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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북유럽 세계의 변화

칼마르 동맹 시대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30년 전쟁 이후로 유럽 대륙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일에 심심치 않게 덴마크와 스웨덴이 참견하는 일이 늘어나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어떻게 갑자기 서유럽 정계의 중앙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도 한번 살펴볼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가 만든 칼마르 동맹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네요. 14세기 말, 독일 북부의 한자 동맹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스칸디나비아 3국이 모여서 만들어진 칼마르 동맹은 마르그레테 1세의 사망 이후에도 한자 동맹과의 대결을 계속했습니다.

 

일단 마르그레테 1세에 의해서 동맹의 왕이 된 에리크 7세는 이 전쟁에서 한자 동맹의 강력한 해상력을 제압하며 칼마르 동맹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서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외레순 해협을 장악해 이 지역에서 통행세를 거두어 들였죠. 이곳이 워낙 중요한 해상요충지이다보니, 이 통행세는 무려 19세기까지 덴마크에게 지속적으로 막대한 세입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두 동맹 간의 전쟁 때문에 이 지역의 해상무역이 상당히 위축되었는데요. 이는 양측 모두에게 좋을 게 없는 일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전쟁을 치르느라 세금을 더 내야하는 상황에서 생필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의 물가가 치솟자 민중봉기가 빈발하고 내정이 불안해진 거죠. 

   

한편, 세 나라의 귀족들은 점차 에리크 7세의 왕권이 강력해지는 상황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과중한 세금과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빌미로 에리크 7세를 폐위하고, 그의 조카인 크리스토페르 3세를 새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그동안 에리크 7세가 한자 동맹과의 전쟁에 너무 몰두하느라, 나라, 아니 동맹 전체가 혼란에 빠져든 것을 목격한 그는 한자 동맹과의 관계를 너무 대결 국면을 몰아가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타협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그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는데요. 그러면서 한자 동맹에 부과된 각종 규제들도 폐지했지만... 이렇게 되니 이번에는 동맹 내의 상인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었죠. 참 쉽지 않네요.

 

상대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에리크 7세와는 달리 크리스토페르 3세가 동맹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 후사 없이 사망하자, 세 나라는 왕위를 두고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는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슐레스비히 공작의 조카, 크리스티안 1세가 즉위하면서 올덴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구요. 스웨덴에서는 지금의 러시아 서쪽 국경에 가까운 비보르크 총독이었던 칼 8세가 즉위하면서 동맹은 분열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서로 자신이 동맹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된거죠. 한편, 덴마크의 영향력 하에 있던 노르웨이의 귀족들은 이 둘을 두고 양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이 갈등은 끝내 전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451년부터 벌어진 이 전쟁에서 패한 칼 8세는 신성로마제국으로 피신했고, 결국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의 왕위까지 차지하면서  동맹은 다시 재건되었죠. 하지만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의 왕권도 그리 강력하지는 않은 상황에서 스웨덴까지 그의 통치력이 미치기는 힘들었습니다. 스웨덴의 귀족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사후에 아들 한스가 즉위하지 그를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스웨덴 왕위를 그냥 공석으로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한편, 한스는 당시 몽골로부터 독립하며 세력을 확장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연합하며 스웨덴을 고립시키려 했죠.

  

한스의 덴마크-노르웨이는 모스크바 대공국과 함께 한자 동맹을 견제하는 한편, 스웨덴과의 대결도 계속했지만 스웨덴의 왕위를 차지하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스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2세가 즉위한 이후 전쟁을 통해 해결되었죠. 상업 장려 정책으로 부르주아 세력의 지지를 얻으면서 귀족 세력을 제압한 그는 이제 스웨덴 귀족들 사이의 세력 다툼에 개입해 군사를 이끌고 1520년 스톡홀름으로 진격했습니다. 분열되어 있던 스웨덴 귀족들은 덴마크 군에게 손쉽게 제압되었고, 결국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의 왕위도 차지하면서 칼마르 동맹의 분열을 수습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동맹이 재건되었고 크리스티안 2세가 세 나라의 왕위를 모두 차지했으니, 곧 대대적인 숙청과 개혁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스웨덴의 귀족들을 모두 모이게 한 연회 자리에서 순식간에 그들을 학살하는 일을 벌였는데요. 이 일로 그를 향한 스웨덴 귀족들의 반감이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는 법률을 정비하고 농민과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안들을 마련했지만 실상은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이었습니다. 결국 덴마크 귀족들은 그를 몰아내고 삼촌인 프레데리크 1세를 옹립했습니다. 뭐, 쫒겨나긴 했지만 자신의 뒤를 이은 프레데리크 1세와 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3세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고 하네요. 

