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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콩키스타도르

야만적인 문명인

  
에스파냐는 포르투갈과 다르게 자신들이 발견한 신대륙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유럽인의 입장에서 아메리카 대륙은 신대륙이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상당한 인구와 문명화된 도시들이 번성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16세기 중반 당시의 세계인구는 4억 명 정도로 추측된다고 하는데요. 그 중 8천 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파냐는 이들을 대상으로 정복전쟁에 나섰습니다.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을 위해 신항로를 개척했고 또 거기에 성공해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지만 에스파냐가 도착한 신대륙에는 향신료가 없었고, 따라서 이들의 목표도 자연스럽게 신대륙 그 자체를 차지하는 것이 되었죠. 

 

이렇게 에스파냐가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서자, 아메리카의 원주민 인구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어떤 연구에서는 콜럼버스가 도착한 15세기 말 이후로 약 100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가 10 분의 1로 줄었다고도 하구요. 특히 그가 도착한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20만명이었던 인구가 200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고도 합니다. 그야말로 멸종에 가까운 인구 감소였습니다. 이렇게 줄어든 아메리카의 인구가 다시 유럽인의 도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라고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줄어든 것은 단지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긴 했지만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그들의 병원균으로 원주민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죠. 오랫동안 아메리카 대륙에 고립된 채로 문명을 일구어 온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가진 천연두나 흑사병 등의 치명적인 전염병 면역체계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고, 때문에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유럽에서부터 옮겨온 천연두, 홍역, 말라리아, 인플루엔자 병원균에 의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유럽 대륙이나 사람 사는 곳인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독 전염병에 취약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일단 유럽인들은 긴 세월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전염병에 대한 면역체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비록 흑사병 같은 무서운 전염병으로 인구가 급감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추어갈 수 있었죠.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은 이들과는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병원균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가축의 유무 여부도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유럽인의 경우 선사시대부터 소나 말, 양, 돼지 등의 가축과 함께 생활하며 가축이 보유한 병원균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면역체계를 갖출 수 있었는데요. 아메리카 대륙에는 사실상 가축이라고 부를만한 큰 포유동물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아메리카에는 라마와 알파카 정도가 있었지만 유럽인들이 가축을 기르던 것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작았고 이들이 면역을 가진 인수공통 전염병의 종류도 훨씬 적었습니다. 

 

반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이 유럽인에게 옮긴 병원균도 있습니다. 바로 매독인데요. 15세기 말 에스파냐의 탐험가들에 의해서 유럽으로 전해져 창궐했던 매독은 유럽인들에게 큰 공포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퍼뜨린 병원균에 비해서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죠. 매독을 제외하면 다른 병원균도 없었구요. 

비록 병원균에 의한 인명 피해는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그게 아니어도 이들은 공격적인 정복활동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습니다. 이들의 정복 과정은 포르투갈인들보다 훨씬 잔인하고 공격적으로 진행되었죠
.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한편, 금광이나 은광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습니다. 원주민들은 가혹한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잃기도 했고 노예로 잡혀 유럽으로 납치되기도 했죠.   

  

  

코르테스와 피사로 

  

이 당시 활동했던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스페인어로 '콩키스타도르'라고 불리웠습닌다. 에스파냐의 탐험가들의 뒤를 이어 아메리카 대륙에 나타난 이들은 부와 명예를 찾아 신대륙에 발을 들여놓았는데요. 에스파냐 왕실에서도 크리스트교의 전파를 명분으로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들 일행 중에는 물론 전도를 목적으로 합류한 성직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철제 갑옷으로 무장하고, 총포를 능숙하게 다루는 군인들이었죠.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이들로는 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있는데요.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콩키스타도르입니다. 

 

젊은 시절 이미 에스파냐의 쿠바 원정에 참여하며 식민지 관료 경험을 쌓았던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8년 유카탄 반도 어딘가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자신의 탐험대를 꾸려 탐험에 나섰습니다. 본래는 이곳에 금이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탐험에 나선 것이었는데 탐험 도중 황금이 가득한 나라인 아즈텍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금을 약탈해 귀환하겠다는 목표로 아즈텍 제국을 찾아나섰죠. 

