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절반을 가졌던 카를 5세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후 줄곧 쇠퇴의 길을 걸었던 교황권은 백년 전쟁을 거치며 점차 강화되어가던 세속 군주의 권한에 밀려 조금씩 힘을 잃어갔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교회는 자정능력과 개혁의지를 잃어갔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성직자들은 예전의 수도원 운동이 타락했던 교회를 바로잡아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그들이 다시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어주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수도원도 예전의 수도원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종교회의 즉 공의회를 상설화하고 자정 노력을 계속해기로 했지만 그냥 공허한 결심이었죠.
이렇게 교회의 개혁이 딱히 효과를 내지 못하자, 각국의 세속군주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야 수많은 봉건 영주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교황청과의 공생이 불가피했지만, 이제 왕권이 어느 정도 강화된 상황에서 그들은 그냥 자신의 영토 내의 교회들을 국가 차원에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제 교회 권력이 세속 권력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중세 말기를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교회 권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자, 이는 이미 강화되고 있던 왕권이 더욱더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제 세속 군주들은 서로만이 자신들의 경쟁자일 뿐 이제는 교회를 신경쓸 일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물론 교회는 아직도 로마 교황청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지만, 각국에 소속되어 교황청보다도 세속 군주의 눈치를 더 살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예외도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온 나라가 들썩들썩했던 신성로마제국과 레콩키스타 이후 전세계를 향한 포교 열망에 가득차 있었던 에스파냐가 그런 나라들이었죠. 아직까지는 교황청과 갈라설만한 계기가 딱히 없었던 이들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오히려 교황청의 권위에 더욱더 의존하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의 중심에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모두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하는 나라들이네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막시밀리안 1세는 왕조의 안정을 위해 적극적인 혼인정책을 폈습니다. 그는 우선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결혼해 부르고뉴와 지금의 베네룩스 3국 지역인 저지대 지역을 소유했구요. 마리아가 25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밀라노 공국을 통치하던 스포르차 가문과 혼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딸은 각각 에스파냐의 왕족들과, 손주들은 헝가리의 왕족들과 결혼시키며 부르고뉴, 밀라노, 에스파냐와 헝가리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가문의 소유로 만들었죠. 전쟁이 아닌 결혼이야말로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막시밀리안 1세가 뿌려놓은 혼인정책의 씨앗은 그의 손자인 카를 5세 대에 들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이미 부르고뉴 공작위와 에스파냐의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에서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그는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정복하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가 되기에 이릅니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구요.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시작부터 이미 이렇게 많은 것을 손에 쥔 채로 제위에 오른 이도 아마 드물지 않을까 싶네요.
끝없는 전쟁
이러한 상황에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것은 누구였을까요? 유럽 각국의 군주들 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였습니다. 사실 그는 막시밀리안 1세의 사후 신성로마제국의 차기 제위를 두고 벌어진 선거에 출마했지만 카를 5세에게 밀려 낙선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강력한 왕권을 가진 그에게 선제후들이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까지 얹어주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카를 5세가 즉위하고나니, 프랑스는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와 남쪽의 이탈리아 양쪽으로 그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된 거였죠.
카를 5세의 입장에서도 역시 프랑수아 1세에게 경계심을 느낀 것은 마친가지였는데요. 비록 혼인정책을 통해 넒은 영토를 갖게 되긴 했지만, 신성로마제국 안에는 각 영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영방군주들이 존재했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에스파냐 출신도 아닌 그가 왕위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대중적인 거부감이 드러나기도 했구요.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땅은 넓은데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보니까 통치도 비효율적이고, 여기저기 골칫거리는 많은데, 황제권은 약하고... 결국 서로를 경계하던 양측은 1521년부터 전쟁에 돌입해서 재위 기간 동안 수차례 부딛혔습니다.
카를 5세는 사실 앞서 일어난 에스파냐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프랑수아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 연합해 공격을 해온건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525년 파비아 전투를 계기로 프랑스에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죠. 심지어 프랑스와의 전쟁은 그의 생애에 있었던 여러 전쟁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가 앞서 체결한 평화조약을 뒤엎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교황청의 클레멘스 7세의 지지를 받아 또 다시 공격에 나섰지만, 이번에도 전쟁은 카를 5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구실만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1539년에는 카를 5세가 먼저 프로방스를 공격했다가 도리어 사보이 공국을 잃기도 했구요. 1542년에는 후계가 끊긴 밀라노 공작 자리에 카를 5세가 자신의 아들을 앉히자 프랑수아 1세가 이에 반발하며 또 이탈리아에서 충돌했죠.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전쟁은 어느 한 쪽의 뚜렷한 우세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모전 양상을 보였습니다. 거듭되는 대결에서 신성로마제국은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한편으로는 양국 사이에 늘 골치거리였던 라인 강 인근의 요충지들은 프랑스에 넘겨주야 했습니다.
