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리어 왕조
이제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와 완전히 단절된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대제의 칭호를 받았던 군주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는 아직 신성로마제국이 차지하지 못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 욕심을 냈습니다. 당시는 노르만족이 이탈리아 남부에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기 전, 사라센인들이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때였는데요. 983년,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칠리아에 가장 가까운 칼라브리아에서 사라센인들과 맞붙었지만 전투는 완전 망하고 본인은 부상을 얻어 고생하다가 얼마 안가 허무하게 사망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오토 3세는 불과 세 살의 나이로 즉위해 모후인 테오파누 태후의 섭정을 받다가 친정에 나섰는데요. 다행히도 섭정? 하면 흔히 떠올리는, 외척 가문이 득세해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불상사가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옛 로마 제국으로 재탄생시키고 싶어했던 그는 로마를 중시하며 이탈리아 지역에 많은 관심을 쏟았구요. 교황청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독일인 교황을 선출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 지역을 크리스트교 문화권으로 완전히 편입시키고자 했죠. 하지만 그 역시도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왕위는 사촌인 하인리히 2세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작센이 아닌, 바이에른 공국 출신이었던 하인리히 2세는 오토 3세의 이탈리아와 로마 중시 정책을 계승하는 동시에 폴란드 공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그 두가지는 모두 무력 충돌을 의미한다는 거... 1002년에 이미 현재의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 공국을 복속시킨 그는 폴란드 공국의 볼레스와프 1세가 점차 세력을 키우며 독일의 동부지역을 공격하자 여러 번의 전투 끝에 휴전 협정을 맺으며 마이센 변경백 등의 동부 지역의 영토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발생한 반란들도 모두 진압하며 그 지역 내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성공했죠.
근데 하인리히 2세도 역시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위는 지금의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를 맞대고 있는 케른텐 공국이라는 곳의 콘라트 2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제 오토 왕조가 끝나고 잘리어 왕조가 새롭게 들어선 것인데요. 말만 들어도 작센이나 바이에른과 같은 공국들보다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느낌 아닌가요? 근데 생각해보면,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계승 시스템상 제후들은 본인이 황제로 선출되지 않는 이상은 강력한 황제가 권력을 휘두르며 제후들을 압박하는 상황을 반길 리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별로 영향력이 없는 공국의 후보자를 선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해봅니다.
콘라트 2세는 폴란드 공국의 미에슈코 2세를 제압하며 그를 봉신으로 삼는 한편,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독립적인 왕국으로 존재하던 부르군트 왕국을 신성로마제국 내로 편입시켰습니다. 하지만 덴마크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크누트 2세에게 독일 북부지방을 일부 빼앗기기도 했죠. 현재의 독일 위의 덴마크 쪽에 툭 튀어나온 유틀란트 반도가 바로 이 지역입니다.
콘라트 2세는 다행히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이 하인리히 3세로 선출되었습니다. 1039년에 황제로 즉위한 그가 무엇보다도 신경쓴 것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는데요. 황제위를 선제후들의 선거로 선출하는 방식으로 정하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선제후를 비롯한 많은 공작, 백작 등 봉신들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위협했습니다. 한편, 황제위를 최종적으로 인정하는 역할을 했던 교황은 자신을 지킬 군사력이 없으니 이들 봉신들과 필연적으로 밀착될 수밖에 없었죠. 황제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봉신들,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는 교황을 제압해야 했습니다.
하인리히 3세는 황제의 권위를 내세워 주교를 비롯한 중요한 성직에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인물들을 임명하며 주교임명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교황 선출에도 관여해 여러 명의 교황이 난립한 상황에서 자신이 내세운 교황 후보를 당선시키는 등 교회 권력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였죠.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가진 권력은 그의 시기에 교황과 제후들을 압도하며, 매우 강화되는 흐름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도 장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마흔이 안된 젊은 나이에 죽고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상황은 다시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죠.
