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제국
십자군 원정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십자군 왕국들이 생겨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미카엘 8세가 팔레올로구스 왕조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가 됩니다. 이 무렵 비잔티움 제국은 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소아시아 서부, 그리스 반도 정도만 갖고 있었고 서유럽의 다른 왕국들과 비교했을 때 평범한 왕국들과 비슷했습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겨 재정이 악화되고 내부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습니다. 시리아는 일찌감치 이슬람권의 손에 들어가고 그나마 유지하던 소아시아 지역은 오스만튀르크가 차지했습니다. 오히려 서쪽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비잔티움의 속국이면서도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왕국은 몽골의 침략으로 쇠퇴했습니다.
셀주크튀르크가 몽골에 의해 멸망한 뒤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한 오스만튀르크는 1326년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 근처 부르사를 수도로 삼으며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했습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사이 오스만튀르크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를, 니코폴리스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르나에서 불가리아를 물리치고 비잔티움의 오래된 식민지인 그리스를 점령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구했지만 이 때 교황청은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있었고, 비잔티움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453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총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로마가 건국한 지 1100년만에 멸망했습니다.
에스파냐
14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아라곤, 카스티야, 포르투갈 3개의 크리스트교 왕국과 그라나다의 이슬람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이라곤과 카스티야 두 왕국은 1469년 혼인정책으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습니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는 함께 두 통합 왕국인 에스파냐의 공동국왕이 되었습니다.
1492년 에스파냐는 그라나다 남부의 마지막 남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마침내 800년만에 레콩키스타를 완성시켰습니다. 이 해에 이사벨 1세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상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로 개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콜롬버스를 비롯한 에스파냐의 신항로 개척 사업으로 신대륙 아메리카가 발견되며 지중해 항로에서 소외되었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일약 대서양 시대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도시의 형성
원래 도시는 인류 문명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도시는 단지 인구가 밀집된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공업 도시입니다. 이전까지의 중세 도시 중에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나 영주의 장원 같은 성채 도시, 교구의 경계에 따른 주교 도시가 있었지만 10세기를 전후로 점차 교통의 중심지에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모여들며 생산자도시를 형성했습니다. 초기의 수공업도시는 안전 확보를 위해 영주의 성곽 주변에 터를 잡고 성장했다가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이 모여들어 스스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자 점차 영주의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영주들은 도시의 등장을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인구가 늘어나자 징세를 목적으로 도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도시들은 영주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자치권을 인정받거나, 납세를 거부하고 영주에 맞서 싸웠습니다. 한편, 시민과 영주가 서로 협력해 공생 관계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언뜻 쉽지 않아 보이지만 영주의 권력이 약한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비교적 흔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점차 강화되어 13세기에 이르면 많은 도시들이 영주에 대항해 자치권을 획득합니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들었습니다. 농촌에서 농노였던 사람들도 일단 어떻게든 도시에 들어오면 자유민이 되었으므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고 장원의 해체를 가속화했습니다.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워진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평등에 기반을 둔 행정, 사법체제를 수립했습니다. 세금 역시 시민들을 위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납세가 시민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14세기 중세의 도시들 중 인구 5-10만 명 정도의 가장 큰 도시들은 베네치아, 파리, 팔레르모,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 바르셀로나, 쾰른, 런던 등이었고 볼로냐, 파도바, 뉘른베르크, 스트라스부르크, 뤼벡, 루앙, 브뤼주 등이 그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이탈리아 북부와 플랑드르 등 정치권력은 약하고 시민자치권이 강한 곳이었고, 해상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강력한 왕국이나 에스파냐 같은 소왕국이 아닌 자치도시들이 형성된 곳이었고 지중해와 북해, 발트해 등 바다와 면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이슬람과 비잔티움 제국을 제치고 도시들이 크게 발전했고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항구도시들이 한자 동맹을 형성해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작은 공국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서 번영을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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