해서 자연과학과 수학,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죠. 본인도 6개 국어에 능통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고 해요. 덕분에 그에게는 '최초의 르네상스인' 또는 '세계의 경이'라는 멋진 별명이 붙었습니다.
물론 그가 평생동안 시칠리아의 왕으로만 머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벨프 가문에 제위를 빼앗겼으니 언젠가는 되찾아야 했죠. 신성로마제국에서 오토 4세가 잉글랜드의 존 왕의 프랑스 공격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마침내 프리드리히 2세에게도 복수의 기회가 옵니다. 1220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지원을 받아 오토 4세를 몰아내고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복권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6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도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전의 황제들과 마찬가치로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에는 실패했습니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탈리아 중부로 진출해 그의 외가인 시칠리아 왕국을 고립시키고자 했는데요.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맞서 교황군을 격파하고 이탈리아 중부를 시칠리아 왕국에 병합했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800년 동안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문화적 배경이 상이한, 별개의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 때 두 국가를 병합시킴으로써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와의 연결고리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졌죠.
시칠리아 왕국에서의 업적만 보면 그는 중앙집권화에 꽤 성공한 것 같지만 문제는 독일이었습니다. 시칠리아 왕국과 이탈리아에 너무 집중하느라 정작 독일 지역에서는 시칠리아 왕국에서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었죠. 결국 그는 독일의 강력한 제후들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인정하며 상당한 권한을 나누어 주어야 했습니다. 거기에 후계자 문제도 있었죠. 그는 아들인 하인리히 7세를 독일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의 제위를 잇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며 아버지와 마찰을 빚다 결국은 반란을 일으키고 유폐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자리는 둘째 아들인 콘라트 4세가 상속받지만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시칠리아, 예루살렘의 왕으로만 즉위할 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불과 26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멸망하는데요. 이후 20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황제위가 비어있는 소위 '대공위시대' 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독일의 제후들은 프리드리히 2세때 보장받은 자치권을 기반으로 각자의 독립국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느슨하게나마 존재하던 독일의 공동체 의식은 더욱 희미해졌고 독일은 본격적으로 영방국가 체제로 접어들었죠.
대공위시대라고 해서 정말로 황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특정 왕조에서 제위를 잇는 것이 아닌, 선제후들이 선출하는 황제가 제위를 이어가는 상황이었는데요. 이들이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실질적인 통치행위를 하기는 힘들었죠. 실권이 거의 없는 이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도 후보를 내었고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10세가 황제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본격적인 통치 의욕을 가진 황제들이 아니었고, 심지어 독일에는 거의 방문하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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