카노사의 굴욕
강력한 황제권을 휘두르던 하인리히 3세의 영향력 하에 억눌려 있었던 각 지역의 봉신들과 교황청에서는 하인리히 4세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이를 잃어버린 자신들의 권위를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섭정을 받긴 했지만, 이 기간 동안 하인리히 4세는 각 지역의 봉신들의 권위를 강화해주는 몇몇 조치들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년이 되고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는 그런 조치들을 되돌리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의 주교서임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의 교황은 1073년에 즉위한 그레고리오 7세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세속 권력에 기생하며 세속화되는 것과 세속 권력이 교회에 간섭하는 것 모두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리히 4세와는 결국 마찰을 피할 수 없었죠. 그는 황제의 주교서임권에 반발하며 교황만이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 양측의 갈등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밀라노 대주교 자리에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를 두고 본격적으로 충돌했습니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는 왜 갑자기 세속으로부터의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그건 당시 교회가 처해있던 상황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주의 장원 내의 교회는 분명 로마 교황청에 소속된 종교 조직이었지만 영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위치가 영주의 장원 안에 있구요. 또 영주는 교회에 막대한 토지를 기증하고 각종 혜택을 부여했습니다. 교회는 방대한 토지를 지닌 지주이기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지배계층과 이해관계를 함께 했습니다. 이 둘은 일종의 공생 관계였습니다.
중세 초,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시기, 이민족의 이동을 피해 농촌으로 모여드는 농민들을 보호하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했던 당시에는 분명 교회가 세속 군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자, 영주와 교회의 관계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죠. 영주들은 자신의 친인척을 교회의 요직에 임명하여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세력 하에 두려고 했고, 교회는 영주를 비롯한 세속권력에 기생하며 그들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특권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종교적으로는 타락했습니다.
그러던 중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교회가 토지를 비롯한 경제적 이득을 포기하고 교회 본연의 취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아키텐 공국의 기욤 1세가 교회의 세속적 권한을 박탈하고자 하는 의도로 창설을 승인했던 수도원이었는데요. 한편으로 이는 교회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세속 군주의 권한이 계속해서 성장하면서 교황마저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임명, 해임하는 정도에 이른 상황에서 클뤼니 수도원은 성직자들을 교황을 독립적으로 교회 내에서 임명하고자 했고, 각 지역의 교구 역시 영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죠.
금방 잠잠해질 것 같았던 이들의 움직임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을 따르는 교회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났던 거죠. 이런 흐름은 프랑스를 넘어 영국에까지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켰고, 분위기를 타고 1059년 로마 교황청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닌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한다는 원래의 원칙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미 세속 군주들의 성직자 임면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상태에서 이런 선언은 곧 세속 군주와 교회와의 대립을 격화시켰습니다.
이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에게 교회가 이미 선언한 원칙대로 밀라노의 대주교를 선출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이는 교황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한 것이었지만 하인리히 4세에게는 그렇지 않았죠. 그는 교황이 자신의 주교서임권을 침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통보를 무시하고 밀라노 주교 선출 문제에 관여하며 제국 내의 봉신들이 모인 종교회의에서 그레고리오 7세를 비난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해 버립니다.
파문은 카톨릭 신자로서의 모든 권한이 중지되는 최고 수준의 징계입니다. 세속 군주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킨 그레고리오 7세의 조치는 매우 강경한 것이었죠. 그래서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일부 귀족들은 교황의 이런 강력한 대처에 당황하며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철회했는데요. 가뜩이나 제국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던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국 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77년, 그는 이 문제를 그레고리우스 7세와 만나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알프스 북쪽 카노사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 나름대로는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추운 겨울 눈 밭에서 교황의 용서를 기다렸지만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레고리오 7세는 시간을 한참 끌다가 겨우 그를 만나 파문을 철회하고 용서해주었다고 합니다. 거기까지가 그 전까지 제가 알고 있던 이야기였는데, 사실 그 뒤의 이야기를 더 보면 하인리히 4세가 그저 굴욕의 대명사로만 남은 거 같아서 좀 아쉽기도 하더라구요.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는 소식이 제국 내에 퍼지자 하인리히 4세에게 적대적이었던 귀족들은 그의 정적인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 황제로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철회하긴 했지만,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의 대결에서 양쪽을 오가는 줄타기를 했는데요. 이 대결은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끝났죠. 그는 루돌프 세력을 모두 정리하고 자신에게 반발하던 다른 귀족 세력들까지도 모두 제압하며 다시 황제권 강화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즉위시켰습니다. 결국에는 복수에 성공한 셈이네요.
