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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중세의 초가을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의 발전

 

로마 시대부터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마무리되고, 그 이후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들을 휩쓸었던 노르만족의 이동도 어느 정도는 잦아들고나니 이제 역사는 11세기로 접어들었네요. 이 두 차례의 민족 대이동은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의 남하였습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서구 문명의 변두리 또는 경계 쯤으로 인식되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시작되어 유럽 내륙과 지중해 지역으로까지 영향을 미친 이 현상은 분명 기존의 유럽 세계를 확대 재편성한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를 헝성하고, 문명사적으로는 로마-게르만 문명, 즉 유럽의 중세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중세 문명의 상징은 크게 크리스트교와 봉건제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이 중 크리스트교 부분을 먼저 봐볼까요?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 왕국들에게 남긴 제일 큰 유산이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로 클로비스 1세, 샤를마뉴 대제, 오토 대제, 알프레드 대왕 등 게르만족 왕국들의 정복군주들은 모두 크리스트교를 전파함으로써 정복지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실익을 거둘 수 있었죠. 이들의 개인적이 신앙심이 진실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크리스트교는 이제 막 세력을 형성한 세속군주들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미 수세기 동안 세속권력과 합쳐진 형태로 존재해온 동방정교에 비해 그런 권력 기반이 약한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도 세속군주들이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는 것은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딱히 물리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는 교황청으로서는 그들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교세를 확장시키고 자신들의 권위도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서유럽의 중세 초기 정복군주들과 로마 교황청은 서로 공생관계였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 공생관계가 결코 공평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 때와는 다르게 세속 권력은 수십 수백 개의 왕국과 공국, 귀족들의 영지로 분열 추세를 보였지만 종교 권력은 모두 교황에게 있었으니까요. 세속 권력은 교황으로부터 정통성 있는 군주로 인정받기 위해 다른 왕이나 귀족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인 반면, 교황은 그 많은 세속 권력 중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 가장 유리한 세력을 선택하면 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교황권은 중세 초반 동안 계속해서 세속 권력을 압도했습니다. 교황은 이 과정을 통해 더더욱 자신의 권위를 확대시켜나갈 수 있었구요.
 
한편, 서유럽에서 로마 카톨릭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자, 동로마 제국의 동방정교 역시 점차 세력 확대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동서 교회가 분열된 이래로 크리스트교의 정통성은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로마 카톨릭 세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니까요.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 이 두 크리스트교는 곧 경쟁하듯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각 종교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지역보다는 아직 로마 카톨릭도 동방정교도 전파되지 않은 지역으로 활발하게 포교활동이 전개되었죠.

 

동방정교는 동유럽 지역으로 활발하게 포교 운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노르만족의 남하에 밀려서 동로마 제국 북부에 자리잡은 슬라브족을 상대로 포교한 결과 863년 동로마 제국의 미카엘 3세는 지금의 체코 동부와 슬로바키아 지역인 모라비아 지역에 동방정교를 전파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은 독일의 동쪽 방향으로 포교사업을 추진한 결과 폴란드를 개종시켰고 이어서 달마치아 지방의 크로아티아까지 세력을 확대했죠. 그런데 크로아티아의 바로 동쪽 세르비아 지역에는 또 동방정교 전통이 뿌리를 내리는데.... 훗날 이슬람교까지 유입되면서 20세기에 들어서도 종교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동방정교는 10세기 후반에 들어 러시아를 개종시키면서 대박을 터뜨립니다. 988년 권력이 불안정했던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는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고 블라디미르 1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동로마 제국 황실과의 혼인을 요구했는데요. 이 때 양측의 거래가 성사되면서 키예프 공국이 동방정교로 개종한 것이죠. 이렇게 해서 탄생한 러시아정교회는 훗날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한 뒤로는 동방정교의 전통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덕분에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제2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을 이어 제3의 로마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죠.

