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의 대분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서유럽 세계에서는 이미 교황청의 힘이 세속의 권력에게 제압되며 점차 힘을 잃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백년 전쟁의 과정에서 각국의 군주들은 영토를 둘러싼 잦은 전쟁을 거치며 군대를 크게 강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왕권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반면 한때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귀족들은 전쟁이 거듭되는 동안에 점차 수가 줄어들면서 힘을 잃었구요. 살아남은 이들도 이제는 왕권을 뒷받침해주는 신흥 관료 계층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또, 각국의 민중들에게 조금씩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예전과는 좀 달라진 점이었죠. 이렇게 세속 군주들의 권한이 강화되니 상대적으로 교황의 권력은 위축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황권이 몰락하던 당시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는데요.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던, 아비뇽 유수가 바로 그것입니다. 필리프 4세가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자 교황인 보니파시오 8세가 이어 크게 반발하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군에게 붙잡히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니파시오 8세는 몸져 누웠다가 사망했는데요. 이걸 기회로 삼은 필리프 4세는 차기 교황 선출에 관여하며 교황청을 아예 아비뇽으로 옮겨벼렸죠. 이렇게 해서 1309년 탄생한 아비뇽 교황청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복귀하기까지 약 70년을 존속하며 7명의 교황을 배출했습니다.
이 사건은 1378년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다시 로마로 복귀하면서 마무리되었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과 로마계 추기경들이 교황 선출권을 두고 갈등을 벌여 각각의 교황을 선출한 것인데요. 그럼 교황도 두 명이 되겠죠?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서유럽 국가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가르기를 시작했습니다. 중세 내내 분열의 길을 걸었던 유럽 사회에 그나마 종교적 통합성을 부여했던 로마 교황청이 이제 분열의 길로 접어들게 된것입니다. 카톨릭과 정교가 분리되었던 교회의 대분열 이후 일어난 또 한번의 분열이었습니다.
일단 아비뇽 교황청 측에는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따르는 왕국들이 가세했구요. 당시 프랑스와 백년 전쟁 중이던 잉글랜드와, 독일 지역의 영방군주들은 당연히 로마 교황청을 지지했습니다. 근데 상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죠. 양측이 끝없이 대결 양상을 보이자 교회는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고 양쪽 중 어느 한 쪽이 아닌, 아예 새로운 인물인 알렉산데르 5세를 교황으로 추대해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두 교황을 퇴위시키면 이런 분열 사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될테니까요. 근데 문제는 이 두 교황이 순순히 퇴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교황은 피사 교황까지 세 명이 됩니다.
이렇게 혼란이 거듭되자 성직자들은 신앙이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에 몰두하며 점차 부패했고, 교회는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민중들도 이제는 교회를 마냥 따르지 않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교회의 권위는 땅으로 추락했죠. 중세 클뤼니 수도원처럼 교회 개혁에 앞장서주지 않을까 싶었던 수도원들은 오히려 부패에 동참했구요. 그럴수록 교회를 향한 비판은 점차 거세졌습니다.
교회의 암담한 현실은 로마와 멀리 떨어진 잉글랜드에도 전해졌습니다. 신학자인 존 위클리프는 교회의 부패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거리로 나섰는데요. 교회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에 염증을 느꼈던 그는 교황을 가리켜 무려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칭하고 민중들을 대상으로하는 설교에서 '성서 안에서 신앙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믿음을 설파했습니다. 비록 그는 활동기간 내내 교회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그의 사상은 유럽 여러 나라의 다른 종교개혁가들에게로 이어지며 유럽의 역사를 뒤바꾸는 작은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종교개혁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30년 정도가 흐른 뒤,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위클리프의 주장을 계승하는 신학자가 나타났습니다. 얀 후스는 1412년 일반 민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면죄부를 판매하고 성직을 매매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는데요. 그러자 화가 난 교황청에서는 프라하 시 전체를 파문시키고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를 화형시키며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근데 그러한 조치는 상황을 수습하기는 커녕, 교회의 타락에 실망한 민중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죠.