 

한편,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의 왕위를 차지하기 전까지, 왕위를 비워두고 섭정이 나라를 통치하던 상황이었던 스웨덴에서는 별안간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이제 그만 덴마크와 결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런 귀족 세력을 규합해 본격적으로 덴마크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구스타브 바사, 훗날 구스타브 1세로 스웨덴 바사 왕조의 시조가 되는 이였죠. 오합지졸의 농민군으로 구성된 반란군을 이끌며 힘겹게 덴마크에 맞서던 그는 크리스티안 2세가 덴마크 왕위에서도 쫒겨나자 귀족들의 추대로 스웨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되면서 1523년, 칼마르 동맹도 해제되었습니다. 

  

칼마르 동맹이 해체된 것도 큰 사건이지만 이 즈음에는 유럽 대륙을 온통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종교개혁의 물결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도 밀어닥쳤습니다. 평소 주교가 교회법대로 재판을 주관하거나 마치 세금 걷듯이 헌금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귀족과 평민을 불문하고 불만이 많았던지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순식간에 루터교가 전파되었는데요. 덕분에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게 된 덴마크-노르웨이의 프레데리크 1세나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역시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며 이 지역에는 루터교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스웨덴의 근대화

   

이렇게 해서 스웨덴은 덴마크 중심으로 흘러가던 칼마르 동맹에서 힘겹게 탈퇴해 독립된 왕조를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구스타브 1세는 치세 내내 귀족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에 주력해야 했습니다. 애초부터 귀족 세력의 도움을 받아 칼마르 동맹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낸 것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겠지만요. 근데 더 큰 문제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 서로 형제관계가 매우 안좋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이를 걱정해야 했고, 실제로도 그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서 형제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왕위다툼이 일어나 나라는 또 다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구스타브 1세 사후, 왕위는 장자인 에리크 14세에게로 돌아갔지만 이복 동생인 곧 요한 3세에게 빼앗기고, 요한 3세의 아들인 시기스문드에게로 전해졌다가 다시 에리크 14세의 또 다른 이복 동생 칼 9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50 년 동안 세 명의 형제들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가 마냥 암흑시대인건 아니었구요. 스웨덴이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북방에서 조금씩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웃인 덴마크와는 물론이고 남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그리고 동쪽으로는 핀란드를 두고 루스 차르국과 경쟁했죠. 그리고 칼 9세의 아들인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2세 때에는 30년 전쟁에 개입하며 마침내 유럽 중앙 무대에 데뷔합니다. 

  

파격적인 군사개혁으로 강력한 군대를 마련한 구스타브 2세는 30년 전쟁에서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서유럽의 강대국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요. 단지 군사적인 성과 뿐만 아니라, 내정에 있어서도 다양한 개혁을 통해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대학을 설립하고 전국에 법원을 설치해 사법개혁을 주도했고 행정구역을 개편해 왕권을 강화했죠. 다만 별명처럼 전투에 나서면 늘 앞장서서 용맹하게 싸웠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과 벌어진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근데 전투에선 이겼어요. 

 

구스타브 2세는 여러 모로 스웨덴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군주이긴 했지만... 그의 개혁이 강한 군대를 육성하기 위한 데에 좀 치중되어 있었고, 또 그렇게 육성한 군대를 30년 전쟁에 모두 쏟아부으면서 그가 시행한 다른 개혁들을 무색하게 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전사하는 바람에 그의 사후에는 불과 7살에 불과한 그의 딸 크리스티나가, 30년 전쟁이 아직 한창이던 와중에 즉위해야 했죠. 다행히 크리스티나 여왕은 왕실의 다른 친척들과 중신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30년 전쟁을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지만요.  

