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트 왕국의 몰락
유럽 대륙에서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 이래로 샤를마뉴 대제가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하기까의 5 ~ 9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서고트 왕국에는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466년에 즉위한 에우리크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한 서고트 왕국은 수도인 톨로사, 오늘날의 툴루즈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옛 서로마의 아퀴타니아 지역을 차지하고 남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프랑크 왕국이 아직 자리를 잡기 전의 서유럽 세계의 최강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484년까지 전성기를 누린 서고트 왕국은 에우리크 왕의 사망과 동시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우리크 왕 사후에 즉위한 그의 아들, 알라리크 2세는 이베리아 반도 내에 거주하던 옛 로마인들과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서고트족 간의 화합을 위해 공통의 법전을 편찬하고 옛 로마인들이 신봉하는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박해를 철회하는 등 왕국 내의 통합적인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진운이 그렇게 좋지 못했죠. 당시 유럽 내륙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건국된 이래로 클로비스 1세라는 강력한 군주가 등장해 순식간에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독일 북서부 쯤에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남서쪽으로는 옛 로마인들이 세운 수아송 왕국을, 남동쪽으로는 알레만니 족을 몰아내며 내려와 마침내 서고트 왕국과 마주했습니다.
그러자 서고트 왕국 내의 로마 카톨릭 세력들은 앞다투어 클로비스 1세의 편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알라리크 2세가 그들에 대한 완화책을 폈다 하더라도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 클로비스 1세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는데 굳이 서고트 왕국을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죠. 알라리크 2세는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507년 부이예 평원에서 프랑크 군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샤를 마르텔이 이슬람 세력을 물리쳤던 투르 푸아티에 전투가 벌어졌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네요.
전투의 결과는 서고트 왕국의 완패였습니다. 서고트 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고 알라리크 2세는 전사했습니다. 프랑크 군은 아퀴타니아 지역 대부분을 차지한 채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톨로사를 함락시키고 도시를 약탈했죠. 만약 프랑크 군이 공격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서고트 왕국이 아예 멸망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다행히도 프랑크 왕국은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왕의 중재로 아퀴타니아 지역을 얻는 선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왕이 전사했으니 새로운 왕이 즉위해야 했습니다. 알라리크 2세에게는 미상의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게살레크와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왕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말라리크, 이렇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서고트 왕국이 프랑크 왕국의 공격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였을 때, 테오도리크 왕이 중재를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였네요. 서고트 왕국의 귀족들은 게살레크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멸망 직전의 서고트 왕국을 살려낸 공로가 있었던 테오도리크 왕은 자신의 외손자인 아말라리크를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서고트 왕국의 섭정이 됩니다.
테오도리크 왕의 사후 아말라리크 왕은 비로소 친정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서고트 왕국은 전성기 시절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 그는 옛 로마인들과의 통합 정책을 시행하고 멀어진 프랑크 왕국과의 외교관계도 다시 회복하며 나라를 부흥시켜보고자 노력했지만 허무하게도 후계자 없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알라리크 왕이 서고트 족을 이끌고 처음 왕조를 세운 이래로 이어져 내려오던 발티 왕조, 일명 톨로사 왕국이 문을 닫고, 서고트 왕국의 귀족들은 동고트족 출신의 테우디스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그는 아말라리크 왕의 섭정이었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왕이 서고트 왕국에 파견한 고문 출신이었죠.
이렇게 부이예 전투의 패배와 발티 왕조의 멸망 이후 이베리아 반도로 중심을 이동한 서고트 왕국의 지배세력들은 톨레도를 수도로 삼아 톨레도 왕국이라고도 불리우는, 새로운 서고트 왕국을 출범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주를 하고보니, 왕국 내부적으로 옛날 로마의 히스파니아 속주 시절부터 이베리아 반도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로마인들, 즉 히스파노로마노와 서고트족의 이질성으로 인해 여전히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즉위하는 왕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서고트 왕국 내부의 사회통합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습니다.
