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발단
노르망디 공 월리엄 1세가 영국 왕이 된 이래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토 분쟁은 늘 있어왔습니다. 이후 앙주 가문이 영국 문제에 개입하고 플랜태저넷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와 앙주를 정복하자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가 크게 넓어졌던 사건과, 성왕 루이 9세 때 파리 조약으로 가스코뉴가 영국의 영토로 인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의 불만을 키웠습니다. 오랜 영토 문제는 결국 전쟁의 형태로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왕권을 크게 강화시킨 필리프 4세 이후 카페 왕조는 샤를 4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직계가 끊어지며 왕위계승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위에 권리가 있었던 인물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 명은 샤를 4세의 사촌이자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 6세였고, 다른 한 명은 필리프 4세의 딸인 프랑스의 이사벨과 영국왕 에드워드 2세 사이의 아들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필리프 6세를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이는 이전까지와 다르게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조금씩이나마 국민의식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에드워드 3세는 1330년 스코틀랜드 정복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경쟁자였던 필리프 6세는 이 때 스코틀랜드를 지원했습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로 건너가 스스로를 프랑스 왕이라고 자칭했습니다. 플랑드르는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는데, 당시 수공업자와 부유한 상인들의 갈등을 플랑드르 백작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플랑드르로 건너간 에드워드 3세는 독일과 네덜란드 등 플랑드르의 주변국들과 연합해 대 프랑스 공동전선을 구축했고 필리프 6세는 이에 대항해 프랑스 내의 마지막 남은 영국령인 아키텐의 가스코뉴를 몰수했습니다. 이로써 양측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의 등장
백년전쟁은 이름처럼 백년 이상 진행된 전쟁이었지만 그 기간 내내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국력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작은 왕국이었지만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는 비등한 군사력을 보였습니다. 영국의 궁병들이 사용한 장궁은 프랑스군을 대적하는 데에 크게 효과적이었고 시스템적으로도 왕권이 느슨하고 관료제가 발전한 프랑스에 비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영국의 효율적인 대응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양국은 팽팽하게 대결했습니다.
도버 해협에서 해상전을 치룬 양측은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지상전을 벌였습니다. 영국은 장궁병을 앞세워 크게 승리하고 노르망디에서 아키텐에 이르는 프랑스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한편,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는 프랑스 전역에서 여러 번의 전투에 승리하고 1356년에는 프랑스 왕인 장 2세를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유럽 전체에 번진 페스트와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점차 소모되던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 양측 모두 내부의 극심한 권력다툼으로 양측은 20년 동안 휴전하는 데에 합의했습니다.
전쟁은 1415년부타 재개되었습니다. 이 때에도 영국은 거의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낼 정도로 우세했지만 잔 다르크가 등장하면서 오를레앙을 수복했습니다. 오를레앙은 영국의 입장에서는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연결 지점이었고,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이곳을 잃으면 루아르 강 이남 훨씬 남쪽까지 후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수복한 것은 전세를 뒤엎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승리에 있어서 잔 다르크의 활약이 크게 부각되긴 했지만, 사실은 그 무렵부터 도입된 대포의 역할이 컸습니다. 프랑스는 1437년 파리를 탈환하고 영국이 점령했던 영토를 거의 수복해서 1452년 가스코뉴까지 얻으면서 승리했습니다.
잔 다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과의 전쟁 도중 프랑스에서는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영국의 헨리 5세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의 왕위를, 원래의 계승권자인 샤를 7세가 아닌 영국 왕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 사이의 아들 헨리 6세가 잇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둘 다 일찍 죽자 영국에서는 갓난아기인 헨리 6세를 프랑스의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이에 부르고뉴 가문은 영국과 결탁하고 오를레앙 가문은 프랑스 왕가와 결탁한 상태였습니다. 이 때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수복하자, 프랑스에서는 헨리 6세가 아닌 원래의 왕위계승권자인 샤를 7세가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
전장이 프랑스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영토 전역이 황폐화되었고 군사들의 급료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아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의 거의 잃어 도버 해협의 칼레 지방만 남았고, 막대한 전비로 재정 위기를 맞았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습니다. 샤를 7세가 참전기사들을 중심으로 상비군을 편성해 프랑스의 군사적 기반을 닦았고 이후 등장한 강력한 프랑스 군주들이 왕권을 크게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전쟁에 용병을 도입한 반면 영국에서는 각 귀족들의 사병이 활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소 영주들이 대영주들 휘하로 들어가면서 중소영주들이 난립했던 영국의 봉건제가 한차례 정리되었고 대귀족들의 발언권이 크게 신장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는 모두 전쟁을 거치며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고 나라 안에서는 국민의식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두 전쟁은 봉건 영주들 간의 싸움이었지만 전쟁이 워낙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이 아닌 일반 평민들에게도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애국심이 생겼습니다. 특히 서유럽 역사에서는 비교적 변방에 속했던 영국은 프랑스와의 대등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륙에 대한 열등의식을 떨쳐버리며 서유럽의 확실한 주도세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장미전쟁과 튜더 왕조의 탄생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일찍 사망한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 2세는 귀족들과의 권력다툼에서 패해 폐위되었습니다. 이로써 플랜태저넷 왕조가 문을 닫고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4세가 즉위했습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후손인 요크 가문은 이에 반발해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를 폐위하고 요크 왕조를 열어 에드워드 4세를 즉위시켰습니다. 이 두 가문은 1455년부터 30년 동안 왕위계승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데 두 가문 모두 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했기때문에 이 전쟁을 장미전쟁이라고 합니다.
에드워드 4세 이후 영국의 왕위는 불과 12세였던 에드워드 5세가 이었습니다. 그러자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차드 3세가 윙위를 찬탈하고 에드워드 5세와 그의 형제들을 런던탑에 가두어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3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에게 패해 왕위를 잃었습니다. 헨리 7세로 즉위한 헨리 튜더는 모계만 랭커스터 가문이고 부계는 리치먼드 백작 튜더 가문이었기 때문에 헨리 7세는 튜더 왕조의 창설자가 되었습니다. 튜더 왕조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크게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절대왕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도 절대왕정이 성립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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