 

그런데 크리스티나 여왕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후사도 남기지 않아 왕위는 가장 친했던 외사촌인 칼 10세가 잇게 됩니다. 왕조가 바뀐 거죠. 결혼 자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데에다가 서른도 안된 나이에 일찌감치 퇴위하고 그 후에는 카톨릭으로 개종까지 한 걸 보면 왕위에는 별로 욕심이 없는, 자유분방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던 인물인 거 같습니다. 덕분에 후세에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어서 크리스티나 여왕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렇게 해서 스웨덴에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인데요. 이름만 들으면 독일계 왕조인 거 같네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배출한 적이 있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방계라고도 하는데, 유럽의 왕실 대부분 다 그렇게 서로 친인척 관계이니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죠. 칼 10세는 이전의 스웨덴의 군주들이 해왔듯 덴마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의 대결을 계속했습니다. 스웨덴의 이런 팽창주의는 국내 정세에 따라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칼마르 동맹을 해체시킨 이후로부터 주욱 계속되었던 움직임이었습니다. 

   

  

북방전쟁

  

특히 스웨덴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2차 북방전쟁은 나름 동유럽에서는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크게 위축시키며,  이 일대의 국제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요. 스웨덴의 역사에서는 나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니 조금 생소한 이야기지만 한번 들여다볼까 합니다. 좀 멀리 돌아가는 느낌이긴 하지만... 이야기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의 드넓은 평야지대에는 카자크라고 불리우는 무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인들이지만 루스 차르국에 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속하지도 않은 이들은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또 약탈도 하는 반독립적인 세력이었는데요. 17세기 중반인 이 즈음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점차 세력을 불리는 중이었죠. 이렇게 이들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다보니 여기에 불안감을 느낀 폴란드 접경지역의 귀족들은  카자크 세력을 정리해 자신들의 농노제 안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동안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존재해왔던 카자크들은 이들의 이러한 시도에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용병이었던 이들이 봉기를 일으키며 폴란드 동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폴란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구요. 폴란드에서 멀쩡하게 용병 활동을 잘하고 있던 카자크들까지도 합세하면서 카자크 군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이제 상황은 봉기가 아닌, 폴란드 대 카자크의 전쟁이 되어가고 있었죠. 1648년, 서쪽에서는 30년 전쟁이 마무리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던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가 그대로 무기력하게 패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카자크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초반에는 정신없이 당하긴 했지만 시간이 좀 흐르면서 폴란드 군도 전열이 정비되자 카자크 군에 점점 우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1651년부터 벌어진 전투에서 연이어 큰 패배를 당한 카자크 세력이 휴전을 요청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이를 받아들이며 종전을 위한 조약을 준비하게 되죠. 이쯤에서 상황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카자크는 조약에 서명하는 대신 루스 차르국에 구원 요청을 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마침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가짜 드미트리 사건으로 한창 나라 안이 시끄러울 때 벌어진 전쟁으로 차르인 바실리 4세는 폴란드 군에 사로잡혔고,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었던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가 루스 차르국의 차르로 즉위하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당시에는 그를 몰아내고 로마노프 왕조가 수립된 때였지만 바로 그 직전까지도 브와디스와프 4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었기 때문에 루스 차르국은 카자크 세력의 부탁을 받아들일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루스 차르국의 알렉세이 1세는 카자크 세력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카자크와 루스 차르국의 연합군을 상대해야할 위기에 놓인 거죠. 루스 군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서쪽과 핀란드, 벨라루스 등 폴란드 동쪽 전역을 공격했고 그 때문에 폴란드가 반쪽날 상황에 놓이자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구성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도 폴란드를 돕기 위해 군사를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빌뉴스와 카우나스 등 리투아니아의 주요 거점이 루스 군에게 함락당하며 위기에 처했죠. 근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스웨덴 얘기가 나옵니다. 이 난리가 시작된 게 30년 전쟁이 끝나던 즈음이었으니 스웨덴이 한창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바로 그 시기였네요.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투에서는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군대도 얻게된 스웨덴에게 마침 카자크와 루스 차르국에게 정신없이 공격당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스웨덴은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는데요. 사실 명분이 없진 않았습니다. 얼마 전 루스 차르국에 굴욕을 안겨주었던 지그문트 3세와 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 그리고 그의 동생인 얀 2세는 모두 바사 왕조 출신이었는데요. 이 바사 왕조는 본래 스웨덴의 귀족 가문이었다가 지그문트 3세의 조부인 구스타브 1세 때부터는 왕실이 된, 그런 가문이었죠. 즉,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의 왕 시기스문드. 이 당시 두 나라, 아니 리투아니아까지 세 나라는 바사 왕조가 다스리는 동군연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동군연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지그문트 3세, 즉 시기스문드가 루터교 국가인 스웨덴에 무리하게 카톨릭 도입 정책을 펴며 스웨덴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를 틈타 그의 삼촌인 칼 9세가 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스웨덴 쪽 바사 왕조에서는 크리스티나 여왕의 끝으로 후계자를 내놓지 못하자 외사촌인 칼 10세에게로 왕위가 넘어가면서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죠. 그런데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이때까지도 스웨덴 왕위를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스웨덴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이 문제를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칼 10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카자크와 루스 차르국의 공격으로 폴란드 전국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형인 브와디스와프 4세가 사망한 뒤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얀 2세가 귀족들과 마찰을 빚으며 국정 장악에 실패하자, 스웨덴은 마침내 폴란드로의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얀 2세는 스웨덴 군이 수도 바르샤바를 둘러싸자 성을 빠져나와 도망쳤죠. 이대로 스웨덴 군이 얀 2세를 추격했다면 폴란드는 스웨덴으로 완전히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한방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그 동안 폴란드의 봉신을 자처하던 프로이센 공국이 폴란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폴란드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세 나라와 힘겨운 전쟁을 끌어가고 있는 가운데, 여기에 또 다른 전선을 추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으니까요. 이 때 폴란드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프로이센은 훗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뛰어들며 급격히 성장하게 되죠. 

