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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

  

대항해 시대의 시작

 

15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마침내 이슬람 세력을 모두 몰아내며 레콩키스타를 끝마쳤습니다. 이제 이베리아 반도 전체는 카톨릭 세계가 된 것이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뿌듯해할만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다보니, 한창 국민국가로 거듭나고 있던 유럽 내륙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는 다소 후진적인 사회로 낙오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때만 해도 일찍이 히스파니아라는 속주로 편입되며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훨씬 먼저 선진적인 로마 문명의 혜택을 누렸지만 오랜 기간 이슬람의 지배를 겪는 동안 상황이 뒤집힌 것입니다. 

 

한편, 이제 이슬람 세력을 자신들의 땅에서 완전히 몰아냈다는 승리감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자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망을 포교를 통해 펼치고자 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미 십자군 원정 당시 경험했던 그 열정이 이제 이베리아 반도에서 다시 한 번 불타오르기 시작한 가죠.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였습니다. 일단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은 이미 유럽과 아시아가 강력한 전통사회로 자리잡고 있었구요.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 세계가 지배하고 있었죠. 사실 이쪽으로 진출하는 것도 시도해보긴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한 탐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반드시 종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선진 문물은 동방에서 유래된 것이었는데요. 유럽 대륙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는 이러한 동방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일 멀리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문명 수준 역시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지게 되었죠. 그 와중에 오랜 세월 동안 레콩키스타에 전념하다보니 지중해에 면해있다는 장점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구요. 십자군 원정 동안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는데 말이에요.

동방으로부터 유입되는 문물 중 가장 중요한 품목은 향신료였는데요. 그 중에서도 향신료의 왕, 검은 황금으로도 불리우는 후추가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냉장시설이 없었던 중세 사람들에게 후추는 고기류의 부패를 막아주고 풍미를 더해주는 아주 귀한 향신료였죠. 하지만, 후추는 인도에서 소량만 생산되는 향신료였기 때문에 당연히 값이 아주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족들이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던, 그런 향신료였을 것입니다. 

 

사실, 후추가 생산되던 인도에서는 후추 가격이 그렇게까지 비싸진 않았을 거에요. 하지만, 당시 향신료 무역은 인도와 유럽의 중간에 위치한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는데요. 이들이 중간에서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면서 한차례 값이 뛰고, 거기에 이들로부터 후추를 매입한 이탈리아의 상인들 역시  마진을 붙여서 유럽 전역에  팔았을데니... 인도에서 출발한 후추가 유럽 귀족들의 식탁 위에 올라올 즈음에는 백배가 넘는 가격이 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특히나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동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후추 값은 더더욱 비싸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향신료 무역, 특히 후추 무역이 이렇게 큰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유럽의 상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그 루트를 알아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을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후추의 원산지를 밝혀내는 데에는 실패했죠. 후추 원산지는 아라비아 상인들에게도 매우 귀중한 정보였기 때문에 유럽의 상인들에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직접 동방을 탐험하면서 후추 원산지를 찾아보자, 하며 나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럽의 상인들, 특히 레콩키스타가 끝나고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종교적 사명감과 싼 값에 향신료를 구하고자 하는 경제적 목적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상인들이 바다로 나섰죠.  

  

 

항해왕자 엔히크 

   

혹시 유명한 포르투갈 왕,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항해왕 엔리케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는 항해'왕'이 아닌 항해'왕자'였고, 이름도 포르투갈식으로 발음하면 엔히크라고 하더라구요. 왕보다 유명한 왕자, 엔히크는 당시 유럽의 여러 선진국들이 아직 지중해와 북해 무역에만 집중하던 당시 처음으로 대서양으로 눈길을 돌려 대항해시대의 막을 올린 선구자였습니다. 

 

사실, 그가 등장하던 당시, 포르투갈은 당시 에스파냐보다도 더욱 발전에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일찌감치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지만, 동쪽의 카스티야 왕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었는데요. 에스파냐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보다 더 동쪽의 유럽 내륙으로는 연결될 수가 없으니...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는 바다로 눈을 돌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죠. 오랜 동안 이어지던 카스티야 왕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을 선포한 아비스 왕조의 창업군주 주앙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 북아프리카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1415년, 왕자인 엔히크와 함께 세우타 정복에 성공했죠.  

