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왕조의 시작
온 유럽 대륙이 30년 전쟁으로 시끌벅적하던 내내, 으레 이런 큰 일이 일어나면 늘 모습을 드러내던 '그 나라'가 안보이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얘기인데요.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내내 잉글랜드가 별다른 관여를 하지 못했던 건 다른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였죠. 또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일단 튜더 왕조의 헨리 8세는 여러 번의 결혼 끝에 아들을 얻긴 했지만 그 아들인 에드워드 6세는 금방 요절하고 결국 왕위는 그의 이복 누나들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차례로 차지했습니다. 근데 엘리자베스 1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있듯이 평생 후사를 남기지 않았죠. 그래서 튜더 왕조도 곧 문을 닫을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찾는 일은 잉글랜드의 의회에게 맏겨졌습니다. 의회가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은, 헨리 7세의 딸인 마거릿 튜더의 자손들 중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이라면 그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처형한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기도 했다는 거죠. 엘리자베스 1세는 생전에 메리 스튜어트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그를 처형했는데, 결국은 그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기어이 잉글랜드의 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도 겸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스코틀랜드는 어떤 나라일까요? 그가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의 후손이라면 분명 두 나라의 왕실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을텐데요... 사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상당히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아주 먼 옛날 본래 켈트족이 살던 잉글랜드에 로마인이 들어온 뒤 로마가 쇠퇴하면서, 잉글랜드는 앵글로 색슨족과 데인족, 그리고 노르망디 공국의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북쪽의 스코틀랜드는 그러한 변화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었죠.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차지하기 위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격해왔고 특히나 플랜태저넷 왕조의 에드워드 1세 때에는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며 스코틀랜드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5세기에 들어 잉글랜드의 헨리 7세가 평화적인 외교정책을 펴며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와 혼인동맹을 체결하자 양국은 비로소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를 그렇게 경계했던 것도 메리 스튜어트 역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명분이 인정될 여지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인 거죠.
그런데 스코틀랜드는 무엇이 그토록 잉글랜드와 이질적이었던 걸까요? 일단 두 나라는 이웃이면서도 오래도록 적대적인 관계를 맺어왔는데요. 스코틀랜드로서는 그들보다 강성했던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서 유럽 대륙의 강대국과 원활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잉글랜드와 무려 백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인 적이 있는 프랑스와 깊은 외교 관계를 맺어왔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게 되었고 정작 지척에 있는데 잉글랜드와는 다른 정치 제도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 내에서도 가장 안정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한 나라였습니다. 중세 내내 봉건 영주들과 교회 세력에 대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온 프랑스의 왕들은 이제 30년 전쟁을 거치며 전문화된 관료 집단과 근대화된 상비군을 거느린, 절대 군주로 군림할 기반을 닦고 있었죠. 그러니 프랑스의 정치적 전통을 수용해온 스코틀랜드의 왕실 역시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임스 6세도요.
잉글랜드는 어땠을까요? 13세기 실지왕 존이 귀족들의 요구로 마그나카르타를 받아들인 이래로 잉글랜드는 의회의 승인 없이 왕이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가졌던 잉글랜드의 의회는 백년 전쟁을 거치는 동안 몇번이고 막대한 전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더욱 그 기능이 강화되었죠. 왕이 '제발 전쟁하게 세금 좀 걷을 수 있게 해줘', 하면 귀족들은 못이기는 척 '그래, 잘해야돼', 하는 그런 분위기 아니었을까요? 따라서 잉글랜드는 이미 일찌기 왕과 의회의 권한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체제가 발전해왔습니다. 프랑스와는 좀 다른 모습이죠?
따라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서도 프랑스식 정치 체제를 따라 왕권을 대폭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마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이 의회의 의견을 수용해야하는 잉글랜드의 시스템이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와는 달리 마그나카르타를 선포한 시점부터 끊임없이 의회 제도를 발전시켜온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처럼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군주들조차도 의회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정치적 전통이 존재했고, 따라서 제임스 1세의 왕권 강화 노력은 의회 세력에게 상당히 못마땅한 것이었겠죠.
그런데... 이 즈음 유럽 대륙을 휩쓸다시피 했던 종교개혁의 바람이 잉글랜드에도 불어닥쳤습니다. 프랑스에서 위그노 전쟁을 촉발하며 이제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한 칼뱅파가 잉글랜드에도 상륙한 거죠. 칼뱅주의는 유럽의 다른 종교개혁 세력보다도 더욱 철저한 교회 개혁과 성서로의 회귀를 주장했는데요. 근데 사실 잉글랜드는 이미 자신들 나름대로 종교개혁을 끝마친 일이 있었죠? 이들은 이미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내린 1534년부터 로마 교황청과는 분리된 국교회를 수립한 상태였죠. 잉글랜드로 전파된 칼뱅파는 어찌보면 신신교라고 볼 수 있으려나요.
