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사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정

태양왕의 시대

  

리슐리외의 능수능란한 외교정책 덕분에 유럽 대륙 한복판이 초토화된 30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최종 승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리슐리외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기 6년 전인 1642년에 죽었으니 전쟁의 최종 결과는 보지 못했지만요. 신기하게도, 그가 집권하는 동안 재위했던 루이 13세는 사실상 그에게 국정을 총괄할, 막대한 권력을 넘겨준 채 자신은 정사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는데요. 어쩌면 유능한 관료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주는 것 또한 군주의 자질 중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리슐리외가 마무리하지 못한 베스트팔렌 조약을 완성하며 프랑스의 승리를 확정지은 이는 리슐리외의 후계자인 추기경 쥘 마자랭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프랑스 사람이 아닌, 이탈리아 사람이었는데요. 대학 교육은 또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받았습니다. 거기에 교황 특사로 외교관 경력까지 쌓았으니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는 리슐리외의 사망 이후 프랑스의 실권자가 되어 30년 전쟁의 전후 상황을 처리했구요. 루이 13세가 죽자 불과 5세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14세를 대신해 본격적으로 정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뭔가 상황이 루이 13세 때와 비슷합니다. 루이 13세가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도움을 받으며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재위했던 것처럼 루이 14세 역시 어린 나이로 즉위해 모후인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의 도움을 받으며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죠. 근데 사실 다섯 살에 불과한 그가 정사를 직접 돌봤을 리는 없고 국정의 대부분은 재상인 마자랭에 의해서 운영되었습니다. 

 

마자랭은 유능한 재상이었지만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귀화한 프랑스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모후인 안 도트리슈 역시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죠. 리슐리외가 정사를 이끄는 동안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프랑스의 귀족들은 이 외국인 출신 섭정에 의해 자신들의 권한이 또 다시 억눌리는 상황이 되자 점점 더 불만이 커져갔습니다. 거기에 30년 전쟁이 끝난 뒤로도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전비를 핑게로 계속 과중한 과세를 하는 데에 대한 분노도 쌓였죠. 그러다 마침 런던에서 의회에 의해 왕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파리에도 반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마자랭이 파리고등법원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해온 소위 법복 귀족들 중 몇명의 판사들을 체포하자 다른 귀족들이 이에 항의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체포한 인사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다른 귀족들 역시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1648년부터 1653년까지 두차례에 걸쳐 일어난 이 반란은 프롱드의 난이라고 불리우는데요. 저는 프롱드가 사람 이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새총을 의미하더라구요. 반란 가담자들이 마자랭의 지지자들을 향해서 새총을 쏘고 도망가곤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들으면 이 사건이 반란이라기보다는 좀 짖궃은 장난 정도로 느껴지는데 실제로는 심각했습니다. 반란군은 파리 시내를 포위하고 심지어 루이 14세의 궁정에까지 침입했구요. 왕실과 마자랭 일파는 성난 시위대를 피해  파리 외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마자랭은 즉시 국왕군을 결성해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죠. 반란세력과 국왕군은 얼마 간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 같았지만, 반란군이 내부 분열로 혼란스러워진 사이 국왕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반란으로 파리에서는 위그노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만에 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고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프롱드의 난이 성공했다면 프랑스는 잉글랜드처럼 의회 권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또 더욱 나아가서는 좀 더 일찍 시민혁명이 성공한 입헌군주국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프롱드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100여 년 동안, 귀족들이 왕권을 넘보지 못하는 절대 왕권의 시대가 열렸죠. 훗날의 관점에서야 이 체제가 타파해야 할 구제도의 모순이다보니 프랑스의 역사 발전이 잉글랜드에 비해 한걸음 뒤쳐지게 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 당시에는 강력한 왕권과 전문적인 관료집단에 의해 운영되는, 나름 선진적인 정치체제였습니다.  