교황과 황제가 벌인 대결은 이렇게 양측이 한번씩 주고 받으면서 끝났지만 하인리히 4세는 말년에 들어 아들들의 반란으로 골머리를 썩어야 했습니다. 장남인 콘라트와 차남인 하인리히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킨 거죠.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고 황제로 선출된 하인리히 5세는 교황권과의 대결에서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주교서임권을 두고 교황 갈리스토 2세와 충돌할 뻔 했지만 이번에는 교황 측에서 협약을 준비해왔습니다.
1122년, 갈리스토 2세가 가져온 타협안은 간단했습니다. 주교는 교회에서 선출하되 선출된 교주는 군주의 다른 가신들처럼 군주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양쪽에 공평한 중재안처럼 보이지만 교회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되고 있던 시점에 교황이 서유럽 세계의 유일한 종교적 지도자임을 재확인시켜주는 협약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주교서임권은 교황이 가져왔으니까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변화가 본래는 교회의 타락을 정화하기 위한 클뤼니 수도원 운동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권력이 강화되는 결말을 맞게 된 것이죠.
십자군 원정의 시작
다시 그레고리오 7세의 다다음 교황인 우르바노 2세 때로 되돌아와서... 그는 그레고리오 7세가 확립한 교황권을 휘둘러 아직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교회를 통합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찾았는데요. 마침 적당한 사건이 동로마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가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죠. 우르바노 2세는 이슬람 세력이 점유하고 있던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해야한다는 명분을 걸고 멋진 연설로 세속의 군주과 귀족들을 선동했습니다.
사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확대로 크리스트교 세계가 위협당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는 견해도 있구요. 교황청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세속 군주들을 휘두르기 위해 일으켰다는 견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슬람 세계를 정복하고 부를 차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거라는 견해, 심지어는 기후 변화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유목민들이 크리스트교 성지 주변으로 이동해오며 이들과 마찰이 빚어진 탓이라는 견해도 있고... 크고 복잡한 사건일수록 한가지 원인보다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고, 또 한가지 원인도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도 있을테니까요.
당시 이슬람 세계는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셀주크투르크가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찬란한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던 아바스 왕조는 사분오열되어 여러 세력이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죠.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체적으로 성지 탈환을 추진했을 법한 동로마 제국도 상황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중앙 권력이 불안정해 지방의 귀족들이 황제를 위협하던 상황이었죠.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는 성지 탈환은커녕 오히려 셀주크투르크의 침략에 시달려 로마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우르바노 2세는 전쟁 명분은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서유럽은 수백 년 동안 큰 전쟁이나 전염병 없이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농업 생산량이 서서히 증가하며 인구가 늘어났고 유럽 전역이 개간되면서 토지가 부족해질 기미를 보였습니다. 늘어난 잉여 생산물이 유럽 각지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들어섰죠. 이러한 경제적 풍요는 종교적 열망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부를 축적한 상인과 귀족들은 자신의 도시에 거금을 후원했고, 대도시마다 거대한 교회들이 들어섰습니다. 이제는 과거와는 다르게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역량이 비교적 비등한 상태였습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의 선동적인 연설과 함께, 마침내 성지 탈환을 위한 원정이 결정되었습니다.
민중 십자군
우르바노 2세의 연설이 끝나자 유럽 각지는 성지 탈환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올랐습니다. 비단 왕과 귀족들 뿐만이 아니라, 전투에 나가본 적이 없는 평범한 농민들을 비롯해 무기를 다룰 수 있을지 다소 의심스러운 여성과 노인들과 아이들, 장애인들까지 온갖 다양한 계층의 인파가 로마로 몰려들었죠. 사실 이들은 유럽 각자의 왕과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원정을 위해 병력을 꾸리고 보급품을 준비하는 동안 먼저 모여습니다. 딱히 준비라고 할 게 없으니... 자기들끼리 자체적으로 원정대를 꾸리고 성지를 항해 출발한 건데요. 일명 민중 십자군이라고 불리우는 원정대입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성지 탈환을 위한 원정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은자로 불리웠던 수도승 피에르가 있었습니다.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일단 그는 수도승 신분으로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녔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우르바노 2세의 연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성지 탈환에 열광하던 당시 이들을 더욱 선동해 점점 더 많은 인원이 민중 십자군에 합류했죠. 이들은 은자 피에르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비범한 능력이 있으며 그가 자신들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나 봅니다.