  

세우타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 본토를 마주보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도시입니다. 지금은 멜리야라는 또 다른 스페인 도시와 함께 아프리카 내의 유이한? 유럽 국가의 영토로 남아있는데요. 모로코에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요즘은 모로코의 이민자들의 불법 이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하네요. 어쨌든 엔히크 왕자는 세우타 정복 이후 이곳의 총독이 되어 추가적인 북아프리카 진출 사업을 추진하던 중, 주앙 1세가 북아프리카 정복을 포기하자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왕위를 잇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앙 1세가 죽자 엔히크 왕자의 형인 두아르트 1세가 즉위하고, 또 그가 사망한 뒤에는 조카인 아폰수 5세가 어린 나이로 즉위해 왕위를 이었지만 엔히크 왕자는 시종일관 정치의 중심에서는 빗겨나 있었죠. 세우타 정복 이후 북아프리카로의 진출이 흐지부지되자 그 이후에는 중앙 정치 별로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엔히크 왕자는 젊은 시절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황금으로 가득 찬 크리스트교 국가인 프레스터 존의 나라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이 북아프리카  어딘가에 광활한 영토와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나라가 있다는 소문은 오랜 세월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워온 유럽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죠. 물론 프레스터 존 이야기 자체는 허구이긴 하지만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트교 문명을 이룩한 에티오피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결국,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 전쟁이 거의 후반부로 접어들던 15세기 초, 프레스터 존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던 엔히크 왕자는 원양 항해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포르투갈에는 원양 항해를 이끌만한 기술력을 갖춘 인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숙련된 항해 기술로 명성이 높았던 베네치아의 조선공과 항해사, 천문학자, 지도제작자 등을 모집해 포르투갈로 불러들였죠.

먼 바다를 장기간 항해하는 원양 항해는 그 전까지 주로 해왔던 연안항해와 전혀 달랐습니다. 중간 기착지도 없이 위치가 불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은 당시의 유럽인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우선 그전까지 유럽인들이 항해하던 지중해와 다서양은 전혀 다른 바다였구요. 지중해는 선원들이 노를 저어 항해할 수 있는 작은 바다였던 데에 반해 드넓은 망망대해인 대서양에서는 사람의 힘이 아닌,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범선이 필요했습니다. 또, 나침반이나 사분의 등의 정교한 항해 장비를 다루는 기술도 포르투갈에서는 그다지 보편화되어있지 않았죠. 

 

무엇보다도 선원들은 먼 바다로 나가는 것에 대해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사하라 지역 이남으로 내려가면 지옥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거나 거대한 바다 괴물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미신이 그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까지는 유럽에서 출발한 배가 사하라 이남, 정확히는 보자도르 곶이라 불리우는 지점 이남으로 남하했다가 돌아온 적이 없었다고 하네요. 그러니 보자도르 곶을 세상의 끝이라고 불렀던 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최신식의 범선을 건조하고, 첨단 항해 장비를 갖추고, 또 기술력을 갖춘 인력을 모아 목숨을 건 원양 항해를 하는 건 엄청난 비용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우주 개발 사업과도 많이 비교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우주 개발 사업과 비슷하게도 투자에 비해 초반의 성과는 미약했구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히크 왕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비를 들여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업을 이어갔고 1419년에는 마데이라 제도, 1427년에는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는 작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이 섬들에 중간기착지를 건설해 더 먼 바다를 탐험할 수 있었죠.  

  