청교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잉글랜드의 칼뱅파는 당연히 국교회와는 분명 다른 교파였습니다. 사실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를 빌미로 카톨릭에서 독립한 교파였지만 사실 교회 조직이 로마 교황청과 분리되어 있을 뿐, 사상적으로는 카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칼뱅파는 카톨릭과는 내용 면에서 실질적으로 다른 교파였죠. 잉글랜드에서 점차 청교도가 세력을 얻기 시작하자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국교회의 수장인 제임스 1세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왕권도 강화해야 하고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청교도도 몰아내야 했던 제임스 1세는 일단 국교회의 주교와 손을 잡았습니다. 한편, 왕권을 견제해야 하는 의회 세력은 제임스 1세의 탄압을 받고 있었던 청교도 세력에게 손을 내밀었죠.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양 팀은 제임스 1세 사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찰스 1세 때 더욱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이 시기 왕권을 그토록 견제하고자 했던 잉글랜드의 의회는 누가 주도하고 있었던 걸까요? 귀족일까요?
젠트리와 청교도
사실 잉글랜드에는 마그나카르타가 공포되기 이전부터도 의회가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전쟁에 참전하느라 전사하나 전비로 재산을 탕진하면서 귀족 세력들은 상당히 쇠퇴한 반면에 넓은 땅을 보유한 지주들이 새로운 상류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가 발달한 이후로는 재산을 많이 축적한 상인들, 그리고 당시에도 전문직종으로 인정받았던 법률가나 학자들도 일부 새로운 상류층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젠트리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법적으로는 귀족이 아닌 평민 계층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잉글랜드의 상류층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죠. 그리고 튜더 왕조 시기에 들어서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며 카톨릭 교회 세력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자 그 재산들을 사들이면서 더욱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며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들이 의회의 구성원 대다수를 차지하게된 상황이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본래 스코틀랜드 출신인데에다가 왕권 강화를 추구했으니 잉글랜드의 의회 세력과 마찰을 빚는 건 당연해 보이기도 하네요.
한편,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칼뱅주의가 잉글랜드에도 전해지며 청교도 또한 잉글랜드 사회의 중요한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유럽 대륙의 칼뱅주의를 수용한 이들은 헨리 8세가 수립한 국교회가 종교개혁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더 강도 높은 교회 개혁을 요구했죠. 사실 스코틀랜드 역시 종교개혁 이후 국교회가 수립되었고 제임스 1세도 이에 영향을 받은 신교도였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으니 청교도가 주장하는 적극적인 교회 개혁은 별로 원치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신교도라는 사실 때문에 개혁에 대한 기대를 걸었던 청교도 세력은 개혁보다 왕권 강화에 더 관심이 많은 그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죠.
거기에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은 제임스 1세로 하여금 더더욱 청교도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으로 왕권이 위협받았고, 신성로마제국은 30년 전쟁으로 그야말로 전국토가 황폐화되었으니까요. 마침 칼뱅파의 주요 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도시들을 보니 유독 자유 도시들이 많기도 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분투하던 제임스 1세는 결국 청교도들을 배척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문제는 1625년, 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즉위하면서 한층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제 청교도는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도 점차 수가 늘어나고 있었는데요. 반면에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보다 더 강경하게 청교도들을 배척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스코틀랜드인 출신이면서도 제임스 1세와는 다르게 영 스코틀랜드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왔으니... 이에 불만을 가진 스코틀랜드의 급진적인 청교도들은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죠.
