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왕자 엔히크
15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레콩키스타를 끝마쳤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후진적인 사회로 낙오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 때에는 히스파니아라는 속주로 프랑스나 영국에 앞서 선진적인 로마 문명의 혜택을 누렸지만 오랜 기간 동안의 이슬람 지배로 서유럽 문화권에서 배제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은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가 강력한 전통사회로 자리잡고 있었고, 북아프리카 지역 역시 이슬람 세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새로운 세계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한 탐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단지 종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전까지 모든 선진문물은 동방에서 유래된 것이었는데, 유럽 대륙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이러한 선진문물을 가장 마지막에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이 지역의 문명 수준 역시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중해를 접하고 있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레콩키스타에 전념하느라 이탈리아 북부와 플랑드르의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으로 큰 이득을 얻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방의 문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향신료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후추였습니다.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향료 무역의 수익률은 매우 높아서 인도에서 값싸게 매입한 향신료가 지중해를 지나 유럽에 도착하게 되면 그 가격은 수백 배 이상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유럽의 상인들은 향료의 원산지를 알아내 직접 교역을 하려고 헸지만 아라비아 상인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데에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결국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종교적 사명감과 싼 값에 향신료를 구하고자 하는 경제적 동인은 이들을 대항해시대로 이끌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자 엔히크는 젊은 시절 아프리카의 세우타 지역을 정복하면서 황금으로 가득 찬 크리스트교 국가인 프레스터 존의 나라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트교 문명을 일궈온 에티오피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 전쟁을 벌이고 독일의 영방국가들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칼마르 동맹이 패권 다툼을 하던 시기,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는 원양항해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가장 숙련된 항해기술을 지닌 베네치아의 조선공과 항해사, 천문학자 등을 모집하고 국내에서 선원을 모집했습니다.
원양항해는 그 전까지 없었던 방식의 항해였습니다. 중간 기착지 없이 위치가 불분명한 목적지를 원거리로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보였습니다. 우선 사람의 힘이 아닌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범선을 제작하는 것부터 나침반이나 사분의 등의 정교한 항해장비를 다루는 일 등 모든 준비 과정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준비에 비해 초반의 성과는 미약했습니다. 하지만 엔히크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비를 들여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업을 이어갔고 마침내 아프리카의 가장 서쪽인 베르데 곶을 발견하면서 대서양 동부의 해도를 완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데이라, 아조레스 등 대서양의 여러 섬들을 발견하면서 이제 대서양 항해에 있어서도 중간 기착지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엔히크가 시작한 이 사업은 그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주앙 2세에 의해 더욱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488년 마침내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최남단을 발견하고 귀환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주앙 2세는 이 곳에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아프리카의 끝을 발견했기 때문에 곧 인도로 가는 항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스파냐의 신세계 탐험
포르투갈보다 늦게 신항로 개척에 뛰어든 에스파냐는 포르투갈과는 반대편으로 진출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에서는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 하다보면 포르투갈과는 반대 방향으로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482년 콜럼버스는 원래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자신의 탐험 프로젝트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미 아프리카 항로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주앙 2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당시 레콩키스타를 막 끝마친 에스파냐의 이사벨 1세에게 다시 부탁했고 이번에는 지원을 받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같은 해 카리브해의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발견으로, 신항로 개척에서 포르투갈에게 뒤져있떤 에스파냐는 단번에 이를 역전시켰습니다.
두 나라의 신항로 개척 경쟁이 과열되자 로마 교황청에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아프리카의 베르데 곶에서 서쪽으로 대략 20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상의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먼저 진출한 동쪽의 아프리카 대륙은 포르투갈의 소유로 하고, 서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에스파냐의 것으로 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남아메리카가 발견되기 전이었지만 이 가상의 선에는 지금의 브라질 땅이 닿아 있습니다. 원래 포르투갈에서 희망봉으로 가던 포르투갈 항해사 페드루 알바레즈 카브랄이 실수로 항로에서 이탈해 남아메리카 브라질 지역에 도착했고 이를 전해들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가 피렌체의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 신대륙이 발견된 것을 확인받았습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어 지금도 남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독점한 포르투갈은 더 서쪽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는 리스본을 출발해 인도에 도착해 최초로 인도 향신료 구입에 성공한 유럽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1519년에는 마젤란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했습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이었지만 그는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항해에 성공했으므로 세계일주 성공은 신항로 개척에 뛰어든 두 나라가 함께 거둔 성과였습니다.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의 등장과 스콜라 철학 (1) | 2024.03.25 |
---|---|
중세 말 즈음의 비잔티움 제국, 에스파냐 (1) | 2024.03.21 |
중세 말 즈음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러시아 (0) | 2024.03.18 |
백년 동안의 전쟁 (0) | 2024.03.15 |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등장과 영국 프랑스의 의회제도 (1) | 2024.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