전쟁으로 번진 개혁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카를 5세가 황제로 선출되던 1519년까지도 잦아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활활 타올랐습니다. 사태가 쉽사리 진정되지 않자, 위기감을 느낀 로마 교황청에서는 즉위한 지 얼마 안된 카를 5세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부탁했죠. 비록 카를 5세가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젊은 군주라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래의 카톨릭의 모습을 되찾자는 것을 지지하는 거였지 카톨릭을 뒤엎는 걸 방관하겠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미 루터는 자신의 개혁안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상당수 확보해둔 상태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독일 내의 지역 경제를 좀먹는 교황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부 귀족들은, 그러지 않아도 세대를 거듭하며 점차 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키워온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서도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주변 국가들은 근대화의 밑바탕을 그리며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는 와중에 여전히 교황청에 빨대가 꼽힌 채 개혁을 저지하려는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죠. 이들은 결국 루터를 보호하고 황제와는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한판 승부가 벌어질 것만 같았던 상황은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으로 잠시 주춤했습니다.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지 약 80여년 만에, 이제 하나 남은 크리스트교 제국을 향해 점점 공격의 수위를 높여오고 있었던 건데요. 마침 이 즈음은 오스만튀르크에서도 슐레이만 1세라는 걸출한 군주가 나타나며 최전성기를 누리던 때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기 서양사에는 강력한 군주가 여럿 있었네요.
1526년, 헝가리 왕국을 침공해 헝가리의 왕인 러요시 2세를 전사하게 만들었던 오스만군은 1529년에는 또 다시 헝가리를 침공해 그대로 제국의 심장부인 빈까지 북상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카를 5세도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국내의 영방군주들에 대해 마냥 강경책으로만 대응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당장은 가까스로 빈을 지켜내긴 했지만,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르는 오스만튀르크로부터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영방군주들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우크르부르크에서 회의를 소집해 구교인 카톨릭과 신교인 종교개혁파 사이의 간극을 좁혀보려고 했죠.
하지만 구교와 신교 간의 통합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스위스 지역에서는 또 다른 종교개혁 지도자인 울리히 츠빙글리가 카톨릭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며 종교 갈등 지역이 더욱 넓어져 버렸습니다.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했으니 이제 둘 사이의 대립도 더욱 뚜렷해졌구요. 신교를 따르기로한 군주들은 모여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해서 본격적으로 황제에게 맞서기로 했습니다. 구글맵을 보니 슈말칼덴은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라이프치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더라구요. 지금의 독일의 중앙 즈음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카를 5세는 또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에게 다행이라면 오랜 시간을 끌어왔던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거... 오스만튀르크는 여전히 강성했지만요. 1546년 슈말칼덴 동맹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카를 5세는 독일 남부에서 신교 군주들에 연전연승하며 불과 1년만에 동맹의 지도자 격이었던 작센 선제후와 헤센 방백을 사로잡는데에 성공했습니다. 반면에 슈말칼덴 동맹은 카를 5세의 맹렬한 공격에 여러 군주들을 잃고, 마침 종교 개혁의 시발점을 제공했던 마르틴 루터도 사망하면서 다소 기세가 누그러졌죠.
이 때 이후로 카를 5세는 정치적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일생의 숙적이었던 프랑수아 1세도 불상의 병으로 죽었구요. 자신에게 반하던 종교개혁 세력들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를 위협할만한 세력은 이제 오스만튀르크 정도였는데요. 한때 빈을 포위하며 제국을 위협했던 슐레이만 1세는 당장은 카를 5세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유럽으로의 진출을 미루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신성로마제국의 경쟁자인 프랑스 동맹을 맺고 제국의 해외 식민지들을 찔러보며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다소 불안한 상황이었죠.
두 개의 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대적인 혼인정책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급격히 넓어졌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주들은 넓어진 영토만큼이나 잦아진 다른 국가들과의 분쟁 거리를 잘 관리해야 했죠. 카를 5세는 그런 분쟁들 대부분을 무력으로 해결하곤 했습니다. 위에 나열된 것만 해도 에스파냐에서 벌어진 반란과 이탈리아를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 제국 내 영방군주들과의 종교 전쟁, 그리고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까지... 여러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던 카를 5세는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어야 했구요. 동시에 여러 곳의 상황을 주시해야 했죠.
엄청난 전비는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과 은을 통해 해결되었습니다.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심각한 재정 부담으로 다가왔지만요. 한편, 자신의 국정을 보조하는 데에는 세 살 터울의 친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는 오스만튀르크의 빈 공격이 있었을 때에는 황제를 도와 전투를 이끌었구요. 독일 내의 영방군주들 사이의 종교 갈등이 격화되려는 시점에는 황제와 군주들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정을 보조했습니다. 카를 5세 역시 자신의 통치에 큰 도움이 되는 동생을 신임했고, 제국 내의 영방군주들 역시 강경일변도인 카를 5세보다는 신교에 대해 보다 유연한 태도를 가진 그를 더 선호했죠.