아니나다를까, 그의 사후에도 사태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추종하며 그의 신념을 이어나가려는 프라하 시민들은 계속 그 수가 늘어났구요. 여기에 농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저항 운동은 곧 내전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급격히 세력이 커진 이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 파견한 기사단을 물리치고 보헤미아를 넘어 독일 동부까지 진출하자, 놀란 교회 측은 전략을 바꾸어 화해를 요청했죠. 몇 번의 전투에서 후스파가 계속 승리를 거둔 뒤, 다급해진 교회 측에서는 가까스로 평화 협상을 타결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후스파의 요구사항 일부를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이 부분만 봐도 이제 교회의 권위가 옛날같지 않다는 게 느껴지네요.
루터의 등장
시간이 흘러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교수로 활동하던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발행을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게시했습니다. 이 면죄부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당시 강력한 왕권이 들어선 프랑스와는 다르게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 지역이 로마 교황청에서 봤을 때에는 가장 만만한 면죄부 판매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많은 영방군주들은 이전부터 이러한 상황에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행동에 분노한 교황청은 그를 파문했지만 루터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교황청은 당시 제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게 루터의 처벌을 요청했습니다. 이 때, 루터의 신변을 보호한 사람은 작센 대공국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였습니다. 강력한 영방군주인 프리드리히 3세의 영지, 작센으로 간 루터는 그곳에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다양한 저작활동을 했죠. 사실, 프리드리히 3세 역시 학문과 예술적 식견이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루터를 보호하고 싶기도 했을 거 같습니다.
사실, 루터의 주장을 살펴보면 순수한 종교적 동기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것들도 있습니다. 루터가 의도한 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종교계를 넘어서 유럽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내용들도 포함되었죠. 교회의 타락을 고발하고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영방군주들이 민중과 결집할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루터의 주장을 접한 독일 내의 영방군주들은 이제 루터파와 반루터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한편, 영방군주들의 입장이 다소 나뉘어진 것과는 다르게 독일 지역의 민중들은 루터의 주장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이며 봉기를 일으켰는데요. 이들이 받아들였다고 한 루터의 주장은 성서 중심주의, 평등주의 같은 것들이였죠. 자신들의 군주와 결집하자는 주장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학교수이자 성직자인 루터와는 다르게 이들은 일반 민중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보다는 자신들의 처우가 걸린 문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1542년 독일 남부의 슈틸링겐 백작령을 시작으로 농민들의 투쟁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에 번졌습니다. 처음에는 평등을 강조하고 교회의 정화를 주장했던 이들은 이제 농노제를 폐지하고 인두세와 상속세 등 각종 봉건제적 세금을 경감해줄 것을 주장했습니다. 봉건제적인 악습의 철폐, 즉 봉건제의 철폐가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분명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 성질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사회개혁적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그렇게 독일 전역으로 반란이 번지자 루터는 오히려 영방군주들로 하여금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민중들의 요구는 루터가 주장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죠. 그는 농민들의 요구에 전적으로 반대하며 농민 반란군들을 가혹하게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독일의 영방군주들로 하여금 교황청의 손에서 벗어나 교회를 제압할 것을 주장한 그는 영방군주들을 위한 종교적 명분을 마련한 것이었지, 농민들을 위해 개혁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던 거죠. 결국 농민 반란은 실패했습니다. 루터파와 반루터파로 나뉘었던 영방군주들은 공동전선을 구축해 반란을 진압했고 2년 동안 10만명이 넘는 농민반란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엄청난 아아러니네요.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루터의 요청에 따라 독일의 농민반란을 진압하던 루터파 영방군주들은 반루터파 영방군주들과 달리 교회와 수도원이 보유한 어마어마한 재산을 몰수하고 종교 권력을 국가로 복속시켰습니다. 이들이 루터의 편에 서기로 한 이상 이제는 교황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특히 오스만튀르크가 점차 서진해 빈을 향해 다가오자 카를 5세가 빈을 떠나 에스파냐에 머무르던 사이, 영방군주들은 루터의 개혁안을 착실히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후 오스만군이 포위를 풀고 빈을 떠나자, 빈으로 돌아온 카를 5세가 영방군주들을 저지하려 하자 그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항의서를 제출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로테스탄트는 이렇게 등장했습니다.
