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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근대의 서막

영토와 주권

  

르네상스와 신항로 개척, 종교개혁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며 중세의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유럽의 각 국가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영토와 주권을 가진 나라로 변화하며,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세 시대 동안 봉건 영주의 직할지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경계가 흐릿한 중세의 영토국가와는 다른 새로운 영토 개념이 생겨났는데요. 중세의 봉건제에서는 영토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주민들에 대한 봉건 영주의 주권 또한 불분명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각 국가간 국경이 확실해지고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국가의 개념이 보다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사실, 중세 시대에도 자신의 영지를 거느린 귀족들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땅 위에 살아가던 일반 민중들에게 전쟁은 그저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키는 쓸데 없는 소란일 뿐 누가 전쟁에서 승리하는지, 내가 사는 곳이 어느 나라인지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죠. 하지만 백년 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겪으면서 이제는 귀족들 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국가와 민족에 대한 소속감과 애국심, 자부심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마치 각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 축구 리그에는 주민들의 관심이 그렇게 크지 않더라도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전에는 많은 국민이 한마음으로 한국팀을 응원하는, 그런 거 아닐까요? 

 

한편, 영토에 대한 개념도 보다 확실해졌죠. 서로 다른 도시 또는 국가에 사는 사람들끼리의 교류가 흔치 않았던 중세 시대에는 도시들이나 국가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 지역이 누구의 땅인지 확실하지 않았다면, 이제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오가게 되면서부터는 통행세를 받거나 도로나 다리 사용료를 거두는 게 권력자들에게 상당히 쏠쏠한 수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금이나 요금을 부과하려면 도시 간, 국가 간에 경계를 확실히 확정짓는 것이 필요했죠. 

 

세속의 권력이 이렇게 분권적인 모습을 탈피해 중앙집권적인 모습으로 서서히 변화한 것과는 다르게 종교권력은 중세에서 근대로 갈수록 점점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중세 동안 교황청은 국가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전쟁을 부추기고 때로는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등 막강한 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죠? 세속에는 수없이 많은 군주가 존재했다면, 종교에는 단 한명의 황제인 교황이 있을 뿐이었고 서유럽 세계는 그 교황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제국의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의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예시입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새롭게 발견한 신대륙 영토에 대한 분쟁이 생기자 이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교황청에게 갈등에 대한 중재를 맡겼고, 교황이 그어준 경계를 따라 영토를 확정지었는데요. 유럽 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수많은 민중들이 이에 동조하자 힘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속군주들의 힘을 빌려 종교개혁 세력을 진압하기에 급급했지만 그래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죠. 

   

따라서 종교개혁을 거치며 교황권이 몰락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서유럽의 국제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교황이라는 초국가적 중재자가 사라지고 중세라는 틀을 유지해온 국제질서가 무너지면서 각 국가들은 온전히 스스로의 국력에 의지해 국제 문제를 풀어나가야만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칼레 해전

  

카를 5세는 1556년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에스파냐의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양위했습니다. 거대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이제 둘로 나뉜 것입니다. 에스파냐의 왕이 된 펠리페 2세는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통혼 정책을 이어나가며 세력 확대를 시도했는데요. 특히 현재의 볼리비아에 위치한 포토시에서는 은광이 개발되어 매년 엄청난 양의 은이 에스파냐로 유입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량 유입된 금과 은은 유럽에서 유례가 없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유럽 경제에 큰 파장을 몰고오기도 했죠.

 

펠리페 2세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포르투갈의 왕녀인 마리아 마누엘라,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 프랑스 왕녀인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의 왕녀인 안나와 차례대로 혼인을 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중 포르투갈 왕국을 병합하면서 영토가 더 넓어졌습니다. 여기서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 1세는 튜더 왕조의 그 메리 1세가 맞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카를 5세의 이모이자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이었고, 또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의 안나는 카를 5세의 외손녀였으니... 엄청 복잡하네요.