 

하지만 다행히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안 폴란드에게도 기적같은 반전의 기회가 왔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스웨덴이 자기 집을 비운 동안 덴마크-노르웨이가 스웨덴 본토로 침략한 것입니다. 또 거기에 스웨덴의 세력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경계한 루스 차르국도 재빨리 태세를 전환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평화 협정을 맺고 스웨덴을 공격했죠. 아마 루스 차르국의 입장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완전한 멸망보다는 자신들의 서쪽 국경에 너무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지 않기를 원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어쨌든 칼 10세는 바르샤바를 떠나 본국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복귀했고 폴란드는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폴란드는 반격을 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얀 2세는 얼마나 인기가 없었던건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일부 귀족들은 그가 수도를 비우고 도망가자, 아예 칼 10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에 앉히려고 했었는데요. 폴란드의 전 국토가 외국 군대에 의해 마구잡이로 유린당하다 보니 1655년부터는 이런 분위기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폴란드를 외세의 손에서 지켜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지긋지긋한 공성전들이 이어졌습니다. 장기간 공성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스웨덴 본토가 침략받는 상황이 벌어지니 스웨덴도 이제 더 이상은 공격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졌죠.  

  

카자크 세력 내부에서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제 폴란드와는 화해를 하고 이 지역에 들어와서 난동을 피우고 있는 스웨덴 군을 몰아내자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카자크 세력과의 대치 상황이 끝나니 폴란드도 이제 좀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폴란드는 곧 스웨덴이 침공의 빌미로 삼았던 스웨덴 왕위 주장도 철회하고 마침 스웨덴도 이제 국내 문제로 전쟁을 더 길게 끌 여유가 없어지자 스웨덴 쪽 전선도 정리되었죠. 이제서야 비로소 대 루스 차르국 전선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쟁은 그 뒤로도 4년을 더 끌었습니다. 폴란드가 루스 차르국으로 전선을 좁힐 수 있게 된 게 1660년이었고, 양국이 지루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평화협상을 시작한 게 1664년, 협상이 완전히 끝난 것은 1697년이니, 카자크 세력이 폴란드에서 처음 봉기를 일으킨지 50년이 지나서야 이 사태가 마무리되었죠.  이 전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동쪽 국경지대의 상당한 영토를 루스 차르국에게 넘겨주어야 했는데요. 이 중 일부는 처음에 카자크의 봉기가 일어났던 그 지역입니다. 한편, 이 때의 혼란을 틈타 프로이센이 독립한 것도 폴란드에게는 원통한 일일거에요. 훗날 그 프로이센이 어떻게 어떻게 되어서 폴란드에게 무슨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생각한다면요. 

   

 

덴마크의 근대화 

  

한편,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스웨덴이 바사 왕조를 새로 차리며 분리된 이후, 남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일단 노르웨이는 덴마크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 동군연합을 유지했습니다. 이 두 나라가 분리되는 것은 19세기 초에 들어서의 일이지만, 노르웨이는 그 뒤로도 한동안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제대로 독립할 수 있었죠.    

