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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신에서 인간으로

신에서 인간으로

 

문예부흥운동이라고도 말하는 르네상스는 대략 14세기에 시작되어 16세기 쯤에는 서유럽 세계 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이때는 서유럽 세계가 천년 동안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사회를 시작하는 이행기에 접어들 조짐을 보이는 때였죠. 백년 전쟁을 거치며 세속 군주의 권한이 강화되고 반면에 교회의 힘은 점차 약화되는, 그런 흐름을 보이던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 시기는 중세의 끝이자 근대의 시작인 거죠.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 자체가 대략 200년에 걸쳐서 지속된 현상이다 보니 이를 별도의 독립적인 시기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200년이나 걸렸다고 하기엔 좀 길기도 하니까요.

  

중세의 끝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부각되는 사회적인 변화가 있다면 크리스트교의 통합이 계속 약화되는 추세를 보였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세속 권력의 재편은 가속화되고 황제권 또는 왕권은 점점 강력해졌습니다. 비슷한 크기의 작은 귀족들은 서로 흡수 통합되면서 강력한 왕권이 들어설 만한 지역에서 원시적인 국민국가들이 발생해 오늘날의 프랑스, 영국, 에스파냐, 북유럽 국가들의 원형이 되었구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탈리아 북부나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치도시들이 성장했죠. 반면에 교회는 여전히 중세 초기의 형태에서 크게 변화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럼 교회 내부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사실,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는 했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지식이 축적되면서 이렇게 축적된 지식이 사람들의 이성을 일깨운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신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중세인들이 이제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싶어진 거죠.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훨씬 앞선 시대 인물들이었는데요. 이미 이 당시부터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탐구를 점차 넓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연구결과가 마침내 결실을 보인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크리스트교라는 신앙의 큰 테두리를 유지했지만요. 

 

이러한 새로운 물결의 도래는 문학 분야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습니다.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장관이었던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이성의 관점으로 묘사한 신의 세계를 보여주었죠. 그 전에 쓰여진 서사시들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입니다. 한편, 단테가 <신곡>을 집필했다면 <인곡>이라고 불리우는 저작을 집필한 이도 있습니다. 역시 피렌체 출신으로 단테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이었던 조반니 보카치오인데요. 그는 <데카메론>에서 당시 사회에 존재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간상을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묘사된 타락하고 어리석은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면... 곧 종교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만 같죠.

 

단테와 보카치오 등 당대의 새로운 문학사조를 낳은 이들이 활동했던 곳은 모두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도시 출신이었습니다. 르네상스가 바로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긴데요. 왜 그랬을까요? 우선 이 지역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의 자치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쌓은 곳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에서 번성하기 마련이죠. 15세기에 들어 서유럽 정계의 큰손으로 통하던 메디치 가문이 이탈리아의 많은 예술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한편 정치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은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의 잦은 마찰로 정치적 권력의 공백이 존재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신성로마제국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문을 닫고, 다시 옛날의 영방국가 체제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이 갑자기 더 약화되었죠. 또 프랑스가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버리자 로마 교황청의 압력까지도 사라졌습니다. 본래부터 인구가 밀집해있고 경제으로도 풍요로웠던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은 이 때를 기회로 삼아 강력한 자치도시들로 거듭났습니다.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이 남긴 고전문화에 대한 전통 역시 르네상스의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유산은 곧 그리스 문명의 유산이기도 하고 로마 제국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에 그 유산이 더욱 풍부하게 남아있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물론 르네상스의 탄생에 앞서 말한 것들중 어느 하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결국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배경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도시들을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되도록 하는 데에 일조한 거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사실적인 미술의 등장

 

사실, 중세 중반에 접어드는 시점까지도 여전히 문명의 중심지는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이었습니다. 단지 정치나 사회 체제 뿐만 아니라 학문, 예술, 문화적 관점에서도 동로마 제국의 것이 가장 선진적인 것,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죠. 하지만 서유럽 세계에서 르네상스가 꽃피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구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났습니다.  