 

그렇게 부가 나라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니 군사력도 더 강화되었습니다. 본래도 해상력에 있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였지만, 오스만튀르크르 상대로 벌어진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하며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이 더 강화되었죠. 이렇게 강화된 군사력은 다시 신대륙과의 해상무역에 투입되며 에스파냐에게 더 많은 금과 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뭐, 해상무역의 실상은 신대륙의 원주민들의 노동력과 자원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거긴 했지만요. 펠리페 2세는 곧 무적함대라고도 불리우는 강력한 함대를 구성하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력을 가진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으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소모한 데에다가 에스파냐 왕실의 끝없는 사치가 이어지자 어마어마했던 국고도 곧 고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에스파냐의 자랑인 무적함대 역시 잉글랜드에게 패하며 그 명성을 잃게 되죠. 한때나마 혼인관계에 있던 양국이 어쩌다 그렇게 전쟁까지 벌였나 싶기도 했지만, 카톨릭을 신봉했던 메리 1세의 사후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인 헨리 8세를 따라 잉글랜드의 국교를 다시 성공회로 복귀시킨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 양국의 관계도 다시 악화되었죠. 거기에 두 나라는 신대륙 식민지를 두고 사사건건 다투던 상황이기도 했구요.    

  

당시 에스파냐의 함선들은 신대륙과 에스파냐 본토 사이 대서양을 오가며 열심히 금과 은을 운반했는데요. 그러다보니 당연히 신대륙에서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함선들 대부분은 어마어마한 양의 금은보화를 싣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보물선이네요... 그래서 당시 신대륙 인근을 탐험하던 잉글랜드 해적들은 에스파냐의 보물선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해적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런 해적활동은 카리브해 인근에서 특히 빈번하게 이루어졌죠. 캐리비안의 해적도 이래서 유명해졌나봅니다. 

  

안그래도 종교 문제 때문에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두 나라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가운데, 잉글랜드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자 에스파냐에서는 잉글랜드에게 이 해적들을 단속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이 해적들에게 해적 허가까지 내어주며 오히려 노략질을 더욱 장려했습니다. 그 중 프랜시스 드레이크라는 해적은 해적 행위로 노획한 재화 일부를 여왕에게 바치고 기사 작위까지 얻기도 했죠. 마치 에스파냐를 약올리는 것 같은 이러한 상황을 에스파냐도 도저히 두고볼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결국 양측은 1588년 칼레에서 맞붙었습니다.  

  

칼레 해전은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해전으로 그 동안 바다에서는 적수가 없었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는 체면이 크게 깎이긴 했지만... 그래도 에스파냐의 해상력이 폭삭 망한 건 아니었구요. 잉글랜드의 입장에서는 에스파냐가 우세했던 해상에서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는 차지할 수 있게 되었죠. 이후로도 둘은 몇번 더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이미 앞서서 큰 해전을 치르느라 양국 모두 상당한 전비를 소모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다음 해인 1604년에 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잉글랜드 해군과 싸우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작자는 미상이고 현재는 영국 그리니치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독립

  