573년에 즉위한 레오비힐도 왕은 히스파노로마노와 서고트족 간의 화합을 위해 이들 사이의 결혼을 허용하면서 이 둘 사이에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레카레도 왕 때인 589년에는 마침내 서고트 왕국의 국교를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에서 로마 카톨릭으로 전환하며 종교적 통합을 이루었죠. 그리고 653년에 즉위한 레세스빈토 왕은 그 때까지 남아있던 두 민족간의 모든 법적, 제도적 차별을 철폐하며 완전한 통합을 이루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서고트 왕국이 내부적으로 점차 체제를 정비해나가는 와중에 지브롤터 해협 너머 남쪽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가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혀오고 있었던 것이죠. 이들은 반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차례로 세력을 뻗치며 경제적 수탈을 일삼던 북아프리카 지역을 차지하고 이제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부적인 사회통합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때까지도 서고트 왕국은 아직 왕위 세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바뀔 때마다 극심한 혼란에 시달려야 했죠. 710년 위티사 왕의 사후, 유력 귀족이었던 로드라고가 왕위를 차지하자 위티사 왕의 아들인 아길라 2세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711년 이슬람군 사령관 타리크는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드리고 왕이 이끄는 군대를 쳐부수고 로드리고 왕도 전사시키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서고트 왕국은 완전히 붕괴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800여년에 이르는 이슬람 세력의 통치가 시작되었네요.
알 안달루스의 탄생과 레콩키스타의 시작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오게 된 이슬람 세력은 그곳에 마련한 자신들의 정복지를 알 안달루스라고 불렀습니다. 반달족이 건너온 곳이라는 의미의 '반달루스'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의 사회 체제를 알 안달루스로 옮겨오며 새롭게 마련한 식민지를 빠른 속도로 넓혀갔죠. 본래 알 안달루스는 우마이야 왕조에서 파견한 총독의 통치를 받았지만 우마이야 왕조 중앙 정계와는 물리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총독이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땅은 넓은데 중앙의 통치권이 잘 닿지 않으니 이베리아 반도 내에 정착한 이슬람 세력 내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알력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중동 지역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랍 중심주의를 표방하던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아바스 왕조가 새롭게 들어선 것인데요. 이 과정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인 히샴의 손자 아브드 알라흐만이 알 안달루스로 망명해 그곳의 이슬람 세력을 규합하고 후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했습니다. 이제 알 안달루스에는 중동의 아바스 왕조와는 별개로, 독립된 이슬람 세습 왕조가 생겨난 것이죠.
후 우마이야 왕조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체제를 정비해 새로운 칼리파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습니다. 마침 위치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에 면해 있다보니 순식간에 지중해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죠. 당시의 이슬람 문명은 게르만족 왕국들보다 훨씬 앞선 수준에 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후 우마이야 왕조는 빠른 속도로 이베리아 반도 내의 정치, 종교 세력을 통합하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수도인 코르도바 역시 서유럽에서 가장 번영한, 세련된 도시로 급부상했죠.
한편, 과달레테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에 패한 서고트 왕국이 멸망한 이래로 이베리아 반도의 북쪽으로 밀려났던 로마 카톨릭 세력들은 그곳에 터를 잡고 카톨릭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 중 제일 처음 세워진 나라가 718년에 건국된 아스투리아스 왕국인데요. 이들은 722년에 벌어진 코바동가 전투에서 처음으로 후 우마이야 군을 물리치며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저항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북쪽의 카톨릭 세력이 남쪽의 후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자신들의 영토를 탈환해가는 국토회복운동, 즉 레콩키스타가 펼쳐집니다.
레콩키스타는 스페인어로 정복을 의미하는 콩키스타에 Re 를 붙여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재정복이라는 의미가 있겠네요. 서고트족이 정복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으로부터 다시 되찾아 재정복했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이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몇십 년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800년이나 걸렸네요. 이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 내의 카톨릭 국가들은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여한 대대적인 대 이슬람 전쟁이었던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하지 못할 만큼 자신들의 국토 회복에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8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이베리아 반도 내의 카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시종일관 전쟁만 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800년 동안의 전쟁이라는 것이 사실, 가능할지도 모르겠구요.그래서 현실에서 이 두 세력은 서로를 엄밀히 구분하고 배척하기보다는 어느 곳에서는 전쟁을 벌이며 치열하게 대립하기도 하고 또 어느 곳에서는 한데 뒤섞여 살기도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들 중에는 카톨릭교도였지만 이슬람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그들과의 공존의 길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아랍화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모사라베 (Mozárabe)'라고 불렀죠. 이들은 처음에는 이슬람교 정권 특유의 관용정책으로 큰 박해를 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레콩키스타가 진행되고 양쪽 세력의 대결이 격화되면서 이슬람 세력에게는 이교도로, 카톨릭세력에게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 밖에도 카톨릭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켜서는 물라디 (Muladí) 라고 불렀구요. 반대로 이슬람교도였지만 레콩키스타가 진행됨에 따라 카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토르나디소 (Tornadizo), 레콩키스타 이후 카톨릭 세력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슬람교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무데하르 (Mudéjar) 라고 불렀습니다. 카톨릭과 이슬람교 사이에 있던 애매한 사람들은 에나시아도 (Enaciado)라고 불렀는데요. 이는 첩자, 스파이라는 의미로도 통용되었다고 하네요. 실제로 이들은 양쪽 모두의 언어에 능통해서 첩자로 활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통치자들끼리야 전쟁을 일삼으며 대립했을지 몰라도 현실에서의 민중들의 삶은 여러가지 모습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는거죠, 뭐.