 

1523년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면서 스웨덴은 독립했지만 덴마크-노르웨이에서는 여전히 올덴부르크 왕조가 왕실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스웨덴에서 횡포를 부리다가 쫒겨난 크리스티안 2세는 덴마크의 귀족들에게도 별로 환영받진 못했는데요. 그래서 덴마크의 귀족들그의 삼촌인 프레데리크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재미있는 점 한가지는, 이후로 덴마크에서는 계속해서 프레데리크와 크리스티안이 번갈아가면서 즉위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퇴위한 마르그레테 2세를 제외하면요. 이 즈음부터 현재까지 두 왕명을 번갈아가면서 쓰는 게 전통이 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프레데리크 1세와 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3세의 치세 동안, 덴마크는 완전하게 종교개혁을 달성합니다. 프레데리크 1세 때에는 신교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정도였다가, 독실한 루터교 신자인 크리스티안 3세 때에는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물론 반발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주민들 대부분이 이미 카톨릭 교회의 오랜 전횡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불만은 금새 잦아들었고 루터교는 빠르게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분명 신성로마제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황제와 신교를 받아들인 영방제후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이러한 긴장은 덴마크-노르웨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죠. 이 때 크리스티안 3세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외레순 해협이었습니다. 카를 5세의 중요한 세원이었던 네덜란드의 상선들에게는 이 외레순 해협을 통해 상선들이 안전하게 항행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슈였고, 때문에 이곳에 대한 권리를 가진 크리스티안 3세에게 무작정 압력을 넣기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내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이제 해외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프레데리크 2세와 크리스티안 4세 때에는 독립한 스웨덴을 다시 병합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는데요. 두 나라는 북해와 스웨덴 남부 지역에서  치열하게 다퉜지만 덴마크는 스웨덴을 다시 병합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또 독일 북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독일의 다른 신교 영방제후들의 편에 서서 30년 전쟁에서도 싸웠지만 큰 소득은 없었죠. 앞서서 달성한 국내에서의 성과를 다 까먹는 거 같네요. 

 

  

대북방전쟁

 

1682년, 루스 차르국에서는 표트르 1세가 로마노프 왕조의 네번째 차르로 즉위했습니다. 불과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한 그는 이복 누나와의 피 튀기는 권력쟁탈전 끝에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마침내 권력에 정점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죠. 그리고 일련의 내정 개혁 후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날의 러시아 역시도 그렇게 탐을 내는 땅이니,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긴 한가봐요. 한편, 같은 해에 스웨덴의 바사 왕조에서는 훗날 표트르 1세의 맞수가 될, 칼 12세가 태어났습니다. 

 

당시 크림 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평원 일대는 킵차크 칸국을 계승한 여러 칸국들 중 하나인 크림 칸국이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몽골이 쇠락한 이후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칸국들은 오스만 튀르크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표트르 1세가 이 지역으로의 진출을 원한다면 당연히 오스만 튀르크와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죠.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튀르크는 크림 반도 일대를 두고 한바탕 전투를 벌였지만, 해군 전력에서 크게 열세였던 루스 차르국은 크림 반도 진출에 실패했고 표트르 1세는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그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루스 차르국의 서쪽에는 스웨덴이 있습니다. 당시의 스웨덴은 30년 전쟁과 북방전쟁 이후 북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는데요. 표트르 1세처럼 어린 나이에 즉위한 칼 12세는 성인이 되면서 섭정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되찾고 강력한 군대 또한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권력을 장악하고 무력으로 패권을 노리는 것까지, 두 사람은 여러 모로 상당히 비슷한 느낌입니다. 

  

우선 1700년, 표트르 1세의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루스 차르국은 덴마크 군, 폴란드-리투아니아 군과 함께 양국의 접경 지대를 여러 방향으로 공격했지만, 불과 18살이었던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 군은 훨씬 불리한 병력으로도 각각의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반격을 가해 루스 차르국에 큰 피해를 안겨다 주었죠. 이렇게 초반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덴마크는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고 일찌감치 이 전쟁에서 빠져나와 버립니다. 표트르 1세로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네요. 