에스파냐의 풍부했던 재정도 왕실의 사치와 큰 전쟁으로 급격히 부실해졌습니다. 그 사이에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부는 상당 부분 플랑드르 상인들의 손으로 들어갔는데요. 그러다보니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이들 사이에서는 이제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고조되었습니다. 플랑드르인의 나라인 네덜란드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인데요. 사실 플랑드르 지방은 에스파냐에게는 매우 중요한 영토였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지역일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치우친 에스파냐의 위치상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 중앙에 가까운 곳이라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했죠. 에스파냐로서는 당연히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세 말기 상인들의 자치도시로 성장한 네덜란드는 자유를 중시하는 플랑드르적 전통을 바탕으로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가장 큰 세력을 이룬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파냐는 그와는 정반대로 카톨릭의 마지막 수호자를 자처하는 나라였죠. 그러니 펠리페 2세가 플랑드르 지방에서 시행한 보수적이고 경직된 카톨릭 정책은 플랑드르인들에게 영 맞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플랑드르 지역에 착취에 가까운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으니... 플랑드르의 상인들은 물론이고 전통적 귀족들마저도 에스파냐에 반감을 품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적극적인 혼인 정책으로 유럽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가던 시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된 지역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부르고뉴 공국의 일부이기도 했구요, 또 그 전에는 신성로마제국이 거느린 여러 공국들 중 하나에 속해있던 곳이었죠. 네덜란드도 처음부터 상업이 발달한 국제무역항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민 대부분이 전통적 방식의 어업에 종사하는 낙후된 곳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어부들이 지방과 단백질이 풍부한 등푸른 생선, 청어잡이에 나서면서부터 네덜란드 어업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의 독립과정에 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청어 얘기를 꺼내는 게 좀 엉뚱한 거 같지만, 그래도 네덜란드가 15 ~ 16세기의 청어 산업을 주도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청어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고 그러면서도 북해에서 엄청나게 많이 잡히는 어종이었는데요. 지방이 많이 함유된 생선이라 빨리 상하기 때문에 북해 연안 지역에서 주로 소비되는 생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어부들이 획기적인 염장 처리 방식을 발명해내면서 청어의 보관기간이 크게 늘어났고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염장 처리된 청어는 유럽 각 지역에 널리 유통되면서 네덜란드에 큰 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청어의 염장 처리 방식만으로 네덜란드가 경제적으로 그럽게 급성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좀 더 많은 청어를 잡기 위해 점차 먼바다로 나가게 되면서 조선업과 항해술을 발전시켰구요. 또 그렇게 잡은 많은 청어들을 효율적으로 상품화하기 위해 생선 손질과 염장, 포장, 유통하는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업화해서 철저한 생산 유통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품의 표준화, 규격화가 이루어지면서 청어잡이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하나의 커다란 주력 산업으로 자리잡았죠.   

  

한편, 네덜란드는 에스파냐가 시행한 대규모의 유대인 추방 정책에 반사이익을 얻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베리아 반도 지역은 이슬람 왕국들의 통치를 받던 시절까지만 해도 종교적으로 상당히 자유로운 곳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특유의 종교적 관용 정책이 통용되던 곳이었고 따라서 이슬람교와 카톨릭, 그리고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큰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대인들은 상업에 종사하며 유럽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죠. 당연히 이들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도 적지 않겠죠? 

 

하지만 레콩키스타 이후 온세상에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은 카톨릭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하자 유대인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도 사라졌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 새롭게 들어선 카톨릭 왕국은 이들을 향해 개종 또는 추방, 오직 두개의 선택지만 내밀었을 뿐이죠. 결국 이베리아의 유대인들은 에스파냐를 떠나, 상대적으로 군주의 권한이 약하고 종교적으로 개방적인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재에 밝은 유대인들은 적극적인 상업활동을 통해 네덜란드를 유럽 제일의 상업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총독은 침묵공이라는 별명을 가진 빌렘 공이었습니다. 과거 봉건시대 오랑주 공국을 통치한 오랑주 가문 출신인 그는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하는 내내 펠리페 2세의 간섭과 에스파냐에서 이주한 귀족들과의 갈등에 시달렸는데요. 그러던 중 펠리페 2세가 군대를 보내 신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신교 신자들이 이를 피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자 네덜란드에서는 펠리페 2세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하는 반란이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단지 종교만이 반란의 이유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에스파냐는 오스만튀르크와 지중해 재해권을 두고 벌어진 레판토 해전을 치르기 위해 병력을 정비하던 중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막대한 전비가 소모되자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이었던 네덜란드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자치 의회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죠. 결국 레판토 해전이 있은 다음해인 1572년, 빌렘 공은 신교도들을 이끌고 군대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독립을 위한 투쟁에 착수했습니다. 