 

유럽 근대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는 비잔틴 양식이라고 불리우는 기존의 성화 기법과 양식들을 혁신적으로 재해석하며 르네상스 미술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기존의 비잔틴 양식의 성화에서는 작품 안에 묘사된 인물들이 평면적이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요. 이는 이 작품들이 자연스러운 묘사보다는 종교적인 목적에 더욱 부합하도록 그려졌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 성모 마리아 등은 다른 인물들보다 더 크게, 더 특별하게 묘사하고 배경이 되는 다른 등장인물들은 좀 더 작게 별로 강조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 조토는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실감나고 자연스러운 묘사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중요한 인물일수록 크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가까운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중세의 미술이 종교적 목적에 부합하는 작품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다른 것, 보다 현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세 이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던 예술적 관점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죠. 조토의 등장은 이제 예술사에 있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조토의 &lt;애도&gt;
서양미술사의 일대 변혁을 이끈 작품으로 평가받는 조토 디 본도네의 <애도> 입니다. 비슷한 소재, 비슷한 구도에 익숙해져있는 우리 눈에는 그리 대단한 점이 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예수의 죽음이 당대인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토가 문을 연 새로운 시대는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이어졌습니다. 그는 작품의 사실성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계산하기 위해서 로마의 옛 건축물들을 연구해 비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정립시켰는데요. 관찰자와 물체의 거리에 따라 사물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작게, 또는 크게 보일 수 있는지를 밝혀내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습니다. 사실 원근법 그 자체는 이미 예전부터 건축술에서 적용되어오던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 사물을 관찰한 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노력이 회화에 적용되면서 중세시대와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미술이 등장하는 데에 기여했죠.

 

조토나 브루넬레스키의 발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노력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물론, 문명의 발생 이전,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벽화나 라스코의 동굴 벽화에서도 나타난 것이죠. 이쯤되면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노력은 인류의 본능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합니다. 다만, 중세가 시작된 이래로 그 본능을 능가하면서까지 모든 것이 종교를 떠받치고 있던 시대가 저물고 이제는 다시 옛날의 본능을 되찾으려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거죠. 

 

한편, 조토와 브루넬레스키의 새로운 발상은 이제 피렌체의 다른 화가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소재 자체도 종교를 벗어나 더욱 다양해지기 시작했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나 고전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 만들어지고 그 과정에서 보다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인체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긴 하지만... 인간의 신체에 대한 관심은 중세 시대 내내 금기시되던 것이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르네상스 3대장으로 불리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모두 인간의 신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성서와 신화의 내용을 빌려 인간의 모습을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는 데에 몰두했습니다.

 

단테와 보카치오, 조토와 브루넬레스키가 활동한 피렌체는 도대체 어떤 곳이었을까요?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기 내내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고 르네상스가 저물어가는 시기 이와 같이 쇠퇴했으니 정말 르네상스의 도시 맞네요. 사실 12세기부터 이미 모직물 산업과 중개무역으로 큰 부를 쌓은 피렌체는 정치적으로는 교황파인 구엘프와 황제파인 기벨린으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있었는데요. 13세기에 들어 상인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이들이 조금씩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자 본인들의 상업활동에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했습니다. 바로 공화정이죠.

 

공화정, 하면 곧 원로원이 연상되는데요. 사실, 그것 말고도 피렌체에 만들어진 작은 로마는 정말 로마와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도시 내의 수공업자들과 시 주변의 농민들이 큰 돈을 번 상인들에 비해 소외되자 피렌체의 공화정 정부는 로마와 비슷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는데요. 노예를 해방하고 평민들을 정치에 참여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가 전성기에 도달한 후에는 제정으로 변화한 것처럼 공화정을 유지하던 피렌체에서도 강력한 권력이 출연했습니다. 1458년 코시모 데 메디치를 시작으로 메디치 가문의 집권이 시작된 것입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탄탄한 재력으로 많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르네상스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피렌체는 곧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이탈리아 북부의 다른 자치도시들 역시 피렌체의 예술양식을 모방하기 시작했죠. 예술계에서는 피렌체가 유행의 발상지가 된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이제 군주의 가문과 궁전을 자신들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기 시작했고 귀족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 초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교회 역시 예술가들의 주요 고객이었습니다. 교회를 새로 짓거나 보수할 때면 건축가가 필요했구요. 그렇게 건설된 교회 건물 안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제단화와 벽화를 그릴 화가와 조각상을 만들어줄 조각가 등이 필요했죠. 예술가들은 교회에 자신들의 작품을 납품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과 같은 작품들이 모두 이런 방식을 통해 탄생한 작품입니다.