1661년,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비로소 친정에 나서게 됩니다. 비록 프롱드의 난으로 한차례 난리통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리슐리외와 마자랭이 집권하는 동안 발달한 관료제 덕분에, 측근 귀족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전문화된 관료집단에게 정책의 시행을 명령할 수 있는 시스템을 누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왕이 자신의 뜻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왕의 권한을 단단히 뒷받침해주었죠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뒤를 이어 루이 14세의 국정을 도운 관료는 마자랭이 자신의 집권기간 동안 발탁했던 상인 가문 출신의 경제관료 장 바티스트 콜베르였는데요.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인데다가 상인 가문 출신이라고 하니 그 역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귀족과는 거리가 좀 머네요. 재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수출 장려, 보호관세 시행, 국내산업 육성 등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펴고,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해 해외 무역을 장려했습니다.

 

직물공장을 시찰 중인 루이 14세와 콜베르를 직물 위에 묘사한 작품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에 소장 중인 폭 576 cm 짜리 태피스트리의 일부라고 하네요. 당시 유럽에서는 이런 장면들도 다 작품으로 남겼군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했다는 걸 보면 프랑스 역시 이 즈음부터는 식민지 개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 같습니다. 이 무렵 프랑스가 주로 공들여 개척한 지역은 북아메리카 쪽이었는데요. 이쪽은 이미 잉글랜드에서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미 상당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뒤늦게 뛰어든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잉글랜드와의 충돌을 피하려면 아무래도 잉글랜드의 식민지들보다 더 북쪽으로 진출해야 했죠. 현재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이 때 프랑스의 식민지들이 건설된 곳이었던 퀘벡 등 캐나다 동부에 집중되어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확고한 패권 국가로 자리잡기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고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습니다. 국가 재정이 빈약했던 프랑스는 해운업이나 조선업, 양모 산업 등을 갖춘 잉글랜드처럼 해상활동을 통한 해상패권을 추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때문에 잉글랜드와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해상이 아닌 육지에서의 패권을 추구한 거죠. 본래도 농사가 잘 되는 기름진 농토를 가진 농업 국가이니 프랑스에게는 이쪽이 더 쉬운 길이었을 거 같습니다. 패권을 추구하는 방법은? 또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팽창 시도

 

사실 1648년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프랑스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는 국경 지대에서 계속 크고 작은 충돌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마침 에스파냐에서는 포르투갈이 독립을 선포하며 전쟁을 개시했고, 카탈루냐에서도 반란이 벌어져서 내부적으로도 좀 정신이 없었는데요. 비슷한 시기 프랑스 역시 프롱드의 난으로 내정이 순탄치 않았던 상황이라 양국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결혼하는 혼인동맹을 맺으며 충돌을 멈추기로 합의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사 공주는 엄청난 금액의 지참금을 들고 프랑스로 와서 루이 14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돈을 다 들고 온 건 아니구요. 빚으로 쌓여 있었는데요. 혹시라도 펠리페 4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가 일찍 요절하면 에스파냐의 왕위는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아 테레사 공주에게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에스파냐로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지참금을 내고 대신 마리아 테레사가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포기하도록 한 것이었죠. 그런데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에스파냐는 이 지참금을 내지 못했습니다. 루이가 14세가 이 상황을 그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겠죠? 

  

1665년 펠리페 4세가 여전히 지참금을 내지 못한 채로 사망했습니다. 루이 14세는 당연히 지참금을 받지 못했으니 자신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사에게 상속권이 있는 무언가를 요구했는데요. 그가 요구한 것은 네덜란드 남부 지방에 대한 권리였습니다. 그 지역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네덜란드가 미처 공화국에 편입시키지 못해서 여전히 에스나퍄령으로 남아있는 곳이었죠. 2년 뒤 루이 14세는 정말로 네덜란드 남부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남부 국경에 프랑스 군대가 들어오자 불안해진 신생공화국 네덜란드는 스웨덴과 함께 프랑스에 대항해 에스파냐를 지원했지만 에스파냐는 끝내 네덜란드 남부 중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일단 1685년, 자신의 절대왕권을 더욱 강화하고자 종교적 통일을 위해,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하고 카톨릭으로 회귀했습니다. 잠깐이나마 누렸던 종교의 자유가 사라져버렸으니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다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이주했는데요. 독립 선포 후 네덜란드 공화국을 통치하던 빌렘 3세가 잉글랜드에서 윌리엄 3세로 즉위하자, 루이 14세는 권좌를 잃고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를 다시 복위시키겠다는 명분으로 네덜란드를 침략했습니다. 