반란이 일어났으니 이를 수습해야 했고 그러자면 전비가 필요했습니다. 찰스 1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랜만에 의회를 소집했는데요.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청교도들이 의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상황에서, 의회가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징세안에 합의해줄 리 없었죠. 물론 급진적인 청교도들에 반감을 가진 온건파도 있긴 했지만 결국 의회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1640년에 소집해 한달이 채 못가서 해산된 이 의회를 단기의회라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 찰스 1세가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다급해진 찰스 1세는 같은 해에 다시 의회를 소집했는데요. 이 의회는 무려 1653년에서야 폐회가 되어서 장기의회라고도 합니다. 사실 반란의 주축은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이긴 했지만 이들이 잉글랜드의 영토로 들어와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니, 아무리 같은 청교도라고 하더라도 잉글랜드인들에게 이들이 반갑기만 한 존재일리는 없겠죠? 그래서 다소 온건한 청교도들은 점차 스코틀랜드의 급진적인 청교도들에 대해 점차 반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와중에 찰스 1세, 아니 잉글랜드에는 또 다른 골치 아픈 일이 터지는데요. 헨리 8세 이후 사실상 잉글랜드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나쁜 일이 겹쳐서 일어난 셈이죠. 아일랜드는 오래도록 카톨릭을 신봉하던 지역이었는데요. 잉글랜드 국교회가 수립된 이래로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 가혹한 카톨릭 탄압 정책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이들에게 다소 유화적인 정책을 펴며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급진적인 청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늘려가자 이에 불안함을 느낀 아일랜드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로서는 튜더 왕조 시기에 당한 일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청교도가 카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 어떡하나, 해서 일으킨 반란이었겠지만, 사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세력을 제압하는 일로 이미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던 찰스 1세로서는 신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환장할 노릇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아일랜드에서는 종교의 자유는 물론이고 아일랜드의 자치와 아일랜드인의 재산권 보장과 같은 정치적 요구사항을 들고 나왔구요. 잉글랜드 의회의 극단적인 청교도 세력은 이들을 당장 쓸어버려야 한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상황이 극단적인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찰스 1세는 어쨌든 이를 수습해야 했습니다. 의회에는 분명 청교도들의 과도한 요구사항에 지친 온건파가 존재했고 이들이야말로 찰스 1세가 징치적 지원을 기대해볼 수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찰스 1세는 이들을 최대한 설득해 의회 내의 청교도 세력을 제압하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결국 내전
그런데 그렇게 찰스 1세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던 사이, 의회 내의 강경파 청교도들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소탕할 것을 주장하며 자체적으로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강경파가 반란을 진압하는 일에 왕의 의중을 묻지도 않고 군대를 움직이는 결정을 해버리자 이에 격분한 찰스 1세는 이들을 체포해야 한다며 의회로 진입했죠. 강경파들이 자신들의 리더를 체포하려는 찰스 1세를 저지하려하자 찰스 1세는 아예 의회의 해산을 명령했고, 양측의 대립은 이제 무력 충돌로 격화되었습니다.
내전이 시작되자 의회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동안 찰스 1세에 반발해온 극단적인 청교도 세력은 의회파,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지나친 횡포라고 생각했던 의회 내의 온건파는 왕당파가 되었죠. 무력 대결이 시작되자 의회파 세력은 각자 알아서 자신들이 모을 수 있는 병력을 끌어모았지만 그렇게 모인 군대는 당연히 왕실이 보유한 정규군에 비해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의회파에도 그들을 이끌만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등장하는데요. 훗날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올리버 크롬웰이 바로 의회파의 새로운 리더였습니다.

젠트리 출신으로 독실한 청교도였던 올리버 크롬웰은 본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찰스 1세가 의회를 해산시키자 다른 의회파 의원들처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왕실의 정규군에 대적할 군대를 끌어모았는데요. 의회파가 모은 군대는 대부분 정식 군대 교육을 받은 전문 군인이 아니었지만 크롬웰은 그래도 이 군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잘 훈련시키고 능력있는 지휘관을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한 군대로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린 그는 의회파 지도자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일약 의회파의 리더로 떠올랐죠.
결국 크롬웰은 1645년 벌어진 네이즈비 전투에서 정규군에 승리하고, 찰스 1세는 의회파의 포로가 되었는데요. 찰스 1세는 포로로 있는 동안 의회파 몰래 스코틀랜드를 끌여들여 재기를 노려보았지만 실패하고 1649년 재판과 의회의 동의를 거쳐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국왕이 일반 민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목이 잘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왕이 죽었으니 새로운 왕을 옹립해야 했지만 의회파는 그렇게 하는 대신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공화국의 새로운 지도자는 의회파의 리더였던 올리버 크롬웰이었죠.
크롬웰의 공포 정치
공화국 잉글랜드의 새로운 수장이 된 크롬웰에게는 찰스 1세가 감당해야 했던 복잡한 정치상황이 아직 그대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구요. 잉글랜드 내의 종교 갈등도 수습해야 했습니다. 군주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왕당파였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구요. 혁명의 공과에 따라 논공행상도 해야 했습니다. 거기에 불만을 가질만한 이들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했죠. 이 중에서 크롬웰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아일랜드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습니다.
크롬웰이 워낙 후세에 공포 정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인지, 아일랜드의 반란도 가혹하게 진압했을 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독실한 청교도였기 때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일랜드로 진입한 그의 토벌군은 카톨릭 세력을 척결하겠다며, 반란에 가담했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아일랜드인들을 부분별하게 공격하고 약탈했는데요. 이 때 얼마나 아일랜드를 철저하게 초토화시켜놓았는지, 이후로도 아일랜드는 좀처럼 잉글랜드의 압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세기 동안 혹독한 빈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다음은 스코틀랜드였습니다. 크롬웰과 의회파가 처형시킨 찰스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했지만 그가 속한 스튜어트 왕조는 본래 스코틀랜드의 왕실이었습니다. 크롬웰이 잉글랜드에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하더라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스튜어트 왕조가 이어져야 마땅한 일이었죠. 따라서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의 아들이었던 찰스 2세를 자신들의 적법한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당시 찰스 2세는 잉글랜드에서 벌어지던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해있던 상황이었죠.