 

당시 아즈텍 제국은 인구가 500만명이 넘는 제국이었습니다. 수도 테노치티틀란에는 40만명 정도의 인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정도면 전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였죠. 단지 인구 규모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신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도로와 시장, 상점을 비롯한 상업시설, 관개 기술을 비롯한 고도화된 농업기술을 갖춘 문명 사회였죠. 거기에 주변 부족들에게 노예와 공물을 요구할 정도로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제국이었구요. 한편으로 이들은 주변 부족에서 납치해온 인질들을 인신공양으로 바치는 종교의식으로 악명이 높기도 했습니다. 

  

1519년 아즈텍 제국 근처에 다다른 코르테스 일행은 주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빠른 속도로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했습니다. 원주민 부족들과 충돌할 때면 압도적인 화력으로 이들을 무참히 제압했지만, 사실 여러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는 가혹한 착취를 일삼던 아즈텍 제국에 대한 원망이 깊었기 때문에 일부 원주민 부족들은 아즈텍 제국을 향해 진격하는 코르테스 일행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죠. 일부는 아예 그의 탐험대에 합류하기도 하구요.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점령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앞서서 콩키스타토르의 잔혹한 행각에 대해 전해들은 아즈텍 제국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일단 회유를 목적으로 그들을 환대했지만 애초부터 약탈을 목표로 침입해온 코르테스 일행은 그를 감금하고 금을 요구했는데요. 이 때 코르테스가 이끄는 탐험대의 병력은 900명 남짓이었습니다. 비록 아즈텍인들보다 훨씬 위력적인 화약무기로 무장하긴 했지만 수십만명을 상대하기에는 좀 무리였을 것 같네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수만 명의 원주민 부족 전사들의 도움을 받은 코르테스는 1521년 결국 테노치티틀란을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몬테수마 2세는 자신이 가진 황금을 모두 주겠다며 그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죠. 그가 가진 모든 황금은 어차피 코르테스의 손에 들어올테니까요. 아즈텍인들은 코르테스의 탐험대에게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아즈텍 제국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다른 원주민 부족들의 방해로 결국은 테노치티틀란을 수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몬테수마 2세도 결국은 처형되었구요.  

 

새로운 땅을 얻었으니 에스파냐 본국에 있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야 했습니다. 근데 그 당시 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에스파냐로 확장을 시도하며 정치적으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죠.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에서 카를로스 1세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그 뒤로도 그는 신대륙에서의 영향력 확대보다는 유럽 내부의 단속에 더 신경을 쓰느라 신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다소 무관심했습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에서 매년 본국으로 엄청난 양의 공물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카를로스 1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죠. 게다가 그가 나이가 들어서 에스파냐로 돌아온 뒤로도 그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뭐... 카를로스 1세로서는 아즈텍 제국이 차지했던 드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곳에서 나는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그가 고맙다기보단 커다란 부담이지 않았을까요? 코르테스의 계속된 요청으로 카를로스 1세는 결국 그를 자신의 알제리 원정에 참여시켰지만 원정길 도중의 폭풍우 때문에 원정은 실패했구요. 코르테스는 얼마 후 이질에 걸려 병사했습니다.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의 초상화
작가가 밝혀지지 않은 코르테스의 초상화입니다. 한때는 위대한 정복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오늘날 그를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서인지 그의 시신은 그가 죽은 뒤로도 여덟번이나 옮겨져야 했습니다.

 

콩키스타도르의 활동이 한창이었던 1521년, 에스파냐의 새로운 개척치인 파나마의 행정장관으로 있었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의 7촌 친척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도 원정대를 꾸려 정복활동에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파나마는 이제 막 총독부가 설치된 새로운 정복지였고 그 이남의 남미 일대는 그냥 거대한 미개척지로 남아있던 상태였죠. 물론 에스파냐인들을 비롯한 유럽인들에게요. 

