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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카톨릭의 자정 노력

 

1555년, 합스부르크 왕조와 신성로마제국 내의 루터교 영방군주들 사이에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이제 루터교는 이단 종파가 아닌, 크리스트교의 공인된 한 종파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빠르게 성장한 신교 세력과의 무력충돌을 막아보려는 카톨릭 교회의 임시방편일 뿐 양측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죠. 무엇보다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공인된 신교는 루터교 하나 뿐이었구요. 여러 종교개혁가들이 주창한 다른 신교는 여전히 카톨릭 교회에서 이단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우쿠스부르크 화의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를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카톨릭 교회에서도 조금씩 자성의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카톨릭은 왜 더 이상 민중의 지지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왜 신교가 카톨릭의 위치를 대체해가는 상황이 벌어졌나 하는 문제에 대해 조금씩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견이 카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제일 근본적인 문제로 지목된 원인은 카톨릭 교회의 부패였습니다. 그러니 교회로서는 이제 이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죠. 교황청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당시 공공연하게 벌어지던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의 성직 매매를 금지시키고 성직자 개개인들의 도덕성과 전문성을 향상시키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교회를 개혁할 거라면 이왕에 하는 거 이미 벌어지고 있던 종교개혁을 수용해서 모든 신교 종파들을 다 공인하면 안되는 거였을까요? 그러기에는 신교의 교리에 카톨릭 교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신교에서는 이제 성서 본연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야함을 주장했지만 그러자면 그동안 카톨릭 교회가 고수해온 전례 방식과 교회 조직, 그리고 사제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거였죠.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카톨릭 교회의 기본 교리를 점검하고, 현재의 교회 체제 또한 앞으로 계속 보전해나갈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역시나 근본적인 변화는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카톨릭 교회로서는 그동안 교회가 지나치게 세속화될 때마다 해왔던 조치들을 또 한번 해봐야겠죠? 카톨릭 교회는 다시 한 번 개혁을 다짐하며 수도회 운동을 새롭게 재개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쿠스 수도회가 활동을 다시 재개했고 중세 후기 카톨릭의 새로운 보호자를 자처한 에스파냐에서는 사제이자 신학자인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가 예수회를 창설해 유럽 뿐 아니라 신대륙 곳곳에서 카톨릭 부흥에 앞장섰습니다. 덕분일까요? 이들은 북독일의 영방군주들이 대거 신교로 개종하면서 혼란에 빠진 동유럽 지역에서 남독일과 폴란드를 카톨릭으로 복귀시키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칼뱅주의의 전파 

  

카톨릭 교회가 그렇게 자정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신교 세력, 특히 칼뱅파의 세력은 점점 불어났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공인된 루터교와는 다르게 아직 공인을 받지 못한 칼뱅파는 본진인 프랑스 남부는 물론이고 16세기에 들어서는 독일에서도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죠. 심지어 공인된 루터교를 신봉하던 지역에서도 루터교의 지나친 정치화에 회의를 느낀 신교 영방군주들이 칼뱅주의를 채택하면서 교세가 크게 불어났습니다. 또 상황이 이렇게 되니 루터교 세력의 입장에서도 칼뱅파는 같은 신교 동료인 동시에 경계 대상이 되었구요.  

   

같은 신교 세력이고, 카톨릭 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입장이라면 루터교와 칼뱅파가 쉽게 힘을 합치지 않은게 선뜻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분명 입장이 달랐죠. 일단 아우크르부르크 화의를 통해 카톨릭 교회로부터 공인을 받은 루터교는 이제 분명한 크리스트교의 정식 종파였지만 칼뱅파는 아직 그렇지 않았죠. 분명 수많은 이들이 칼뱅주의를 신봉하고, 그들 중에는 상당한 세력을 거느린 영주들, 부유한 상인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단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한편, 루터교 측에서는 한때 자신들을 지지하던 일부 세력이 자꾸 칼뱅파로 넘어가는 것도 불안한데 이제 이들이 교회로부터의 공인을 추진하고 있으니 더욱 이들을 경계할만 했습니다. 

