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왕국은 어떤 나라일까?
이름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는데 좀 갑자기 튀어나온 느낌이 있네요. 프로이센 왕국은 어떻게 신성로마제국 내의 강력한 영방제후국들을 따돌리고 독일 통일의 발판을 마련할만큼 강력해질 수 있었을까요? 궁금합니다. 일단 프로이센 왕국도 처음부터 왕국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프로이센 공국이었다가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편에서 프랑스와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폴트 1세로부터 왕국으로의 자격을 인정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유럽 역사에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였죠.
그럼 또 프로이센 공국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근데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는데요. 프로이센 왕국은 단순히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진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국 중 하나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의 동군연합으로 탄생한 나라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제게는 이 나라가 친숙한 느낌입니다. 물론 그냥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 선제후국 중 하나라는 점 밖에는 모르지만요. 어쨌든 프로이센 왕국이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난건지를 알기 위해서 이 두 나라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알아볼 필요가 있겠네요.
먼저 프로이센 공국은 그 기원이 무려 십자군 원정 당시 원정에 참여했던 튜튼기사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튜튼기사단은 주로 독일계 수도자들이 모여서 결성된 단체였는데요. 속세와는 연을 끊고 수도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을 거 같은 수도자들이 기사가 되어 전쟁에 참전한다니, 뭔가 동양인의 시각으로는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십자군 원정 이후 헝가리와 폴란드, 덴마크 등과 교류하며 발트해 남동쪽, 폴란드 북부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1525년,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으로서 프로이센 공국을 창건했습니다.
기사단에서 공국이 되었으니 기사단장은 공작이 되고 그의 공작위도 세습됩니다. 한편, 알브레히트 공작의 가문인 호엔촐레른 가문은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통치하는 가문으로, 두 나라의 군주는 본래 같은 가문의 친척 관계였는데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있었던 즈음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공국과 같은 루터교로 개종한 후 두 나라는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다 1618년, 알브레히트 공작의 아들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프로이센 공국의 공작위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요한 지기스문트가 겸하게 되었죠.
사실 봉신국의 군주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 그 작위는 상급군주가 다시 가져가게 됩니다. 이 경우에는 폴란드 왕이 작위를 가져가서 자신의 방계 친척이나 다른 귀족가문에게 하사해야 했는데요. 당시 폴란드의 대내외적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프로이센 공국의 일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죠. 어쨌든 이제 동군연합을 하게 된 두 나라는 이후 30년 전쟁과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등 유럽 대륙에서 연이어서 일어난 굵직한 전쟁에 참전하며 점차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와의 봉건제적 관계도 단절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행정적, 제도적 통합을 거쳐 점차 한 나라가 되어갔습니다.
이 시기 유럽의 역사가 워낙 혼란스러워서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은 특히 프로이센 공국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 후 프로이센 공국은 1701년, 마침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는데요.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프로이센 공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같은 군주, 서로 다른 나라의 동군연합 체제가 아닌 완전한 한 나라가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크고 강력한 신생 왕국은 순식간에 유럽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왕국이 출범하기 전부터 독립국에 준하는 영향력을 가지긴 했지만 이제는 강력한 대규모 상비군과 절대왕정 체제를 갖춘, 본격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거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쉼 없이 전쟁을 일으키며 국력을 소모하는 사이, 그들 틈새에서 훌쩍 성장한 프로이센 왕국은 어느새 이 두 전통적 강자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새로운 경쟁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이 이렇게 강국의 반열에 올라서는 데에는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잘 알려진 프리드리히 2세의 공이 컸습니다. 1740년, 프로이센 왕국의 세번째 군주로 즉위한 그는 아직 국력이 그렇게 강성하지 않은 시절부터 당시 이미 식민지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다른 강대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었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개혁을 시행했는데요. 그 중에서도 군사력 증강을 위해 상비군을 확대시키고 군사훈련 방법을 효율화하며 신식 무기들을 도입한 군사개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죠.
이렇게 군사력을 증강한 프로이센 왕국은 이제 다른 유럽의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영토확장에 나섰습니다. 당시 이제 막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지역은 각종 석탄과 철, 납 같은 각종 광물이 풍부한 슐레지엔 지역이었는데요. 지금의 폴란드와 체코에 걸친 이 드넓은 지역을 손에 넣기 위해 결국 그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군주는 국가 제일의 공복"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있던 계몽군주였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영토를 확장하고 자원과 인력을 얻기 위해 몰두했던 것은 당대의 다른 절대군주들과 유사한 모습이네요.