 

유럽인들에게는 미개척지였을지 몰라도, 그곳에는 잉카 제국이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잉카 제국은 인근의 다른 민족들을 제압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잉카 문명이 처음 발생했던 쿠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북쪽으로 새롭게 확장하며 획득하게 된 영토인 에콰도르의 키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내분이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한편, 지금의 에콰도르와 페루의 접경지대인 툼베스를 지나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살짝 더 내륙으로 들어간 피사로의 원정대는 잉카 제국의 황제인 아타우알파가 대군을 이끌고 바로 근처인 카하마르카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키토 세력을 이끄는 아타우알파 황제는 마침 근처에서 벌어진 쿠스코 세력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뒤 수도인 쿠스코로 입성하던 중이었던 거죠. 1533년 피사로의 원정대는 우연히 마주친 아타우알파 황제를 생포하고 엄청난 양의 금을 약탈한 뒤 그를 처형하고 곧 본격적인 쿠스코 점령을 계획했습니다. 


이렇게 쿠스코로 들어간 피사로의 원정대는 아타우알파의 정적이자 쿠스코 세력을 이끌었던 망코 잉카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 그들과 함께 공동 정권을 수립할 것을 구상했습니다. 원정대의 부족한 병력으로는 수십만의 잉카인들을 제대로 통치하기는 커녕 목숨이 위태로울수도 있으니까요. 망코 잉카 역시 에스파냐인들이 자신들을 키토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을테니 이들은 사실상 이해관계가 맞았던 셈이죠. 하지만 피사로가 새로운 정복지에 항구도시인 리마를 건설하기 위해 쿠스코를 비운 사이에 그의 동생들이 망코 잉카와 잉카의 귀족들에게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잉카인들은 결국 이들에게 반기를 들기로 합니다. 

 

1537년, 잉카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땅에서 에스파냐인들을 모두 몰아내기 위한 항전에 돌입했습니다. 수십만의 잉카인들은 쿠스코를 포위하고 한줌도 안되는 에스파냐인 정복자들데 대항해 싸웠는데요. 놀랍게도 전투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한때 잉카군이 압도적인 군사 수로 에스파냐인들을 몰아붙이기도 했지만, 쿠스코에 고립된 에스파냐인들의 구원 요청을 받고 구원군이 속속 쿠스코 주변으로 모여들자 항전을 포기한 망코 잉카는 북서쪽으로 도주해 빌카밤바 지역에 망명정부를 수립했죠. 이 망명정부는 30년 정도 존속하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완전히 멸망했고, 이로써 잉카 제국도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쿠스코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리마에 있었던 피사로도 그 이후의 삶은 그다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망코 잉카의 항전이 마무리된 이후 그는 원래 집중하고 있었던 리마 신항구 건설을 마무리 짓고 남미 지역의 방대한 정복지를 통치하며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요. 잉카 제국의 정복 과정에서 벌어진 논공행상에 불만을 깊게 가졌던 동료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잉카 제국 정복에 함께 했던 그의 형제들 역시 모두 사망한 이후 페루 지역은 에스파냐의 왕이 파견한 부왕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가 되죠. 

  

  
식민지가 된 아메리카 

신대륙 탐험 초기, 동쪽으로 항해한 포르투갈인들에게 막대한 향신료 무역 수입을 안겨다 준 인도 항로와는 다르게 에스파냐의 탐험가들이 발견한 신대륙은 별로 돈이 되지 않는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원주민 부족들은 유럽인들이 필요로 하는 향신료를 갖고 있지 않았고, 일부는 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죠. 자연환경도 척박해서 탐험도 쉽지 않았구요. 하지만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얻게 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 얘기가 소문을 타고 유럽에도 퍼지자 이제 에스파냐인들에게는 포르투갈의 향신료 무역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신대륙은 향신료 무역로 개척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땅이 아니라 전설 속에 등장하는 황금으로 가득한 거대한 땅이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너도나도 콩키스타도르를 자처하며 신대륙으로 몰려들었고, 이렇게 해서 에스파냐의 식민지 경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요. 본토의 수십배에 달하는, 아직 정확한 넓이도 알수 없는 거대한 해외 식민지를 얻게 된 에스파냐는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고 현지를 탐험한 콩키스타도르에게는 정복한 영토를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며 정복활동을 장려했습니다. 

  

이들이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당연히 금과 은이었습니다.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이 그토록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곳에 거대한 규모의 금 광산이 있다는 말이니까요. 실제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에스파냐인들이 신대륙에서 채굴한 금과 은은 비슷한 시기 전세계 다른 지역에서 채굴한 금과 은의 10배 정도가 되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채굴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은 모두 에스파냐 본국으로 흘러들었구요. 이를 기반으로 에스파냐는 단숨에 유럽의 최대 부국으로 발돋음했죠. 