 

두 교파의 성격도 약간 다릅니다. 루터교는 교황청의 간섭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신성로마제국에 속해있던 영방제후들이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얻기 위한 사상적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이 영방제후들은 명목상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이긴 했지만 그 황제를 선출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강력한 귀족들일 뿐더러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었죠. 따라서 이들도 강력한 군주권과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뿐 새로운 정치 체제나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칼뱅파를 신봉하는 세력은 조금 다릅니다. 칼뱅파가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된 지역들은 대부분 상업과 수공업, 무역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이나 시민 세력이 존재하는 지역들이었죠. 그래서 칼뱅파 세력은 주로 강력한 전제군주, 황제의 출현을 경계하던 부유한 평민이나 그런 군주들의 봉신이 되는 하급 귀족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이런 세력들이 도시의 지배층을 이루었던 프랑스 남부의 자유도시들이나 네덜란드 또는 라인 강 인근의 부유한 상업도시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프랑스에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에서 낭트 칙령이라는 승리를 얻어낸 칼뱅파들은 이제 상당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거기에 신성로마제국의 영방군주들 사이에서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었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역시도 루터교에서 칼뱅파로 돌아서자 이들은 이제 다음 단계, 카톨릭 교회로부터 칼뱅파를 공인받기 위해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카톨릭 교회에서도 뭔가 조치가 있었겠죠? 위그노 전쟁의 결과로 큰 충격을 받은 카톨릭 세력에서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대공국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중심으로 카톨릭 동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양측은 충돌할 일만 남았죠.
   

 

개전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전쟁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와 헝가리 지방에서 신교 신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었죠. 사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성립시킨 페르디난트 1세는 형인 카를 5세와 신교 세력의 대립이 지나치게 격화되지 않도록 양측을 중재하며 신교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폈는데요. 그의 손자인 페르디난트 2세는 할아버지와 조금 달랐죠. 어린 시절을 예수회 학교에서 보내며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된 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으로 즉위한 후 그 지역의 신교 신자들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사실 보헤미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는 얀 후스를 배출한 지역이기도 했던 만큼 이미 신교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보유한 지역이기도 하다보니 카톨릭 세력 역시 무시할만한 규모는 아니었죠. 카톨릭과 신교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국에서 새로 즉위한 왕이 처음부터 신교 세력을 탄압하겠다고 나서니, 화가 난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프라하에 파견되어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관리들을 프라하 성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본격적으로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 이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칼뱅파 군주였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였습니다. 칼뱅파 군주라는 말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팔츠의 선제후들은 대대로 루터교와 칼뱅파를 오가던, 신교 세력을 대표하는 군주 중 한명이었는데요. 뜻하지 않게 보헤미아의 귀족들로부터 왕위를 제안받은 그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보헤미아의 왕이 되기로 합니다. 뭐, 왕이 되는 건 좋지만 그건 보헤미아인들이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의 선봉에 서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죠.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한 1619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가 제위에 올랐습니다. 양 세력을 대표하는 두 군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인데요. 상황을 놓고 보면 신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단합한 카톨릭 세력이 좀 더 유리해 보이긴 합니다. 프리드리히 5세를 중심으로 뭉친 보헤미아의 칼뱅파 세력에게 도움을 줄만한 이들로는 같은 신교 세력들 정도가 있겠지만 사실 루터교 세력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그런 긴박한 문제가 아니었구요. 부르봉 왕조가 들어선 프랑스는 프리드리히 5세의 왕비가 잉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엘리자베스 공주라는 것 때문에 별로 도와주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에게는 도움을 줄만한 다른 카톨릭 세력들이 꽤 있었습니다. 우선 카톨릭의 전파가 늘 지상과제인 에스파냐가 지원을 약속했구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는 카톨릭 세력이 강성한 남독일 지역에서 그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바이에른 공국의 막시밀리안 1세가 나선 것이었죠. 전장은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 외곽 지역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 전투가 시작이 되었는데요. 전투는 예상처럼 카톨릭 세력의 우세로 진행되었습니다. 루터교 세력은커녕 같은 칼뱅파 세력으로부터도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 보헤미아인들은 결국 전투에서 패하고 이들의 지도자였던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도주해버렸죠.    

     

원래 자신이 왕이 되어야 했을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한 건 물론이고,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 팔츠 선제후국까지 차지했으니 페르디난트 2세에게는 매우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원래 하려던 대로 보헤미아 지역에서 칼뱅파 세력을 뿌리 뽑기로 하고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죠. 한편, 프리드리히 5세로서는 보헤미아의 왕위를 한번 노려보려다가 본래의 영지도 잃고 망명자 신세가 되어버렸죠. 그는 주변의 신교 세력과 용병단까지 동원해 다시 군사를 모아 다시 팔츠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고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덴마크의 참전 

  
하지만 이 일은 다른 영방국과 주변국들에게 뜻하지 않은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는 팔츠 선제후국을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바이에른 공국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주었는데요. 이는 대대로 영지를 세습해왔던 영방군주들에게, 황제가 무력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빼앗아 마음대로 처분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한 조치였습니다. 또 방대한 영토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제 황제권마저 공고히하게 된다면 호랑이가 날개를 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 주변국 군주들도 이 상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죠. 아마 제일 불안해했을 곳은 오랜 세월 합스부르크 왕조와 대립했던 바로 옆나라, 프랑스겠죠? 