서프랑크 왕국에서 프랑스로
다시,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 한동안 상속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프랑크 왕국으로 돌아와보면... 이제 프랑크 왕국은 세 나라로 나뉘어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중 가장 유리한 출발을 하게 된 건 샤를마뉴의 막내 아들이었던 대머리왕 샤를이 나눠받은 서프랑크 왕국이었습니다. 서프랑크 왕국의 땅 자체가 비옥한 평지라 워낙 농업 생산량이 높았구요. 옛 로마의 속주였던 곳이 대부분이라 로마 문명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은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죠. 거기에 당시로서는 중세의 새로운 트렌드가 된 정치체제인 봉건제도가 제일 잘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 개의 프랑크 왕국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카롤링거 왕조가 유지되었습니다.
당시의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중앙집권적인 영토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왕은 분명 왕국 전체를 다스리는 군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통치권을 왕국 전체에 미치게 할 강력한 권력은 없었죠. 왕은 귀족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졌지만 귀족들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 내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지방분권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귀족들의 영지에서는 왕이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왕국 내에는 왕에 버금가는 강력한 귀족들이 여럿 존재했습니다.
서프랑크 왕국은 대머리왕 샤를 2세 이후 987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 동안 서프랑크를 비롯한 게르만족 왕국들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바이킹족의 한 일파인 노르만족의 약탈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습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로마 제국이 겪었던 고통을 이제 게르만족 왕국들이 당하는 입장이 된거죠. 그들 중에서도 노르만족 족장 롤로가 이끄는 부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부터 배를 타고 남하해 센 강을 따라 파리까지 와서 약탈을 했는데요. 결국 단순왕 샤를 3세는 그들에게 루앙 지역을 나눠주고 롤로에게는 루앙 백작이라는 작위를 내려 정착시켰습니다. 이 지역은 훗날 노르망디 공국이 되죠.
그런데 서프랑크 왕국이 막아내야 했던 외세는 노르만족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쪽에서는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이슬람 세력이 서프랑크 왕국을 위협하고 있었구요. 동쪽에서는 우랄 산맥 남쪽에 살던 강력한 기마민족인 마자르족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동프랑크 왕국과는 옛 중프랑크 왕국의 영토였던 로타링기아 지방을 두고 잦은 다툼을 벌이기도 했죠. 이 지역은 훗날 국민국가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영토분쟁이 벌어지는 곳인데요. 이미 이 때부터 핫한 동네였나 봅니다.
단순왕 샤를 3세 이후 왕위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아닌 샤를 3세의 봉신이자 강력한 대귀족인 로베르 1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노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서프랑크의 귀족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자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는데요. 1년 만에 암살되고 왕위는 그의 사위인 라울이 차지했습니다. 이후 다시 카롤링거 왕조 혈통의 루이 4세가 즉위했기 때문에 카롤링거 왕조가 이 때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로베르 가문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는 루이 4세의 손자인 무위왕 루이 5세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습니다. 19살에 즉위한 그는 1년이 조금 넘는 재위기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무위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요.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건지 후사를 남기는 일조차 하지 않아서... 그가 20살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에는 카롤링거 왕조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죠. 그러자 왕위는 자연스럽게 그 전에도 종종 왕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던 로베르 가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로베르 가문이 987년에 세운 프랑스의 본격적인 첫 왕조가 바로 카페 왕조입니다.
현재의 프랑스 땅에 사람이 살고 도시가 생겨난 역사는 매우 길지만 보통은 이 카페 왕조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프랑스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가 생긴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본래 로베르 가문은 파리 주변의 일 드 프랑스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근데 샤를 3세와 왕위를 다툰 적이 있었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가진 가문이니 그냥 평범한 귀족은 아니었겠죠. 카페 왕조를 창건한 위그 카페는 로베르 1세의 손자로 카롤링거 왕조의 루이 5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많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습니다.