   

물론 그가 프랑스를 다기 카톨릭 국가로 회귀시키고 제임스 2세의 복위를 명분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한 것은 모두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과거 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주변국가들이 모두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처럼 이번에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시작했죠. 이 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가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우려한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방국가들과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도 프랑스에 대항하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 전쟁을 9년 전쟁 또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이라고 하는데요. 전쟁은 사실상 프랑스 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연합이 대결하는 구도로 치러졌습니다. 육지에서는 대체로 프랑스가 우세했지만 해전에서는 역시 잉글랜드 해군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프랑스는 1697년 레이스웨이크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로부터 빼앗았던 네덜란드의 남부를 다시 돌려주는 대신에 알자스-로렌 남부의 스트라스부르를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사실, 프랑스가 이렇게 여러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크게 패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강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에 대항해서 싸운 나라들 역시 한편으로는 다른 전쟁을 수행하느라 프랑스와의 싸움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17세기에 들어서 다소 쇠퇴를 보이고 있던 오스만튀르크가 바로 그들의 또 다른 상대였는데요. 오스만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헝가리 북부 지역이 합스부르크 왕조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재빨리 그들을 지원하며 유럽으로의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기회를 잡은 오스만튀르크는 마치 전성기인 슐레이만 1세 시절처럼 빈을 포위하며 서유럽 세계를 위협했지만 이제 이들의 국력도 그 때와는 좀 달랐습니다. 두 합스부르크 왕조와 더불어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까지 합세한 유럽 연합군에게 밀린 오스만튀르크는 이들과 경쟁관계에 놓여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빈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습니다. 대튀르크 전쟁이라고 불리우는 이 전쟁은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마무리되었고, 오스만튀르크는 옛 헝가리 왕국의 영토 상당부분과 현재의 우크라이나 중부 일대, 그리스 남부 일대를 잃으면서 프랑스 좋은 일만 시켜주었죠.  

  

위그노 전쟁 때에는 그렇게 위그노를 탄압하다가도 30년 전쟁 때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신교 세력을 지원하더니 이번에는 퐁텐블로 칙령으로 국교를 카톨릭으로 회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튀르크와 동맹을 맺고 같은 카톨릭 국가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전쟁을 벌이고... 당시 프랑스 왕들에게 종교란 그저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명분으로만 쓰이는, 일종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사실 9년 전쟁도, 대튀르크 전쟁도 누구 하나 확실한 승자라고 할만한 쪽이 없이 끝나긴 했지만 이 전쟁을 통해 이제 프랑스는 적어도 유럽 대륙 내에서만큼은 누구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쇠퇴 

 