1434년에는 포르투갈의 탐험가 질 이아네스가 마침내 뱃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의 바다로 이어지는 관문으로 불리우던, 서사하라 해안의 보자도르 곶을 통과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아프리카 남쪽, 즉 적도 이남으로의 항해를 위한 바닷길이 열린 것인데요. 먼 바다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자 엔히크 왕자의 항해 사업도 더 활기를 띄었죠. 그러다 마침내 1444년, 아프리카의 가장 서쪽인 베르데 곶을 발견하면서 대서양 동부의 해도가 어느 정도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의 원래 목적은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을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찾는 거였죠. 아프리카 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이들은 1448년, 세네갈강 하구에 이르렀는데요. 이곳은 정말 금이 채굴되는 곳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이곳에서 많은 양의 금을 채취해 크루자두 (Cruzado) 라는 금화를 주조하고, 이를 아프리카와 인도 무역에서 주된 교역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유럽인에 의한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 무역이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물론 노예 무역은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이 때 처음 노예 무역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식민지 무역의 일부로서 노예 무역이라는 거대한 산업이 처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 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는 주로 아랍의 노예 상인들에 의해 흑인과 유럽인들이 노예로 거래되었다면, 유럽인들 중에서는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유럽으로 데려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1441년 포르투갈인 탐험가 안탐 곤살베스는 서사하라 해안 지역에서 처음으로 흑인을 납치해 포르투갈로 데려왔는데요. 마침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노동력이 줄어든 포르투갈에서는 탐험대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납치해오기 시작했고, 이렇게 데려온 흑인들을 마데이라나 아조레스 등에 건설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으로 투입했죠. 이들은 힘도 세고 면역력도 강해서 질병에도 잘 걸리지 않는 반면에, 백인 노동자들에 비해 인건비는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드니 포르투갈 상인들은 너도나도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엔히크 왕자가 시작한 이 거대한 사업은 그가 죽은 뒤, 주앙 2세에 의해 더욱 본격화되었습니다. 사실, 엔히크 왕자 본인은 한번도 직접 항해에 나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세우타 정복을 위해 북아프리카에 다녀왔던 것을 제외하면 일생의 대부분을 포르투갈에서 보냈죠. 배멀미가 심해서 배를 오래 탈 수 없다는 설도 있고... 어쨌든 이 항해 사업이 그의 생애 동안에 상당한 성과를 내었으니 포르투갈에서는 이제 더욱 본격적으로 여기에 자원을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엔히크 왕자가 사망한지 20여년이 지난 1488년, 마침내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최남단을 발견하고 귀환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당시의 다른 포르투갈 탐험가들처럼 그 역시 아프리카 어딘가에 존재하는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찾아 항해에 나섰는데요. 그는 1차 관문인 보자도르 곶을 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해류가 급격히 바뀌며 파도가 거세지는 기니만 이남 어딘가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현재의 남아공 케이프타운 근처에 상륙했습니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포르투갈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했죠. 주앙 2세는 이 곳에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

 

한편, 포르투갈이 항해 사업을 통해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과정을 지켜본 에스파냐는 그보다 조금 늦게 신항로 개척에 뛰어들었습니다. 제일 큰 이유로는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구요. 포르투갈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내부적 통합을 끝내고 신항로 개척에 국가적 역량을 쏟을 수 있었던 반면에, 에스파냐에서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통합으로 두 나라가 한동안 시끌벅적했기 때문인 점도 있었죠.

 

또 에스파냐는 이미 레콩키스타 후반부 쯤 되면, 일부 이슬람 세력들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받기도 했는데요. 이들을 통해 아프리카로부터 금, 향신료, 노예 등의 물자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포르투갈만큼 적극적으로 신항로 개척에 뛰어들 동기도 좀 부족했었습니다. 하지만 옆 나라의 사업 성공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기에는 상대적인 박탈감도 드는 데에다가 레콩키스타가 끝난 뒤로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얻었던 조공 수입도 끊어졌으니 그를 대체할 물자를 찾아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에스파냐는 남쪽, 아프리카를 주로 탐험했던 포르투갈과는 다르게 서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설이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에서는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 하다보면 포르투갈과는 다른 방향으로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정작 이러한 계획을 실행으로 옮긴 이는 에스파냐인이 아닌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탐험가였습니다. 

 

148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의 탐험 프로젝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주앙 2세를 찾았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적극적으로 신항로 개척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때라 그는 주앙 2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면 어렵지 않게 지원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앙 2세는 이미 아프리카 항로에 꽂혀있었고, 서쪽으로 항해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내자는 콜럼버스의 제안은 거절당했죠. 근데 그 이유 말고도, 콜럼버스가 신항로에 대해 너무 과도한 권리를 요구해서 거절했다는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프랑스에서 모두 거절당한 콜럼버스는 당시 레콩키스타를 막 끝마친 에스파냐로 향했습니다. 사실 에스파냐 역시 처음부터 콜럼버스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는 이사벨라 1세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지원하기로 했죠. 이렇게 해서 1492년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1세와 산타페 협약을 맺고 본격적인 탐험에 나섰습니다. 콜럼버스가 앞으로 발견할 지역에서의 부왕 지위를 인정받고 그곳에서 산출되는 금의 10%를 소유할 수 있다는 매우 후한 조건이었는데요. 거기에 이러한 권리들은 그의 자손들에게도 대대로 세습되는 것이었다고 하니, 이건 좀 과한게 아닌지...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의 항해를 시작한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는 대장정 끝에 마침내 바하마 제도,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라고 부르던 섬에 상륙했습니다. 항해 동안 선상에서의 고된 생활과 선원들의 온갖 불평불만과 폭동, 폭풍우 등 고초란 고초는 다 겪었던 그는 처음 상륙한 그 섬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산 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구세주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자신이 도착한 그곳이 신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인줄 알았죠.   