크롬웰은 이를 잉글랜드 공화국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하고 스코틀랜드를 공격했습니다. 잉글랜드 군은 공격 초기 스코틀랜드 군에게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해 다시 잉글랜드로 철수했는데요. 이후 오히려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오자 이를 막아내며 반격을 시작해 스코틀랜드 군을 전멸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 역시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 정도 되니 이제 크롬웰을 막을 만한 세력은 없어보이네요.
사실 잉글랜드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혼란이 벌어지는 사이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는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럽은 1648년 이제 막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고 30년 전쟁 동안의 극심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해쓰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프랑스든, 에스파냐든 이 내전에 끼어들어 약간이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정리한 크롬웰은 이제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왕당파 말고도 의회파 내부에 보다 온건한 개혁을 원하는 세력이 존재했는데요. 크롬웰은 이들의 의견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에 의회를 통째로 해산해버린 것입니다. 그럼 이제 왕위에 올라서 크롬웰 왕조를 수립하면 될 거 같은데, 또 그러지는 않았네요. 그는 호국경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원수 자리에 올라 젠트리와 청교도 세력의 이익에 부합하는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했습니다.
특히 1651년에는 항해조례를 강화해서 잉글랜드의 식민지에는 잉글랜드의 선박만이 왕래할 수 있게 하면서 네덜란드의 해상패권을 저지하려고 했죠. 이 조치는 결국 네덜란드의 반발을 불러와서 두 나라는 1652년 제 1차 영란전쟁을 치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전쟁은 그 후로도 계속될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패권 경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면서 막강한 해상 전력을 자랑하던 네덜란드의 해군은 전쟁 초반 잉글랜드 해군을 압도하며 우세를 보이는 듯 했지만 결과적으로 양측은 어느 한 쪽이 우세를 보이는 데에 실패하면서 2년 만에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청교도 세력을 위한 특별한 정책도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이 특별히 좋아했을진 모르겠지만... 그는 엄격한 사회 통제 정책을 시행해서 청교도적 윤리관에 어긋날 법한 다양한 횔동들을 금지시켰는데요. 거기에는 극장 공연 관람이나 운동 경기 대회 개최, 무도회 개최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왕이나 귀족들이 했던 대부분의 여가 활동들이 모두 금지되었죠. 당시 지배층의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풍습을 근절하려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도가 지나쳐서 일반 민중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잔치를 여는 것까지 단속했습니다.
왕정복고
상황이 이러니 크롬웰의 강압적인 통치는 금방 인기를 잃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크롬웰은 자신의 통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한편 스스로를 종신 호국경이라 칭하면서 장기집권을 위한 체제를 다져갔죠. 가벼운 위법에도 무거운 형벌을 내리고 종교적 엄숙주의를 강요하는 통치가 계속되자 일반 민중들의 불만은 높아졌지만 아직은 그의 공포 정치가 공고한 상태였습니다. 젠트리와 청교도 세력 역시 크롬웰의 정치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왕당파가 재건되면 정치적으로 또 다른 위기에 몰릴 것을 염려해 크롬웰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노년기에 들어 각종 질병을 얻으며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다가 60세가 된 1959년에 감기 몸살로 사망했습니다. 생전의 행보를 보면 반란이나 암살 같은 최후를 맞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평화로운 최후입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을 후계자로 낙점해 자신의 사후에는 그가 정권을 승계받도록 했는데요. 이럴 거면 왜 왕위에 오르지 않았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두번째 호국경으로 취임하기는 했습니다, 만... 별로 오래 정권을 유지하진 못했습니다. 이미 그의 아버지의 치세 동안 공포 정치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구요. 또 그는 아버지에 비해 정권을 장악할 능력도 카리스마도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리처드 크롬웰은 군대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군대는 의회 내의 일부 세력과 함께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해 왕정복고를 선포했습니다. 그가 호국경 직위를 계승해 집권한지 겨우 8개월차 되는 시점이었죠.
크롬웰의 실각 이후 또 다른 호국경이 취임하지 않고 왕정이 복고된 것도 저는 좀 의문입니다. 그냥 짐작일 뿐이지만 혹독했던 크롬웰의 공포정치를 겪고난 당시 민중들에게는 자신들 눈앞에서 처형된 찰스 1세에 대한 동정심과 옛날의 자유로웠던 사회 분위기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왕정이 복고되고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귀국을 하자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그를 환영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실각한 리처드 크롬웰은 프랑스로 도주해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처지가 반대로 뒤바뀌었네요. 그래도 말년에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팔순이 넘도록 생존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