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
한차례 혁명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잉글랜드. 잠깐이지만 공화정을 경험해본 잉글랜드인들의 선택은 왕정으로의 회귀였습니다. 왕정을 복고시킨 의회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 중이던 찰스 2세를 잉글랜드로 데려와 즉위시켰습니다. 사실 찰스 2세는 찰스 1세의 적법한 후계자로 이미 스코틀랜드 국왕에 즉위한 상태였는데요. 크롬웰이 이에 반발하며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자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로 들어오지 못하고 여전히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잉글랜드인들이 다시 그를 원하고 있었고, 1660년, 그는 다시 명예롭게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의회가 찰스 2세를 다시 모셔오기는 했지만 사실 찰스 2세와 의회는 각자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지 이제 우리 사이좋게 잘 지내보자,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왕과 의회가 그렇게 사이가 좋았다면 애초에 잉글랜드가 공화국 맛보기를 해볼 일도 없었겠죠. 하지만 아버지인 찰스 1세가 의회와의 힘겨루기에서 패해 사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찰스 2세와 공화국이란 이름 하에서의 공포정치를 경험해본 의회는 예전 같은 그런 노골적인 대결 상황은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레서 양측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협력할 것은 협력하는 와중에 자신들의 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죠.
이 때 즈음 잉글랜드의 의회에는 최초로 토리당과 휘그당이 등장했습니다. 찰스 2세의 후계자로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를 즉위하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찬성하는 쪽은 토리당, 반대하는 쪽은 휘그당이라고 불리운 게 그 기원이었는데요. 이 두 세력은 각각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으로 성장해 훗날 잉글랜드 의회의 양 진영을 이끌게 됩니다. 유럽 대륙의 다른 강대국들이 절대군주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근대식 정당제의 토대가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던 거죠.
한편, 찰스 2세는 청교도를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구교인 카톨릭에 대한 탄압을 멈추고, 크롬웰 시대의 공포정치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잠깐이나마 위그노 군주가 통치했다가 30년 전쟁 이후 다시 카톨릭 국가로 회귀한 프랑스와 친교를 맺으면 왕권 강화를 시도했죠. 또 유럽 대륙에서 에스파냐를 제치고 새로운 패권국으로의 도약을 꿈꾸던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며 이들의 패권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찰스 2세는 상당히 사생활이 자유분방했다고 하는데요. 정작 그의 왕비인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 주앙 4세의 딸, 카타리나 공주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1685년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잇게 되었습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가장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던 부분은 종교 문제였습니다.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는 찰스 2세가 겉으로는 국교회 신앙을 유지했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카톨릭 신자였을 거라는 의심이 돌던 상황이었는데, 아예 카톨릭 신자인제임스 2세가 즉위해 카톨릭 친화적인 노선을 보이자 더욱 불안해했습니다. 의회는 혹시라도 그가 잉글랜드를 다시 카톨릭 국가로 회귀시키지 않을지 우려했죠.
의회의 입장에서 다행한 일이라면 제임스 2세의 두 딸인 메리 공주와 앤 공주가 모두 국교회 신자라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 2세가 두번째 결혼에서 뒤늦게 아들을 얻었고 이 아들이 제임스 2세의 왕위를 잇게 된다면 또 한번의 극심한 종교 갈등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의회는 1688년 선제적으로 제임스 2세를 물러나게 하고 그의 장녀인 메리 공주와 사위인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작 빌렘 3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빌렘 3세는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끌었던 침묵공 빌렘 1세의 증손자이기도 했죠. 근데 왕이 두 명이네요?
사실 제임스 2세가 의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끝까지 싸워 왕위를 아들인 제임스에게 물려주려고 했을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극심한 내전으로 큰 혼란을 경험했던 잉글랜드인들에게는 다행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죠. 제임스 2세는 왕위를 포기하고 잉글랜드 왕들의 망명 맛집인 프랑스로 향하면서 사태는 비교적 수월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위는 메리 2세가 잇게 되었고, 네덜란드에서 이 과정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던 빌렘 3세가 공동으로 함께 즉위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윌리엄 3세가 되겠네요. 이 사건은 별다른 무력충돌 없이 왕위가 평화롭게 교체되었다고 해서 명예혁명으로 불리웁니다.