  

  

교회와 성직자

 
분권적인 모습을 보인 세속권력과는 다르게 교회 권력은 중앙집권적이었습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각 교구의 대주교와 주교들이 서열에 맞게 편제되어 있었는데요. 다만 이들은 공식적으로 세속 권력을 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근데 이러한 교황의 정치적 필요에 호응한 것이 독일 왕국이었죠. 결국 이렇게 신성로마제국이 생겨나게 되었구요. 자연스럽게 로마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자신의 권력을 가장 장력하게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교황이 세속적 질서에 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로마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의 결합은 서유럽 전체로 봤을 때에는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에 비해 정치적으로는 유럽 세계의 중심이 되기는커녕 훗날 독일의 정치적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구요. 프랑스나 영국이 민족의식을 키우며 국민국가로 발돋움하는 동안에도 계속 귀족 세력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통일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한편 교황 역시 신성로마제국을 통해 서유럽의 세속적 질서에 개입하고자 하는 시도를 계속했고 그 결과 십자군 원정을 벌이지만 원정 실패 이후에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럼 좀 더 중세인의 생활로 들어가봤을때... 중세 유럽에서 교회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는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이기는 하지만 자체적인 법 체계 즉 교회법을 갖고 있어서 세속의 법과는 분리된 사법권을 행사했구요. 영주들 못지 않게 넓은 영지를 소유한 대토지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토지를 갖고 있으니 당연히 지대를 받았을 테고, 또 교회에서는 십일조라는 헌금을 받기도 했으니 사실상 세금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았죠. 그러고 보니 세속 군주나 귀족들이 자신의 영토나 영지에서 하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세속화된 교회는 일반 세속적인 군주들 못지않은 권세를 누렸습니다. 이들은 이교도의 침략이 있을 때 세속군주들의 보호를 받는 한편, 그들로부터 일반 귀족들과는 구별되는 특권을 얻기도 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불입권입니다. 불입권은 교회의 영지에 왕이나 귀족들, 그리고 그들을 대리하는 관리들의 출입을 금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한마디로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이죠. 영지에서 지대를 받고 십일조를 걷는 것도 모두 세속권력의 개입을 배제한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겠죠? 그러다보니 이들은 종종 도를 넘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을 고위성직에 임명하고 교회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런 행위들이었죠.

 

중세 교회조직은 매우 체계적입니다. 당연히 교황이 제일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었구요. 그 아래로 추기경, 대주교, 주교, 교구사제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황에서 주교에 이르는 고위성직자들은 귀족 가문 출신인 경우가 많았지만 교구 사제들 중에는 일반 농민이나 농노 출신들도 많았죠. 이들이 재능을 발휘하면 보다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황은 언제 생겨났을까요? 일반적으로는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를 최초의 교황으로 인정하지만 교황이라는 지위가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5세기 때부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부터 로마 주교를 다른 주교들과는 구분해서 베드로의 뒤를 잇는 특별한 주교라는 의미로 교황이라고 일컫다가, 11세기 그레고리오 7세 때부터는 그 지위가 보다 보편적으로 인정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교는 주교관구를 이끄는 고위성직자입니다. 주교관구 제도는 이미 로마 제국 말기부터 자리가 잡혀있던 상태였는데요. 이 주교관구를 맡고 있던 주교들은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대이동이 유럽을 휩쓸며 로마와 게르만족 왕국들의 행정 기능이 마비되자 이들을 대신해 주민들을 통치하고 보호했습니다. 세속의 통치자들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었죠.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성직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했는데요. 그 덕분에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이후에도 계속 세속의 통치권력과 유사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아니지만 중세 사회에 교회만큼이나 중요한 종교기관도 있습니다. 크리스트교가 성립된 초기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수도원이 바로 그곳인데요. 수도원 안에는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종교적 구원을 얻기 위해 수양에 전념하는 수도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제가 아닌 평신도 신분이기 때문에 교회와는 별도의 제도를 갖고 있었구요. 수도원 안에서 수도와 함께 옛 고전과 학문, 예술을 연구하고 전례하는 일종의 학문기관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이 시대의 거의 유일한 지식인 계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부자들 중에는 수도원에 토지나 재산을 기증하고 노년에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했구요. 또한 귀족 가문에서는 자식이 여럿일 경우 이 중 막내를 수도사로 수도원에 보내는 관습이 있어서 수도원장이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갖는 경우도 있었죠. 수도원은  큰 틀에서 보면 교황에 예속된 기관이기는 했지만 교회와는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과도하게 세속화되고 부패하면 이를 견제하는 정화 운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속학교와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기초적인 지식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구요. 빈민 구휼과 다양한 자선사업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에서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증받은 토지에서 수도사들이 직접 경작을 해서 농사를 지었는데요. 덕분에 경제적으로 농업 기술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뭄과 기근으로 식량이 부족할 때에는 각 장원의 영주들이 수도원에서 조달받은 식량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봉건제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유산이라면 봉건제는 게르만 문명 고유의 전통입니다. 물론 로마 제국 시기에도 콜로나투스라는 소작제의 원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문명에서도 그런 제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전통적인 게르만 부족사회는 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기 한참 전부터 이미 자체적인 봉건제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콜로나투스가 단지 경제적 요소에 한정되는 제도였다면 중세 시대의 봉건제는 경제적 요소를 넘어 중세를 정의하는 정치 체제이기도 했죠. 