  

이미 에스파냐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진 상황에서 신교가 우세한 중서부의 홀란트 주 일대가 빌렘 공에 의해서 금새 점령되자 눈치를 보던 남부의 주들도 이에 화답하듯 에스파냐 왕실을 향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거기에 프랑스의 신교 세력 역시 이들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독립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처럼 보였죠. 하지만 카톨릭을 신봉하는 프랑스에서도 신교 신자들을 향한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자, 네덜란드를 돕던 프랑스의 신교 세력들의 지원이 끊어졌고, 결국 네덜란드는 남부의 주들은 남겨둔 채로 신교 세력이 우세한 나머지  주들을 연합해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고 에스파냐에 대항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의 반란을 진압하던 에스파냐에서는 반란 진압에 동원된 군인들의 급여가 밀리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군대가 해산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신대륙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금과 은을 국내로 들여오던 에스파냐가 어쩌다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참 의아한 일이네요. 이렇게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한 군인들은 네덜란드의 항구도시인 안트베르펜에서 마구 약탈 행위를 하면서 도시를 파괴했는데요. 그 꼴을 본 네덜란드인들은 이제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이 종교의 자유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네덜란드에는 아직도 카톨릭을 신봉하며 에스파냐에 충성을 바치는 귀족세력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빌렘 공이 주도하는 독립전쟁에 가세한 신교 세력권에 더해 카톨릭을 신봉함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의 착취에 지친 일부 주들이 위트레흐트 동맹으로 넘어오면서 네덜란드는 결국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암살당한 빌렘 공의 아들인 마우리츠 판 나사우를 국가원수로 공화국을 출범시켰죠. 이렇게 해서 1587년, 네덜란드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신생독립국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미 플랑드르 상인들이 원래부터 해오던 청어 산업과 모직물 공업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크게 성장한 금융업과 무역 활동을 밑거름 삼아 곧 해외진출에 나섰습니다. 이제 플랑드르 상인들은 마치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북해와 지중해를 오가며 갈고 닦은 항해술과 무역 경험을 바탕으로 에스파냐가 일궈놓은 신항로를 타고 전세계를 누비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신대륙의 발견으로 엄청난 금과 은을 얻으며 한때 지중해와 대서양을 장악했던 에스파냐는 서유럽 저지대에 작은 영토를 가진 공화국 네덜란드에게 그 패권을 고스란히 넘겨주어야 했죠. 

 

  

프랑스의 근대화

 

강력한 카톨릭 왕이 통치하는 프랑스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을까요? 중세의 종말을 가져온 거나 마찬가지인 이 당시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유럽 대륙 중앙에 위치한 프랑스에서는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에스파냐의 신항로의 개척이나 잉글랜드와 보헤미아,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이탈리아와 북유럽 일대에서 발생한 르네상스는 모두 프랑스와는 먼 곳에서 시작된 것이었죠. 따라서 유럽 대륙 한가운데에 놓인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근대적 변화가 더디게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로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부패한 교회 세력에 대한 청산이 종교개혁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벌어졌습니다. 로마의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한 아비뇽 유수가 바로 그 사건이었는데요. 아비뇽 유수를 거치며 본래에도 세속권력이 강력했던 프랑스에서는 종교권력이 급격히 쇠락하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더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내내 극도로 분권화되었던 지방 영주들의 서열이 정해지면서 점차 중앙집권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죠. 특히 15세기 중반 잉글랜드와의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모두 빼앗은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이미 일찌감치 영토국가로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근대의 시작이 될만한 세계사적 변화, 즉 신항로 개척이나 종교개혁, 르네상스 등과 같은 일들을 별로 거치지 않은채 뭔가 역사 발전의 흐름에서 좀 벗어나 있었던 것만 같았던 프랑스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먼저 근대 국가의 바탕을 마련한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격렬한 움직임이 프랑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의미하는 위그노들과 카톨릭 세력 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위그노 전쟁은 유럽 대륙 한복판을 거대한 전장으로 만들며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죠. 