이렇게 모여든 무리는 대략 10만을 헤아렸습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구체적인 원정 계획이나 통일된 지휘체계가 있을 리가 없죠. 이들은 군대가 아닌, 그냥 커다란 군중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모인 원정대는 로마를 출발해서 동진해 헝가리 왕국과 세르비아 대공국을 지나 동로마 제국 안으로 들어왔는데요. 여기까지 오니 나름 준비해온 식량도 떨어지고 돈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런 원정을 감당할 정도로 경제력이 있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아니었으니까요. 이들은 곧 필요한 돈과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에 의한 대대적인 약탈로 동로마 제국의 도시들은 몸살을 앓아야 했죠.
민중 십자군이 휩쓸고 지나간 도시들로부터 이들의 약탈에 대한 보고를 들은 알렉시오스 1세는 본격적인 십자군 원정대를 기다렸다 그들이 오면 민중 십자군 역시 그들과 함께 원정에 참여할 것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국내에서 벌어지는 약탈 행휘를 막아야 했던 알렉시오스 1세는 결과를 뻔히 예상하면서 그들에게 성지로 가는 길을 터주었죠. 그렇게 민중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의 영향권인 룸 술탄국으로 진입했습니다.
룸 술탄국은 셀주크투르크에서 독립한 투르크계 이슬람 왕국이었는데요. 이들은 처음에는 민중 십자군이 나라 안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원래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럽의 성지순례객들이 빈번하게 이 지역을 드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순례객이 아닌, 원정대라는 무리가 엄청난 수로 몰려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으며 행패를 부리자 술탄 클르츠 아슬란 1세는 이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민중 십자군은 룸 술탄국의 기병대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되었고 소수만이 살아남아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습니다. 본격적인 1차 십자군에 앞선 0차 십자군 원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죠.
첫번째 승리
민중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 소아시아 지역으로 진입하는 동안 유럽 각국에서는 본격적인 원정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르바노 2세의 연설이 있은 다음해인 1096년, 첫번째 원정이 시작되었죠. 1차 원정에는 평민에서부터 귀족들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참여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얼마나 여러 차례 있었는지는 저마다 다른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총 여덟 차례인 것으로 보는데요. 첫번째 원정은 전체 십자군 전쟁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동시에 순수한 종교적 열망에도 가장 충실했던 원정이었습니다.
원정에는 일단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동생인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 툴루즈 백작 레몽, 하 로트링겐 공작 고드프루아, 베르됭 백작 보두앵, 로베르 기스카르의 장남인 보에몽 공 등 당대의 권력자들이 수많은 보병과 수천의 기사들을 동원해 참여했습니다. 이들 중 왕은 없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막대한 영지를 거느린 대귀족들이었죠. 그러다보니 이들 사이의 지휘계통을 어떻게 설정할지가 문제였습니다. 원정군 내에는 분명 일관된 지휘체계가 있어야 했지만 이들 각자가 모두 강력한 세력을 가진 귀족들이다 보니 이들 사이의 상하관계를 정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죠.
어쨌든 이러한 문제를 안고, 수 개월의 이동 끝에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자 도시에는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의 입장에서는, 비록 요청에 의한 원정대이긴 했지만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이들이 모두 콘스탄티노플 안에 들어와 있는거니까요.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대로 도시를 점령하는 시도를 할 수도 있었죠.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을 환대하며 막대한 선물을 하사하고 모두가 함께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로의 출정했습니다.
룸 술탄국에서는 이미 민중 십자군을 손쉽게 이긴 적이 있었죠? 아마 클르츠 아슬란 1세는 이번에도 비슷한 무리가 침입한 것으로 알고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원정군이 니케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그는 수도를 비운 채 동부에서 원정 활동에만 몰두했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를 총사령관으로 한 1차 원정군은 손쉽게 니케아를 점령할 수 있었죠. 클르츠 아슬란 1세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니케아로 되돌아왔지만 이미 도시는 원정군에게 넘어간 후였습니다.
하지만 원정군은 겨우 니케아를 차지했을 뿐 원정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장기간 수도를 떠나 있는 것을 염려해 자신의 측근을 남기고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되돌아갔구요. 원정대는 이제 룸 술탄국의 영토를 가로질러 성지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1097년의 여름 내내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의 혹독한 열기와 룸 술탄국의 게릴라 부대에 맞서 싸우며 마침내 셀주크투르크의 도시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죠. 마침 준비해온 군수물자가 거의 바닥을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식량 부족은 원정군에게 큰 난관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문제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식량이 없다는 소문이 병사들 사이에 퍼지면 통제불가능한 공포가 이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죠. 거기에 룸 술탄국 각지에서 보낸 지원군들이 원정군을 공격해오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과 북아프리카 동쪽에 새로운 이슬람 왕조인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들에게 밀려난 셀주크투르크인들이 또 원정군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이 당시에는 이슬람 세력도 여러 나라로 산산조각이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 이들 십자군의 공격에 발빠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는 거...