많은 귀족 가문의 지지를 받아 새 왕조를 열었으니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였을 것 같지만 이 당시의 프랑스는 사실 그런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프랑스는 좀 형편이 나은 수준이었죠.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이미 독립적인 지역이었던 아키텐이나 예전에는 아예 부르군트 왕국이라는 별개의 나라였던 부르고뉴, 노르만족이 정착한 루앙 지역의 노르망디 공국 등은 모두 독립적인 세력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카페 왕조가 우리가 인식하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모습에 가까워지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더 흘러야 했습니다.
동프랑크 왕국의 지극히 조용한 멸망
서프랑크 왕국과는 반대로 샤를마뉴 대제의 셋째 아들인 독일왕 루트비히가 받은 동프랑크 왕국은 위치상 발전에 제일 불리했습니다. 동프랑크 지역은 서프랑크에 비해 황무지가 많아서 농업에 불리한 데에다가, 당시까지도 옛 로마 제국의 전통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게르만 전통의 생활방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동프랑크 지역은 노르만족의 이동 경로 상에 위치해 서프랑크보다 더 많은 약탈을 겪어야 했죠. 서프랑크 왕국도 노르만족들을 달래느라 영토를 따로 떼어주어야 했을 정도인데 동프랑크 왕국은 그보다 더 큰 피해를 겪었다니, 독일왕 루트비히는 확실히 두 형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동생인 샤를보다 나쁜 영토를 받았네요.
동프랑크 왕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과거 샤를마뉴 대제가 영토 확장 과정에서 유독 치열한 전투를 겪어야 했던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당시까지도 동프랑크 왕국에 속해있는 귀족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상당히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죠. 당시 동프랑크 왕국은 작센, 프랑켄, 로트링겐, 슈바벤, 바이에른, 이렇게 5개의 부족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공국의 공작들이 카롤링거 왕조의 왕족들 중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왕을 선출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왕위세습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던 서프랑크 왕국에 비하면 왕권이 상당히 약한 모습입니다.
부족공국이라는 말이 좀 생소하긴 한데요. 한편으로는 오히려 직관적인 용어인 것 같습니다. 게르만족의 부족 공동체 생활방식과 봉건제적인 체제가 혼재된 그런 모습의 나라가 아니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이런 부분도 뭔가 서프랑크 왕국에 비해서는 좀 낙후된 느낌이 드네요. 이 부족공국의 지도자들은 각자가 자치권을 가진 군주였기 때문에 이들이 왕을 선출할 때에는 당연히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기보다는 영향력이 약한 인물을 선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동프랑크 왕국의 왕권은 늘 약할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유력한 귀족들이 왕이나 황제를 선출하는 전통은 훗날 신성로마제국으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동프랑크 왕국에도 노르만족과 마자르족의 공격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왕의 권한이 별볼일 없는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5개의 부족공국들이 각자 알아서 자신의 영토를 지켜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과 7살에 왕위에 올랐던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19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부족공국의 공작들은 새로운 왕을 뽑아야 했는데요. 이제 더 이상 카롤링거 왕조에는 후계자가 될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뽑은 인물은 5개의 부족공국 중 하나인 프랑켄 공국의 군주 콘라트 1세였습니다. 이 때를 독일이라는 나라의 시작으로 치는 것 같습니다. 콘라트 1세는 독일의 첫번째 왕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콘라트 1세는 카롤링거 왕조에 이은 새로운 왕조를 연 것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콘라트 왕조라고 붙일 수 있겠지만 그 역시도 외아들이 일찍 요절하고 더 이상은 후사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왕위는 다시 작센 공국의 군주 하인리히 1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다행히도 하인리히 1세는 콘라트 1세보다 훨씬 강력한 군주였고 아들인 오토 1세에게 성공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왕조인 오토 왕조의 개창자가 되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콘라트 1세는 그냥 건너뛰고 하인리히 1세를 본격적인 독일의 첫번째 왕으로 보는 관점도 있죠.
이렇게 동프랑크 왕국에서도 카롤링거 왕조는 단절되고 동프랑크 왕국도 오늘날 우리가 독일이라고 부르는 그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 전체가 그냥 자연스럽게, 조용하게 흘러가서인지 동프랑크 왕국의 멸망을 두고 지극히 조용한 멸망이라고 일컫는다고 합니다. 베르됭 조약이 체결된 것이 843년이니까 이 때 이후로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한 911년까지 동프랑크 왕국은 불과 68년을 존속한 것이 됩니다. 서프랑크 왕국의 역사의 절반 정도인 셈이네요.