 

근데 이 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프랑스 얘기를 한 게 언제였는지를 죽 거슬러 올라가보니... 무려 백년전쟁 때였네요! 그래서 이글은 다시 백년전쟁 직후에서부터 이어서 프랑스 얘기를 해야될 것 같습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은 그 동안 잉글랜드가 유럽 내에서 가졌던 영토를 모두 프랑스에게 내어주는 결과를 낳았는데요. 백년전쟁은 프랑스로 하여금 새롭게 얻은 상당한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분관적인 중세 왕국에서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백년전쟁으로 서쪽 국경을 확정지은 프랑스는 이제 동쪽으로 국경을 맞댄 나라들과의 관계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프랑스는 유럽의 한가운데에 있고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보니 인접국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는데요. 동부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늘 강력했던 봉신인 부르고뉴 공국과의 문제,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자치도시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벌어진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경쟁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씩 들여다 볼까요?

 

사실, 부르고뉴는 이미 예전부터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독립성을 지켜온 지역이었습니다. 서로마가 휘청휘청하던 시기부터 부르군트 왕국이라는 독립된 왕국으로 존속했구요. 프랑스에 카페 왕조가 들어서던 시기에 방계 왕족이 봉토로 하사받아 대대로 공국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죠. 위치로는 프랑스 동부의 중간쯤 되는 곳인데, 프랑스에 발루아 왕조가 들어서고 부르고뉴 공국도 발루아 왕조의 방계가 상속을 받게 된 이래로, 혼인 정책을 통해 플랑드르 지방의 일부도 영토로 편입한 상태였습니다.

 

새로 얻은 플랑드르 지방은 원래의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용담공이라는 별명이 붙은 샤를 1세가 부르고뉴 공작으로 즉위한 뒤 이 둘 사이의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고 부르고뉴를 왕국으로 선포하려고 하자 프랑스와의 갈등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주변의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자가 생겨날 것을 걱정한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영방군주들과 결탁해 샤를 1세의 시도를 차단했죠. 결국 1477년 부르고뉴 전쟁에서 샤를 1세가 전사하면서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후계자가 없었던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 분할 병합되었습니다.  

  

한편, 동남부의 이탈리아 북부와 자치도시들에 관한 문제는 이미 프랑수아 1세 때 불거졌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두고 선거에 출마하며 카를 5세와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적극적인 혼인정책으로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된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자, 지리상 동서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에 둘러싸이며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거기에 카를 5세는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부를 통해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으니 프랑스로서는 당연히 불안했겠죠. 

 

결국 양측은 무력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에서 격돌했고 충돌은 훗날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의 영향력은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내어주었지만, 그래도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라인강 인근 요충지들 중 일부는 프랑스가 차지하게 되었죠. 프랑스로서는 점차 커져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이탈리아 북부의 영토를 얻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사실 프랑수아 1세는 원래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학문과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군주였다고 합니다.  

  

  

위그노 전쟁 

  

그는 호방한 무인적 기질과 섬세한 문인 기질을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키도 2미터였대요. 이탈리아 북부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종교에 관해서는 여느 프랑스의 군주들과 다르지 않게 엄격한 카톨릭 중시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사실 경쟁자인 카를 5세가 줄곧 카톨릭을 고수하느라 영방 군주을 상대해야하는 그런 골치 아픈 일을 겪은 모습을 봤더라면 프랑스로서는 신교를 수용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신교 탄압에 대한 반사이익을 얻는 정책을 시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이를 두고 프랑스의 카톨릭 교회가 신성로마제국의 카톨릭 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제위를 인정받는, 카톨릭 세계의 정통성있는 수호자라는 명예를 가진 세속군주였지만, 그게 한편으로는 황제를 카톨릭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족쇄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의 왕은 적어도 그런 걱정은 없었죠. 카톨릭 세계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일 테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카톨릭 교회는 엄연히 세속군주인 프랑스 왕의 통치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굳이 교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신교를 지지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네요.