 

사회경제사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은 봉건제의 경제적 요소만을 강조해 봉건제를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데에 따르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로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봉건제는 서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게르만족이 대거 유입되며 그 공백을 차지하고 세력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동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건제가 유지되는 중세 내내 이러한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죠. 

봉건제는 군주가 가신들에게 충성을 대가로 지급하는 봉토를 기반으로 하는데요. 그 직접적인 기원을 좀 거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사제와 은대지제로 나뉠 수 있습니다. 우선, 종사제는 군주와 가신 간의 일종의 주종관계가 제도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의 일방적인 군신관계와는 다르게 서로에게 쌍방의 의무를 지는 관계였습니다. 가신은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군주는 가신을 보호할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린다면 다른 한쪽도 자신의 의무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죠. 

 

게르만족의 종사제는 언뜻 보기에 로마 시대 당시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사이에 맺어지는 피호관계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신분이 더 높거나 권력을 가진 가문이 낮은 신분, 또는 영향력이 없는 하급귀족이나 평민들을 보호하고 후원하면 그들의 보호를 받는 하급귀족이나 평민들은 그들에게 정치적 충성을 바치는 거죠. 하지만 종사제는 로마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역을 정복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관습이지, 게르만족이 로마의 영향을 받아 만든 제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종사제에서는 딱히 경제적인 요소를 찾기는 힘든 거 같네요.

 

한편, 개인의 생존이 힘들고 사회구조가 단순했던 고대에는 단순히 보호만으로 가신의 충성을 살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사회가 발달하자 종사제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은대지제가 도입되었습니다. 은대지는 군주가 가신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대여해주는 땅을 의미하는데요. 이 은대지가 점차 봉토로 바뀌면서 봉건제로 발전했습니다. 원래 은대지는 군주가 가신에게 일회적으로 빌려주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주의 입장에서는 한번 땅을 빌려주고나니 다시 돌려받는 게 영 쉽지 않았습니다. 땅을 받은 입장에서도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다시 땅을 돌려주기는 싫을테니까요.  

 

그래서 은대지는 점차 토지의 소유권까지 가신에게 넘겨주는 봉토가 되었습니다. 귀족들간의 땅따먹기가 한창 벌어지던 시절에는 단기적인 전투를 앞두고 은대지만으로도 가신들의 충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영구적으로 운영하려면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충성이 필요해졌습니다. 따라서 군주가 가신에게 주는 땅 역시 장기적이고 항구적으로 대를 이어서 소유할 수 있게 해주어야 했죠. 그래서 군주는 토지를 가신들에게 사실상 영구히 봉토로 넘겼습니다. 그렇게 봉토는 가신들의 집안에 대대로 세습되었습니다.

 

서양의 봉건제는 동양의 봉건제와 크게 달랐는데요. 우선, 중국의 황제들은 서양의 군주들에 비해 훨씬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중국의 황제들은 대게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통치했고,만약 변방의 왕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중앙정부가 그들을 진압하거나 그럴 능력이 없으면 아예 멸망하고 새로운 제국이 들어섰죠. 그러나 서양의 봉건제에서는 상급영주가 하급영주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을 뿐더러 무조건적인 충성을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하급영주가 자신의 영지 안에서 하는 일에 대해 간섭하거나 관여할 수 없었구요. 하급영주는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상급영주의 세력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서양에서는 프랑크 왕국 이후 제국이라는 정치적 중심이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서유럽의 군주들은 계약에 따라 권력기반을 가질 뿐이었죠. 이렇게 정치적 중심이 없다보니 이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상당히 질서는 느슨하고 불명확했습니다. 왕은 있었지만 사실상 가장 높은 상급영주라는 의미에 불과했구요. 자신의 나라 전역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영주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국 안에 포함되는 영주들도 자신의 나라에 대한 큰 소속감을 갖고있지 않았겠죠? 이렇게 봉건제가 만들어낸 분권적인 국제질서는 중세가 끝날 쯤이 되면 다양하고 복잡하게 읽히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게 됩니다.