더 복잡한 중프랑크 왕국의 사정
분명 프랑크 왕국이 처음 나눠질 때만 해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없어진 것 같은 중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 반도의 상황도 한번 복습해볼까 합니다. 이왕에 복습할 거 시간을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성상 숭배 금지령에 반발하던 로마 교황청은 랑고바르드 족이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라벤나가 점령당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레오 3세가 교황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끌어들인 결과였죠.
랑고바르드 족 역시 본래는 게르만족의 한 일파로 스칸디나비아에서부터 남하해 5세기 쯤이 되면 다뉴브 강 유역에 이르렀는데요. 그러다 568년 알보인 왕 때 파비아를 수도로 자신들의 왕국을 수립하고 동로마 제국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 일대를 차지할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 반도는 새롭게 생겨난 랑고바르드 왕국과 동로마 제국, 두 나라의 영토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부에는 랑고바르드 족에 의해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이 건설되었죠.
756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입으로 다급해진 교황청이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로 내려와 랑고바르드 군을 몰아내고 라벤나를 교황에게 기부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에게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영토를 빼앗긴 랑고바르드 왕국은 피핀 3세가 사망한 후 재기를 노렸지만 하필 프랑크 왕국에서는 피핀 3세를 능가하는 걸출한 인물인 샤를마뉴 대제가 즉위하면서 또 위기를 맞이합니다. 773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데시데리우스 왕은 다시 한 번 로마를 포위해 공격했지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샤를마뉴 대제에게 패하고 왕국은 멸망했습니다.
이제 랑고바르드 왕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 북부는 프랑크 왕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훗날 경건왕 루이 1세의 사후, 그의 세 아들이 왕국의 영토를 나누어 가진 베르됭 조약에 의해서 중프랑크 왕국이 되어 장남인 로타르 1세에게 돌아갔죠. 하지만 이 때에도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는 랑고바르드 족이 세운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이 남아있었는데요. 이들은 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강력해짐에 따라 그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계속 자치권을 유지하면서 스폴레토 공국은 13세기까지, 베네벤토 공국은 11세기까지 존속합니다.
로타르 1세가 차지한 중프랑크 왕국의 최초 영토는 말 그대로 프랑크 왕국을 세로로 셋으로 나눌 때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북쪽에서부터 보면, 훗날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화약고?가 되는 일명 알자스-로렌 지방에 해당하는 로타링기아 지역, 즉 프랑스의 중동부와 독일의 중서부 지역, 부르군트, 그리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있던 이탈리아 북부지역이죠. 그런데 로타르 1세가 죽자 또 다시 그의 세 아들들이 다시 그의 영토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세 아들들은 855년 프륌 조약을 맺어 이번에도 영토를 셋으로 나누었고, 이렇게 중프랑크 왕국도 멸망합니다. 사실, 이 셋도 역시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이니 꼭 멸명이라기보다는 해체라고 하는데 맞을 거 같기도 하네요.
우선 장남인 루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북부를 받았구요. 장남이라 로타르 1세의 서로마 황제 지위도 상속했습니다. 차남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막내인 프로방스의 샤를은 부르군트와 프로방스를 받았습니다. 이 셋 중 가장 단명한 아들은 막내였던 프로방스의 샤를이었습니다. 그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위의 두 형들이 동생의 영토를 나누어 갖는데요. 북쪽의 부르군트 부분은 로타르 2세에게 남쪽인 프로방스 부분은 루도비코 2세가 가져갔습니다.
한편 로타르 2세에게는 서자이긴 하지만 아들 위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사후에 로타링기아 지역은 위고가 물려받아야 하는데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동서 두 왕국이 나누어 가졌다가 10년 뒤에는 리베몽 조약으로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가 차지하며 그 영향력 하에서 로타링기아 공국이 됩니다. 이제 루도비코 2세의 땅이 남았네요. 그가 죽자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 지방은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도 죽고, 이탈리아 북부는 동프랑크 왕국으로, 프로방스 지방은 로타르 2세의 부르군트 지방 일부와 합쳐져 하 부르군트 왕국이 되며 독립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 합쳐지기를 반복하던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을 이을 자손들이 부족해지면서 한때 동프랑크 왕국의 비만왕 카를 3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프랑크 왕국이 다시 샤를마뉴 대제 시절의 강력한 단일 왕국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겠죠? 아니나 다를까 카를 3세는 얼마 못 가 귀족들로부터 신뢰를 잃으면서 쿠데타로 폐위를 당하고 카롤링거 왕조의 힘도 서서히 약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두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 왕조라는 공통점이 사라지면서 각자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유럽사에도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나라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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