   

하지만 이 때의 선택은 훗날 커다란 회오리가 되어 프랑스 전역을 강타하게 됩니다.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아들, 앙리 2세는 종교에 관한한 프랑스아 1세보다 더 경직된 정책으로 일관했는데요. 마침 당시 프랑스에는 스위스에서 벌어지는 종교박해를 피해 신교도들이 대거 이주를 하던 상황이었죠. 앙리 2세는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이탈리아 북부에 관한 문제들이 마무리되고 양측이 서로 혼인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합의를 축하하기 위한 마상경기에서 창을 맞는 사고로 죽자... 이 문제는 그의 아내이자 메디치 가문 출신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손으로 들어갔죠.

  

앙리 2세와 카트린 왕비 사이에는 무려 열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요. 앙리 2세의 사후에 프랑수아 2세가 즉위했다가 요절하고, 10살이었던 동생 샤를 9세가 즉위하자 카트린 왕비가 본격적으로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인데다가 명망 있는 귀족가문 출신도 아니었던 카트린 왕비는 프랑스 내에 그다지 믿을만한 지지 기반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나 마찬가지인 메디치 가문을 그냥 부유한 상인 가문 쯤으로 여겼다고 하니, 프랑스 왕실은 또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에요... 카트린 왕비는 이제 카톨릭과 신교 세력 사이의 분쟁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내에서 신교의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은, 과거 13세기 한때 카톨릭에서 이단 종파로 여겨지던 알비파가 대규모 종교박해를 받았던 프랑스 남부지역이었는데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물론이고 전통 귀족을 비롯한 대영주들도 칼뱅파로 대거 개종을 하면서 이곳은 곧 프랑스 칼뱅주의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칼뱅파 세력들은 위그노로 불리우며 지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죠. 당연히 중앙에서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고, 결국 프랑스에서는 남부의 위그노들과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마침내 프랑스도 종교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네요.

  

카톨릭 신자였지만 위그노들에게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던 카트린 왕비와는 다르게, 당시 카톨릭 세력의 수장으로서 신교를 강하게 배척했던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은 위그노들에게 가혹한 박해 정책을 밀어부쳤습니다. 일설에는 그 모든 상황이 카트린 왕비에 의해 배후에서 조종된 것이라는 설도 있기도 하지만, 요즘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사실 위그노들이 요구했던 것은 다만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해달라는 것 뿐이었는데요. 기즈 공작은 그러한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위그노들을 매우 무자비하게 진압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그노 세력의 저항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한편,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은 샤를 9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나바르 왕국의 헨리케 3세, 두 사람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습니다. 헨리케 3세는 독실한 신교 신자, 즉 위그노였는데요. 카톨릭을 고수하던 프랑스 왕실에서 신교 세력의 주요 거점인 나바르 왕국과 혼인동맹을 맺었다는 게 좀 신기하죠? 아마 카트린 왕비의 입장에서는 너무 강력해진 기즈 공작의 세력을 견제하고 카톨릭 세력과 신교 세력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교 세력의 주요인사인 헨리케 3세가 결혼을 위해 파리를 찾자, 프랑스 내의 위그노 세력의 지도층도 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파리로 향했습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카톨릭과 신교 세력 간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양쪽 모두에게 매우 뜻깊은 행사였겠죠?  그래서 프랑스 내의 많은 신교도들이 이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파리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톨릭 세력은 이 결혼식을 프랑스 내의 신교도들을 모두 쓸어버릴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죠. 결국 파리에서는 카톨릭 세력의 무자비한 테러로 수많은 위그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누군가의 결혼식이 이렇게 끔찍한 참극이 벌어지는 무대로 변했다니 섬뜩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 참극이 그저 하루 이틀 동안 파리 시내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파리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카톨릭 세력은 무려 두 달 가까이 프랑스 전역의 위그노들을 학살했고 수많은 위그노들이 그들의 공격에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 참혹한 사건이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게 정말 믿기지 않는 아이러니네요. 그런데 종교를 둘러싼 내전은 이제 시작일 뿐, 위그노 전쟁은 헨리케 3세가 프랑스의 왕 앙리 4세로 즉위한 이후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카톨릭 세력과 위그노와의 대결이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는 동안 무능으로 일관했던 샤를 9세가 후사 없이 죽자 이번에는 그의 동생인 앙리 3세가 즉위했는데요. 그 역시 이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위그노와의 대결이 지속되는 동안 카톨릭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기즈 공작이 프랑스 왕위를 차지할 것을 내심 우려하던 앙리 3세는 그를 암살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노한 카톨릭 세력은 또 앙리 3세를 암살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였죠. 