 

 

영주와 기사, 농노

 

그럼 그렇게 군주에게 받은 봉토에서 가신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가신들은 자신의 봉토 안에서 영주로 대우받았습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었죠. 봉토의 크기가 작을 뿐이지, 하나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주들은 초기에는 지급받은 은대지에 대한 대가로 상급영주에게 이용료로 세금을 냈는대요. 이후 은대지가 봉토로 바뀌면서 이러한 관습은 없어지고 오히려 광범위한 자치권인 불입권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상급영주라 하더라도 하급영주 봉토 내에서는 하급영주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침해할 수 없었죠.

봉건제의 영주들은 장원이라고 하는 자신의 영내에 농민, 즉 농노를 소유했습니다. 영주는 성 안에 살면서 성 밖의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받았고 장원 내의 방앗간, 대장간, 양조장 등의 공동시설을 소유해 이에 대한 사용료도 받았죠. 장원 내에 모든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장원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급자족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장원 내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경제적 자립, 나아가서는 정치적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물론 장원들 간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급자족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러한 폐쇄성은 중세 내내 장기적인 경제 침체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장원의 지도
중세 장원의 모습. 황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영주의 직할지, 빗금으로 표시된 지역이 교회에 봉헌된 토지를 의미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lan_mediaeval_manor.jpg)



한편, 영주가 자신의 장원을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군사력이었습니다. 영주는 자신의 장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상급영주의 충성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장원 내에 사병 조직을 운영했는데요. 그 사병 조직에서 장교의 위치를 담당한 것이 바로 기사였습니다. 기사는 신분상 귀족의 바로 아래에 위치했지만 평기사가 아닌 귀족 자제들도 아버지의 상급영주의 영지로 가서 각종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은 뒤 성인이 되면 기사 서임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훗날 기사도로 불리는 예절과 덕목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원래 게르만족 부족사회에서는 말을 탄 기병보다는 무기를 손에 든 보병들이 주요 병력이었습니다. 하지만 10세기에 들어 제련기술이 발달하고 철제 무기가 널리 쓰이면서 병사 개인이 소지하는 철제 무기와 방어구가 점점 무거워졌죠. 거기에 잦은 전투와 긴 이동거리 때문에 이동 속도도 중요해지자 이들은 걸어다니기보다는 말을 타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병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말도 비싸고, 철제 무기와 방어구도 비싸고... 그리고 그 둘을 잘 다루려면 상당 기간 훈련을 거쳐 기술을 익혀야 했죠. 이런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상당한 재력과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엘리트 계층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상급영주일수록 많은 기사를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기사들 중 장남은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차남 이하의 기사들은 계속해서 상급영주를 섬겼습니다. 상급영주들은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업무를 주고 이를 수행하면 봉급을 지급했는데요. 전쟁을 해서 다른 영주의 영지를 점령하게 되면 그곳을 약탈해서 기사들을 부양할 수 있었지만, 딱히 전쟁이 없을 때에는 영주들도 기사들은 부양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주들은 하급영주들에게 반발의 기색이 보이면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켜 기사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하고 전리품도 챙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영주와 기사들은 그렇다고 치고... 장원 내에서 직접적인 생산활동을 도맡아 했던 농노들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비참했습니다. 이들은 본래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스스로 귀족들의 보호 아래로 들어간 사람들이었는데요. 신체의 자유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가족을 꾸릴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의 노예와는 조금 다르긴 했습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영주가 모든 것을 장원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것들을 부양했는데요. 기본적으로는 농사를 지어 그 소출의 일정 부분을 지대로 납부했습니다. 

 

그게 가장 기본이고 거기에 추가적인 의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일단은 자신의 소작지가 아닌 영주의 직영지에서 일정 기간은 농사를 짓는 부역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농사일 말고도 영주가 거주하는 성의 보초를 서는 일도 부역의 일부였구요. 거기에 각종 세금을 납부해야 했는데요. 가족 수대로 납부하는 인두세를 기본으로 혼인세, 상속세 등이 있었습니다. 세금은 아니지만 생활에 필요한 각종 시설물들, 예를 들면 제분소와 제빵소, 창고, 수레 등을 이용하는 데에 대한 이용료도 따로 냈죠. 당시의 농노들은 ‘뿔 없는 소’라고 불리웠는데요. ‘말하는 짐승’으로 불리운 로마 시대의 노예에 비해 딱히 크게 나아진 것도 없는 것 같네요.