왕의 목을 치기도 했던 잉글랜드의 의회가 이번에는 왕을 갈아치웠습니다. 두 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의회는 이제 왕권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구요. 그들에 의해 즉위한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는 당연히 의회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겠죠? 두 왕은 세금 징수와 법률의 제정은 물론 군사 징집과 재판에 대한 의회의 광범위한 권한을 인정하는 권리장전에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잉글랜드에서는 튜더 왕조가 끝남과 함께 서서히 저물어가던 절대왕권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의회주의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입헌군주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후 국정은 의회가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비록 즉위 당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들어오긴 했지만 외국인인데다가 의회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윌리엄 3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는 입장이었죠. 그는 메리 2세 사후 잠시 간 단독으로 국왕 재위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위는 이미 메리 2세의 여동생인 앤 공주로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앤 여왕 역시 재위 내내 자녀들이 모두 요절하며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앤 여왕이 사망한 1714년 스튜어트 왕조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금과 은
17세기 초반 동안 유럽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일단 유럽 대륙은 30년 전쟁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었구요. 잉글랜드는 왕과 의회의 내전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웠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일어난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거기에는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서 벗어나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결과적으로는 유럽 사회의 모든 면을 통째로 뒤바꿔놓았으니, 종교개혁이 서양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신기한 것 한가지는, 이 모든 일이 종교개혁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상황이 종반으로 흐를수록 종교 얘기는 점점 사라지고 누가 어느 땅을 차지했는지, 누가 이 나라의 왕이 되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에만 신앙의 수호를 명분으로 삼았을 뿐이지, 결국 그들이 추구한 것은 어떻게 자신의 영토와 권력을 지키고 확대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이렇게 복잡한 지경에 이를 때까지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청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죠.
근데 유럽 각지에서 이렇게 전쟁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이 전쟁을 감당할 비용은 모두 어디에서 충당한 것일까요? 전쟁을 수행하려면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야하고 이들을 먹여살릴 식량과 전쟁터에서 쓰일 무기와 장비들을 생산해내야 하는데요. 해답은 유럽 대륙 밖에 있었습니다. 15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신대륙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유럽에서 세운 신대륙의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금과 은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특히 에스파냐에서 개척한 중남미의 식민지에서는 엄청난 양의 은이 생산되었고 이 은이 에스파냐로, 그리고 유럽 각국으로 흘러들어갔죠.
이러한 변화는 유럽 각국의 물가를 인상시키며 큰 폭의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 현상을 두고 가격혁명이라고도 일컫는데요. 신대륙이 이제 막 발견된 15세기 후반부터 식민지에서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된 17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 간 물가가 6배가 올랐다고 합니다. 사실 금본위제가 아닌 신용화폐가 통용되는 요즘 세상에야 그 정도 인플레이션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고정된 금액의 지대를 받던 지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반면에 상품을 거래하던 상인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유럽 사회가 또 한걸음 중세에서 벗어나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이었죠.
금과 은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개척은 여러 면에서 유럽인들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대외교역이 마우 활발해지면서 아메리카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와의 직접 교역도 확대되었고 덕분에 차와 항료, 도자기 같은 사치품들이 엄청난 규모로 유럽으로 수입되었죠. 옥수수나 감자 같은, 유럽인들이 예전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신대륙의 작물들이 유럽에도 소개되면서 하층민들이 겪는 만성적인 빈곤과 기아 현상도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또 설탕, 가죽, 목재 등의 다양한 필수 원자재들에 싼값의 노예노동력까지 유입되어 유럽의 경제력이 전반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각국의 왕실은 어땠을까요? 일단 식민지에서 들어온 막대한 부로 부자가 되었지만 그만큼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관료들에게 일정한 급여를 지급해야 했구요. 자금 당장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늘 유지되어야 하는 상비군을 갖추기 위해 예전보다 더 많은 군비가 지출되었습니다. 절대주의 왕권을 유지하는 것은 여러 모로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고 이 때문에 각국의 군주들은 엄청난 재정을 지출했습니다. 비록 식민지에서 막대한 부가 유입되고는 있었지만 지출도 늘어난 거죠.