  

그 즈음 프랑스의 군주는 부르봉 왕조의 두번째 왕, 루이 13세였습니다.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을 반포한 앙리 4세가 카톨릭 극단주의자 세력에게 암살당할 당시 불과 9살이었던 그는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을 받으며 재위했는데요. 성년이 되어서는 섭정 세력을 일소하고 그들 중에서 출중한 능력을 지닌 리슐리외 추기경을 등용해 그로 하여금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랑스를 유럽 대륙의 패권국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하도록 합니다. 사실 리슐리외 추기경은 하급 귀족 출신이었는데요. 중세 내내 몇몇 대귀족들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시대가 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페르디난트 2세의 행보를 지켜본 프랑스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뭐였을까요? 그나마 제 목소리를 높이는 영방 제후들에 의해서 황제권이 견제를 받아온 신성로마제국이 하나의 거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리슐리외는 신성로마제국이 당시의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꿈꾸는 네덜란드, 그리고 프리드리히 5세와는 사돈 지간인 잉글랜드, 또 신성로마제국과 북쪽으로 국경을 마주한 덴마크, 스웨덴과의 연합을 구상했습니다.     

 

한편, 그 동안 조용히 힘을 키우며 기회를 기다려온 세력에게 이 일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카톨릭 세력을 몰아내고 루터교가 자리잡은 덴마크가 그런 경우였죠. 올덴부르크 왕조의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에서 발생한 이 전쟁을 꼭 카톨릭과 신교 세력 사이의 전쟁으로만 보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그건 이 전쟁의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지만 사실 알맹이는 영토 확장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죠. 틀리지 않은 분석처럼 보입니다. 그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구상대로 다른 신교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북독일 지역으로 진입했습니다.  

 

이제 이 전쟁에서 종교갈등은 그냥 명분일뿐 각국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싸움으로 변했습니다. 왕권 강화와 중상주의 정책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그는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북독일 지역 유틀란트 반도 아래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으로 들어왔는데요. 지금도 독일과 덴마크의 국경이 있는 이 지역은 그러지 않아도 양국 사이의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었죠. 그런데 마침 적당한 기회가 생겼으니 덴마크로서는 한번 도전해볼만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페르디난트 2세는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기용해 북독일의 뤼벡으로 보냈습니다. 

 

사실, 앞서 팔츠 선제후와의 전투 때에는 페르디난트 2세가 좀 더 우세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더 어려웠습니다. 1621년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며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시작하자 에스파냐가 독일 쪽 일에는 통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거죠.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으로 하여금 남하하는 덴마크 군을 뤼벡 부근에서 맞도록 했습니다.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그는 본래 보헤미아의 하급귀족 출신이었는데요.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게 보헤미아의 신교 세력이 페르디난트 2세의 종교 탄압에 대항해 봉기했던 일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좀 희안한 일이기는 합니다. 정작 그는 페르디난트 2세와 카톨릭 세력의 편에서 싸우고 있으니 말이에요. 심지어 그는 뛰어난 전술과 용맹함으로 당대 최고의 용병대장으로 인정받고 있던 인재였습니다. 그는 황제가 기대한 대로 덴마크 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더 나아가서는 원래 덴마크 영토였던 유틀란트 반도까지 진출해 덴마크 군을 몰아내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덴마크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슈타인의 권세는 그렇게 오래 가진 않았습니다.  탁월한 명장인 동시에 엄청난 병력을 거느란 군벌이 된 그는 곧 신성로마제국 내의 다른 영방귀족들의 상당한 견제를 받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그다지 영리한 처신을 보이지 못하고 주둔지에서 약탈을 일삼으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한 나머지 얼마 못가서 황제의 눈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페르디난트 2세는 그를 해임했습니다. 훗날 스웨덴이 이 전쟁에 또 참전을 하면서 그는 다시 기회를 얻는듯 했지만 전투에서도 패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신뢰도 잃으면서 점차 내리막을 걷게 되었죠.