마리아 테레지아
프로이센 왕국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한 1740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 6세가 승하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사실 카를 6세는 아들이 일찍 요절하자,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점찍어둔 상태였는데요. 문제는 살리카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데에다가 카를 6세의 형인 요제프 1세가 남긴 딸들도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명분이 좀 부족하다는 거였습니다. 비록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차지하고 있다고는 형식적으로는 선제후들의 선거를 통해 황제를 선출하는 만큼, 이제는 선제후들이 카를 6세의 뜻에 동의해주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죠.
이 문제를 생전에 확정짓고자 했던 카를 6세는 선제후들에게 후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그들과의 합의를 이끌어냈는데요. 정작 카를 6세가 승하하자 이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선제후들이 하나 둘씩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경쟁자인 프랑스가 이들을 돕겠다며 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정세가 불안한 와중에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차지하기 위해 한발 빠르게 군사를 움직였죠.
프리드리히 2세가 내세운 요구사항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후계자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슐레지엔 지방을 자신에게 할양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슐레지엔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 중에서도 매우 부유한 곳이었고 이 요구는 쉽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선순위의 상속권을 가진 그녀의 사촌들, 즉 요제프 1세의 딸들과 그의 남편들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기를 들었죠. 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이 바로 그런 선제후국들이었습니다.
이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앞길을 막는 일이라면 늘 적극적이었던 프랑스도 이들에게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또 조금 엉뚱하게 느껴지지만 이미 북유럽에서 강대국으로 올라선 스웨덴 역시 프로이센 왕국의 편을 들어주었죠. 그렇다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을 들어주는 나라는 없었을까요? 이미 유럽 대륙과 신대륙에서 프랑스와 패권 경쟁을 해왔던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유럽 대륙에서 힘 좀 쓴다는 나라들이 모두 이 싸움에 끼어들게 되었네요. 유럽 대륙에서 또 한번의 국제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단 프로이센 왕국은 슐레지엔을 얻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프리드리히 2세가 원했던 결과를 얻은 거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 왕국은 군사력에 있어서 이제 그 어떤 나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 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좀 더 복잡합니다. 결과적으로, 슐레지엔을 프로이센 왕국에 내어준 합스부르크 왕조는 카를 6세의 후계자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권을 인정받았습니다. 물론 바이에른 공국의 반대로, 그 과정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지만요.
프로이센 왕국이 목적을 달성한 걸 본 바이에른 공국은 자신들도 보상이 필요하다며 합스부르크 왕국에 보헤미아 왕국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1742년 황제 선거를 열고 바이에른 공국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카를 7세로 즉위했죠. 마리아 테레지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지지를 바탕으로 바이에른 공국에 맞서기로 했고 수도인 뮌헨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바이에른 공국을 지원하던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이 쫒아냈구요.
이 와중에 1745년 카를 7세가 죽자 또 한번 황제 선거가 열렸습니다. 이미 상황이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유리해진 상황에서 치러진 황제 선거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승리를 확정짓는 마지막 절차였죠. 그는 자신의 남편인 로렌 공작 프란츠 슈테판을 후보로 내세워 당선시켰는데요. 이 사람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의 첫번째 황제인 프란츠 1세입니다. 아무리 합스부르크 왕조라 하더라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만큼은 도저히 여성이 승계하도록 할 수 없었나봅니다. 이렇게 헤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제외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제위를 상속받지는 못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곧 황제인 남편을 통해 자신이 뜻한 바대로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등장한 18세기 중반은 이미 합스부르크 왕조의 옛 영광이 많이 쇠락해있던 때였습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유럽의 강자로 자리잡고 있었고, 프로이센 왕국이라는 새로운 강자도 등장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으로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명을 무려 20세기 초까지 연장시키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웁니다.