하지만 신대륙 개척은 당시로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사업이었습니다. 단지 돈이 많이 드는 것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기도 했구요. 때문에 일단 식민지 개척에 성공한 콩키스타도르들은 그동안 투자한 비용을 다시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 식민지를 무자비하게 약탈했습니다. 한편, 신대륙에 금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에스파냐에 퍼지자 이제는 탐험가나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새 삶을 찾아 이주를 시작했고 남미 지역에는 원주민 여성과 에스파냐에서 온 이주민 남성 사이의 혼혈인인 메스티소라는 새로운 인종이 등장했습니다. 현재 중남미 지역에서 최대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들이죠. 

  

이렇게 해서 수많은 에스파냐인들이 남미 대륙으로 건너오면서 이들의 목적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복지가 조금씩 넓어지고, 마치 에스파냐의 도시들을 옮겨놓은듯  다양한 도시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고, 치안이 확보되면서 많은 에스파냐인들은 구대륙에서의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서 이곳으로 이주해 농장을 경영하며 부를 쌓길 원했습니다.  한편, 독실한 크리스트교 사제들은 이 신대륙의 원주민들에게도 믿음을 전파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신대륙으로 이주했죠. 이 때를 계기로 정복지 곳곳에는 성당이 세워졌고 크리스트교는 중남미 전역에 걸쳐 폭넓게 전파되었습니다. 

광활한 영토와 금, 은, 노예 노동력을 얻은 에스파냐는 단숨에 유럽의 강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멕시코와 페루에서 발견된 금광과 은광은 에스파냐의 경제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신대륙에서만 자라나던 옥수수, 감자, 강낭콩, 호박, 면화, 토마토 등의 작물은 반대로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유럽에 만연했던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에스파냐 본국의 적극적인 식민지 개척 장려 정책에 힘입어 16세기 말쯤이면 에스파냐는 카리브해의 수많은 섬들과 멕시코, 북미 대륙의 남쪽과 남미 대륙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죠.  

 


세계를 보다

  

유럽인들은 이제 최초로 전세계를 현재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항해 시대를 전후한 이 시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죠. 아시아에서는 아라비아 상인들을 대신해 향신료를 직접 수입하며 떼돈을 벌어들이는 한편, 새로 발견한 남미 대륙에서는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오고, 또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인건비가 거저인 흑인 노예 노동력이 유입되었으니, 유럽을 제외한 다른 모든 대륙에서 그야말로 돈을 마구잡이로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한때 잘나가던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무역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이래로 이탈리아의 해상 공화국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지중해 무역은 이제 쉽지 않아졌구요. 포르투갈 상인들이 인도 항로를 이용해 직접 향신료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자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도 빼앗겼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를 상당 부분 떠받치고 있었던 지중해 무역이 침체되자 투자처를 잃은 자금들은 부동산 등으로 몰리면서 생산성은 점차 낮아졌습니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데요.

  

한편, 플랑드르 상인들이 장악했던 북해 무역도 비슷한 시기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 전쟁과 점진적인 왕권 강화로 상인들에게 각종 세금이 부과되었구요. 두 나라간 금수조치 같은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무역이 위축되었죠. 특히 그 동안은 플랑드르로 양모를 수출하기만 하던 잉글랜드가 이제 자체적으로 양모와 모직물 모두를 생산하게 되면서 플랑드르의 모직물 산업에서 핵심 요소였던 잉글랜드산 양모가 더 이상 플랑드르로 공급되지 않게 되었죠.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이제 중개무역 대신 금융업이나 숙박업 등 비즈니스 인프라를 제공하는 쪽으로 산업의 중심이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에 급급했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유럽 최대의 패권국가가 되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엄청난 부와 영토를 거머쥐게 되었으니 이제 한동안 이 두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나 싶었는데, 의외로 이들의 패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한편, 이탈리아와 플랑드르를 비롯한 기존의 유럽 국가들은 완전 망하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죠. 이들은 새로운 생존의 길을 모색하던 중에 시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체득했고,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프랑스 등은 앞다투어 동인도회사를 세웠습니다. 멀게나마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의 등장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