카를 5세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는 것은 일찌감치 황제 선거를 실시해 그를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카를 5세는 자신이 31살에 불과했던 시점에 황제 선거를 실시하고 페르디난트 1세를 당선시켜서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삼았는데요. 아직 카를 5세의 나이가 젊은데 벌써부터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자신의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던걸 보면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만한 위치에 있는, 유능한 인물을 왜 그 정도로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는지 좀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네요.
아니나다를까, 시간이 흘러서 장남인 펠리페 2세가 성년이 되어가자 카를 5세도 조금씩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신교 군주들과의 대결이 카를 5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그가 신교 군주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페르디난트 1세 대신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펠리페 2세를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하자, 신교 군주들이 모인 슈말칼덴 동맹은 다시 강하게 결집하며 카를 5세에게 반발했는데요. 놀랍게도 페르디난트 1세 역시 그의 결정에 반대를 표시하자, 전세가 순식간에 뒤집히며 카를 5세를 궁지로 몰아넣었죠. 결국 그는 신교 군주들을 모두 척결하는 것을 포기하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길었던 전쟁을 마무리했습니다.
결국 카를 5세의 결정은 에스파냐의 왕위를 아들인 펠리페2세에게 물려주고,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잇게 한 것이었습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미 처남인 헝가리 왕국의 러요시 2세가 전사하자, 그가 갖고 있던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세 왕국의 왕위를 차지한 상태였는데요. 이제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이으면서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조가 되었죠. 한편,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가 갖고 있던 왕위들 중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왕국의 왕위를 이으면서 압스부르고 왕조를 세웠습니다.
레판토 해전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 세계와 한판 대결을 벌였던 이슬람 세계에서는 15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오스만튀르크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16세기에 들어서는 이집트까지도 정복하며 옛 우마이야 왕조 시절의 강성했던 이슬람 제국의 재현을 꿈꾸었는데요. 특히 명군으로 추앙받는 슐레이만 1세 때에는 파죽지세로 서진해 신성로마제국의 빈을 위협하며 다시 한 번 서유럽 세계에 위기감을 불어넣었죠. 이후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튀르크는 헝가리를 두고 여러 차례 맞붙었지만 대결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 않고 크고 작은 충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육지에서 양측의 대결이 벌어지는 와중에 슐레이만 1세는 지중해쪽으로도 서유럽 세계로 손을 뻗쳤습니다. 당시의 지중해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 같은 이탈리아의 해상공화국들이 전성기의 마지막을 누리고 있었는데요. 이 때문에 이집트 뿐만이 아니라 북아프리카 일대를 모두 차지해 거대한 제국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슐레이만 1세는 결국 지중해에서도 서유럽 세계와 맞붙게 되었죠.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서유럽의 해상 세력을 압도한 오스만튀르크의 함대는 지중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해상공화국들이 가진 섬들을 약탈했습니다.
근데 이 와중에도 여전히 베네치아 공화국이 꼭 붙들고 있던 섬이 있었는데요. 바로 동지중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큰 섬인 키프로스였습니다. 크기도 크지만 위치를 보면 아나톨리아 반도 바로 밑에 있기도 하구요. 토지도 상당히 비옥해서 설탕이나 목화 같은 작물을 재배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베네치아 공화국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이 섬이 오스만튀르크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인 먹잇감이었을까요? 슐레이만 1세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된 셀림 2세는 1567년에 대규모 함대를 보내 섬을 점령했습니다.
한편, 섬을 빼앗긴 베네치아 공화국은 신속하게 서유럽 세계에 구호 요청을 보냈는데요. 교황청과 가장 사이가 좋았던 에스파냐가 나서서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물론 에스파냐가 당시 카톨릭 교회의 수호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약 오스만튀르크가 키프로스를 완전히 차지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에스파냐의 해상활동에도 타격이 있을 게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스만튀르크에 맞설 서유럽 세계의 연합 함대가 마련되었죠. 근데 사실 이 함대의 대부분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에스파냐의 배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서유럽 세계의 연합군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네요.
1571년 현재의 그리스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은 결과적으로 신성동맹이라고 불리웠던 서유럽 세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병력의 규모로만 따지면 오스만튀르크 해군이 더 큰 규모의 함대를 동원했지만 대형 함포를 탑재한 신성동맹의 최신 함선의 막강한 전투력에 밀려 오스만 튀르크는 훨씬 많은 사상자를 내며 전투가 끝났습니다. 그러데 또 완전히 신성동맹의 승리로 보기도 어려운 것이, 오스만튀르크는 결국 키프로스를 다시 베네치아 공화국에 돌려주지 않고 지키는 데에는 성공했구요. 몇 년 지나서는 잃어버린 해군력을 다시 원상복구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또 신성동맹 역시 전쟁의 피해가 적지는 않았죠.
결과적으로 레판토 해전은 중세시대의 끝을 장식하는?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서유렵의 크리스트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튀르크의 지중해 장악을 막아내면서 이탈리아의 해상세력이 몰락하는 시점도 좀 더 훗날로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지중해의 시대는 천천히 저물고 있었고 이제 유럽의 강대국은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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