   

  

스웨덴의 참전  
  

이제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도 평정하고, 팔츠 선제후국도 차지하고, 또 덴마크와의 전투에서도 이긴 페르디난트 2세는 더욱 더 신교 탄압 정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러니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신교 세력은 물론이고, 강력한 황제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방 제후들, 또 국경을 맞댄 인접국가들은 더욱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또 다른 왕국, 스웨덴의 도전이 이어졌습니다. 

 

16세기 초 덴마크의 지배에서 벗어난 스웨덴은 내정 개혁과 중앙집권화에 성공하며 상당한 국력을 쌓았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쌓은 국력을 너무 어려운 전쟁에 쏟아부었다는 거였지만요. 그는 국민들을 강제징집해 유럽 역사상 최초로 국민군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급여와 신식 장비들을 지급해 사기를 향상시키고, 화약무기를 개발해 머스킷병과 야포부대를 편성하는 등 근대적 상비군의 기틀을 확립했죠. 그리고나서는 1630년 신교 세력에 대한 탄압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독일로 남하해 이듬해 작센 공국과 함께 라이프치히 인근 브라이텐펠트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에 크게 승리했습니다.  

  

신교 세력의 첫번째 승리였습니다. 프라하에서도, 뤼벡에서도 늘 신성로마제국에게 패하기만 했던 신교 세력이 처음으로 승리하자 신교 세력도 사기가 오르기 시작했죠. 사실, 신성로마제국 내에는 신교 세력에게 힘을 더해줄만한 영방 제후들이 상당수 있었는데요. 이들은 발렌슈타인의 활약에 힘입은 황제군의 계속된 승리에 쉽사리 군사적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었죠. 그런데 스웨덴 군이 황제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압승을 하자 이들도 용기를 얻어 스웨덴 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센 공국에 이어 브란덴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에서도 지원군이 모이며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듯했습니다. 

 

다급해진 페르디난트 2세는 결국 해임했었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들여 구스타프 2세를 막게 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행실에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분명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지휘관이었으니까. 다만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역시 군사적 역량은 만만치 않은 명장이다보니, 뤼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양국은 확실한 우열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투는 스웨덴 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국왕인 구스타프 2세가 전사했구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는 패배 후 발렌슈타인이 군대를 다시 재건하려는 도중 그의 반대파들에게 암살당하며 전투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습니다. 

 

양측의 총사령관이 모두 사라지며 전투는 확실한 끝을 보지 못했지만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인 페르디난트 3세가 발렌슈타인의 군권을 이어받아 스웨덴 군을 상대했습니다. 반면에 국왕이 전사한 스웨덴은 이 일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죠. 겨우 국력을 신장하고 그 역량을 동원해 유럽의 정치 무대에 발을 내딛으려 했던건데 말이에요. 결국 이 일로 스웨덴은 내부 분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스웨덴을 지원했던 신교 세력의 결집도 약해졌습니다. 1634년 페르디난트 3세는 약해진 스웨덴 군을 상대로 뇌르트링겐 전투에서 스웨덴 군을 쓸어버리며 다시 신교 세력을 제압했습니다.  

  

  

프랑스의 참전 

  

이렇게 신교 세력이 또 궁지에 몰리자 프랑스는 더욱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프랑스의 외무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그동안 신성로마제국의 분열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영방국가들과 주변국들을 배후에서 움직여 왔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긴 합니다. 그는 카톨릭 고위 성직자이면서도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신교를 신봉하는 영방군주들을 지원하며 배후조종해서, 덴마크 군을 막아낸 발렌슈타인을 파면하도록 황제를 압박하게 했구요. 또 덴마크와 스웨덴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 욕심을 내도록 부추겼죠. 하지만 이제 그런 방법들이 쓸모를 다하자, 그는 마침내 프랑스가 직접 움직여야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은 신교 세력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긴 했지만 앞서서 계속 상대를 바꿔가며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과 계속 전쟁을 치르느라 상당한 국력을 소진한 상황이었죠. 만약 또 전쟁을 치러야 한다면, 그리고 그 상대가 막강한 육군 전력을 가진 프랑스라면 또 한번의 승리를 장담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거기에 네덜란드의 독립을 저지하느라 정신없었던 에스파냐는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독립 움직임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에 큰 도움을 주기 어려운 입장이었습니다.  

