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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교황권의 확대와 십자군 전쟁

잘리어 왕조 

 

이제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와 완전히 단절된 유럽의 각국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우선 서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이었지만 어딘가 부실해 보이는 신성로마제국부터 하나씩 훑어보겠습니다. 대제의 칭호를 받았던 군주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는 아직 신성로마제국이 차지하지 못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 욕심을 냈습니다. 당시는 노르만족이 이탈리아 남부에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기 전, 사라센인들이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때였는데요. 983년,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칠리아에 가장 가까운 칼라브리아에서 사라센인들과 맞붙었지만 전투는 완전 망하고 본인은 부상을 얻어 고생하다가 얼마 안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오토 3세는 불과 세 살의 나이로 즉위해 모후인 테오파누 태후의 섭정을 받다가 친정에 나섰는데요. 다행히도 섭정? 하면 흔히 떠올리는, 외척 가문이 득세해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불상사가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옛 로마 제국으로 재탄생시키고 싶어했던 그는 로마를 중시하며 이탈리아 지역에 많은 관심을 쏟았구요. 교황청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독일인 교황을 선출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 지역을 크리스트교 문화권으로 완전히 편입시키고자 했죠. 하지만 그 역시도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왕위는 사촌인 하인리히 2세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작센이 아닌, 바이에른 공국 출신이었던 하인리히 2세는 오토 3세의 이탈리아와 로마 중시 정책을 계승하는 동시에 폴란드 공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그 두가지는 모두 무력 충돌을 의미한다는 거... 1002년에 이미 현재의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 공국을 복속시킨 그는 폴란드 공국의 볼레스와프 1세가 점차 세력을 키우며 독일의 동부지역을 공격하자 여러 번의 전투 끝에 휴전 협정을 맺으며 마이센 변경백 등의 동부 지역의 영토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발생한 반란들도 모두 진압하며 그 지역 내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성공했죠. 

 

근데 하인리히 2세도 역시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위는 지금의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를 맞대고 있는 케른텐 공국이라는 곳의 콘라트 2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제 오토 왕조가 끝나고 잘리어 왕조가 새롭게 들어선 것인데요. 말로만 들어도 작센이나 바이에른과 같은 공국들보다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느낌 아닌가요? 근데 생각해보면,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계승 시스템상 제후들은 본인이 황제로 선출되지 않는 이상은 강력한 황제가 권력을 휘두르며 제후들을 압박하는 상황을 반길 리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별로 영향력이 없는 공국의 후보자를 선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할만 합니다.

 

콘라트 2세는 폴란드 공국의 미에슈코 2세를 제압하며 그를 봉신으로 삼는 한편,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독립적인 왕국으로 존재하던 부르군트 왕국을 신성로마제국 내로 편입시켰습니다. 하지만 덴마크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크누트 2세에게 독일 북부지방을 일부 빼앗기기도 했죠. 현재의 독일 위의 덴마크 쪽에 툭 튀어나온 유틀란트 반도가 바로 이 지역입니다. 

 

콘라트 2세는 다행히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이 하인리히 3세로 선출되었습니다. 1039년에 황제로 즉위한 그가 무엇보다도 신경쓴 것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는데요. 황제위를 선제후들의 선거로 선출하는 방식으로 정하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선제후를 비롯한 많은 공작, 백작 등 봉신들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위협했습니다. 한편, 황제위를 최종적으로 인정하는 역할을 했던 교황은 자신을 지킬 군사력이 없으니 이들 봉신들과 필연적으로 밀착될 수밖에 없었죠. 황제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봉신들,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는 교황을 제압해야 했습니다.

 

하인리히 3세는 황제의 권위를 내세워 주교를 비롯한 중요한 성직에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인물들을 임명하며 주교임명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교황 선출에도 관여해 여러 명의 교황이 난립한 상황에서 자신이 내세운 교황 후보를 당선시키는 등 교회 권력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였죠.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가진 권력은 그의 시기에 교황과 제후들을 압도하며, 매우 강화되는 흐름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도 장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마흔이 안된 젊은 나이에 죽고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상황은 다시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죠.