 

 

도시의 탄생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친 노르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은 유럽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때가 서기 1000년 전후이다보니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곧 신이 인간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종말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세기말적 공포에 빠져들었죠. 엄청난 재앙과 함께 세상에 종말이 올 것만 같은 공포. 2000년 대의 현대인들에게도 적잖게 통했던 떡밥이다보니, 그보다 문명적으로 한참 뒤쳐져있던 중세 유럽인들에게는 그 공포가 훨씬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종말은 없었고, 이민족들의 침입도 어느 정도 잦아들고 나니 11세기부터 유럽 사회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위대한 개간'이라고 일컫어지는 농업기술의 진보가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죠. 11세기 중반부터는 산이나 황무지 등이 대거 개간되며 새로운 농지가 생겨났구요. 농업기술도 진보해서 농기구가 개량되고 가축에 사용하는 쟁기 같은 농기구들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이렇게 농업기술이 향상되자 농업생산량도 당연히 늘어나겠죠? 예전에는 자급자족을 하고나면 땡이었는데 이제는 장원 내에서 소비를 하고나서도 남는,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잉여생산물들은 시장으로 모였습니다. 그러자 농촌의 특정 지역에 잉여생산물을 서로 교환하거나 판매하는 작은 시장들도 활기를 띄며 운영되었는데요. 그 중에서 교통이 편리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는 보다 먼 곳에서 온 물건들을 거래하는 좀 더 규모가 큰 시장도 생겨났습니다. 대표적인 시장이 바로 상파뉴 정기시입니다. 북해의 플랑드르 상권과 지중해의 베네치아 상권이 만나는 프랑스의 상파뉴에는 12세기부터 국제적인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일정 기간에만 시장을 여는 정기시였지만 점차 거래량이 많아지고 상인들도 늘어나자 연중 시장을 여는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이러한 시장은 상파뉴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각 지역에서 열렸는데요. 각 지역의 특산품을 거래하는 상인들과 더불어 대금결제를 위한 환전 업무와 어음 발행 업무 등을 담당하는 초기의 금융업자들도 이 당시부터 시장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자 운 좋게 이 지역에 자리잡은 장원이나 주교관구는 곧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죠. 성채 주변에 주거지와 상점이 생겨났고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켜 부르주아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중세의 도시들이 모두 같은 모습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주교관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주교관구 도시와 군사적 요충지에 발달한 성곽도시들도 있었죠. 하지만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고, 따라서 교통이 편리하고 시장이 열리기 용이한 광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시장을 중심으로 각종 상점들이 있었구요. 물건을 생산할 수공업자들을 양성할 교육기관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도시 전체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성곽도 잘 갖추어야 했죠. 

  

이제 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장원은 이제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에는 장사를 하려는 상인이나 금융업자들 외에도 도시 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죠. 이렇게 형성된 중세의 도시민들로부터 초기의 시민 계급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서로 상부상조 하기 위해 조합의 일종인 길드를 만들고 그 규율에 따라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영주들에 대항해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요. 대체로는 일정 금액을 납부하고 자유를 보장받는 방법으로 자치권을 얻었지만 반란을 일으켜 무력으로 자유를 쟁취해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유를 쟁취한 이들은 도시 내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면 재산과 상관없이 법적으로 모두 평등한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농촌 장원의 농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웠죠. 도시에서는 귀족들이나 많은 재산을 축적한 상인들 뿐만 아니라, 길드에 소속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모두 도시 행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살면서도 약간 특수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신앙생활에 전념하는 대가로 세금을 면제받는 성직자와 수도사들, 그리고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자체적인 규율에 따라 생활하며 세금을 면제받은 유대인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도시의 경제적 번영은 점차 정치, 종교, 문화의 영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성된 사회적 활력은 도시민들의 종교적 열망을 점차 부추기면서 도시 곳곳에는 부를 쌓은 부르주아들이 세운 거대한 교회들이 들어섰죠. 마치 신께 닿으려는 듯 하늘을 향해 높게 솟아있는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교회들이 바로 이 당시에 세워진 건축물들입니다. 이렇게 폭발하는 종교적 열망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교황의 세속적 열망?과 만나서 발생한 대사건이 바로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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