프랑스가 이렇게 힘을 키우는 동안, 카를 5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펠리페 2세 이후 에스파냐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펠리페 3세 때에는 네덜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구요. 또 그 아들인 펠리페 4세 때에는 포르투갈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완전히 독립해버렸죠. 그 아들인 카를로스 2세 때에는 후사가 없어 그나마 유지하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혈통이 아예 끊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카를 5세의 영토가 워낙 드넓었으니 왕조가 두 나라로 쪼개진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헝가리 일부와 포르투갈, 네덜란드까지 잃어버린 합스부르크 왕조는 이제 예전의 영광이 다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남아있는 에스파냐 밖의 영토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정도였는데요. 카를로스 2세에게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를 보전해줄 후계자를 물색하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였습니다. 루이 14세가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의 외손자이니 그의 손자를 통해 합스부르크 왕조의 혈통을 잇게 하겠다는 거였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와 한차례 전쟁을 벌인 상황에서 에스파냐 내의 반 프랑스파 귀족들은 카를로스 2세의 선택에 화들짝 놀라 반대했지만 카를로스 2세는 이들의 반대를 거스르고 앙주 공 필리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상속자로 정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자 앙주 공 필리프가 펠리페 5세로 에스파냐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에스파냐에 부르봉 왕조의 지점이 생겼네요. 스페인식 발음으로 보르본 왕조라고도 하는데요. 중간에 다른 왕조로 바뀐 적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까지 스페인 왕가로 존속하고 있죠.  에스파냐가 부르봉 왕조로 넘어갈 상황이 되자 유럽 각국이 바빠졌습니다. 이미 유럽 대륙에서 패권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프랑스가 에스파냐 마저 차지한다니, 이 일은 이제 그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죠. 잉글랜드, 네덜란드가 즉시 반발했구요. 그리고 같은 합스부르크 왕조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 역시 자신의 정당한 상속권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세 나라는 다시 한번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와 결전을 벌였습니다. 단 이번에는 에스파냐가 프랑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게 차이점이네요. 이렇게 해서 1701년, 또 새로운 전쟁인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과 비슷하게 흘러갔습니다. 육지에서는 우위를 점하던 프랑스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해군에게 패하며 전세가 뒤집어지기 시작했구요.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방면에서, 잉글랜드는 네덜란드 방면에서 동시에 프랑스를 강하게 압박했죠. 결과 역시도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전쟁 이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에스파냐에서는 펠리페 5세가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에스파냐에 프랑스식 제도를 도입하고 중앙집권화를 꾀하며 나라의 쇠퇴를 되돌리기 위해 애썼죠. 하지만 정작 네덜란드 공화국에 편입되지 않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남아있던 일부 네덜란드 영토는 오스트리아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연속된 전쟁으로 돈을 어마어마하게 쓴 상황에서 많은 세입을 거두던 지역을 잃었으니 에스파냐로서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전쟁이었습니다. 반면에,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명분으로 에스파냐의 왕위를 요구했던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 남부지방 말고도 이탈리아 북부, 나폴리, 사르데냐를 얻었습니다.  

  

잉글랜드도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유럽 쪽에서는 지중해 지브롤터 해협의 메노르카 섬을 얻으면서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바닷길을 확보했구요. 식민지 확장에 몰두했던 북아메리카 쪽에서는 에스파냐로부터 노예 공급권을 얻어냈습니다. 사실, 애당초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보다 식민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요. 프랑스도 북아메리카에 식민지 개척 활동을 활발히 별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이러한 잉글랜드의 계획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그래서 양국은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북아메리카에서도 전쟁을 벌였습니다.

  

사실 이 두 나라는 이미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동안에도 충돌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동해안에서 서진하던 잉글랜드와 캐나다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프랑스가 맞부딛힌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으로 또 한번 양국이 충돌한 결과,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허드슨 만 인근과 뉴펀들랜드를 비롯한 일부 영토를 넘겨받으면서 북아메리카에서의 식민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계기를 마련한 거죠.

  

한편, 이번 전쟁으로 중요한 순간을 맞이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하며 공국에서 왕국으로 체급을 올린 프로이센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에서 출발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줄타기하며 세력을 넓혀온 사보이아 공국이 그 둘이었죠. 전쟁 전반부에는 프랑스의 편에 있다가 오스트리아 쪽으로 넘어온 프로이센 공국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로부터 왕국으로 승인받았구요. 사보이아 공국 역시 전쟁 후반기에 프랑스와 맞서 싸우며 시칠리아를 얻었죠. 이 때를 기점으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한 이 두 나라는 훗날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 됩니다.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유럽 세계의 변화  (1) 2026.01.11
부상하는 프로이센, 제국이 된 러시아  (0) 2025.12.28
제국의 시작  (2) 2025.11.14
그동안 잉글랜드에서는...  (1) 2025.10.26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1) 2025.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