  

페르디난트 3세는 일단 국내의 신교 세력을 일부 인정해주는 대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뭔가 이상하죠? 이 전쟁은 처음부터 신교 세력이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황제에게 도전장을 내밀면서 시작된 거였는데, 이제 그 종교 얘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신성로마제국 대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페르디난트 3세는 국내의 신교 영방제후들을 좀 달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야말로 이 전쟁에 있어서 서로의 마지막 적수였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에스파냐를 차지하면서부터 동서 양쪽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둘러싸인 프랑스로서는 그들이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을 겁니다. 거기에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부로 나날이 부자가 되는 에스파냐를 지켜보면서 일종의 포모를 느꼈을 거 같기도 하구요. 한편, 종교개혁을 거치며 카톨릭 교회에서 이탈하려는 영방제후들과 막대한 경제력을 가진 자유도시들을 제국 안에 잡아두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합스부르크 왕조에게는 유럽 내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프랑스가 가장 위협적이었을 것입니다.  

 

프랑스는 이제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이제 본격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각자 신성로마제국과 국경이 접해있는 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해 프랑스는 남부에서, 스웨덴은 북부에서 신성로마제국과 대결을 벌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이제 군사를 동월할 여력도 없고 지원을 해줄 마땅한 나라들도 없는데 남북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으니 이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는데요. 그나마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왕조의 편을 들어주었던 바이에른 공국이 프랑스 군에 승리하면서 프랑스에 무조건 항복을 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로는 좀 더 몰아붙이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거 같네요.

   

  

공화국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하며 유럽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광활한 제국을 다스렸던 카를 5세는 플랑드르 지방의 겐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베네룩스 3국이 있는 저지대 지역인데요. 아마 당시 그 지역에서는 우리 지역에서 황제를 배출했다, 하는 자부심이 가득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치세 내내 수많은 전쟁을 벌였고 전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플랑드르 지방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지게 했습니다. 거기에 신교 세력이 우세한 네덜란드 지역에서 신교에 대한 보수적인 종교 정책을 시행하며 지역 귀족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죠. 결국 네덜란드는 이 참에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전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네덜란드의 신교 세력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항해 1587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빌렘 1세의 아들인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 공화국은 선포 이후에도 한동안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대에 맞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지만 카톨릭 세력이 더 우세했던 플랑드르의 남부를 장악하는데에는 실패했죠. 이 때 네덜란드 공화국과 남부의 카톨릭 우세 지역 간의 경계가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구경과 대략 일치합니다.  

  

일단 독립에는 성공한 네덜란드는 독립 전쟁 과정에서 몰락한 안트베르펜 대신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어업과 무역업, 금융업 등을 발전시키며 급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신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관용적인 정책 덕분에 유대인과 무슬림들이 도시로 유입되기도 했구요. 이들이 보유한 수공업과 금융업이 플랑드르인들의 어업, 항해술 등과 만나 해운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불러왔죠. 그 과정에서 그동안은 에스파냐가 차지하고 있었던 무역 패권을 조금씩 차지해가면서 작지만 강한 신흥강국으로 도약했습니다.    

 

네덜란드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의 대결은 네덜란드의 독립 선포 후에도 금방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만큼 에스파냐로서는 네덜란드가 쉽게 놓아줄 수 없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 같은 존재였던거죠. 또 네덜란드 입장에서도 아직까지 유럽의 해양패권을 놓치지 않고 있었던 에스파냐로부터 플랑드르 남부 지역을 완전히 독립시킬 수는 없었구요. 하지만 네덜란드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상당수의 에스파냐 군대를 플랑드르 지방에 붙잡아둔 덕분에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에스파냐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프랑스와 치열한 일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독립 선언 이후 어느 한쪽으로 전세가 완전히 기울지 않은 채로 양국이 승리를 주고받던 상황은 프랑스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상대로 나서면서부터 네덜란드 쪽으로 조금씩 기울었습니다. 그리고 30년  전쟁의 종전과 함께 마침내 완전한 독립에 성공하게 되죠. 합스부르크 왕조로서는 나라가 나뉘어지긴 했어도 어쨌든 유럽 대륙과 신대륙에 걸쳐 엄청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쪽은 네덜란드에, 신성로마제국 쪽은 프랑스에 패하며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구요. 반대로 저지대의 작은 신생국 네덜란드는 그런 대제국을 상대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조약도 비준되었으니 기념사진 찰칵!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라익스 박물관에 소장된 제라드 테르보르흐의 1648년 작품입니다. 조약 비준에 참여한 국가가 많아서인지 작품 안에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가 있네요.

