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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동크랑크 왕국에서 독일로

지극히 조용한 멸망

샤를마뉴의 아들 중 일찍 사망한 둘째 아들을 대신해 넷째 아들인 샤를이 차지한 서프랑크는 분할된 영토들 중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서프랑크는 옛 로마의 속주인 곳이 대부분이라 문명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은 데에다가 당시 가장 진보된 정치체제인 봉건제도가 제일 잘 자리잡은 곳이었습니다. 한편, 그와는 반대로 셋째 아들인 루이가 받은 동프랑크는 위치상 발전에 제일 불리했습니다. 동프랑크 지역은 서프랑크에 비해 황무지라 농업에 불리한 데에다가, 당시까지 옛 로마제국의 전통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게르만 전통의 생활방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프랑크 지역은 노르만족의 이동경로상에 위치해 그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셋째 아들인 루이는 두 형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동생인 샤를보다 나쁜 영토를 받은 것입니다.

10세기 초, 카롤링거 왕조 혈통이 끊어지자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서프랑크와는 결별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약했던 동프랑크에서는 게르만족 전통이 비교적 강력하게 남아있었고, 귀족들은 굳이 프랑크족 혈통을 왕실로 세우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한 것입니다. 그렇게 프랑켄 공작인 콘라트 1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동프랑크에서 카롤링거 왕조는 지극히 조용한 멸망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동프랑크는 프랑크 왕국의 전통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지면서 옛 게르만 전통에 따른 부족연합체제로 회귀하며 중앙집권화와는 멀어졌습니다.

독일의 왕들

콘라트 1세는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 혈통이 단절된 이후 게르만 부족연합체데에서 선출된 첫번째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사는 그의 아들이 아닌, 귀족들 사이에서 선출된 작센공이었습니다. 그는 하인리히 1세로 동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고 처음으로 왕위를 세습하면서 첫번조 왕조인 작센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지역에 세습 왕조가 완전히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다시 귀족들의 선출에 의해 왕위가 결정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세습되기도 하면서 독일은 1000여년간 분권화의 긴 역사를 걷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1세는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독일의 초대 국왕으로 간주됩니다. 그는 과거 서프랑크와의 조약관계에서 탈피해 로트링겐을 침략해 빼앗고 각자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던 귀족들을 제압해 왕권 강화에 성공하면서 작센 왕조의 토대를 굳혔습니다.

 

베렝가리오 2세의 항복을 받는 오토 1세의 모습을 그린 삽화
중세의 역사가 오토 폰 프라이징 주교가 저술한 <세계의 연대기> 속의 오토 1세

 

하인리히 1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오토 1세는 흔히 오토 대제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는 노르만족의 이동에 대항해 외침을 방어하고자 북쪽에 변경주를 설치해 데인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또한 게르만족의 민간신앙이 남아있던 동프랑크 지역에 카톨릭을 전파하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한편, 당시 서프랑크 즉 프랑스는 하인리히 1세가 얻은 로트링겐 지역을 다시 탈환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오토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프랑스에 대해 우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넓어지자 그는 로트링겐, 슈바벤 (알레마니아), 바이에른 등지를 동생과 아들들에게 할양하고 자신은 작센과 프랑켄을 직속지로 통치하는 방식으로 독일의 영토를 유지했습니다. 961년, 오토 1세에게 굴복하며 충성을 맹세했던 중프랑크의 왕 베렝가리오 2세가 이탈리아에서 스스로를 로마 황제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로마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그는 이에 응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962년 교황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토 1세를 황제로 임명했는데, 이후 독일 황제는 로마 교황이 대관식을 주관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졌습니다. 그는 나라를 중흥시켰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샤를마뉴 대제와 닮은꼴이었습니다. 학문과 예술을 장려해 ‘오토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점도 샤를마뉴와 비슷하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화친을 도모한 점도 비슷합니다. 심지어 그는 비잔티움 황실의 황녀와 혼인하며 앞서 샤를마뉴가 이루지 못한 과업까지 달성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오토 1세를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오토 2세는 오토 1세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도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는 아직 쓰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실제로는 약 200년 뒤인 프리드리히 1세 때에 이르러서야 동프랑크, 즉 독일의 왕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소급해 오토 1세를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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