 

미술에 비해 비교적 뒤늦게 발달한 서양의 근대 음악 역시 미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바흐, 모차르트 등 근대 서양음악가들의 조상 쯤 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가들이 이 때 등장했죠.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팔레스트리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등이 그런 음악가들인데요. 이들은 모두 궁정음악가로 왕이나 귀족들의 궁정에 고용되어 일하면서 자신이 모시는 군주를 위해 작품활동을 하거나, 또는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

  

상업을 기반으로 자치도시들이 발전한 지역이 한 곳 더 있었습니다. 바로 플랑드르 지방이죠. 이곳은 이탈리아 북부와 매우 비슷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가 전례되어 뿌리를 내리기에 매우 적당한 지역이었는데요. 피렌체에서는 조토가 르네상스 미술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얀 반 에이크가 회화에 유화 기법을 처음 도입하면서 북방의 르네상스 시대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탈리아 북부의 르네상스와는 달리 플랑드르에는 고전 시대의 유산이나 전통이 대체로 미약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탈리아 북부와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예술양식을 발전시켰는데요. 자화상이나, 자연의 풍경을 인물과 함께 담은 풍경화 등이 그 예입니다.

 

한편, 플랑드르 지역의 르네상스는 특히 학문 분야에 있어서 두드러진 상과를 보였는데요. 이 지역의 학자들은 보다 자유롭고 새로운 인문주의를 수립하며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연구하는 데에 주로 비중을 두었다면 이들은 고전 연구 외에도, 성서 해석에 있어서 교황청보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신학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의 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는 기존의 권위적인 성서 해석 대신 성서 본래의 의미에 바탕을 둔 소박한 신앙생활을 강조했죠. 그는 자신의 저작 <우신예찬>에서 성직자와 지식인의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플랑드르 지방은 아니지만 알프스 이북 지방인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뒤집는 지동설을 발표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젊은 유학생이었던 그는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주장했던 지동설을 발견하고 당시에 남아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문헌들을 검토해 당시까지 1300년동안 크리스트교적 이념에 충실하면서도 대부분의 천문 현상들을 정확하게 예측했던 천동설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새로운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격렬한 반발을 예상했던 그는 이 주장을 곧바로 발표하지 않고 죽기 1년전이 되어서야 이 학설을 발표했는데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초반에는 교회의 반응이 그냥 무덤덤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학설의 파급력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뿐, 그의 사후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뒤 지동설은 당시 지성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한우주론을 주장한 철학자이자 수도사인 조르다노 브루노가 사형당하고 과학자 갈렐레오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다가 교회의 압력으로 철회하는 등 기존의 교회 중심의 지성계에 반발하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지식인들이 점차 늘어났죠.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학문의 결실은 인쇄업자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해 개량된 금속활자기술과 인쇄기가 전 유럽에 보급되면서 순식간에 전파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지식이 단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인들 역시 향유할 수 있는 것이 된거죠. 인쇄술의 발달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 시민 계급의 탄생과 맞물리면서 서적이 보급되고 지식이 점차 민간에 확산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새롭게 정립된 르네상스적 세계관이 전 유럽에 전파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학자들의 저작이 인쇄되었지만, 가장 많이 인쇄되어 전파된 책은 다름 아닌 성서였습니다.

 

이렇게 알프스를 넘어온 르네상스는 분명 유럽 전지역이 퍼졌지만, 사실 플랑드르 지역만큼 르네상스가 발전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은 없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패권 국가였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이미 절대왕정이 자리잡으며 국가로서의 체제를 굳혀가는 중이었고 그래서 결국 알프스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정착한 르네상스는 이제 서쪽인 이베리아 반도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당시 에스파냐는 대항해 시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키워나가고 있었는데요. 초상화의 대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바로 이 시기 에스파냐의 궁정에서 에스파냐의 르네상스를 이끌던 화가였습니다. 

 

서쪽의 에스파냐에 다다른 르네상스는 동쪽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 도달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모순이 집약되어 발생하던 이 지역에서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의 형태로 나타났는데요. 사실 르네상스의 가장 큰 의의는 학문 분야에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의 학문적 사고의 변화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서구 문명의 밑거름이 되었으니까요. 사실 중세까지 인간의 모든 삶은 오직 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니다.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깊이있게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죠. 하지만 인문주의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이후부터 이제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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