중상주의의 대두
이렇게 나라 안팎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돈의 규모가 급격히 늘어나자, 절대주의 왕권을 추구하던 각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 재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유능한 관료들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는게 필수적이니 돈이 많이 든다고 해서 이걸 안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각국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그러면서 등장하게 된 정책이 바로 중상주의 정책이었습니다.
일단 이들은 가장 생산에 가장 필요한 자원 즉, 토지를 획득하기위해 재정의 상당 부분을 군사력에 사용했습니다. 보다 강력한 군대를 육성해서 전쟁에서 이겨 다른 나라의 땅을 가져오는 거죠. 그렇게 차지한 땅에서 생산된 생산물은 상품으로 가공되어 외국으로 수출했구요. 반대로 외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상품에는 관세를 부과해서 수입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각국은 이렇게 수입을 줄이되 수출은 증대시키고, 관세 장벽을 높이는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럼 무역 흑자가 쌓이면서 재정이 상당히 안정되겠죠? 이렇게 마련된 재정은 다시 군사력 증강에 투입됩니다.
한편, 관세를 앞세운 중상주의 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제 외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다른 지역에 파는 무역업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과거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큰 부를 축적했지만 무역 장벽이 높아진 이제는 상품 자체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어야만 했죠. 하지만 원재료를 구해 이를 여러 단계에 걸쳐 새로운 상품으로 가공하고 이를 수출하는 것은 몇몇의 수공업자나 상인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산업으로서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좀 더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각국은 본격적으로 자국의 산업을 육성하고 보호하는 일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근데, 이런 식으로 국가가 나서서 무역과 산업을 주도하기 시작하자 이제 경제 전반에 있어 국가의 영향력이 점점 강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딱히 경제 정책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던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경제가 특정 주체의 인위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순환되었는데, 각국이 서로 자국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부를 축적하는 경쟁에 나서면서 보다 효율적인 부의 축적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자 이제 국가에 의해 나라 안의 경제 상황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점차 그렇게 변해가니 사람들의 생각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지금 당장의 삶보다 내세에서의 축복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데요. 그래서 현세에서의 안락함을 위해 적극적으로 부를 축적하려는 상업 활동이 사회적으로 그리 존경받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중세 내내 계속 이어지던 이 오랜 고정관념을 파괴했죠. 현세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부를 쌓는 것이 오히려 신이 내려주신 은총의 증거라는 인식이 퍼진 것인데요. 그 바탕에는, 어떤 이가 신의 구원을 받게 될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런 이들에게는 현세에서의 축복이 따른다고 보는 칼뱅주의의 예정설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터부시되던 물질적 풍요가 이제는 축복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식민지로부터의 부의 유입과 각국의 중상주의 정책은 분명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씩 그 환경을 갖추어가고 있었죠. 이러한 변화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며 기회를 잡은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식민지 개척 초기에는 에스파냐가 가장 선두로 나서나 싶었는데요. 중세적 봉건제, 즉 과거의 체제를 버리지 못한 에스파냐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쇠퇴와 함께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 부패한 카톨릭 교회가 몰락하는 일도 없었죠. 결국 기회는 그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와 에스파냐를 이긴 잉글랜드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패권 경쟁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과 잉글랜드와의 해군력 경쟁은 결과적으로 에스파냐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신대륙 발견으로 엄청난 부를 얻은 데다가 한때 유럽의 절반을 차지했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이기도 했으니 이렇게 쉽게 몰락하는 게 의아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에스파냐가 전쟁에 엄청난 국고를 쏟아부었고, 또 왕실의 끝 없는 사치 또한 재정난의 원인이 되었죠. 그러는 와중에 또 전쟁이 터졌으니 에스파냐가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없었겠죠? 결국 30년 전쟁으로 에스파냐는 나라 안의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네덜란드의 독립을 허용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스파냐가 누렸던 번영은 이제 네덜란드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가진 그 광활한 영토 중에서도 상당히 부유한 알짜배기 지역이었는데요. 오랫동안 어업과 무역업에 종사해온 플랑드르 상인들은 북해 지방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래부터 해오던 모직물 산업과 조선업을 발전시키며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성장 잠재력을 가진 지역이 이제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채운 족쇄를 풀고 에스파냐에 의해 개척된 대서양 항로를 누비고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폭발적인 성장을 할 기회를 잡은거죠.