 

한편, 이왕에 반격을 개시한 스웨덴 군은 루스 군보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을 먼저 공격했습니다. 다행히 그 사이 표트르 1세는 가까스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지만, 스웨덴 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주요 도시들이 줄줄이 함락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죠. 아마도 연합군이 스웨덴군을 좀 얕본 게 아닌가 싶어요.  이 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아우구스트 2세가 쫒겨나고 친 스웨덴파 귀족들이 스타니스와프 1세를 옹립해 이제는 루스 차르국이 아닌, 스웨덴 편에 서게 됩니다. 

  

스웨덴은 이 기세를 몰아 이제는 루스 차르국으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표트르 1세는 그 동안 점령한 스웨덴 땅을 돌려주겠다며 협상을 시도했지만 칼 12세는 그가 내건 조건에 만족하지 않았죠. 하지만 스웨덴 군도 동진해서 루스 차르국의 중요한 요새인 스몰렌스크까지 도달한 뒤로는 거기에서 더 가지 못하고 루스 군에게 가로막혔습니다. 칼 12세는 이제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해지자 방향을 틀어 루스 차르국의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향했는데요. 여기에서부터 전쟁의 판세가 뒤바뀌게 됩니다. 스웨덴 군이 본국에서 너무 멀리 오기도 했고, 지리도 낯설고, 무엇보다 이제 겨울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가져온 군량을 소모하는 와중에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스웨덴 군에 이 지역의 카자크 세력이 접근했습니다. 루스 차르국으로부터 반독립 상태에 있던 이들의 염원은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요. 다시 한 번 그 기회가 온 것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스웨덴 군과 카자크 세력은 이제 함께 루스 군을 상대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전쟁의 초반 칼 12세에게 무참히 패한 표트르 1세가  그 동안 절치부심하며 루스 군을 정예화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루스 군은 전쟁 초반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더욱 강력한 군대가 되어 있었죠. 

   

양측은 현재의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해당하는 폴타바에서 일전을 치렀습니다. 루스 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였지만 스웨덴 군은 이제 먹을 것도 점점 없어지고 겨울이 다가오니 빨리 결판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스웨덴도 북유럽의 추운 나라이니 추위 걱정은 별로 안 할 거 같았는데, 아닌가봐요. 1709년, 스웨덴 군이 더 촉박해진 상황에서 치른 폴타바 전투에서 루스 군은 마침내 스웨덴 군을 무찌르고 크게 승리했습니다. 칼 12세는 전사하진 않았지만 오스만 튀르크로 도망쳤습니다.  

  

폴바타전투
폴타바 전투의 한 장면을 묘사한 루이 카라바크의 작품입니다. 루이 바라바크는 프랑스 출신이지만 러시아 궁정에서 초상화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는데요. 초상화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록화들도 많이 남겼다고 합니다.

  

한편, 얼마 전 루스 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었던 오스만 튀르크에게는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잘 훈련된 루스 군으로도 오스만 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던 건지, 루스 군은 오스만 튀르크에게 또 패하고 크림 반도 북쪽에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다만, 남쪽에서의 상황이 그러했을 뿐, 칼 12세가 없는 스웨덴 군을 상대로는 여전히 우위를 보이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심지어는 현재는 독일 북부의 스웨덴 영토까지 일부 점령했죠.

 

그 사이 칼 12세는 어렵사리 스웨덴으로 귀환을 하긴 했는데... 친 스웨덴 정권이 들어서 있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다시 반 스웨덴 정권이 복귀하고, 덴마크도 스웨덴에 선전포고를 하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칼 12세는 남은 병력을 끌어모아 끝까지 루스 군에 맞서보려고 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구요. 오히려 허무하게 전사하면서 스웨덴 군은 더 이상 전쟁을 이끌어나갈 동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아직 36세에 불과한 젊은 나이에 후계자도 없는 상황... 결국 1721년, 스웨덴은 전쟁을 포기하고 루스 차르국과 평화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 전쟁은 북유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이었던 스웨덴과 이제 막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던 루스 차르국, 두 나라의 위치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일단, 스웨덴은 발트해 동부 연안을 루스 차르국에 넘겨주게 되었구요. 반대로 루스 차르국에서는 발트 해에, 표트르 1세가 그렇게 원했던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토 문제를 떠나 좀 더 멀리서 보자면, 스웨덴은 이제 유럽의 역사 중심부에서 밀려나 북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나라로 물러났구요. 루스 차르국은 이제 황제국임을 선포하며 러시아 제국으로 탈바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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