이 점은 이슬람 세력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이었습니다. 셀주크투르크의 중앙 정계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십자군의 공격을 받는 각 도시의 태수들은 중앙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죠. 각 도시의 태수들도 서로에게 지원군을 쉽게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한편, 식량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공성전에 들어간 십자군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안티오키아의 장교를 매수해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안티오키아는 난공불락의 단단한 요새였지만 일단 성문이 열리자, 성이 함락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죠. 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보에몽이었지만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의 견제로 그는 이 성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다른 십자군 지도자 베르됭 백작 보두엥은 셀주크투르크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던 도시 에데사로 향했습니다. 에데사는 셀주크투르크의 도시였지만 정작 태수와 주민들은 크리스트교도들이었습니다. 보두엥은 에데사로 달려가 셀주크투르크인 군대로부터 에데사를 구해냈고 에데사 태수는 그를 사위로 삼으며 후계자로 지명했죠. 그런데 여기에서 좀 황당한 일이 일어납니다. 에데사의 주민들은 보두엥이 엄청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예 쿠데타를 일으켜 태수를 몰아내고 그를 새로운 지도자로 옹립한 거죠. 1098년, 이렇게 에데사에는 보두엥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일명 에데사 백국이라는 백작령인데요. 십자군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점령지에 세워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편,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지원을 요청했던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1세가 지원을 거절하자 안티오키아를 자신이 차지하겠다며 스스로를 안티오키아 공작으로 칭하고 이제 예루살렘을 되찾는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래서 이제 툴루즈 백작 레몽과 하 로트링겐 공작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었죠. 그 때까지도 십자군은 보급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군수물자는 여전히 충분치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굶주린 채로 지나는 도시들을 약탈하며 셀주크투르크를 빠져나와 시아파 이슬람 왕국인 파티마 왕조의 영역 내로 진입했습니다.
자국의 도시들을 지원하는 데에도 애를 먹고 있는데 굳이 시아파 왕국에 지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셀주크투르크는 십자군이 파티마 왕조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았습니다. 십자군은 일단 베들레헴을 함락시켜 차지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요. 마침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업도시인 제노바에서 넉넉한 군수물자가 도착하자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으며 사기가 오른 이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마침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이들은 도시 전체에서 마구 약탈을 벌이며 승리를 즐겼죠.
목적은 달성했는데, 이 원정은 원래부터 동로마 제국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따로 정산을 받더라도 원정을 통해 얻은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알렉시오스 1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했죠. 하지만 이미 안티오키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부터 서유럽의 십자군 지도자들과 동로마 제국 사이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예루살렘을 그냥 자신들이 갖기로 했습니다. 1099년, 이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고드프루아를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데사 백국과 안티오키아 공국에 이어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네요.
남은 건 툴루즈 백작 레몽입니다. 그는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나라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동로마 제국으로 돌아가면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주장을 할 수는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시오스 1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죠. 그는 안티오키아보다 좀 더 남쪽에 위치한 도시 트리폴리를 공격해 이 지역을 자신의 영지로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를 완전하기 점령하기 전에 숨을 거두고 그의 과업은 아들인 베르트랑이 이어받아 1109년에 트리폴리 백국을 창설했죠.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으로 4개의 십자군 국가가 들어서며 첫번째 원정이 끝났습니다. 본래의 목적인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원정에 참여했던 서유럽의 십자군 지도자들은 제각각 자신의 영지를 얻었으니 이 정도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원정이었습니다. 물론 이 원정을 위해 쏟아부은 인적, 물적 자원을 생각했을때, 이게 과연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괜찮은 사업이었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요. 이렇게 첫번째 원정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문은 금새 서유럽의 각국으로 전파되었고, 아쉽게도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이들은 곧 다음의 기회를 노려보기로 합니다. 이번에는 귀족들이 아닌, 각국의 왕들이 참전하는 좀 더 큰 판이 벌어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