  

앞서 왕위에 올랐던 두 명의 형들과 마찬가지로 앙리 3세 역시 자신의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왕실 내에 적법한 후계자를 찾지 못하자 왕위는 성 바르톨로매오 축일의 대학살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나바르 왕국의 왕 헨리케 3세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에샤는 발루아 왕조가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죠. 그는 카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죽고 죽이는 극한의 갈등 상황을 끝내고자, 1598년 프랑스 내의 일부 지역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한 낭트 칙령을 내리며 위그노 전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카톨릭 세력을 달리기 위해 본인 스스로 카톨릭으로 개종하며 갈등의 봉합에 앞장섰습니다. 

 

앙리 4세의 적극적인 조치로 카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전쟁도 잦아들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앙리 4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버티던 카톨릭 세력도 있긴 했지만 이제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이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였죠. 따라서 낭트 칙령은 프랑스 전역의 카톨릭 세력과 위그노 세력 간의 최종적인 타협의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두 세력의 갈등이 워낙 오래도록, 팽팽하게 이어지다 보니 프랑스 내부에서도 기존의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위그노들과 이 사태를 풀어가기 위한 온건파가 모여 새로운 중재 세력을 이루었는데요. 이들은 앙리 4세의 즉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탁월한 국정운영 능력을 인정받아 관료 세력으로 급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파란을 수습한 앙리 4세도 암살의 위협을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주요인사들이 암살을 당하는것도 좀 특이하네요. 그는 급진적인 카톨릭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요. 다행히 그에게는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불과 9살에 불과하긴 했지만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하면 되는 일이었죠. 왕비의 성인 메디시스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역시 카트린 왕비처럼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메디치 가문은 그저 상인 가문이 아닌, 토스카나 대공국을 통치하는 귀족 가문이 되어 있었고, 거기에 앙리 4세의 치세 동안에 탄탄한 세력으로 성장한 관료 집단까지 거느렸으니, 국정 운영이 위협받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한편, 마리 왕비에게는 한가지 더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는데요. 당시 삼부회에서 성직자 대표를 맡으며 이제 막 정계에 진출한 추기경 리슐리외가 마리 왕비의 새로운 정치적 조력자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는 앙리 4세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로 즉위한 루이 13세를 보필해 국정을 이끌어가고 왕권을 강화하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는데요. 사실 그가 프랑스 역사에서 손에 꼽을만한 뛰어난 재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아직 중세 국가로서의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프랑스를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국가, 근대국가로 이끌었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수아 1세 때 시작된 프랑스의 종교 갈등은 발루아 왕조를 끝내고 부르봉 왕조를 열면서, 그리고 중세 체제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면서, 마무리가 되었네요. 오랜 기간의 대내적 혼란이 이렇게 수습되자 프랑스는 이제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력을 받은 루이 13세의 치세 동안 절대왕정의 바탕을 마련하고 유럽 각국이 각축을 벌이는 근대국가로의 전환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쟁은 이번에도 역시 전쟁의 형태로 펼쳐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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