 

한편, 포르투갈에서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이래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동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탐험가가 등장했습니다. 바스쿠 다 가마인데요. 그는 그렇게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만 한다면 향신료 무역으로 큰 부를 쌓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오스만 튀르크가 동방으로의 길목을 차지한 상황에서 인도로 가는 신항로의 개척은 포르투갈에게 무척이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이렇게 리스본을 출발한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는 콜롬버스의 신대륙 상륙 6년 뒤인 1498년에 마침내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습니다.  

 

바스쿠 다 가마가 도착한 인도는 콜럼버스가 도착한 산 살바도르와는 사뭇 다른 곳이었습니다. 산 살바도르의 순박한 원주민들은 처음으로 만난 유럽인들에게 많은 선물을 가져다주며 환대했지만, 이미 오랫동안 아랍인 상인들과 거래해왔던 캘리컷의 노련한 향신료 상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가 가져온 변변치 않은 교역품에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이미 인도는 유럽과 이슬람 세계 못지 않은 문명 세계였고 이러한 인도의 실체가 유럽에도 알려지자 유럽에서는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땅이 인도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죠.  

 

콜럼버스는 12년에 걸쳐서 총 네차례 신대륙을 탐험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현재의 쿠바와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자메이카, 온두라스 등에 해당하는 곳들을 발견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그곳을 여러 번 오가면서 그곳이 인도가 아닌 신대륙임을 확신했고 결국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한편, 그는 애초의 목적대로 엄청난 부를 얻지도 못했습니다. 훗날 에스파냐는 신대륙으로부터 엄청난 금을 채굴해오면서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우뚝 서기는 했지만 그건 좀 더 이후의 일이었구요.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은 그냥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거주하던 마을들이 모여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들에서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며 금을 채취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며 그들의 문명을 파괴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후원했던 이사벨라 1세가 죽은 뒤 점차 몰락의 길을 걷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의 개인적인 삶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그의 발견이 에스파냐의 운명에, 더 크게는 유럽, 그보다 더 크게는 세계사 전체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엄청난 영향이죠. 그의 신대륙 발견으로 에스파냐는 유럽의 변방에서 순식간에 최대 패권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또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서 세운 나라는 현재 전세계에 유일무이한 일강으로 군림하고 있으니까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초상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초상화

 

인도에 제대로 도착한 바스쿠 다 가마 역시 악행으로 치자면 콜럼버스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도착한 인도의 캘리컷은 이미 오랫동안 아라비아의 상인들과 무역을 해오던 곳이었는데요. 아라비아 상인들은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이 인도 항로를 개척하자 이들을 크게 경계했습니다. 이제 향신료 무역에 대한 독점력이 약해질 테고 그렇게 되면 이들의 이윤도 줄어들 테니까요. 결국 캘리컷에서는 포르투갈의 탐험대와 아라비아의 상인들 간에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죠. 적어도 싸움의 당사자인 양측은 억울한 점이 없겠지만 이 전투로 쑥대밭이 된 캘리컷은 그 동안 별 탈이 없던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거래를 방해한 포르투갈 탐험대를 적대시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매입한 향신료를 유럽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길 꿈에 부풀어 있던 포르투갈의 탐험대는 캘리컷 당국이 자신들과의 교역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아라비아 상인들과는 큰 마찰을 빚는 등 상황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합니다. 결국 이들은 탐험대가 아닌 해적단이 되어서 인도양 근처를 지나는 배들을 약탈하고 인도의 항구도시들 역시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들이 소위 이교도라고 여긴 수많은 아라비아와 인도의 상인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죽음으로 몰아넣었죠. 

 

1503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탐험대는 엄청난 양의 향신료를 싣고 포르투갈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얻은 이득을 정당한 교역의 대가라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는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그 뒤에는 포르투갈의 본격적인 인도 진출 정책에 힘입어 인도 총독의 자격으로 다시 인도를 방문했지만 말라리아에 걸려 인도에서 사망했습니다. 포르투갈 역시 잠시 간은 바스쿠 다 가마가 개척한 인도 항로를 통해 향신료 무역으로 적지 않은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얼마 안 가 네덜란드의 상인들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죠. 