평화로운 방법이 통하지 않자 양측은 무력충돌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루터파 군주들은 슈말칼텐 동맹을 결성해 반루터파와 황제에게 맞섰는데요. 1547년 벌어진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의 군대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반면에 승리한 카를 5세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가혹하게 처벌하며 황제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죠. 그런데 사실 황제권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은 반루터파인 영방군주들에게도 딱히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황제권이 강화되면 또 영방군주들에게 각종 의무를 강요하며 세금을 부과하고, 군대를 차줄해서 전쟁에 나가도록 하고... 그들에게는 별로 좋을 게 없는 일만 시킬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황제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조짐을 보이자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물론이고 기존의 반루터파 세력 중에서도 카를 5세에게 반기를 드는 군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포착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 공작이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을 규합하고 카를 2세의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으로 동맹을 체결했죠. 카를 5세의 입장에서는 제국 내의 영방군주들이 자신과 오랫동안 앙숙이었던 프랑스의 왕과 동맹을 체결했으니 이 일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지만 동생이자, 자신의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1세와 반루터 세력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바이에른 공국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자 복수전은 벌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시기 신성로마제국은 루터파 말고도 상대해야할 외세들이 더 있었으니까요. 오스만튀르크는 언제 또 빈을 압박할지 알 수 없었고, 루터파 영방 군주들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도 신경써야 했습니다. 결국 양측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이 분쟁을 마무리하는 데에 합의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합의로 카를 5세는 루터파를 새로운 종파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루터파는 이제 카톨릭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교파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근데, 사실 이건 신성로마제국에서만 통하는 얘기일뿐, 유럽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죠. 그리고 이 조약이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종교의 선택권은 각 지역을 통치하는 영방군주에게만 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일반 민중들은 군주의 종교를 따라야 했습니다. 어쨌든 이 조약의 결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이 강한 독일 남부는 여전히 카톨릭을 신봉하고, 북부에서는 루터파를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인정한 새로운 교파는 루터파가 유일했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종교개혁을 개시한 뒤로 유럽 각지에서는 루터처럼 교회의 개혁을 주장한 여러 종교개혁가들이 활동을 시작했구요. 그들 각자가 다양한 교파를 새롭게 결성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교파가 발생하고 이들이 각 지역의 영주들, 그리고 민중에 의해 신봉되기 시작하니, 이 시점에서는 중앙에서는 이들을 쉽게 이단으로 확정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농민 봉기 같은 혼란이 나라를 휩쓸면 국내 정세도 크게 요동칠테니까요. 결국 이 새로운 종파들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으로 카톨릭과의 긴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한편, 종교개혁은 루터에 의해 본격화되긴 했지만 각 지역의 종교개혁가들의 견해는 루터와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스위스 취리히의 신학자 울리히 츠빙글리는 신학자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받아 인문주의적 입장에서 크리스트교를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루터처럼 지방 영주의 보호를 받지 못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도시에서 공개 토론회를 열고 자신의 견해를 설파하여 신학자와 성직자, 민중의 지지를 두루 얻었습니다. 루터가 영방국가 중심의 종교개혁을 주장했다면, 그는 자치도시의 시민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욱 진일보한 모습이네요.
스위스 제네바 지역에서는 장 칼뱅이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영방 군주의 보호를 받은 루터나, 도시 내 다양한 계층들의 지지를 받은 츠빙글리와는 다르게 정치를 배제한 순수한 종교개혁을 주창한 그는 도덕과 규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을 부활시키기 위해 성직자들을 교육시키고 규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 내에서 장로제를 시행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장로제가 바로 현재까지도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중요한 핵심제도로 남아있는 거구요.