 

 

왕권과 교황권

  

강력한 황제권을 휘두르던 하인리히 3세의 영향력하에 억눌려 있었던 각 지역의 봉신들과 교황청에서는 하인리히 4세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이를 잃어버린 자신들의 권위를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그의 모후인 아그네스 태후가 섭정을 하긴 했지만, 이 기간 동안 하인리히 4세는 각 지역의 봉신들의 권위를 강화해주는 몇몇 조치들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년이 되고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는 그런 조치들을 되돌리가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의 주교서임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장원 내의 교회는 분명 로마 교황청에 소속된 종교 조직이었지만 영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주는 교회에 막대한 토지를 기증하고 각종 혜택을 부여했고 교회는 방대한 토지를 지닌 지주가 되었기 때문에 이 둘은 일종의 공생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중세 초 피정복민들을 종교적으로 통합해 사회를 안정시켜야 했던 당시에는 교회가 세속 군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중세 사회가 안정된 이후로 영주들의 교회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었습니다. 영주들은 친인척을 사제로 임명하여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세력 하에 두려고 했고 교회는 세속적 특권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종교적으로는 타락했습니다.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한 수도원 운동은 교회가 토지를 비롯한 경제적 이득을 포기하고 교회 본연의 취지로 돌아가고자 하는 카톨릭 내부의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아키텐의 공작 기욤 1세는 교회의 세속적 권한을 박탈하고자 하는 의도로 클뤼니 수도원의 창설을 승인했지만 동시에 이는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속 군주의 권한이 계속해서 성장하면서 교황 마저도 황제가 임명, 해임하는 정도에 이른 상황에서 클뤼니 수도원은 성직자들을 독립적으로 교회 내에서 임명하고자 했고 교구 역시 영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을 따르는 교회가 급격히 늘어나자 프랑스를 넘어 영국에까지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1059년 로마 교황청은 로마 교황을 독일 황제가 아닌 추기경들이 선출한다는 원래의 원칙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미 세속 군주들의 성직자 임면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상태에서 이런 선언은 곧 세속 군주와 교회와의 대립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이미 선언한 원칙 대로 밀라노의 대주교를 선출할 것이라도 통보했습니다. 이는 교황이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한 것이었지만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자신의 성직자 임명권을 침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통보를 무시하고 밀라노 주교 선출 문제에 관여하며 독일 내 귀족들이 모인 종교회의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비난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고 놀란 독일 귀족들은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입장에서 이탈했습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이 문제를 그레고리우스 7세와 만나 개인적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알프스 북쪽 카노사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사태가 진정되자 자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귀족들을 몰아내고 다시 로마로 가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내쫒았습니다.

교황과 독일 황제가 대립하던 상황에서 프랑스에서는 양측의 타협안으로 보름스 협약을 내놓았고, 하인리히 4세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교는 교회에서 선출하되 선출된 교주는 군주의 다른 가신들처럼 군주에게 충성을 서약하다는 중재안이었습니다. 이는 양쪽에 공평한 중재안처럼 보이지만 교회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던 시점에 교황이 서유럽 세계의 유일한 종교적 지도자임을 재확인시켜주는 협약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은 교회의 타락을 정화하기 위한 수도원 운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정반대의 결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속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독립적으로 세속적인 사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곧 십자군 전쟁이라는 대규모 국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시작

그레고리우스 7세의 뒤를 이은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 교황이 확립한 교황권을 휘둘러 아직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교회를 통합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찾았습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이 점유하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라는 명분을 걸고 전쟁을 선동했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막강했던 세력을 중앙아시아의 셀주크투르크에게 내어주고 영향력이 다소 축소되어있던 상태였고, 성지 탈환을 먼저 추진했을 법한 비잔티움 제국 역시 중앙 권력이 불안정해 지방의 귀족들이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오히려 셀주크투르크의 침략에 시달려 로마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우르바누스 2세의 전쟁 명분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연설하는 모습을 묘사한 15세기의 삽화
세바스티앙 마메로 Sébastien Mamerot 가 쓴 연대기 <해외항로 Les Passages d'outremer> 에 묘사된 클레르몽 공의회에서의 우르바누스 2세, 1490년대로 추정


반면에 서유럽은 수백 년 동안 큰 전쟁이나 전염병의 창궐 없이 안정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농업생산량이 서서히 증가하며 인구가 늘어났고 유럽 전역이 개간되면서 토지가 부족해질 기미를 보였습니다. 따라서 과거와는 다르게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 양측의 세력은 매우 비등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마침내 성지 탈환을 위한 원정이 결정되었습니다.

첫번째 승리

1차 원정에는 평민에서부터 귀족들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참여했습니다. 총 8차로 간주되는 전체 십자군 전쟁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동시에 종교적 열망에도 가장 충실했던 원정이었습니다. 프랑스 국왕의 동생인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 툴루즈 백작 레몽, 로렌 대공 고드프루아,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노르만 공 보에몽 등 당대의 권력자들이 수많은 보병과 수천의 기사들을 동원해 참여했습니다.

수 개월의 이동 끝에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거점을 마련한 그들은 동진해 터키 서부의 니케아 왕국을 멸망시켰고 2년 뒤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관문인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해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성지를 탈환한 1차 십자군은 터키에서 팔레스타인까지의 해안선을 따라 아르메니아,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 4개의 십자군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뒤에도 계속된 십자군 원정의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기획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 첫번째 승리 이후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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