 

   

토르데시아스 조약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두 나라에서 신항로 개척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지다보니 이제 두 나라의 개척 경쟁이 다소 과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에스파냐는 서쪽으로 항로를 개척했다면 두 나라가 서로 다투게 될 일이 뭐가 있었을까, 싶지만 사정은 좀 더 복잡했습니다. 이 다툼의 실마리는 이사벨라 1세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에 오른 계기가 되었던 카스티야 왕위계승전쟁에서부터 비롯되죠.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엔리케 4세의 딸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와 이복동생인 이사벨라 1세가 왕위를 둘러싸고 내전을 벌이는 중이었는데요. 후아나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의 왕비이기도 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후아나를 지지했습니다. 한편, 아라곤 왕국의 왕자 페란도는 이사벨라 1세와 혼인했기 때문에 아라곤 왕국은 당연히 카스티야 왕국을 지지했습니다. 나중에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두 나라는 연합왕국이 됩니다. 

 

이 내전은 결과적으로 교황청이 개입해서 양측을 중재하면서 알카소바스 조약을 맺으며 마무리되었는데요. 그러면서 교황청은 당시 이미 북아프리카 앞바다에서 활발한 신항로 개척사업을 벌이고 있던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인정해, 카나리아 제도를 기준으로 북쪽은 카스티야 왕국이, 남쪽은 포르투갈이 갖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때가 1479년이니 아직은 아프리카가 남쪽으로 얼마나 더 넓게 펼쳐져 있는지, 신대륙은 또 얼마나 큰 땅덩어리인지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었죠. 

 

그러고나서 1492년, 이사벨라 1세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의 산 살바도르에 상륙했습니다. 문제는 그 산 살바도르가 카나리아 제도 이남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나리아 제도를 기준으로 남북을 나누는 가로선을 서쪽으로 계속 늘여 대서양을 가로지르면, 산 살바도르 섬은 분명 그 선 남쪽에 위치했습니다.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발견한 이 땅은 포르투갈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거였죠. 마침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사업에 투자 제안을 받았다가 거절한 적이 있으니 더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을 거 같네요.

 

포르투갈이 다소 억지스럽게 신대륙의 새로 발견된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자, 신항로 개척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이사벨라 1세는 여기에 즉각 반발했습니다. 가까스로 수습한 분쟁이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였죠. 이번에도 사태 수습을 위해 나선 것은 교황청이었습니다. 본래 카톨릭 세계 밖의 영토에 대한 처분 권한은 교황에게 있었으니까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포르투갈이 발견한 아조레스 제도와 아프리카 대륙의 최서단, 베르데 곳을 잇는 세로선을 긋고 거기에서 서쪽으로 100 레구아, 500 Km를 이동한 지점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의 영토로 인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세로선이 그러졌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새로운 세로선의 서쪽에 있는 산 살바도르를 비롯한 콜럼버스가 발견한 새로운 땅들은 모두 에스파냐의 차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서쪽으로 탐험을 계속해서 새로운 땅이 더 발견된다면 그것도 모두 에스파냐의 영토가 되죠. 정작 신항로 개척에 먼저 뛰어든 건 포르투갈인데 뒤늦게 시작한 에스파냐가 더 큰 이득을 보게 되자,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어떻게든 이 기준선을 조금이라도 더 서쪽으로 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494년, 종전보다  370 레구아, 1850 Km 더 서쪽에 새로운 기준선을 설정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해상력에 있어서는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를 압도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먼저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에스파냐도 결국은 포르투갈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죠. 운 좋으면 새로운 기준선보다 동쪽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땅이 안 나타날 수도 있구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까지는 북미와 남미 대륙 전체가 다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1500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루 알바레즈 카브랄이 현재의 브라질 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땅은 분명 새로운 기준선의 동쪽에 위치한 땅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브라질 땅은 결국 포르투갈의 차지가 되었죠. 남미의 국가들이 모두 스페인어를 쓰는 와중에 브라질만이 현재까지 포르투갈을 쓰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일설에서는 이 새로운 기준선이 그어지던 당시 이미 포르투갈에서는 남미 대륙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거라고도 하네요. 어쨌든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약 100년 동안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다가 1580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을 차지하면서부터는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브라질의 국어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마젤란의 세계일주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본래 포르투갈 사람으로 이미 젊은 시절부터 포르투갈의 다양한 탐험에 참여하며 탐험가이자 군인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탐험대를 꾸려 새로운 향신료 무역로를 개척해보고자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를 찾아갔지만 그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죠. 그의 계획은 서쪽으로 항해해서 대서양을 건너고 신대륙을 지나쳐 계속 더 항해해서 아시아로 가보겠다는 거였습니다. 무모하기로는 콜럼버스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에요. 