칼뱅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하는 모든 활동 속에 이미 신의 의지가 담겨있으며,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은 뒤에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회의 복잡한 예배 절차나 의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며, 일상 속에서의 근면하고 성실한 삶이 필요하다고 말했죠. 이는 일반 민중이 종교적으로 이상적인 삶을 사는 데에 더 이상 성직자의 도움에만 의존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됩니다. 누가 이런 주장을 가장 반겼을까요? 도시 내 신흥 시민층과 상인들, 중산층들입니다. 이들은 칼뱅의 이론에 열성적으로 동조했고 곧 근대에 이르러 사회의 주체 세력인 시민 계층으로 성장해 자본주의의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성공회의 탄생
존 위클리프에서 시작해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 그리고 츠빙글리와 칼뱅을 거치며 유럽 전역에 퍼진 종교개혁 사상은 위클리프의 조국인 잉글랜드로 돌아와 조금 다른 모습이 됩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왕실인 튜더 왕조의 후계자 문제에서 시작했는데요. 이 부분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종교개혁이 주로 교회와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봉건제적 군주의 탄압에 저항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죠.
1485년, 장미 전쟁이 끝나고 튜더 왕조를 수립한 헨리 7세는 곧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절대주의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시기상 에스파냐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7년 전이네요. 헨리 7세가 생전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군주였던만큼, 그의 아들인 헨리 8세 역시 즉위 초부터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요. 근데 아직 후계자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사망한 형의 부인, 즉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는데, 이 캐서린 왕비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통합 왕국의 군주인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딸이었습니다. 그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이모가 되네요.
당시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 이후 프랑스와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에게는 에스파냐와의 외교관계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을 계속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지 못하자 이혼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헨리 8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종교개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당시 루터파를 배척하고 카톨릭 교회를 옹호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를 계속 얻지 못하고 캐서린 왕비의 나이가 마흔을 넘기자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보통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데 말이에요.
카톨릭의 교회법에 따르면 배우자가 생존해있는 경우에는 이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헨리 8세가 이혼을 하면 이 규율을 어기는 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교회법을 어기면서까지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을 새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한편, 교황청에게는 교회법 때문이 아니더라도, 헨리 8세의 요구대로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허락해줄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캐서린 왕비의 조카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죠.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대로 카톨릭의 가장 든든한 수호자 역할을 해왔는데, 만약 교황청이 헨리 8세의 요구대로 그의 이혼을 허락해준다면 이는 카를 5세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헨리 8세는 1534년 의회에서 수장령을 통과시켜 잉글랜드 교회를 가톨릭에서 분리시키고 독립된 국교회로 선포했습니다. 이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 아닌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것을 공표한 것이었죠. 이혼을 위해서 취한 초지였지만 이는 상당한 부가적인 소득도 있었습니다. 교황청이 잉글랜드에게 징세하던 모든 세금을 차단하고 수도원도 해산시켜 그 재산을 모두 국교회로 귀속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후계자를 얻기 위해 교황청과 결별한 그는 이후 아들을 얻었을까요? 일단 그에게는 첫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인 메리 1세가 있었구요.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앤 불린을 처형한 뒤에 결혼한 제인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에드워드 6세를 얻었죠. 하지만 제인 시모어가 요절한 뒤에 또 결혼을 했지만 아들을 더 얻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헨리 8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는데요. 불행히도 그는 불과 15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그의 이복 누나들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차례로 왕위를 잇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헨리 8세의 국교회 선포에 대한 후폭풍이 몰아치면서 잉글랜드 전역은 카톨릭과 국교회, 즉 구교와 신교 사이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카톨릭 교회의 새로운 수호자로 떠오른 에스파냐 출신이었던 캐서린 왕비의 딸인 메리 1세 때에는 왕실이 구교로 복귀하면서 신교도들이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구요. 덕분에 메리 1세는 '피의 메리'라는 무시무시한 별명도 얻습니다. 반면에, 그의 뒤를 이어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다시 신교 세력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면서 구교도들이 탄압을 받게 되었죠.
'서양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와 오스만튀르크 (11) | 2025.08.30 |
---|---|
콩키스타도르 (8) | 2025.08.17 |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 (0) | 2024.03.27 |
대학의 등장과 스콜라 철학 (1) | 2024.03.25 |
중세 말 즈음의 동로마 제국, 에스파냐 (1) | 2024.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