또 하나의 제국
유럽 각국이 이제 우리가 아는 모습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이 즈음부터 유럽의 역사에 또 하나의 강력한 세력이 등장합니다. 흔히 소련과 대비되어 자주 이야기되는 '제정 러시아', 러시아 제국인데요. 루스인들이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제국을 형성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좀 빠진 거 같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 짧게 훑어보고 가볼까 합니다.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루스인들을 해방시킨 것은 15세기 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킵차크 칸국의 지배 하에 놓인 여러 개의 공국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모스크바 대공국도 그런 공국들 중 하나였죠. 그는 멸망 직전에 놓인 동로마 제국과 혼인동맹을 맺으며 동로마 제국의 뒤를 이을 정통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군사적으로는 다른 공국들을 제압하며 결국에는 타타르의 멍에를 벗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한편, 그는 내적으로도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 걸었던 중앙집권화의 단계를 밟기 위해 각 지역의 대귀족들인 보야르 세력을 정리하고, 행정구역을 재정비하고, 법전도 새롭게 편찬하는 등 개혁에 착수했는데요. 이러한 움직임은 그의 사후에도 대를 이어 계속되면서 16세기 중반, 그의 손자인 이반 4세 때에는 '스트렐치'라는 상비군이 마련되고 지방 행정구역에 관리가 파견되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얻으며 나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킵니다. 그러면서 나라 이름도 대공이 통치하는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이제는 차르가 통치하는 루스 차르국이 되었죠.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던 루스인들의 나라가 마침내 하나의 통일된 나라로 탈바꿈한 것도 이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반 4세는 '뇌제'라는 별명이 붙은 무시무시한 전제군주이기도 했습니다.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수많은 귀족 세력을 숙청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후계자인 황태자마저 제거했는데요. 그의 사후에는 3남인 표도르 1세가 즉위하면서부터 황실의 후계구도가 불안정해졌습니다. 표도르 1세가 병약한데에다가 후사를 얻는 것에도 실패하자 1598년, 제위가 엉뚱하게도 그의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시까지 700년을 이어오던 루스인들의 유일한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허무하게 끝나게 되었죠.
왕조가 바뀌긴 했지만 중앙집권화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미 이반 4세 때 남아있던 몽골 계열의 칸국들을 모두 통합한 루스 차르국은 이제 광활한 시베리아 지역을 개척하고 선진적인 서방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서유럽 강대국들과 비슷한 외양을 갖추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알맹이는 좀 많이 다르지만요. 하지만 오랫동안 류리크 왕조가 워낙 오랫동안 루스인들을 통치해왔기 때문인지,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즉위한 이후 보야르들은 시종일관 그의 통치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심지어는 아직 남아있는 류리크 왕조의 후손이 차르가 되어야 한다며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요.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라고 하니, 진짜 드미트리도 있었을까요? 아마 당시에는 그런 소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반 4세는 여러 번의 결혼에서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제위를 이은 표도르 1세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일찍 요절했는데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중 막내 아들인 드미트리가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류리크 왕조의 유일한 후손인 그가 차르가 되어야 하는 거였죠. 가짜 드미트리는 여기저기에서 4명이나 등장해서 이 시기동안 나라 안이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그만큼 이 당시의 제위가 그리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겠죠? 이후 제위는 1605년,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인 표도르 2세에게로 이어졌지만 그는 가짜 드미트리 사건을 수습하지 못한 채 암살당하고, 그 다음으로는 보야르들의 추대로 류리크 왕조의 방계 혈통의 바실리 4세가 즉위했지만, 그 역시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폴란드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서 차르가 된 이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였죠.
물론 블라디슬라프가 차르로 즉위한 것 역시 보야르들의 동의를 얻은 뒤에 진행된 일이긴 했지만, 단지 류리크 왕조가 단절된 것만으로도 내정이 심각하게 불안해졌던 경험이 있다보니 보야르들 사이에서는 점차 외국인을 차르로 섬길 수는 없다는 여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블라디슬라프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보야르들 사이에서는 다른 보야르들 중 하나를 차르로 추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이들의 협의로 1613년,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1세가 루스 차르국의 새로운 차르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이 로마노프 가문이 바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전까지 러시아 제국의 황실로 존속했던 그 가문입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미하일 1세는 보야르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한 차르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눈치를 좀 길게 봐서인지 이러한 상황은 3대를 이어져서 이후에 즉위한 아들과 손자 때에도 차르는 자신의 왕권을 크게 강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상황이 좀 달라진 것은 미하일 1세의 손자인 표도르 3세가 불과 스무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두 명의 동생이 공동 차르로 즉위한 때였습니다. 한 명은 25세의 나이로 요절한 이반 5세였고, 다른 한 명은 마침내 러시아를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대제의 칭호를 얻은 표트르 1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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