  

이미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진 마당에 서쪽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한다 한들 포르투갈이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는데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겠다고 하니, 포르투갈에서는 기꺼이 지원을 약속할 수 없었던 게 당연해 보입니다. 기존에 발견한 향신료 무역로만으로도 이미 짭짤한 수익을 얻고 있기도 했구요. 어쨌든 포르투갈에서 지원을 받는데에 실패한 마젤란은 콜럼버스처럼 이번에는 에스파냐를 찾아갔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상황이 좀 달랐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권리를 인정받은 신대륙이 그때까지는 별달리 에스파냐에게 그리 크게 쓸모있는 땅이 아니었죠. 신대륙에서 발견된 엄청난 규모의 금광, 은광들은 모두 더 훗날의 일입니다.  

  

1519년, 포르투갈과의 신항로 개척 대결에서 뒤쳐져 있다고 생각한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은 마젤란은 마침내 에스파냐를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것은 그 전까지 누구도 가보지 않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죠. 당시는 이미 1500년 카브랄이 남미 대륙을 발견한 이후였으니 적어도 남미 대륙까지는 그의 항해도 큰 위기는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남미 대륙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도중 남미 대륙이 생각보다 거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항해가 예상보다 길어지자 그의 탐험대 내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젤란의 통제를 따르지 않은 선원들이 선상에서 폭동을 일으키거나, 선장들이 탐험을 중단하고 돌아갈 것을 건의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는 마젤란 해협이라는 이름이 붙은 남미 대륙의 남쪽 끄트머리를 돌아서 마침내 태평양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남미 대륙의 최남단은 아니고, 해협을 건너면 더 남쪽으로 우수아이아를 비롯한 남극에 가까운 땅이 펼쳐지긴 하는데요. 그래도 이곳은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는 20세기까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곳입니다. 

  

마젤란 해협은 지금도 기상 악화가 빈번하고 풍랑이 거칠어 배들이 드나들기에 수월한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더 힘들었겠죠? 결국 그는 이 곳을 통과하는 동안 탐험대의 절반 정도를 잃었습니다. 이제 겨우 태평양 입구에 들어섰을 뿐이었는데... 그는 대서양보다 더 큰, 끝없는 바다를 가로질로 북서 방향으로 항해했습니다. 가다보면 섬이 나타나 물과 음식을 구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죠. 하지만 식량이 일찌감치 바닥을 보이고 선원들이 굶주릴 대로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섬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탐험대가 망망대해를 건너 괌에 상륙할 때까지 섬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미 대륙에서 아시아까지 남태평양을 항해하는 동안 호주 대륙은 커녕, 오세아니아의 그 많은 섬들을 다 비껴갔으니... 그들 중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해양 문명을 이룩한 원주민 사회도 존재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괌에 상륙한 마젤란은 그의 계획대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마젤란이 도착한 아시아 세계는 바스쿠 다 가마가 도착한 인도와는 또 다른 곳이었습니다. 현재의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일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는 대체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원주민들이 세운 왕국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말레이시아는 물론 현재의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해당하는 참파와 크메르, 더 멀리는 명나라와 일본과도 교역을 하는 해상 중계무역국가들이었습니다. 필리핀의 크고 작은 섬들에 터를 잡고 성장한 이들은 해상 패권을 두고 서로 치열한 대결을 벌이는 중이었죠.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아시아였지만 허무하게도 마젤란은 필리핀 세부에서 벌어진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그의 선원들 중 상당수가 압도적인 병력의 원주민들에 의해서 격파되었는데요. 겨우 살아남은 나머지 선원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배 한척을 타고 출항 3년 만에 에스파냐로 되돌아왔습니다. 아시아에서 에스파냐로 가는 항로는 이미 포르투갈에서 개척했으니 왔던 길에 비하면 훨씬 쉬운 여정이었지만, 항해 초반에 워낙 고생을 많이한지라... 원래 다섯 척이었던 배 중 한 척은 도주, 세 척은 파손되었구요. 약 280명이었던 선원 중 생환한 선원은 18명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