네덜란드는 금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대체할 패권국가로 떠올랐습니다.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전부터 이미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이 지역 진출에 나서기 시작한 네덜란드는 1602년에는 여러 개가 난립해 있던 동인도회사들을 하나의 국영기업으로 통합하고 인도와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일본으로까지 아시아 무역에 나섰습니다. 동인도회사, 라고 하면 흔히 네덜란드보다 약간 더 먼저 세워진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떠올리지만 네덜란드가 이 당시 건립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당대 최대 규모의 거대기업이었죠.
사실, 에스파냐와 다르게 신대륙 대신 아시아 항로에 더 많은 투자를 해왔던 포르투갈이 이미 인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일본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진출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일본에는 이미 몇몇 포르투갈 상인들이 진출해 교역을 하고 있었구요. 덕분에 일본은 일찌감치 이들이 전해준 서양 문물을 경험해볼 수 있었지만 공격적인 카톨릭 포교를 앞세운 포르투갈인들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했었죠. 그런데 이들보다 조금 늦게 찾아온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특별히 자기네들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 훨씬 우호적이니, 일본으로서는 네덜란드에 보다 더 호감을 갖고 폭넓게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잉글랜드는 어땠을까요? 이 시기 유럽은 이미 중세에서부터 사회이 여러 면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이 조금씩 갖추어져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는 중세 시대의 카톨릭 종교관과 봉건제에 기반한 신분제적 전통이 제일 약한 곳이었는데요. 덕분에 대항해시대에 들어 대서양을 넘나들며 신대륙에 광활한 식민지를 개척한 에스파냐를 해군력에서 앞서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15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인클로저 운동이 진행되던 중이었습니다. 인클로저 운동은 그동안 소유권이나 경계가 불분명했던 땅에 울타리를 쳐서 누구의 땅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거였는데요. 그 전까지는 사실 장원 내에서 농지가 아닌 땅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생산물을 산출하기 어려웠고 장원 내의 주민들이 그냥 가축을 풀어놓거나 땔감을 얻기 위해 쓰던 땅이었죠. 하지만 각국이 서로 수출 경쟁에 뛰어들던 중상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양모의 수요가 크게 늘자, 지주들은 이제 버려둔 땅의 소유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사유화해서 그 땅에서 양을 목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양 목축은 농사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일도 아니고, 마침 양모도 잘 팔리니 이 당시 양모 생산에 뛰어든 지주들은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런 기회를 놓친 일부 지주들은 그냥 땅을 팔아버리고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의 임금 노동자가 되기도 했죠. 또 비록 농지는 아니었지만 그 땅에서 먹을만한 걸 채집해서 연명하던 빈민들도 더 이상은 이 땅에서 뭔가를 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들 또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했습니다. 그저 자기 땅에 울타리를 치는 단순한 행위가 토지의 사유화와 임금 노동자의 도시 유입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킨 셈입니다.