 

 

이렇게 해서 유럽, 특히 독일과 보헤미아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30년 전쟁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전후 문제를 처리할 조약이 맺어져야 했는데요. 1648년에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이 바로 30년 전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전장이 되었던 나라들에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뒤얽히며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전했으니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조약 역시 매우 복잡했는데요. 이를 반영해 각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복잡한 조항들이 포함되면서 베스트팔렌 조약은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또 한가지 특별한 점을 찾아보자면 당대의 많은 다른 전쟁들처럼 종교를 빌미로 시작되었지만 정작 그 전쟁을 중재해야할 교황청이 전쟁 내내 조용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교황청과 교회의 권위는 완전히 실추되고 이제 이 땅은 누구의 땅이냐, 하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국제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원동력을 떠올랐죠. 이제 각국의 갈등해결 방식이 더는 교회의 권위가 아닌, 무력 즉 전쟁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분명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난, 보다 근대적 방식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더 많은 사상자와 더 많은 피해를 발생시킬 거 같은 느낌입니다. 실제로도 이러한 양상은 20세기에 들어 세계대전을 치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해당사자가 복잡하게 얽힌 전쟁이었으니, 베스트팔렌 조약의 내용도 매우 복잡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조약이 체결되는 일은 많았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은 모든 참전국이 모두 조약에 관여하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는데요. 일단 최종 승자인 프랑스는 독일과의 오랜 분쟁지역이었던 알자스-로렌 지역을 얻었구요. 함께 싸운 스웨덴은 발트해를 장악하면서 일약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는 마침내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훗날 유럽의 강력한 패권국으로 부상하게 되죠.

 

한편 절망편으로는... 전쟁터였던 신성로마제국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살 길을 찾기위해 전국을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구요. 모든 생산 시설이 파괴되고 방치되면서 온 나라가 황폐화되었습니다. 30년 전쟁 내내 전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이제 왕조의 존립이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했죠. 이 기회를 틈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체제 하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많은 영방국가들과 자치도시들은 새롭게 독립해 주권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혹독한 상황에 직면하긴 했지만 왕조나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신성로마제국이 차지했던 있던 땅과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통째로 없어지는 건 아니었죠. 단지 새로운 변화가 그들에게 닥쳐왔습니다. 우선 전쟁을 이끌어가느라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어야 했던 합스부르크 왕조가 약화되자 그 영향력에서 벗어난 영방국가들 중 새로운 강자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될만한 국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요. 그 중에 가장 강력한 영방국가로는 단연 프로이센을 꼽을 수 있습니다.

 

30년 전쟁의 초반, 카톨릭과 신교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공국을 통합하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을 출범시킨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세제를 개혁하고 상비군을 육성하는 한편 외교정책을 다변화하면서 발전의 도약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하며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해 프로이센을 독일 지역 내의 신흥 강국으로 발전시켰죠. 그리고 3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 때에는 프로이센을 독일 지역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훗날 탄생할 독일 제국의 기반을 마렸했습니다. 

30년 전쟁으로 제일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무래도 전쟁의 초반부터 이미 초토화가 되었던 보헤미안 지방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쟁 초반에 이미 신성로마제국에 패하는 바람에 일찌감치 귀족 세력이 몰락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이 때의 일로 지금의 체코 지역인 보헤미아 지방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황청 역시 전쟁 이후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 중 하나였습니다. 크리스트교가 발생한 이래로 여러변 교회의 분열을 겪어온 교황청은 그 과정마다 꾸준히 영향력이 줄어들었는데요. 이제는 신교 세력이 독립하자 또 그만큼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중세 시대만 하더라도 유럽 전지역에 걸쳐서 거의 모든 외교적, 국제적 분쟁에서 심판 역할을 해왔던 교황청은 30년 전쟁 동안 한번도 제대로 갈등을 중재하지 못했고, 베스트팔렌 조약에 있어서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죠. 이제 유럽 전역에는 정교도 있고, 카톨릭도 있고 신교도 있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교황청의 영향력 축소가 단지 종교개혁으로 인해 그만큼 카톨릭 국가의 비중이 낮아진 것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시대 내내 교회는 세속 군주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세속 권력이기도 했습니다. 또 성직자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에게까지도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막강한 권위를 가진 존재였죠. 그런데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근대화된 군대를 지닌 근대화된 각국의 세속군주들은 이제 더 이상 교회로부터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게 카톨릭 국가의 군주하 하더라도요. 30년 전쟁을 계기로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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