농민에서 임금 노동자가 된 이들에게는 무척 가혹한 상황이었지만, 인클로저 운동 덕분에 잉글랜드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양 목축으로 양모를 생산해 부를 이룩한 자영농들 중 일부는 젠트리에 포함되며 의회에 진출했고, 청교도 혁명 과정에서는 의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해 잉글랜드의 의회제도를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마침 잉글랜드는 중세적 질서 대신 의회 전통을 발전시켜온 나라였으니 이러한 변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스튜어트 왕조 초반, 군주들의 반동적인 정책과 신교, 구교 간의 갈등으로 대외활동이 잠시 주춤했던 잉글랜드는 왕실과 의회 간의 대결이 마무리되고 내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곧 당대의 패권국가로 성장한 네덜란드를 추격하며 해외 진출에 눈을 돌렸습니다. 이미 조선업이나 항해술에 있어서 결코 네덜란드에 못지 않았던 잉글랜드는 양모를 비롯해 각종 상품을 직접 생산할 산업시설들을 갖추어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무역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네덜란드보다 더 크게 성장할 잠재력을 갖고 있었는데요. 이 때문에 두 나라는 해상 패권을 두고 언젠가는 한번 맞붙어야 할 운명이었죠.
왕을 사형시키고 공화정이 수립된 잉글랜드에서 권력을 잡은 크롬웰은 1651년, 새로운 항해조례를 제정했습니다. 내용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을 잉글랜드나 그 식민지로 운송할 때에는 반드시 잉글랜드의 선박만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거였죠. 네덜란드의 선박들이 전세계를 누비며 떼돈을 벌던 이 시기에, 이는 분명 네덜란드의 해운업을 정조준한 조치였고, 양국 간의 마찰은 곧 현실화되었습니다. 결국 양측은 1652년부터 1674년까지 세 번에 걸친 영란전쟁을 통해 자웅을 겨루었죠.
세번의 전쟁은 모두 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었습니다. 항해조례가 제정된 다음해인 1652년에 발발한 첫번째 영란전쟁은 딱히 어느 한쪽의 승리로 단정짓기 애매한 상황에서 평화협정을 맺으며 마무리되었지만 1665년에 벌어진 두 번째 영란전쟁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네덜란드가 승리하며 해상 패권을 차지하나 싶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승자인 네덜란드가 브레다 조약을 통해 남미의 수리남과 인도네시아 동부의 룬 섬을 얻은 반면에 지금의 뉴욕에 해당하는 뉴암스테르담을 잉글랜드에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지만 당시 뉴욕은 그냥 한산한 식민지의 항구였던 반면 인도네시아 동부는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였다고 하네요.

네덜란드가 잠깐 누렸던 에스파냐의 패권은 이제 잉글랜드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그랬듯 곧 대대적인 식민지 식민지 개발에 착수했는데요. 근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잉글랜드의 식민지 정책은 상당히 다릅니다. 에스파냐가 짧은 시간 동안 식민지의 자원과 인력을 철저히 수탈하고 착취하며 원주민 세계를 초토화시켰다면, 이제 막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서기 시작하고 시장의 개념이 자리잡던 시기에 식민지 개척에 나선 잉글랜드는 식민지를 상품 생산을 위한 원료 공급처이자 소비를 위한 시장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에스파냐가 탐험대를 앞세워 원주민 문명을 정복하고 말살했던 것과는 다르게 잉글랜드는 식민지에 본국, 즉, 잉글랜드를 위한 정치, 행정구조를 갖추고 식민지를 경영했습니다. 마치 구석기인들이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 식량을 얻었다면, 신석기인들은 동물을 가축화하고 농경을 해서 꾸준한 식량을 확보하는 것처럼요. 그렇게 해서 식민지를 최대한 오랫동안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거죠. 이 당시 잉글랜드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운영했던 식민지가 바로 아메리카와 인도였습니다. 뭐가 더 낫다고 말하긴 뭐하지만 잉글랜드의 식민지 정책이 한단계 더 고도화된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
사실 잉글랜드가 아메리카와 인도에 식민 통치를 위한 거점을 마련한 것은 17세기 후반 쯤이었지만 그 뒤로 곧바로 본격적인 식민 통치를 시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잉글랜드 본국도 왕과 의회, 신교도들 끼리의 종교갈등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웠던 데에다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반란도 있었고... 여러 모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에 신경을 쓰기는 힘든 상황이었던 거죠. 다행히 그동안 유럽의 강대국들도 30년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 그 혼란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정리가 되었으니 이제 유럽 각국은 식민지를 두고 새로운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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